1.
세월이 흘러도 기억에 남는 일이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일 텐데 나에게도 그런 게 있다. 결혼을 한 뒤 첫 아이를 낳고 그 애가 서너 살이 되어 외할머니에게 맡겨도 울지 않게 되었을 때 난 새로운 각오로 도전을 시도했다. 문학을 공부하기로 한 것이다. 정해진 요일마다 ‘소설 강의’를 듣기 위해 배움터에 갈 때마다 마치 내 어깨에 날개가 달려 하늘에라도 뛰어오를 듯 마음이 설레었다. 그 설렘이 좋았다. 이때 내 나이 삼십 대 초반이었다.
그때 함께 강의를 들었던 수강생들이 열 명이 넘었던 것 같은데 내가 알기로는 그중 나를 포함해 다섯 명이 책을 냈다. 강의했던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여러분 모두가 작가가 될 건 아니잖아요.”라고 했던 말씀. 훗날 다섯 명이나 책을 낼 줄을 선생님은 모르셨을 것이다.
2.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고 나서 나의 중고등학생 시절은 어땠는지를 내 기억 속에서 빼내어 회상해 보았다.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학교에 가는 것과 수업을 받는 것, 그리고 숙제를 해야 하는 것 등 의무로 해야 하는 일 때문인지 학창 시절의 즐거움을 잘 몰랐던 것 같다. 물론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 아이들과 떠들며 노는 재미가 없었던 건 아니나 그 시간이 짧았으므로 만족감을 맛볼 수 없었고 아쉬움만 남기곤 하였다.
일부 선생님들은 학생을 한 명씩 지명하여 질문하길 좋아했다. 자신이 가르친 것에 대해 학생들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또는 예습이나 복습을 해 왔는지 알기 위함이었겠지만 답을 알지 못한 학생은 창피함을 감수해야 했다. 우리는 그런 수업 시간을 싫어했다.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 과목을 열심히 공부해 오는 것도 아니었다. 왜 선생님들은 학교를 즐거운 곳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을까.
3.
마음이 늘 평온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에 대해서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 감정 조절을 어렵게 만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조차 잘 알지 못하리라. 인간이란 존재는 극단적인 상황에 처할수록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있을 때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알게 된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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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는 조용하고 외딴 장소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던 끝에 편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곳을 발견하고는 죽음의 보금자리로 정해 놓았다. 그리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거기에 찾아갔다. 머지않아 사람들이 여기서 자신의 시체를 발견하게 되리라는 상상을 하며 이상야릇한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밧줄을 매달 나뭇가지도 마음속으로 정해 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몸무게를 충분히 지탱할 수 있는지도 시험해 보았다.(181~182쪽)
-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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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한스는 시체로 발견된다. 한스가 자살한 것일지 모른다는 추측을 할 수 있을 뿐, 자살했다고 확실히 알 수 없는 결말로 이 소설은 끝난다. 중요한 건 한스가 어떻게 죽었든지 간에, 자살하기로 결심하고 자살할 장소를 물색해 놓기까지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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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남을 처벌하려는 충동이 강한 자라면 그 누구든 믿지 마라!
그들은 비천한 종족과 혈통에 속하며, 그들의 얼굴에는 형리와 염탐꾼이 드러나 있다.
자신의 정의로움을 과시하기 위해 많은 말을 하는 자라면 누구든 믿지 마라! 참으로 그들의 영혼에 결핍된 것은 꿀만이 아니다.(174쪽)
그러니 벗들이여, 내가 현기증을 일으키지 않도록 여기 이 기둥에 나를 단단히 묶어다오! 나는 복수심의 회오리에 휘말리기보다는 기둥에 묶인 성자가 되련다!(177쪽)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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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한 자를 처벌하려고 한다거나 정의를 위해 누군가를 비난한다고 치자. 문제는 남을 비난하는 그의 모습에서 다른 이들이 따뜻함이나 포용력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즉 비난하는 자는 자기에게 나쁜 이미지가 씌어진 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손가락으로 달을 가르키는데 사람들은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의를 위해 누군가를 비난하려면 본인의 이미지쯤은 신경을 쓰지 않을 만큼 담대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사람들 대부분이 남을 비난할 때는 그것에만 집중하느라 본인의 이미지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한다. 결국 비난한 이는 이미지만 나빠졌고 비난 받은 이는 동정을 받는 걸로 끝이 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