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혁명의 시대
이해영 엮음 / 새로운세상 / 1999년 12월
품절


신현준, <1980년대 문화적 정세와 민중문화운동> 중 일부를 옮겨본다.

80년대 한국 사회를 치열하게 살아가려고 한(모두가 실제 치열하게 살았는가는 다른 문제다) 사람들에게 문화는 중요한 주제가 아니었다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어떤 정치적 입장을 선택했다고 해도 문화는 정치나 경제에 비해 우선순위 면에서 밀려나 있었다. 그 이유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지배세력이든 저항세력이든 중도세력이든 80년대의 절박한 상황은 여유로워 보이는 문화라는 단어와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214쪽

1980년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개정된 제5공화국 헌법은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제8조)라고 적혀 있으며, 이를 대통령의 취임선서에까지 다짐하도록 규정했다(제44조). 또한 교육혁신과 문화창달은 80년대 4대 국정지표의 하나로 지정되었다. 이런 전통문화의 계승과 민족문화의 창달이라는 목표는 60~70년대 박정희 정권에 의해 확립된 것과 크게 다른 것이 아니다. 당시의 정권은 80년대의 문화정책을 '새문화정책'이라고 불렀지만 새로운 정책은 목표와 집행 양면에서 70년대의 연장이었다. 정책의 목표면에서는 민족 문화의 창달이라는 기치 아래 각종 관변인물에 대한 지원과 관변행사의 주최가 계속되었다. 집행 면에서는 관 주도의 각종 행사와 각종 윤리위원회의 검열이 지속되었다.-220쪽

70년대의 문화정책이 주로 전문/예술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면, 80년대는 정책의 대상을 전문 문화예술인부터 국민 전체로 확대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대중문화가 퇴폐화, 낭비화되었고 세대 간, 지역 간 문화갈등이 심화되었다"는 나름의 현실 인식에 기초한 것이었다. 여기에 기초하여 국민정신개혁운동이라는 이름의 정화운동이 전개되었고, 국민의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대중문화의 형식에 대한 관심이 기울여졌다. 즉, 정책의 외연이 이전 시기보다 확대된 것이다. -220~221쪽

둘째로 정책 대상의 변화는 정책 방향의 변화를 수반했다. 그것은 퇴폐적, 향락적, 외래적이라고 간주된 대중문화에 대한 규제가 육성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완화의 대상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대중문화를 억압 일변도로 다스릴 수 없다는 현실 인식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컬러TV의 조기방영, 프로스포츠의 확대, 영화검열(및 극장 설립규정)의 완화 등의 현안들은 모두 범국민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들이었다.이는 또한 좁은 의미에서 문화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국민의 일살적 생활양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러 조치들을 낳았다. 몇 가지 예만 들어도 통행금지 해제, 중고생 교복자율화, 대학로의 개장 같은 현상들은 80년대 대중의 삶이 70년대와 크게 달라지는 영향을 미쳤다.-221쪽

한마디로 80년대의 문화정책은 대중문화를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 방향은 대체로 규제완화의 방향을 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규제완화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가라는 점이다. 먼저 지적할 것은 대중문화에 대한 규제완화가 선별적이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한 예로 영화검열 완화의 경우 주로 저급한 영화에만 선별적으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즉 불온한 문화의 금지는 여전했고 1981~83년 사이에는 이전보/다더욱 강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불온한 반대자들이 3S정책이라고 불렀던 표현은 당시 정책의 새로운 기조를 말해 준다. 70년대 문화정책이 원칙적으로 외래 퇴폐문화를 금지하면서 실제로는 모든 문화에 대한 규제를 단행했던 반면, 80년대는 퇴폐문화에 대한 선별적 해금을 실시하면서 이런 조치가 체제와 그리 불편하지 않게 어울리도록 관리하는 양상을 취했다. 즉, 정책담당자가 보기에 퇴폐적이지만 별달리 위협적이지 않은 한도 내에서는 방치힌다는 것이 당시 문화정책의 이데올로기로 보인다. 70년대와 비교한다면 정책의 지배적 원리가 금지의 논리에서 방치의 논리로 전화한 것이다.-221~222쪽

따라서 정책의 성과가 그다지 문화적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단적인 예로 앞서 언급한 국풍81의 경우 탈품과 그룹사운드 공연이 한자리에서 치러지고 민속놀이 줄다리기와 스케이트보드가 같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광경이 연출되었다. 행사의 내용이 다양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는 아닐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런 형식의 다양성 사이에 어떤 일관성을 형성하려는 노력이 부재했다는 점이다. 국풍 81을비롯한 관제행사들은 새로운 문화적 모델을 제공하지 못했다. 이를 통해 문화의 탈정치화를 통한 정치적 이용이라는 80년대 문화정책의 기조가 형성되었다는 성과를 빼면 말이다. -222쪽

급속한 산업화와 경제성장으로 인해 TV, 라디오, 오디오(80년대 후반부터는 VTR) 등의 전자 미디어의 보급률은 100%에 육박하였고 정부는 앞서 본 언론 및 방송 통폐합을 통해 이들 매스 미디어를 완벽하게 통제하였다. 아이러닉한 것은 각종 규제와 억압이 온존되는 상황에서 대중문화는 이전과 달리 화려하고 컬러풀해졌다는 점이다. 컬러/TV의 조기방영과 연예인 두발 규제의 완화와 더불어 영 일레븐, 젊음의 행진 같은 청소년용 오락 프로그램이 성행하였다. 또한 극장 설립과 영화 검열의 완화에 따라 에로 영화 등 저질 음란물에 가까운 외국 영화들이 다소의 가위질만을 거친 채 허용되었고 FM방송을 통한 영미 중심의 팝 음악의 조류들도 이전 시기에 비해 시차를 현격히 줄이면서 소개되었다.-234쪽

80년대 한국의 대중문화는 상업적 성격과 청소년 지향적 성격을 동시에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달리 말한다면 80년대에 10대 시절을 시작한 세대, 흔히 영상 세대라고 불리는 세대는 대중문화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감성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80년대의 대중문화 대 민중문화의 구도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이 대립구도는 상업문화 대 비상업적 문화라는 일반적 대립 구도 가운데 10대 문화 대 대학생 문화라는 특수한 대립을 내포하고 있다. 이때 대학생이란 대학에 실제로 다니는 사람이라는 의미보다는 대학생 연령의 세대라는 뜻에 가깝다. 쉽게 말해서 대학생이 되어서도 대중문화를 즐기는 사람은 10대 사춘기 시절의 경험에 고착된 철들지 않은 사람이라는 평을 받아야 했다. -235쪽

대중문화에 대한 정부의 통제는 완벽할 수 없고 그 틈새에서는 무엇으로 개념화하기 힘든 현상이 발생했다. 그 대표적인 것은 매니아 문화의 확산이/다. 이는 대중문화를 일회적 오락의 차원에서 즐기는 것이 아니라 심미적 감상의 수단으로 삼는 현상을 말한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극히 일부 계층에서 60년대부터 시작되었지만 80년대는 이런 현상이 일반 청소년층까지 확대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 대상으로는 영화나 대중음악 같은 오래된 대중문화의 형식뿐만 아니라 만화, 애니메이션, 컴퓨터 게임 같은 새로운 형식들도 포함되었다. -235~236쪽

적어도 80년대 후반 이후 대중문화는 고급문화나 민중문화 같은 외부를 갖지 않는 내재적 장이 되었다. 이는 대중문화를 거부하거나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도 대중문화 내부에서 전개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80년대 말 운동권 출신 노래패(노래를 찾는 사람들, 노래 마을)와 운동권 출신 영화인(박광수, 장선우 등)의 절반의 성공이라는 사건은 대중문화에 대한 시각의 점차적 변화를 가져왔다. -236쪽

80년대 한국에서 대중문화는 한편으로 본격적인 산업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해독할 수 있는 수용자층을 형성하는 과정이었다. 문제는 정부도 재야도 이런 과정을 의식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237쪽

현대의 대중문화는 상업적 매스미디어에 의해 대량으로 전달되고 대량으로 소비되는 문화라는 정의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즉, 대중매체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수준의 미디어가 복합적인 네트워크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문화라는 장은 정치에 일방적으로 종속된 장도 정치가 부재한 장이 아니라 복잡한 방식으로 정치적인 장이라는 주장이 가능하다.-237쪽

대중문화에서 대안을 모색하려고 한다면 대중문화로 오염되지 않은 외부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문화 내부를 경유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를 이른바 비즈니스의 정치라고 부를 수 있다. 즉 대중문화의 정치적 가치는 어떤 비즈니스를 수행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즉, 상업적 비즈니스의 형식을 취하는 실천의 본질적 한계를 미리 경계짓는 것이 아니라 허용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확장시킴으로써 문화정치가 수행된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237쪽

현대의 국민적 대중문화가 산업화 과정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미국화 과정의 산물이기 때문에, 대중문화에서 새로운 대안을 추구한다면 순수한 국민문화의 부활이 아니라 혼성화 과정을 거친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서 미국이란 실제의 미국이 아니라 상징적 미국이며, 따라서 좀 어폐가 있지만 미국 이외의 나라를 포함한 나라의 대중문화도 포함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국민적 대중문화란 탈미국화와 재미국화의 복잡한 과정의 산물이다. -238쪽

