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사 공부 1980-1997 - 한국영화사 연구총서 02
유지나 외 지음, 한국영상자료원(KOFA) 엮음 / 이채 / 2005년 12월
절판


1980년대 한국영화 - 강소원의 글 일부를 옮겨 본다 / 1980년대 다수의 한국영화는 프로야구와 마찬가지로 심리적 도피처나 한풀이의 수단으로 여겨졌던 반면, 또 다른 축의 한국 영화들은 끊임없이 회의하고 저항하고 울분을 쏟아 냈다. / 1980년 한국 산업은 1970년대 전반에 걸쳐 일어났던 지속적인 하강곡선을 반전 없이 이어갔다. 극장수, 제작편수, 총관객수 모두 줄어들었고 총 91편의 영화가 만들어졌다.-10,11쪽

1981년. 이른바 체육관 선거를 통해 90.2 %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 정권은 서울/올림픽 유치에 성공하고 기세등등했다. 그 기세를 몰아 '유사 이래 가장 거대한 놀자판' 국풍 81로 대중 조작 이벤트를 시작한 정권은 3S정책을 1980년대 문화정책으로 내놓는다. '문화'정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저급한 이 정책 아닌 정책은 영화를 비롯한 1980년대 문화 전반을 꿰는 용어가 되었다. -14,15쪽

(1984년) 이 해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제작의 전반적인 특징은 1980년대 내내 양산된 소프트 포르노그래피 영화들이 장르의 폭을 점점 좁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멜로드라마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사실은 자극적인 정사 신을 어디에 몇 개나 포함시킬 것인지에 훨씬 골몰했을 듯한 영화들이 말 그대로 쏟아져 나왔다. / 흥행에서 극단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에로영화들이 그렇게 많이 만들어졌던 것은 다른 장르의 영화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적은 제작비로 흥행 결과에 대한 압박이 적었고, 완성도의 편차는 있지만 한줌의 상상력도 필요치 않은 천편일률적인 서사를 반복하는 제작의 용이성 덕분이었을 것이다. -25,26쪽

1988년. 집회시위를 규제하는 올림픽 평화구역을 선포해 가면서 서울올림픽을 치렀고 이 해 말 제5공화국 청문회를 통해 전두환을 백담사로 보냈다. 그 뜨거웠던 6월항쟁의 성과치고 / 는 그다지 달라진 게 없는 세상이었지만 한국영화계는 그 어느 해보다도 투쟁의 열기를 높여 갔다. 이 해 1월에 미국 직배 영화사 uip의 국내 영업이 허가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인들의 uip 저지투쟁은 치열했지만 대세를 바꿀 수는 없었다. uip는 업계 관행을 무시해 가며 극장측에 특혜를 제시했고 직배 영화 확보에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극장주들은 극장 방화사건을 사주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 와중에 다국적 비디오회사인 CIC까지 한국시장 공략에 나섰다. 올림픽 특수로 국내 VCR 보급률이 급상승하면서 비디오 시장이 영화 시장을 추월할 것을 예견한 것이다. -34쪽

1980년대 내내 추진되었던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도래는 거의 완성된 듯이 보였다. 얼핏 보기에 한국영화계도 호황을 누리는 듯했다. 한국영화의 제작편수와 외국영화 수입편수, 그리고 / 관객수, 총매출액, 극장수 모두 증가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호황을 누린 것은 직배회사와 영화제작 대신 외화 수입에만 열을 올린 국내 영화사와 극장주뿐 한국영화 관객은 전년도보다 오히려 줄었다. UIP 직배 저지투쟁도 계속되었다. 이 해 321편의 외국영화가 수입되었고 한국영화는 110편이 만들어졌다.역시 가장 많이 만들어진 영화는 에로티시즘을 목적으로 한 멜로드라마였지만 그것도 거의 막바지였다. VCR의 대량 보급에 힘입어 영화관에서 상영되지 않고 곧바로 비디오로 출시되는 16MM 영화들이 본격적으로 제작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수용 환경의 변화가 소프트 포르노영화의 대대적인 양산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지만, 다르게 본다면 긍정적인 측면이 훨씬 많았다. 단순하게 반복 재생산되는 소프트 포르노영화의 제작비를 그 효용의 수준만큼 절감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충무로 안의 자본을 좀 더 효율적으로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들어 내는 데 집-37,38쪽