80년대 이전부터 추진되었고 변화를 추동한 힘은 한국의 문화산업의 자생적인 성장이라기보다는 대외적 압력의 효과였다. 80년대 후반은 미국의 시장개방 압력이 가시화된 시기였고 태평양을 오가며 실무/협상이 이루어졌다. 80년대 초,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국내의 구조조정을 대체로 완료한 미국은 새롭게 재편된 산업구조에 부응하는 세계 시장의 형성에 나섰는데, 그중에서도 문화산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간주되었다. 시장개방과 관련된 협상들 중에서 문화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분야는 다름아니라 저작권을 비롯한 지적재산권 협상이었다. 1987년 저작권법 개정이 이루어지면서 이제까지 외국의 저작물을 저작권 협약 없이 무단으로 출판했던 관행은 국제법적으로 제재받게 되었다.-238~239쪽

이는 단지 불법복제물의 단속의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였다. 문화는 이제 단지 상품이 아니라 재산 혹은 자본이 되었다. 즉, 문화산업은 재화나 서비스를 판매한 대가로 수입을 획득한 것보다는 재화나 서비스를 사용할 권리를 판매하고 이로부터 일정한 사용료를 수취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의 대외적 압력은 이미 이때부터 문화산업을 비롯한 한국의 산업구조의 전반적 구조조정을 요구하는 문제였다. 1987년의 저작권 협약은 몇 가지 유예조항을 두는 등 제한적이었으므로 이런 변화가 보다 가시화되는 시기는 1996년의 저작권법의 개정을 전후로 하는 90년대 중반이다. 그렇지만 80년대 후반에도 가시적인 제도의 변화가 있었다. 상징적인 변화는 1988년부터 시작된 다국적 문화산업의 한국시장 진출이었다. -239쪽

80년대의 민중문화운동을 논하는 일이 우울한 이유 역시도 그 운동이 어떤 의미에서든 문화의 정치적 사용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모든 사람이 그랬던 것도 아니며, 나름의 객관적 필요성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해도 이런 평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렇다면 문화는 정치로부터 초연해야 하는가. 80년대의 인식은 이런 주장을 부르주아 예술관이라고 불렀고 나는 아직도 여기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그렇지만 원칙적으로만 동의할 뿐이다. 문화와 정치를 분리시켜 사고하는 관습 자체를 탈피할 수는 없었을까. 앞서 지적했듯 문화 내부에서 정치가 전개되고, 이런 정치는 관습적 의미의 정치와 다르다고 사고할수는 없을까. 그렇다면 문제는 문화의 정치적 사용 자체라기보다는 어떤 정치에 어떻게 사용되었는가이고 나아가 정치의 문화적구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추론할 수도 있다. -240쪽

이런 논점들은 80년대에는 토론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건 다행일까./불행일까.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표현은 당시를 살아온 사람의 분열적 의식을 드러내 준다. 그건 참 다행한 일임과 동시에 불행한 일이었다. 외래문화로부터 독립되고 상업적 힘에 오염되지 않은 문화를 건설할 수 있다는 꿈은 불가능하지만 아름다운 꿈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불가능함은 강화되었다. -240쪽

민중문화에 주목했던 80년대의 운동들이 정치적 강령에 대해 조금 유연한 태도를 보일수는 없었을까. 대중문화의 형식들에 대해서도 나름의 문화적 가치를 인정할수는 없었을까. 외래 문화에 대해서도 그 맥락을 통찰하고 보다 여유롭게 수용할 수는 없었을까. 그래서 90년대 이후에는 민중형식에 대한 탐구의 성과를 계승하고, 이를 글로벌한 감각과 결합시킬 수는 없었을/까. 그래서 한국의 대중문화를 일정 수준으로 끌어올려 국민적 독창성과 세계적 보편성을 고루 갖추게 할 수는 없었을까. 자연발생적으로 창조되는 국지적 문화형식들을 존중하고, 이를 보편적으로 전국적인 정치에 일방적으로 종속시키지 않을 수 없었을까, 그럴 수 있었다면 대중문화를 단지 안락한 수단으로 평가절하하지도, 그렇다고 독해와 맹신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았을 것이다. -241~242쪽

대중문화의 윤리는 재미의 윤리다. 80년대의 문화운동이 아직 가치있다면 문화를 윤리의 문제로 사고했다는 점이고, 가치가 없다면 재미의 문제를 사고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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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산에 대하여 - 자크 비데 서문 동문선 문예신서 346
루이 알튀세르 지음, 김웅권 옮김 / 동문선 / 2007년 10월
절판


이것이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 대이론가인 그람시가 옹호하는 주장이다."인간은 누구나 철학자이다"라는 것이다.그람시는 흥미 있는 세부적 내용을 제시한다. 그의 지적에 따르면 민중 언어에서 "철학적으로 사태를 대한다"는 표현은 그 자체가 철학에 대한 어떤 관념을 포함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이 관념은 합리적인 필연성에 대한 관념과 연결되어 있다. 고통스러운 사건에 직면하여 "사태를 철학적으로 대하/는"자는 거리를 두고 즉각적인 반응을 자제하며 합리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는 자이다. 자신에게 충격을 주는 사건의 필연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물론 이러한 태도에는 수동성의 요소가 있을 수 있다고 그람시는 말한다.('철학자이다'는 말은 '자신의 정원을 가꾸며,'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고] '자신의 일이나 하고' 자신의 관점으로 사물을 본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것은 또한 대개의 경우 필연성을 체념하고 받아들이며 이러한 체념 속에 틀어박힌다는 말이다. '사태가 잘 해결되길' 기다리면서 자신의 내적인 사적인 삶, 자신의 작은 일들에 파묻힌다는 것이다).-41~42쪽

우리는 대문자 철학이 항상 존재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하겠다.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는 사회들에서만 대문자 철학이 관찰된다. 1.사회적 계급들(따라서 국가)의 존재 2. 과학들(혹은 과학)의 존재 -46쪽

즉시 지적해야 할 것은 마르크스가 '사회'의 개념을 매우 일찍이 (1847년에 <철학의 빈곤>에서 프루동과 가진 논쟁에서부터) 비과학적인 것으로 배척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 용어는 도덕적, 종교적, 과학적 울림이 과부하되어 있다. 요컨대 그것은 사회 구성체(마르크스, 레닌)라는 과학적 개념으로 대체해야 할 이데올로기적 개념이다. 단순히 하나의 낱말을 다른 하나의 낱말로 대체하자는 게 아니다. 사회 구성체의 개념은 과학적인 개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라는 관념적인 개념이 연결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적 개념들의 체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개념들의 이론적 체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생산 양식이라는 개념이 중심적 역할을 하는 이 개념 체계를 개진할 수는 없다. 다만 각자 모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말할 수 있는 점은 하나의 사회구성체가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구체적인 사회를 지칭한다는 것이고, 그같은 사회는 개별화되어 있고, 따라서 그 사회에서 지배하는 생산 양식을 통해 여타 동시대의 사회들 및 그 자신의 과거와 구분된다는 것이다. -54쪽

생산 양식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마르크스가 한편으로 생산력이라 부르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생산 관계라 부르는 것 사이의 통일체이다. 따라서 각각의 생산 양식은 그것이 지배적이든 피지배적이든, 그것의 통일체 안에 고유한 생산력과 생산 관계를 소유하고 있다. -56쪽

하나의 생산 양식이 지닌 생산력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등장시키는 복잡하고 정연한 판의 통일체에 의해 구성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노동 대상(단순한 바람이나 흐르는 물이 되었든 어쨌든 '손에 넣거나'-중력처럼- 이용해야 하는 자연적 에너지를 포함해) 여러 형태의 자연뿐 아니라, 무엇보다 수동적 원료(광물)와 활동적 원료(짐승, 땅)
- 생산 도구 - 직접 생산자(혹은 노동력). 마르크스는 노동 대상과 노동 도구(혹은 생산 도구)를 합쳐 생산 수단이라 부른다. 마르크스는 노동 과정의 행위자들 전체, 그러니까 비/협동 노동이나 협동 노동에서 요구되는 형태의 기존 생산 수단을 기술적으로 사용할 줄 아는 개인들 전체가 수행하는 활동의 다양한 형태들 전체를 노동력이라 부른다. 우리는 이러한 용어들을 다시 고찰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문제의 등식을 갖게 된다. 생산력 = 생산 수단 + 노동력으로서 하나의 통일체를 이룬다. 이 모든 것을 일정한 하나의 생산 양식을 위한 것이다. -62~63쪽

하나의 정해진 생산 양식에 고유한 생산력과, 다른 한편으로 하나의 구체적인 사회 구성체 안에 존재하는 생산력 전체를 분명히 구분하는 것은 이미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독자는 이해했을 것이다. 사회 구성체에는 지배적인 생산 양식 아래 여러 개의 생산 양식들이 존재하는 것이다.-63쪽

자본주의의 생산 양식은 제1의 목표가 사회적으로 유용한 물건들의 생산이 아니라 잉여 가치의 생산과 자본 자체의 생산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체제의 동력은 이익의 추구라는 일반적인 표현이 표현하는 것이다. 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동력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물건들을 생산하는 수단을 통한 잉여 가치를 생산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것은 생산 수단을 통한 착취의 중단 없는, 따라서 확장된 증대이다. 자본주의 생산 양식에서 사회적으로 유용한 물건들의 생산은 잉여 가치에, 다시 말해 자본의 확장된 생산에, 마르크스가 '가치의 가치화'라 부르는 것에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다./ (중략) 이 생산 양식은 다음과 같은 단 하나의 유일한 목적으로 노동력이라는 그 상품의 구매를 통해 재화들을 상품으로 생산한다. 즉 초과 생산의 가치와 임금의 가치라는 두 가치 사이의 불평등한 게임을 통해 노동자들로부터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 것, 다시 말해 갈취하는 것이다. -73~74쪽

우리가 노동의 사회적 분할을 통해 지칭하는 것은 생산 과정의 내부 자체에 있는 착취 관계로서의 생산 관계의 효과이다. 우리의 적은 다시 한번 동일한 것인데, 다/름 아닌 우리가 경제주의적이라고 부르면서 특징지을 수 있는 기술지상주의적-기술관료주의적인 이데올로기이다.-75~76쪽

엔지니어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하물며 경영진이 되는 노동자는 우리 사회에서 박물관의 전시품 같은 것이 된다. 이 전시품은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믿게 하며, 사회적 계급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노동자로 태어나고 노동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계급을 넘어서 상승할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만들기 위해 전시된다. 매우 단순하고 적나라한 현실은 이런 파렴치한 전시에 항의한다. 노동자의 엄청난 다수는 종신토록 노동자이다. 그 반대가 훨씬 맞는다. 즉 엔지니어나 고위 간부는 재앙적인 경제 위기가 닥친 경우를 제외하곤 결코 노동자의 조건으로 추락하지 않는다.-79쪽

동시에 법은 포화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사실상의 어떤 법률적 발견으로 허를 찔리지 않도록 현실에 나타나는 모든 가능한 사례들의 포괄을 지향하는 규칙들의 체계를 제시해야 한다. 이런 발견을 통해 체계의 완전성을 저해하는 비법률적 관행들이 법 자체 안으로 도입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08쪽

법은 기존 생산 관계에 따라서만 존재한다. 법은 생산 관계에 따라 존재하는데, 이 생산 관계가 법 자체에 완전히 부재하는 조건이 충족됨으로써만 법의 형식, 다시 말해 그것의 형식적 체계성을 지닌다. 법 자체가 완전히 빼버린 내용(생산 관계)에 따라서만 존재하는 법의 이런 이상한 상황이 다음과 같은 마르크스의 고전적 표현을 설명해 전다. 즉 법은 그것의 규칙 체계 속에 이 생산 관계를 전혀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그러니까 그것을 감추면서 그것을 표현한다. -110쪽

국가는 무엇보다도 마르크스주의 고전파가 국가 장치라 부르는 모든 것이다. 우리가 이 용어를 통해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법률적 실천의 요구에 입각해 그 존재와 필요성을 인정한(좁은 의미의)문화된 장치, 즉 경찰-법원-감옥뿐 아니라 군대를 말한다. 군대는 '국가 방위'의 기능(프롤레타리아는 이 경험의 대가로 피를 흘려야 했다)을 넘어서 경찰(그리고 보안 기동대와 같은 전문화된 경찰 조직들)이 사건을 감당하지 못할 때 최후의 보급 진압군으로 직접 개입한다. 이 모든 것 위에 국가 장치로는 국가 원수, 정부와 공무원들이 있다. 이런 형태로 제시된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 이론은 본질과 관련되고 있으며 이것이 본질이라는 점을 단 한순간도 망각해서는 안 된다.-125쪽

국가의 제1문제는 국가 권력의 보유 문제이다. 모든 정치적 계급 투쟁은 이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155쪽

국가 장치는 다음과 같은 두 유형의 장치들을 포함한다. 1) 억압적 국가 장치(정부, 행정 조직, 군대, 경찰, 전문화된 진압 조직, 치안유지군, 법원, 사법관, 감옥 따위). 이 장치는 중앙집권화된 유일한 기관이다. 2)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우리의 사회 구성체에서 교육, 종교, 가족, 정치, 노동조합, 정보, 문화 등에 속하는 장치들). 이 장치들은 다양하고 상대적으로 독립적이며, 국가 이데올로기의 전체, 혹은 부분을 통해 분명한 체계로 통일되어 있다. 억압적 국가 장치는 (물리적 혹은 비물리적)억압에 따라 지배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은 이데올로기에 따라 지배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 -156쪽

노동자 계급의 정당이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 체계의 게임에 (수정주의적이 아니라) 혁명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은 법이 존중되면서도 회피될 수 있는 가능성에 달려 있다. -183쪽

국가는 국가 권력하에서 한편으로 억압적 국가 장치이고, 다른 한편으로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이다. 국가 장치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의 통일성은 국가 권력을 보유한 자들의 계급 정치에 의해 확보된다. 이들은 계급 투쟁에서 직접적으로는 억압적 국가 장치를 통해,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 속에 국/가 이데올로기의 구현을 통해 행동한다.-217~218쪽

이데올로기는 상상적인 임기응변적인 물건과 같은 것이고, 완전하고 실증적인 유일한 현실, 다시 말해 자신들의 존재를 물질적으로 생산하는 구체적, 물질적 개인들의 구체적 역사라는 현실의 나의 잔존물들에 의해 구성된 비어 있고 헛된 순전한 꿈이다.-268쪽

이데올로기의 이데올로기적 특성을 이데올로기가 부인하는 그 부정이 이데올로기의 효과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나는 이데올로기적이다"라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293쪽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이 완벽하게 기능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더 이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모든 주체들의 의식 속에 생산 관계를 재생산하지 못하게 될 때, 그때 다소간 심각한 이른바 '사건들'이 터진다. -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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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 폴리테이아 총서 1
최장집 지음 / 후마니타스 / 2005년 9월
구판절판


상품시장에서 소비자의 이탈은 상품공급자인 기업에게 소비자의 선호에 적응하도록 만드는 자기조정의 효과를 갖지만, 선거시장에서 유권자의 이탈은 정당이라고 하는 정치기업에 변화를 강제하는 효과가 약하다.-24쪽

나는 해방 이후 국가의 특징을 정의하기 위해 '과대성장국가'라는 개념을 사용한 바 있다. 이것은 원래 파키스탄의 정치경제학자 함자 알리비가 탈식민사회의 국가를 분석하는 데 사용했던 개념이다. 그것은 식민통치를 위해 제국주의 국가의 잘 발달된 국가기구가 식민지 사회에 이식된 결과, 독립 이후에도 경제적 토대나 사회적 기반보다 과도하게 강한 국가가 지배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55쪽

1960년대에 이미 미국의 정치학자 그레고리 핸더슨은 '소용돌이의 정치'라는 말로 한국사회에서 모든 사회적 자원과 가치가 서울과 권력의 정점으로 집중하/는 현상을 한국정치의 가장 큰 특징으로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핸더슨의 집중화테제는 유교적 관료문화를 거의 유일한 동인으로 강조하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59~60쪽

결빙효과 :립셋, 로칸이 서유럽 정당체제의 형성과 관련하여 사용한 개념. 대중정치로의 이행기였던 1920년대에 형성된 정당체제가 이후 장기간 지속성을 갖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63쪽

이승만 대통령의 제1공화국을 사인적 권위주의 권력이라는 의미에서 '세자리즘'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중략) 제도화된 정부구조 안에서 대통령 권력을 견제할 힘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환경에서 야당은 권위주의 정부의 '충성스런 야당'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야당은 제도화된 정치권 밖에 있는 시민사회로부터 운동의 형태를 띠고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었다. 이러한 체제는 정부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약해지거나 그들의 태도가 비판적이 될 때 국가기구를 통해 억압의 정도를 높이는 과/정, 즉 권위주의화 없이는 유지될 수 없었다. 이는 헌법을 포함하여 제도는 민주주의적인 반면, 정치적 실천은 권위주의적인,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간의 기묘한 결합을 만들어 냈다. -66~67쪽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 도입되고 실천된 민주주의의 주요 특징의 하나를 조숙한 민주주의라고 말할 때, 조숙하다는 의미는 한국인들이 역사,문화,의식면에서 서구인과 같이 민주주의를 할 수준이 되지 못한 상황에서 너무 빨리 민주주의를 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한국에서 민주주의 제도의 최초 도입의 국내 정치 세력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한국에서 민주주의는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이 주도했던 분단국가 형성 과정에서 하나의 제도적 세트로 도입되었다. 즉 민주주의는 분단국가의 제도적 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토착적 기반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그 제도적 형식만 들어온 필연적 결과, 그 내용을 채울 역사적, 정신적, 이념적 면을 결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71쪽

이념적 불러내기 : 사실이나 현상에 대해 사회적인 의미가 부여되는 과정에서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이 동원되고 접합되는 것을 의미한다. 루이 알튀세르의 개념으로 이데올로기가 개인을 종속적인 주체로 호명되면서 지배의 효과를 갖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한 사회에서 지배적인 구조나 체제가 유지되는 것은 단순히 생산관계상의 계급구조의 결과가 아니라, 국가나 이데올로기와 같은 상부 구조의 중층적 결정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정치사회 : 그람시, 토크빌 등이 국가와 시민사회를 매개하는 중간층위로서 설정한 개념. 코헨, 아라토, 린츠 등의 정의에 따르면 정치사회는 정당, 정치조직 등 공적 권력을 분점하고 있는 정치 세력들로 구성되고,그 핵심적인 제도는 정당, 선거, 선거규칙, 정당연합, 의회이며,정치체제 구성원들이 공공권력과 국가기구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하려는 정치적 경쟁을 위하여 스스로를 특수하게 조직하는 영역이다.-79쪽