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대중영화 안에서 성과 육체는 언제나 가장 잘 팔리는 소재였다. 크게는 멜로드라마라고 봐야할, 일반적으로는 성애영화, 에로영화라고 불리는 이 범주의 영화는 1980년대를 통틀어 가장 많이 만들어진 장르이다. 노출의 수위에서 하드코어 포르노그래피와 구별되는 소프트코어 포르노그래피는 주류산업의 구조 안에서는 제작이 불가능한 영화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1980년대 성애영화들을 소프트 포르노그래피라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이겠지만 표현의 수위가 아니라 그 영화의 수용 기제와 기능, 그리고 본질의 차원에서는 포르노그래피와 다르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38,57쪽

1982년 <애마부인>을 기점으로 거의 폭발적으로 제작된 성애영화의 히로인들은 1970년대 호스티스 영화들의 그녀들과는 달랐다. 가난 때문에, 남자 때문에, 범죄에 희생된 탓에, 하는 수 없이 몸을 팔게 되는 수동적인 입장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 때문에 사회의 도덕률을 넘어서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능동적인 욕망의 실천자들이었다. 물론 처벌의 결말을 통해 가부장제와 일부일처제는 여기서도 온전히 작동하지만 말이다. 그 영화들이 지향하는 것은 금기된 욕망을 실천하는 / 그녀들을 음습한 시선으로 훔쳐보는 것이었지 유교적 윤리관을 공격하고 넘어서는 지점에 있지 않았다. 82쪽부터는 유지나, <1990년대 한국영화>라는 글 일부를 옮긴다. -57~58쪽

한국영화는 tv대중화 이전 영화 황금기(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전반)를 구가하다가 정치적/ 상황과 미디어 환경 변화로 침체국면(1970,80년대)을 겪었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를 기점으로 예외적인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다는 진단은 비록 거품론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일단 주목해 볼만한 현상이다. 1990년대 전반 20%내외에 머물던 한국영화의 국내 시장점유율이 제작편수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1998년 24%대로 상승했다가 1999년에는 약38%로 성장했다.또한 1990년대 들어서 <서편제>,<장군의 아들>,<쉬리>로 이어지는 한국영화 신기록 행진은 한국영화(보기)붐으로 이어졌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한국영화라는 추상적 개념에 대한 관객 인식의 역전이다. 과거 외화가 한국영화보다 더 볼 만한 재미있는 영화(구체적으로는 할리우드영화)라는 통념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영화가 외화보다 볼 만하다는 인식의 역전을 이루어 낸 것이다. 그러나 한국영화의 부흥 속에서도 위기론과 거품론이 때때로 제기되기도 했다. 유난히 여관방 정사신이 넘쳐나는 영화들이 많이 나왔던 1997년에는 "상상력과 의식의 빈곤'이란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82~83쪽

1980년대 민주화투쟁 속에서 지지받던 민중이란 집단개념은 1990년대 대중을 대변하는 서민층까지 포괄해 내는 중산층으로 변화된다. 계급성을 봉합해 낸 중상층이란 집단의 전면적 등장, 그 존재감에 대한 적극적인 호명은 1997년 IMF 이전까지 한국사회의 (거품 낀) 풍요를 이끄는 주체이자 선망의 대상으로 작동한다.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는 중산층을 중심에 두고 신세대, 미씨족 등 대중을 지칭하는 온갖 집단들이 소비주체로 호명되고, 대중문화시장이 급팽창한다. 속칭 고급예술을 위에 두고 연예나 딴따라라고 분리되어 상대적으로 폄하되던 분야는 대중문화예술, 연예인으로 재정립된다. 즉, 고급문화의 상대 개념으로서의 대중문화, 민중문화의 대칭 개념으로의 대중문화라는 기존의 인식은 1990년대 들어 물질적 풍요와 탈정치화된 사회분위기 속에서 이전 시대보다 긍정적인 개념으로 등장하게 된다.(중략) 이런 여건 속에서 중산층적 대중추수주의가 영화를 포함한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재정립(중략) 반면에 1980년대로부터 이어지는 본질적이로 거시적인 의제들, 이를테면 민주화과정에서 발생한 광주의 트라우마나 노동운동, 분단 이데올로기에 대한 진지한 -87쪽

모색은 제도권 영화 생산에서 지속성을 담보해 내지 못한 채 실종되어 버리는 현상이 영화산업의 속성이기도 한 대중추수/주의 속에 나타난다. 그것이 자본주의와 결합한 대중문화 상품으로서 제도권 영화의 속성이자 한계라면, 소위 비제도권 영화로 분류되며 1990년대 자신의 길을 개척해 가는 독립영화 속에서 한국사회의 문제적 상황에 대한 사회적 사실주의 정신이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87~88쪽