1980년대 중후반 우리나라 정치학계에서는,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중반 사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 등장한 군부권위주의정권의 발생원인을 이론화한 오도넬의 BA(관료적 권위주의)이론의 1972년 유신체제 성립에 적용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둘러싸고 활발한 논쟁을 벌인 바 있다. 그의 BA모델은 수입대체산업의 고갈과 산업구조의 심화라는 경제적 변수를 통해 권위주의체제가 성립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다시 말해 수입대체산업화가 가져왔던 내수시장의 성장을 통해 사회의 광범위한 계층을 끌어안는 민중주의동맹이 형성되었는데, 이것이 산업 구조의 심화단계에서 해체됨에 따라 정치적으로 활성화되고 전투적이 된 민중부문을 억압하기 위해 민간경제부문 군의 테크노크라트, 외국의 다국적기업을 주축으로 한 쿠데타동맹이 형성되었고, 그 결과로 권위주의가 등장했다는 것이다.(중략) 관료적 권위주의이론은 유신체제발생을 둘러싼 인과적 설명보다는 유신체제의 통치양식으로서 더 설득력을 갖는다고 하겠다.-83~84쪽

립셋으로 대표화되는 근대화론은 간단히 말하면 산업화와 경제성장이 민주주의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경제발전은 중산층을 성장시키며 교육과 문화적 태도의 확산을 통하여 민주주의의 가치가 널리 수용되고 정치참여의 증대를 가져오며, 사회적 갈등을 제도화하여 갈등과 통합의 변증법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84쪽

민주주의 공고화 : 쉐보르스키의 정의에 따르면 주어진 정치적, 경제적 조건하에서 특정한 제도들의 체계가 동네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게임이 되었을 때, 즉 어느 누구도 민주적 제도 밖에서 행동할 수 없는 상황, 패자가 원하는 것은 자신들이 패배한 바로 그 제도 내에서 다시 경쟁을 시도하는 것 뿐인 상황을 일컫는 개념이다.-87쪽

지시적 개념 : 1950년대 이래 프랑스의 경제개획 모델을 지칭하는 개념. 이는 정부의 고위 경제정책 결정자들이 사기업에게 성취할 목표를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목표를 제시해주는 방법을 통하여 운/용되는, 사회주의식 계획경제와 자유시장경제 사이의 어느 중간에 위치하는 경제체제이다. 지시적 계획은 어디까지나 고위정부관료와 대기업의 경영진 사이의 자발적 결탁행위가 본질이다. 이 과정에서 정치인들과 조직 노동의 대표들은 배제된다. -90쪽

산업화 시기 한국의 국가는 BA이론에서 말하듯이 노동자계급을 포함한 활성화된 민중부문처럼 사회의 강렬한 반대세력과 대면하지도 않았고, 체제변화의 사회적 기원이론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지주계급과 도시의 상업부르주아지 등 그 어떤 강렬한 세력과도 대면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 시기 국가주도의 빠른 산업화는 바로 이런 조건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군부 엘리트가 주도한 박정희 정권은 이승만 정부와는 달리 지지를적극적으로 동원했다. 그 핵심적인 수단이 고도성장을 통한 산업화이다.-92쪽

박정희 정권 하에서 경제기획원으로 대표되는 경제관료체제는 1920~70년대까지의 일본 통산성과 거시경제 기획 및 집행과정에서 경제 관료의 영향력이 지배적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다시 말해 경제관료가 단기적인 정치적 사이클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장기적인 국가경제의 이익을 위해 행위할 수 있는 자율성을 충분히 누렸던 것은 아니었다. (중략)즉, 정치(권력)의 논리가 경제관료의 기술합리성보다 우위에 있었던 것이다.-97쪽

기술관료적 경영주의 : 막스 베버의 관료주의의 목적합리성과 현대 기업조직의 이윤극대화를 위한 경영적 원리를 결합한 개념. 수단적 가치와 효율성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는 조직 및 조직운영의 원리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비정치적 내지는 반정치적 가치를 핵심으로 한다. 그러므로 기술관료적 경영주의는 사기업조직과 정치적인 권위주의체제와 잘 상응한다. 사회의 다양한 이익 갈등에 기초하고 이를 조정하고 타협하며, 효율성보다는 갈등의 조정과 통합을 중심 원리로 하는 민주정치의 특성과는 상반된다. 엘리트 내지는 전문가 중심의 폐쇄회로식 결정방식과는 달리 결정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그것이 공적 통제하에서 개방적이고 투명하게 드러나게 하는 민주주의적 정치과정 및 정책결정과는 정반대되는 조직이나 제도의 운영원리이다.-109쪽

한국의 민주주의 이행을 운동에 의한 민주화라고만 규정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운동에 의한 민주화와 협약에 의한 민주화, 두 과정이 결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구체제를 붕괴시킨 것은 전적으로 운동에 의한 민주화였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제도화한 것은 정치 엘리트간 협약에 의한 것이었다. -127쪽

위로부터의 개혁 : 한국정치체제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로 정치사회와 시민사회가 분리된 상황에서 정치 엘리트들이 대중을 배제한 채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대응하여 개혁을 수행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람시와 무어가 사용한 수동 혁명, 위로부터의 혁명, 보수적 근대화와 같은 의미-128쪽

편향성의 동원 : 사츠슈나이더는 모든 형태의 정치조직들이 특정 종류의 갈등에 대해서는 선호하는 반면, 그외의 갈등에 대해서는 그것을 억압하려는 성향. 즉 일종의 편향성을 갖게 된다고 말하면서, 이를 편향성의 동원이라고 표현하였다. 예를 들어 미국정치사에서 계급 갈등의 상쇄를 위해 인종 갈등을 이용하거나 급진적 농민운동의 영향력을 억제하기 위해 지역 갈등을 이용하는 것 등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131쪽

민주화로 인한 국가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국가를 두 수준으로 나누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하부구조적 수준에서의 국가이다. 우리가 보통 국가를 항상적으로 제도화된 역할의 체계라고 말할 때 그것은 권력의 중앙집중화를 구현하는 방대한 관료기구와 이를 운용하는 국가기구의 관리자로서의 인적 집단을 말한다. 베버가 말하듯이 그것은 비인격적, 비개인적 충원, 공적 목표, 역할, 업적평가의 체계를 갖는 대규모 조직으로서 관료행정적 형태로 제도화된 체제를 말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한국의 국가를 강력한 국가라고 말할 때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위에서 말한 국가의 하부구조적 수준에서가 아니라 정부적 수준에서의 국가이다. 정부는 초헌법적 힘의 사용을 통해서든 경쟁적인 선거를 통한 민주주의적 방식으로든 권력을 획득하고, 특정 형태의 방법으로 권력을 행사하며 국가기구를 운영하는 일단의 정치 세력을 말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권력의 획득과 행사 과정에서 사회적 지지를 조직하고 동원하고자 하는 특정의 이념적 정향 내지는 정책적 정향을 갖는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는 국가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53쪽

오도넬, 위임민주주의 : 위임민주주의의 경우, 대통령은 그 어떤 정당이나 조직화된 이해의 상위에 위치하고 의회나 정당, 법원은 대통령의 정책의지를 방해하는 제도로 인식되거나 자주 이를 우회하여 정책결정과 변경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대통령의 주도하에 정책의 수립과 변경이 쉽게 이루어지며, 집권 초 대통령의 정책을 사회의 조화로운 이익을 실현하는 것으로 환호되지만, 곧 정책집행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비용의 문제가 발생하고 이를 둘러싼 반발과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제도화의 수준이 낮음에 따라 정책의 실패는 대통령 개인에게 그 책임이 돌아가고 결과적으로 대통령은 집권 초 높은 대중적 인기를 향유하다가 집권 말에 이르러서는 저주에 가까운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163쪽

권위주의 산업화 과정에서 형성된 시장은 크게 세 가지 특성을 갖는다. 첫째는 국가가 경제의 성장목표를 설정하고 여기에 민간기업을 동원하여 자원의 할당과 분배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한 국가주도성이다. 둘째는 이 과정에서 국가에 의해 육성된 소수의 거대 기업이 국가의 거시경제정책의 성장목표를 대리 추진하면서 국민경제를 지배하는 재벌 경제체제이다. 셋째는 노동의 배제이다. 이는 생산적 자원의 할당과 분배에 영향을 미치는 정부의 정책결정과정에서나 보수독점의 정치적 대표체제에서 사회의 대표적인 생산자 집단인 노동의 참여와 대표가 허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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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비디오를 위한 변명
유정서 지음 / 도서출판 동재 / 2003년 7월
품절


우리나라 비디오 소프트웨어 산업의 역사는 80년대 초중반을 기점으로 지금까지 대략 20여년의 연륜을 쌓아 왔다. 80년대 후반, 하드웨어의 급속한 보급을 배경으로 90년대 초 중반에 이르러 최고의 호황을 누렸으나 대여시스템에 편중된 시장구조의 근본적 한계와 누적된 모순의 드러남, 그리고 뉴 미디어의 거센 도전으로 90년대 후반부터 심각한 전환기를 맞게 된다. -239쪽

"영화와 비디오는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새삼스럽게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일이 왜 중요한가라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영화보다 한 수 아래의 영상매체 쯤으로 간단하게 대답하려 드는 사람도 적지 않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실제로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하며 대답 또한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이 질문에 정확하게 답하지 못하는 한 영화와 비디오는 항상 혼돈되는 매체이거나 아니면 영화보다 한결 뒤떨어지는 매체라는 편견에서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이다.실제로 비디오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적지 아니 왜곡되어 있는 것도 어쩌면 비디오 산업에 종사하는 주체들이 이런 근본적인 문제들을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생각해온 탓도 없지 않다. -240쪽

비디오를 많이 보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겠지만, 고객들은 꼭 시간을 내서 극장에서 봐야 할 영화와 시간 날 때 비디오로 감상해야 할 영화를 따로 구분할 줄 안다. 또한 와이드 스크린과 화려한 사운드가 받쳐줄 때는 더없이 감동스러웠던 영화가 비디오로 보았을 때는 도무지 뭐하는 영화인지 모르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리고 극장에사 20만 정도의 관객이 든 영화는 대단하게 생각하면서도 대여점을 통해 40~50만은 족히 보았을 B급 액션영화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한마디로 좋은 영화와 잘 나가는 비디오라는 등식은 언제나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영화를 아무런 고려사항 없이 오직 미학적인 관점에서 평하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비디오는 그런 식으로만 얘기되어서는 안되는 매체다. -241쪽

80년대 초부터 비디오 시장이 급격히 커지기 시작하자 한 때 영화의 사양화를 우려하는 소리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왔듯이 비디오의 성장은 영화시장을 결코 잠식하지 않았으며 우리나라의 경우는 오히려 영화가 비디오 시장에 적지 않은 신세를 졌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중략) 영화가 후발 미디어의 도전을 거뜬히 극복하고 공존의 길을 성공적으로 걸어온 데 비해 비디오의 현실은 적지 아니 우려스런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비디오는 영화처럼 1차 저작물의 가치를 지니지 못해 상품가치가 한정되어 있는데다 시장의 주체들은 이들 뉴미디어와 구분되는 비디오만의 고유영역을 개발하고 개척하는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어보이기 때문이다. / 비디오의 고유 기능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건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영화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매스 미디어적 예술이고 인터넷이 특정 개인을 상대로 한 퍼스날 미디어라면 비디오는 '홈비디오'라는 말이 상정하듯 가정에서 온 가족이 함께 향유하는 홈미디어인 셈이다. 문제는 이런 고유영역을 가꾸려는 노력이 얼마나 경주되고 있는가-244~245쪽

비디오 감상 인구는 조금씩만 늘고 있는데도 마진을 무시하고 재벌기업 특유의 마켓 쉐어 위주의 마케팅으로 시장 규모만 늘려놓은 메이저 제작사의 전철이나, 장사가 조금 된다니까 영상소프트웨어의 상품적 특성을 무시하고 우후죽순격으로 난립했던 대여점의 마인드, 더 나아가 대여점의 사활이 제작사나 유통사의 이익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식의 근시안적인 영업관행은 이제 더 이상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250쪽

국내제작 성인비디오는 1980년도 말 처음 선을 보인 이래 작품의 수준이 조악하고 저급하다는 주류문화권의 비판에 시달리면서도 우리나라 비디오 시장의 유일한 틈새시장을 형성해왔다. 특히 최근 몇 년간은 성인비디오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지면서 충무로에서 활동했던 중견감독이나 재능있는 신인들이 대거 제작에 참여하고 출연배우의 수준도 대폭 높아지면서 질과 양적인 면에서 상당 수준의 성장세를 보여왔다. -252쪽

성인비디오의 숨통을 수시로 죄어버리는 당국의 명분은 대체로 추상적이기 이를데 없는 미풍양속의 저해라든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청소년보호 정도다. 우선 오늘날과 같이 다양한 개성이 존중되는 사회에서 자의적으로 해석되기 쉬운 미풍양속과 같은 모호한 잣대를 들이대는게 과연 합리적인가 하는 의구심을 지우기 어렵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비디오 하나만 잡으면 마치 그 미풍양속이라는 것이 저절로 확립되는 듯이 유독 비디오에만 민감한 심의당국의 일방적 태도다.-253쪽

비디오 대여점의 수익구조는 다음 세가지 요소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된다. 테이프 구매비, 회전률, 그리고 대여료가 바로 그것이다. 예로 들어 테이프의 구매비는 저렴하고 회전률과 대여료가 높을 때, 대여점은 최고의 수익은 보장받을 수 있다. 반면 대여점이 가정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테이프의 구매비는 높고 회전률은 저조하며 대여료는 낮을 때이다.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이런 상황이 최근 비디오 대여점이 처한 현실일 것이다. -258쪽

현재 비디오 테이프의 가격은 한마디로 '흥행 가능성'이 얼마나 높으냐에 따라 차등 적용되고 있다. 엔터테인먼트 상품의 속성에 비춰 흥행성이란 얼핏 타당성 있는 기준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현실적으로 그 기준은 이른바 개봉작이냐 아니냐로 도식화되는 모순을 가져왔다. 관객에게 선보일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상 상품이 흥행 여부를 떠나 개봉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거니와 이왕 만들어진 영화를 극장에 거는 일 또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마디로 개봉 여부는 영상물의 질을 결정하는 적합한 기준이 전혀 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모순된 기준이 적용되면서 비개봉작의 출시 빈도는 점점 줄어드는 대신, 흥행 여부는 안중에도 없이 오직 비디오 가격을 높이기 위해 억지 개봉하는 무늬만 개봉작들이 늘어나 사실상 비디오 테이프의 가격이 전체적으로 인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런 황당한 결과는 테이프 가격에 대한 불만을 초래해 비디오 시장의 테두리 안에서 함께 공존해야 할 대여점과 출시사 간에 불신의 벽만 높여 놓는데 한몫을 했다. -259쪽

한편 대여료 문제도 현재의 비디오 대여점을 곤혹스럽게 하는 커다란 요인 중의 하나다. 테이프의 구매가와 평균 회전률에 훨씬 못미치는 대여료가 일반화된데는 일부 몰지각한 대여점의 대여료 덤핑 공세가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사실 회전 수명이 다해 속된말로 이미 본전을 뽑은 프로는 단돈 100원을 받아도 이익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얼핏 그럴싸해 보이는 이같은 발상 역시 일반 생필품과 문화상품의 속성을 구/ 분하지 못한 어처구니 없는 단견에 지나지 않는다. 화장지나 비누처럼 사 두기만 하면 어차피 소비하게 될 생필품은 가격만 싸다면 당장 필요하지 않아도 일단 구매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상 상품이란 재미가 없으면 싸다 못해 거저 주어도 시간이 아까워 안보게 되어있다. 결국 구프로라는 미명하에 턱없이 책정된 대여료는 비디오라는 상품에 대한 이미지를 싸구려화시켜 멀쩡한 신프로의 가격까지 덩달아 낮추어야 하는 출혈을 초래한 것이다. -259쪽

비디오 산업 침체의 원인에 관한 한 그의 해답은 의외로 명백하고 간단하다. 바로 비디오 대여점의 몰락인 것이다. 대여 위주로 형성된 우리나라 비디오 시장에서 대여점은 필연적으로 상품의 사실상 최종 소비자 간주돼 왔다. 이를테면 렌탈용 비디오를 제작, 출시하고 유통하는 제작사나 유통사가 얻는 모든 수익은 대여점이 상품을 구매하는데서 시작되고 끝나는 구조라는 이야기다. -261쪽

영상 소프트웨어 산업의 특징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절묘한 균형 속에서 성장 및 답보 상황이 결정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최근 급속한 성장을 보이고 있는 게임산업이나 인터넷 산업은 궁극적으로 pC라는 하드웨어의 급속한 보급을 전제로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비디오 소프트웨어 산업 역시 88올림픽을 분수령으로 한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의 급속한 하드웨어(VCR)의 보급을 배경으로 급격한 성장세를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느 누가 VCR 한 대를 구입했다면 그것은 곧 소프트웨어 소비자의 자연적 증가를 의미한다. 더욱이 하드웨어의 보급률이 소프트웨어의 보급률을 앞지르는 상황이라면 소비자들은 상품/의 질에 대해서도 거의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당연히 별다른 판촉활동이 없어도 프로를 출시만 하면 나가게 되어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외국 직배사들이 속속 상륙하고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너도나도 비디오 소프트웨어 산업에 뛰어들고, 비디오 대여점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나던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의 상황이었다. -267~268쪽

사실 비디오 산업의 초창기인 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비디오는 그 자체가 놀랍고 충격적인 뉴미디어였다. 영화의 위기론까지 거론될 만큼 그 파급력은 참으로 위력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첨단 기술을 등에 업은 미디어 산업의 눈부신 발달로 새롭고 경이로운 매체들이 속속 등장하는 동안 이제는 아무도 비디오를 놀랍거나 새로운 미디어로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말하면 매체 자체의 신선도가 많이 약화된 것이다.-268쪽

결론적으로 이제 비디오 대여점은 단순히 비디오에만 대여해 주는 소극적 의미의 '가게'라는 의식에서 스스로 벗어나 영화를 비롯한 영상 소프트웨어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마케팅이 펼쳐지는 영상소프트웨어 사업 하나임을 인식하고 그 지역에서 가장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종합 영상문화공간으로 변해야 한다. -272쪽

제1기(맹아기): 80년대 초 비디오라는 매체가 이땅에 처음 보급되기 시작한 시기다. 새로운 매체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으므로 보급 속도는 비교적 빨랐으나 소프트웨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탓에 불법 복제물들이 기승을 부렸고 포르노 테잎과 같은 유해한 영상물도 많이 나돌았다. 이런 상황에서 형성된 비디오에 대한 부정적 편견은 매우 오랜 기간동안 비디오 시장에 악영향을 미쳤다. -274쪽

제2기(정착기):80년대 중후반 우리나라 비디오 시장의 기본 구조가 형성된 시기다. 하드웨어의 보급 속도가 빨라지면서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전문 소프트웨어 제작사들이 속속 생겨났고 이른바 '종합대리점'을 중심으로 한 초기 유통 시스템이 형성, 정착되었다. 비디오 대여점의 숫자도 급격히 늘어나 대여중심의 시장구조가 확립되었다. -274~275쪽

제3기(확대기):80년대 후반~90년대 초 대기업과 외국직배사의 상륙 등으로 비디오 시장의 규모가 급격하게 신장된 시기다. 특히 1998년의 서울 올림픽은 하드웨어가 급속하게 보급된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소프트웨어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자 국내 대기업과 외국 직배사가 속속 소프트웨어 시장에 뛰어들어 비디오 시장의 규모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대여점의 숫자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외형적으로는 최대의 호황기였지만, 이미 이 무렵부터 시장 구조를 왜곡시킬 수 있는 여러 가지 모순들이 누적되고 있었다. -275쪽

제4기(전환기):90년대 초 중반 대기업과 직배사의 약진으로 초기의 시장구조가 일대 변화를 맞이한 시기다. 거대 자본으로 무장한 국내 재벌 기업들이 속속 시장에 진출하고 양질의 소프트웨어를 무한정으로 확보한 외국 직배사가 연이어 상륙함으로써 중소기업 중심의 출시 구조, 종합도매상 중심의 유통 구조로 구축된 초기의 시장의 구조가 심각한 변화를 맞이한다. 시장의 주축을 이루던 중소 제작사들이 몰락하고 대기업과 직배사가 약진하는 한편 유통구조는 대기업 직관 시스템과 기존의 종합 도매상 체제로 양분된다. -275쪽

제5기(과도기): 90년대 중후반~2000년 현재 90년대 초기부터 누적되기 시작한 여러 가지 모순들이 한꺼번에 드러나며 총체적인 위기를 맞은 시기다. 판권료의 급등과 판매실적의 부진으로 악전 고투하던 대기업들은 IMF 위기를 맞아 거의 와해 위기에 처한 반면, 판권료의 부담이 없는데다 자체 유통라인을 유지하지 않아도 되는 외국 직배사의 시장지배구도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 와중에서 국내 메이저 출시사들은 사업 자체를 포기하거나 분사, 합병 등으로 활로를 모색하는 한편, 외국 직배사의 유통 대행사로 전락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불황의 골이 깊어지면서 대여점의 숫자도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했다. 전성기 때 4만여를 헤아리던 대여점이 이 무렵에는 1만여개 선으로 줄어든 것으로 집계 되었다.-2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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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사 공부 1980-1997 - 한국영화사 연구총서 02
유지나 외 지음, 한국영상자료원(KOFA) 엮음 / 이채 / 2005년 12월
절판


1980년대 한국영화 - 강소원의 글 일부를 옮겨 본다 / 1980년대 다수의 한국영화는 프로야구와 마찬가지로 심리적 도피처나 한풀이의 수단으로 여겨졌던 반면, 또 다른 축의 한국 영화들은 끊임없이 회의하고 저항하고 울분을 쏟아 냈다. / 1980년 한국 산업은 1970년대 전반에 걸쳐 일어났던 지속적인 하강곡선을 반전 없이 이어갔다. 극장수, 제작편수, 총관객수 모두 줄어들었고 총 91편의 영화가 만들어졌다.-10,11쪽

1981년. 이른바 체육관 선거를 통해 90.2 %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 정권은 서울/올림픽 유치에 성공하고 기세등등했다. 그 기세를 몰아 '유사 이래 가장 거대한 놀자판' 국풍 81로 대중 조작 이벤트를 시작한 정권은 3S정책을 1980년대 문화정책으로 내놓는다. '문화'정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저급한 이 정책 아닌 정책은 영화를 비롯한 1980년대 문화 전반을 꿰는 용어가 되었다. -14,15쪽

(1984년) 이 해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제작의 전반적인 특징은 1980년대 내내 양산된 소프트 포르노그래피 영화들이 장르의 폭을 점점 좁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멜로드라마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사실은 자극적인 정사 신을 어디에 몇 개나 포함시킬 것인지에 훨씬 골몰했을 듯한 영화들이 말 그대로 쏟아져 나왔다. / 흥행에서 극단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에로영화들이 그렇게 많이 만들어졌던 것은 다른 장르의 영화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적은 제작비로 흥행 결과에 대한 압박이 적었고, 완성도의 편차는 있지만 한줌의 상상력도 필요치 않은 천편일률적인 서사를 반복하는 제작의 용이성 덕분이었을 것이다. -25,26쪽

1988년. 집회시위를 규제하는 올림픽 평화구역을 선포해 가면서 서울올림픽을 치렀고 이 해 말 제5공화국 청문회를 통해 전두환을 백담사로 보냈다. 그 뜨거웠던 6월항쟁의 성과치고 / 는 그다지 달라진 게 없는 세상이었지만 한국영화계는 그 어느 해보다도 투쟁의 열기를 높여 갔다. 이 해 1월에 미국 직배 영화사 uip의 국내 영업이 허가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인들의 uip 저지투쟁은 치열했지만 대세를 바꿀 수는 없었다. uip는 업계 관행을 무시해 가며 극장측에 특혜를 제시했고 직배 영화 확보에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극장주들은 극장 방화사건을 사주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 와중에 다국적 비디오회사인 CIC까지 한국시장 공략에 나섰다. 올림픽 특수로 국내 VCR 보급률이 급상승하면서 비디오 시장이 영화 시장을 추월할 것을 예견한 것이다. -34쪽

1980년대 내내 추진되었던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도래는 거의 완성된 듯이 보였다. 얼핏 보기에 한국영화계도 호황을 누리는 듯했다. 한국영화의 제작편수와 외국영화 수입편수, 그리고 / 관객수, 총매출액, 극장수 모두 증가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호황을 누린 것은 직배회사와 영화제작 대신 외화 수입에만 열을 올린 국내 영화사와 극장주뿐 한국영화 관객은 전년도보다 오히려 줄었다. UIP 직배 저지투쟁도 계속되었다. 이 해 321편의 외국영화가 수입되었고 한국영화는 110편이 만들어졌다.역시 가장 많이 만들어진 영화는 에로티시즘을 목적으로 한 멜로드라마였지만 그것도 거의 막바지였다. VCR의 대량 보급에 힘입어 영화관에서 상영되지 않고 곧바로 비디오로 출시되는 16MM 영화들이 본격적으로 제작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수용 환경의 변화가 소프트 포르노영화의 대대적인 양산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지만, 다르게 본다면 긍정적인 측면이 훨씬 많았다. 단순하게 반복 재생산되는 소프트 포르노영화의 제작비를 그 효용의 수준만큼 절감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충무로 안의 자본을 좀 더 효율적으로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들어 내는 데 집-37,38쪽

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대중영화 안에서 성과 육체는 언제나 가장 잘 팔리는 소재였다. 크게는 멜로드라마라고 봐야할, 일반적으로는 성애영화, 에로영화라고 불리는 이 범주의 영화는 1980년대를 통틀어 가장 많이 만들어진 장르이다. 노출의 수위에서 하드코어 포르노그래피와 구별되는 소프트코어 포르노그래피는 주류산업의 구조 안에서는 제작이 불가능한 영화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1980년대 성애영화들을 소프트 포르노그래피라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이겠지만 표현의 수위가 아니라 그 영화의 수용 기제와 기능, 그리고 본질의 차원에서는 포르노그래피와 다르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38,57쪽

1982년 <애마부인>을 기점으로 거의 폭발적으로 제작된 성애영화의 히로인들은 1970년대 호스티스 영화들의 그녀들과는 달랐다. 가난 때문에, 남자 때문에, 범죄에 희생된 탓에, 하는 수 없이 몸을 팔게 되는 수동적인 입장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 때문에 사회의 도덕률을 넘어서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능동적인 욕망의 실천자들이었다. 물론 처벌의 결말을 통해 가부장제와 일부일처제는 여기서도 온전히 작동하지만 말이다. 그 영화들이 지향하는 것은 금기된 욕망을 실천하는 / 그녀들을 음습한 시선으로 훔쳐보는 것이었지 유교적 윤리관을 공격하고 넘어서는 지점에 있지 않았다. 82쪽부터는 유지나, <1990년대 한국영화>라는 글 일부를 옮긴다. -57~58쪽

한국영화는 tv대중화 이전 영화 황금기(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전반)를 구가하다가 정치적/ 상황과 미디어 환경 변화로 침체국면(1970,80년대)을 겪었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를 기점으로 예외적인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다는 진단은 비록 거품론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일단 주목해 볼만한 현상이다. 1990년대 전반 20%내외에 머물던 한국영화의 국내 시장점유율이 제작편수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1998년 24%대로 상승했다가 1999년에는 약38%로 성장했다.또한 1990년대 들어서 <서편제>,<장군의 아들>,<쉬리>로 이어지는 한국영화 신기록 행진은 한국영화(보기)붐으로 이어졌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한국영화라는 추상적 개념에 대한 관객 인식의 역전이다. 과거 외화가 한국영화보다 더 볼 만한 재미있는 영화(구체적으로는 할리우드영화)라는 통념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영화가 외화보다 볼 만하다는 인식의 역전을 이루어 낸 것이다. 그러나 한국영화의 부흥 속에서도 위기론과 거품론이 때때로 제기되기도 했다. 유난히 여관방 정사신이 넘쳐나는 영화들이 많이 나왔던 1997년에는 "상상력과 의식의 빈곤'이란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82~83쪽

1980년대 민주화투쟁 속에서 지지받던 민중이란 집단개념은 1990년대 대중을 대변하는 서민층까지 포괄해 내는 중산층으로 변화된다. 계급성을 봉합해 낸 중상층이란 집단의 전면적 등장, 그 존재감에 대한 적극적인 호명은 1997년 IMF 이전까지 한국사회의 (거품 낀) 풍요를 이끄는 주체이자 선망의 대상으로 작동한다.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는 중산층을 중심에 두고 신세대, 미씨족 등 대중을 지칭하는 온갖 집단들이 소비주체로 호명되고, 대중문화시장이 급팽창한다. 속칭 고급예술을 위에 두고 연예나 딴따라라고 분리되어 상대적으로 폄하되던 분야는 대중문화예술, 연예인으로 재정립된다. 즉, 고급문화의 상대 개념으로서의 대중문화, 민중문화의 대칭 개념으로의 대중문화라는 기존의 인식은 1990년대 들어 물질적 풍요와 탈정치화된 사회분위기 속에서 이전 시대보다 긍정적인 개념으로 등장하게 된다.(중략) 이런 여건 속에서 중산층적 대중추수주의가 영화를 포함한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재정립(중략) 반면에 1980년대로부터 이어지는 본질적이로 거시적인 의제들, 이를테면 민주화과정에서 발생한 광주의 트라우마나 노동운동, 분단 이데올로기에 대한 진지한 -87쪽

모색은 제도권 영화 생산에서 지속성을 담보해 내지 못한 채 실종되어 버리는 현상이 영화산업의 속성이기도 한 대중추수/주의 속에 나타난다. 그것이 자본주의와 결합한 대중문화 상품으로서 제도권 영화의 속성이자 한계라면, 소위 비제도권 영화로 분류되며 1990년대 자신의 길을 개척해 가는 독립영화 속에서 한국사회의 문제적 상황에 대한 사회적 사실주의 정신이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87~88쪽

1992년부터 비디오 판권 선구매로 영화업에 진출한 대기업이 1990년대 중반부터 영화 제작 전액투자로 확대되다가 점차 발을 떼게 되면서 그 빈자리를 금융자본, 투자사들이 차지하게 된다. 대기업 자본의 영화업 진출 초기 충무로 토착자본의 저항과 반대가 있었지만, 비디오 판권, 유통업을 통해 이미 들어온 대기업 진출이 대세가 되어 가면서, 결국 영화 전문성 부족으로 물러날 것이란 낙관적 기대 하에 저항은 수그러든다. 삼성은 삼성영화사업단을 만들어 1994년 본격적으로 영화업에 진출하게 되고, 대우, 현대 등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대기업들이 비디오 유통과 케이블 TV에 진출하면서 영상 콘텐츠 확보 차원에서 경쟁적으로 영화산업 전반에 손을 뻗친다. 서비스업으로 분류되어 금융지원 혜택을 받지 못하던 영화업은 1995년을 기점으로 준제조업으로 분류되어 창업투자사를 비롯한 금융자본이 투자될 수 있는 법적인 여건을 마련하면서 다양한 제작사들이 다양한 자본주의 후원으로 하나둘씩 설립된다. 제작사들의 백가쟁명시대가 열린 것이다. -91쪽

그러나 영화를 교두보로 한 대기업 자본의 영상업 전반에 투자가 확대될 무렵인 1997년 IMF체제가 닥쳤다. 이에 대기업들은 영상산업 진출에 예상만큼의 수익을 거두지 못한 데다, 경제 위기의 원인 중 대기업의 문어발식 백화점 경영이 문제가 되자 발 빠르게 영화업으로부터 물러나게 되고, 그 빈자리를 금융자본과 결합한 투자사들이 충무로의 가장 강력한 자본주로 들어서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기업 자본이 빠져나간 공백은 컸으며, 한국영화 제작편수는 급감한다. 바로 이 미묘하고 위험한 시기에 등장한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화정권인 김대중 정부는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 획기적인 영화 지원정책을 골자로 한 영화진흥법 개정을 하게 된다. -91쪽

한국영화산업과 정책 : 1980~1997, 조준형의 글 일부를 옮겨본다 / 1980년 이후 1990년대 후반까지 한국영화산업과 정책은 이전 어떤 시기와도 비교할 수 없는 급격한 변화를 겪어 왔다. 이와 같은 변화의 시작은 제5차 개정영화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84년 12월에 개정되어 이듬해 7월부터 시행된 제5차 개정영화법은 1962년 영화법이 제정된 이후 20여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박정희 정권기의 영화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주지하다시피 박정희 정권기 영화정책의 근간은 제작-수입의 일원화, 제작사 허가제를 통한 메이저화 정책, 외화 수입의 통제 등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정책의 실효성을 담보했던 것이 외화수입쿼터였다. 요컨대 박정희 정권의 영화정책 핵심은 할리우드나 일본과 같이 한국에서도 메이저 영화사를 양성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재원 조달과 특혜의 수단으로 외화수입쿼터를 부여했던 것이다. 이는 물론 정권의 입맛에 맞는 영화 제작을 유도하고자 하는 정책적 수단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기 영화정책, 특히 산업정책은 종국적으로 실패하였다. 무엇보다 표현의 자유를 생명으로 하는 문-144쪽

화산업에서 그 입을 틀어막고 자본을 투입하지 않은 채 편의적인 외화수입쿼터 부여로 한국영화산업을 육성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모순적인 것이었다. 이와 같은 영화산업 정책의 실패와 텔레비전의 등장이 겹치면서 한국영화산업은 1970년대 이후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제5차 개정영화법은 제작과 수입업을 자유화함으로써 영화 제작과 수입을 소수의 회사들이 담당하던 독점체제를 무너뜨림과 동시에 외화 수입을 자유화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담고 있었다./ 제작과 수입업의 자유화는 많은 영화인들의 바람이었지만, 외화 수입의 자유화는 오랜 불황으로 제작 능력이 감퇴되어 온 한국영화 제작 부문에 있어서는 커다란 타격을 줄 수 있는 조치이기도 하였다. 어쨌든 이와 같은 제5차 개정영화법의 자유화 조치로 인해 한국영화산업에 완전 경쟁의 풍토가 도입되었고, 이후 한국영화산업은 급격한 변화와 혼란의 시기를 겪게 된다. -144쪽

1970년대 이후 1980년대까지 영화산업 쇠퇴의 주요 원인으로 대략 세 가지가 거론될 수 있었을 것이다. 첫째는 TV의 광범위한 보급으로 인한 영화 관객의 축소였다. 이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는데, 다만 한국의 경우 미국이나 유럽,일본에 비하여 TV쇼크가 다소 늦게 도착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둘째는 검열의 강화로 인한 표현의 자유의 축소 경향이었다. 1972년 유신을 정점으로 한국영화의 표현의 자유는 극도로 축소되었고, 한국영화는 현실의 어느 곳에도 발을 붙이지 못하고 현실성이 증발된 기이한 판타지 공간으로 도피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셋째는 박정희 정권의 영화정책 실패의 후유증이었다. 소위 메이저 기업화 정책은 이미 1960년대 중후반에 그 파탄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권은 그 정책적 기조를 1970년대까지 이어나갔다. 이에따라 제작과 수입 등 영화 공급 부문은 소수의 영화사들에 의해 독점화되었으며, 한국영화의 제작은 점점 더 외화수입쿼터를 따기 위한 들러리에 지나지 않게 된다. 1970년대 한국영화산업의 비극은 이와 같은 개별적인 요인들이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147쪽

어 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TV의 보급에 영화가 대응하는 방식은 대형화(스펙터클), 표현 강도의 강화(폭력, 섹스)등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영화산업은 대형화의 길을 택하기에는 자본력이 부족했고, 표현 강도를 강화하기에는 검열의 수위가 장애가 되었다.-147쪽

일제시대 이후 군사정권을 거치는 동안 거의 1970~80년의 기간 동안 영화는 산업이라기보다 대중적 영향력이 큰 이데올로기 통제수단으로 취급되었다. 산업적 지원책이나 정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정책들은 빈번하게 이데올로기 정책(검열, 제작에 대한 간섭, 광고나 상영에 대한 단속 등)과 모순을 일으켰다. 이러한 모순이 한국영화산업의 산업화 혹은 근대화를 지연시켰으며, 1970년대 한국영화산업의 몰락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에 들어서면서 영화는 점점 이데올로기 통제 대상에서 부가가치 창출과 자본 재생산을 위한 본격적인 의미의 산업으로 자리매김한다. -183쪽

1990년 초를 전후한 대기업의 영화산업 진출에는 몇 가지 배경이 존재한다.첫째, 비디오 유통에서의 직배의 영향이다. 삼성,대우,엘지 등의 가전 3사는 한국에서 VCR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1980년대 중반부터 비디오 프로그램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영화산업에 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1991년을 기점으로 비디오 시장에까지 할리우드 영화사들의 직접배급이 시작되자 대기업들의 프로그램들은 총체적인 어려움에 직면한다. 대형 흥행작들은 직배사의 수중에 있었고, 직배를 거치지 않은 흥행작의 경우 국내 기업들 간의 경쟁으로 몇만 달러 수준이던 판권료가 몇십만 달러로 뛰어올랐다. 뿐만 아니라 대안으로 떠오른 한국영화의 판권료 또한 수억 원에 이르게 되었다(권미정,<90년대 한국영화의 제작방식 연구: 자본과 인력의 변화, 그 영향을 중심으로). 당시 한국영화의 평균 제작비가 5~6억원 선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제작비에 육박하는 금액을 비디오 판권료로 지불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대기업으로 하여금 직접적인 영화 제작에 참여하도록 만들었다. -184쪽

문재철- <1980년대 이후의 영화비평과 이론의 흐름> 중 일부를 옮겨본다 / 제5,6 공화국으로 대표되는 정치적 억압, 그리고 그 배후에 놓여 있던 계급과 민족모순, 그리고 무엇보다 변혁의 주체로서 민중에 대한 자각은 개인적 울분의 형태로 진행되었던 1970년대까지의 낭만적 저항에서 벗어나 영화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을 강조하면서 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저항을 가능케 했다. 더 나아가 문화적 차원에서 볼 때, 문화적 자유화에 따라 외국영화가 범람/하고 UIP 직배 등으로 대변되는 미국의 신식민주의적 통제가 노골화된 시기이지만 동시에 탈식민지적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문화적 정체성을 본격적으로 탐색했던 때이기도 하다.-208~209쪽

1980년대 초반의 상황을 맥락화하자면 두 가지가 지적될 수 있겠다. 하나는 기존 충무로 시스템으로 대변되는 한국영화의 상업주의와 값싼 대중영합주의에 대한 비평적 개입의 문제다. 물론 영화비평계에서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1950년대 후반 이래 지속되어 왔었는데 1980년대를 시작하는 시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였다. 다시 말해 한국영화의 전근대성을 어떻게 비평적으로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는 한국영화비평의 오랜 숙원이었고 1980년대 영화비평이 해결해야 할 역사적 유산이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영화의 사회적 역할과 관련된 것이었다. 물론 이 역시 기존 리얼리즘 비평의 문제의식이긴 했다. 하지만 이영일을 위시한 우파 민족주의 비평계열이/보여 주던 관념적 리얼리즘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고 어떤 식으로든 한국영화의 변화를 위해선 해결해야 할 시급한 당면 과제였다. -209~210쪽

김종원이 말한 '이제부터'가 1980년대라면 그 주역은 기존의 학자나 평론가가 아닌 새로운 세대들이었다. 이 새로운 세대는 대학 내 영화서클을 중심으로 한 젊은 시네필들로 영화에 대한 순수한 애정에서 출발하였다는 점에서 기존 충무로를 중심으로 한 영화계가 지니지 못한 열정과 에너지를 지니고 있었다. 물론 시네필의 활동은 이미 유신 말기 때부터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오고 있었는데, 1977년 프랑스문화원에서 만들어진 '씨네클럽'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영화예술의 공간을 조성한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시네클럽'은 매주 영화감상과 토론의 시간을 열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대학 내 소모임으로 동호회가 결성되고 영화감상과 토론은 물론 초보적이기는 하나 8MM단편영화를 제작하면서 영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나갔다. 이 시기 씨네필들이 지니는 한국영화사적 의미는 각별하다. 열혈 영화광은 늘 존재했지만, 본격적인 의미에서 씨네필들이 왕성한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특히 이들은 집단을 이루고 나름의 통일된 목소리는 내는 등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과거의 씨네-212쪽

필들과는 달랐다. 이러한 씨네필들의 활동은 향후 1990년대를 거치면서 예컨대 문화학교 서울과 같은 형태의 예술영화 보기 운동으로 이어지면서 오늘날 시네마테크의 뿌리를 형성했다.-212쪽

가령, 199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시작된 대기업 자본과 그 이후 금융자본의 유입, 기획영화의 등장, 마케팅의 부각 등은 영화를 보다 산업적 틀 속에서 정의하게 했다. 더군다나 감독들 역시 서사적 상상력보다는 이미지의 매력에 집착하고 리얼리즘 영화보다는 장르영화에 치중하는 등 이전 세대와 확연히 구분되는 영화적 상상력을 보여 주었다. 게다가 수용문화 또한 변화했다. 관객들의 시각적 해독 능력은 과거에 비해 탁월해졌고, 여기에다 비디오, 텔레비전, 컴퓨터 등등의 시각적 매체는 영화 이미지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바꿔 놓았다. 소위 영상세대의 관객이 출현한 것이다. 그리고 1995년 부산영화제의 시작은 이후의 시기를 영화제의 시대라 할 정도로 영화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보다 강력하게 이끌어 내면서 한국영화를 글로벌 프레임 속에서 사고하게 해 주었다.-235쪽

이전까지의 시대가 전문적 소수가 주도하면서 비평의 공간을 채워 갔다면 이 시기에 이르러 가장 큰 변화는 관객들의 참여와 목소리가 커졌다는 것이다. 관객들이 영화를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존재에서 영화적 의미 생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주체로 거듭나게 된 것은 물론 영화를 비롯한 영상예술에 대한 사회문화적 관심이 증가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이른바 영상시대의 도래로, 영화를 일종의 차세대 중요산업으로 보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이제 영화는 단순히 보고 즐기는 것이 아닌, 새로운 문화적 자본으로서 기능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백두대간'과 같은 영화수입사의 예술영화 상영, '하이퍼텍 나다'등의 예술영화전용관, 문화학교 서울 등을 중심으로 시작된 예술영화 감상과 수용자 운동, 그리고 급기야는 시네마테크 설립('서울 시네마테크')에 힘입어 전문 비평가들만의 전유물에 가깝던 고급 예술영화가 대중들과 만나기 시작했다. 이는 관객 대중들의 영화 독해능력을 향상시킴과 아울러 영화에 대한 대중적 관심의 질적 변화를 이끌어 냈다. 기존의 영화비평이 지식과 정보의 소유를 통해 자신들을 대중과 차별화하고 있었다면 이제 비평의 영-238쪽

역은, 특히 저널비평의 영역은 대중들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많이 소유하게 되고 여러 가지 공간을 통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게 됨에 따라 질적인 변화를 갖게 되었다./이 당시 주간평론지 출간 붐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들이다. 물론 이는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1990년대 이후 소위 문화의 폭발과 연관해 이해할 수 있는 사안이기도 하다. 문화담론의 확산은 대중성의 확대에 편승했다. 1993년을 전후로 각 신문의 문화면이 양적으로 증가하였으며, 특히 한겨레신문의 문화 관련 칼럼 등이 저널리즘이라는 한계 속에서 영화비평의 대중화를 선도하였다. 특히 한겨레신문의 영화평은 신세대 젊은이들에 어필함으로써 문화적 담론의 대중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다.이는 씨네21의 창가으로 이어지면서 한국영화 저널지평담론의 큰 흐름을 주도하게 된다.-238쪽

이미 1980년대를 거치면서 다양한 형태의 대중문화가 자리잡아 가고 있었고 특히 소비문화와 결합된 문화산업은 상당한 대중적 기반을 획득하고있었다. 이와 같은 흐름이 사회과학의 몰락과 더불어 급상승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영화 연구는 자의든 타의든 문화 연구라는 보다 넓은 장 속에 자리매김 되기에 이른다. 이제 영화가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여겨지게 됨에 따라 영화는 질문의 최종적 목표가 아니라 재현과정의 일부로 간주되게 되었다. 그리고 영화를 하나의 문화적 과정으로 보게 됨에 따라 영화는 자기 완결적이고 동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계급, 인종, 성, 민족 등과 같은 사회적 분할에 따라 일상적 가치와 의미가 충돌하고 상호 작용하는 장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 결과 작가영화 대 대중영화, 대안영화 대 주류영화, 예술영화 대 할리우드 영화라는 이분법적 대당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이전의 영화비평이 보여 주던 정치적으로 경직된 측면도 완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중영화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터전과 대안적인 독법이 적극 논의되게 되었다.-242쪽

하지만 문화 연구의 도입이 영화 연구의 이론적 사유 방식이나 방법론과 관련하여 꼭 긍정적/인 영향만을 준 것은 아니었다. 개별 텍스트의 미학적 특징보다는 의사소통의 과정과 맥락에 더 집착한다는 점에서 영화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라 할 수 있는 영화적 특수성의 문제를 간과하는 한계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 의미화, 약호, 위치, 무의식, 이데올로기, 권력 등을 강조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미학을 불신하는 경향이 나타났다.-242~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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