1992년부터 비디오 판권 선구매로 영화업에 진출한 대기업이 1990년대 중반부터 영화 제작 전액투자로 확대되다가 점차 발을 떼게 되면서 그 빈자리를 금융자본, 투자사들이 차지하게 된다. 대기업 자본의 영화업 진출 초기 충무로 토착자본의 저항과 반대가 있었지만, 비디오 판권, 유통업을 통해 이미 들어온 대기업 진출이 대세가 되어 가면서, 결국 영화 전문성 부족으로 물러날 것이란 낙관적 기대 하에 저항은 수그러든다. 삼성은 삼성영화사업단을 만들어 1994년 본격적으로 영화업에 진출하게 되고, 대우, 현대 등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대기업들이 비디오 유통과 케이블 TV에 진출하면서 영상 콘텐츠 확보 차원에서 경쟁적으로 영화산업 전반에 손을 뻗친다. 서비스업으로 분류되어 금융지원 혜택을 받지 못하던 영화업은 1995년을 기점으로 준제조업으로 분류되어 창업투자사를 비롯한 금융자본이 투자될 수 있는 법적인 여건을 마련하면서 다양한 제작사들이 다양한 자본주의 후원으로 하나둘씩 설립된다. 제작사들의 백가쟁명시대가 열린 것이다. -91쪽

그러나 영화를 교두보로 한 대기업 자본의 영상업 전반에 투자가 확대될 무렵인 1997년 IMF체제가 닥쳤다. 이에 대기업들은 영상산업 진출에 예상만큼의 수익을 거두지 못한 데다, 경제 위기의 원인 중 대기업의 문어발식 백화점 경영이 문제가 되자 발 빠르게 영화업으로부터 물러나게 되고, 그 빈자리를 금융자본과 결합한 투자사들이 충무로의 가장 강력한 자본주로 들어서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기업 자본이 빠져나간 공백은 컸으며, 한국영화 제작편수는 급감한다. 바로 이 미묘하고 위험한 시기에 등장한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화정권인 김대중 정부는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 획기적인 영화 지원정책을 골자로 한 영화진흥법 개정을 하게 된다. -91쪽

한국영화산업과 정책 : 1980~1997, 조준형의 글 일부를 옮겨본다 / 1980년 이후 1990년대 후반까지 한국영화산업과 정책은 이전 어떤 시기와도 비교할 수 없는 급격한 변화를 겪어 왔다. 이와 같은 변화의 시작은 제5차 개정영화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84년 12월에 개정되어 이듬해 7월부터 시행된 제5차 개정영화법은 1962년 영화법이 제정된 이후 20여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박정희 정권기의 영화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주지하다시피 박정희 정권기 영화정책의 근간은 제작-수입의 일원화, 제작사 허가제를 통한 메이저화 정책, 외화 수입의 통제 등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정책의 실효성을 담보했던 것이 외화수입쿼터였다. 요컨대 박정희 정권의 영화정책 핵심은 할리우드나 일본과 같이 한국에서도 메이저 영화사를 양성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재원 조달과 특혜의 수단으로 외화수입쿼터를 부여했던 것이다. 이는 물론 정권의 입맛에 맞는 영화 제작을 유도하고자 하는 정책적 수단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기 영화정책, 특히 산업정책은 종국적으로 실패하였다. 무엇보다 표현의 자유를 생명으로 하는 문-144쪽

화산업에서 그 입을 틀어막고 자본을 투입하지 않은 채 편의적인 외화수입쿼터 부여로 한국영화산업을 육성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모순적인 것이었다. 이와 같은 영화산업 정책의 실패와 텔레비전의 등장이 겹치면서 한국영화산업은 1970년대 이후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제5차 개정영화법은 제작과 수입업을 자유화함으로써 영화 제작과 수입을 소수의 회사들이 담당하던 독점체제를 무너뜨림과 동시에 외화 수입을 자유화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담고 있었다./ 제작과 수입업의 자유화는 많은 영화인들의 바람이었지만, 외화 수입의 자유화는 오랜 불황으로 제작 능력이 감퇴되어 온 한국영화 제작 부문에 있어서는 커다란 타격을 줄 수 있는 조치이기도 하였다. 어쨌든 이와 같은 제5차 개정영화법의 자유화 조치로 인해 한국영화산업에 완전 경쟁의 풍토가 도입되었고, 이후 한국영화산업은 급격한 변화와 혼란의 시기를 겪게 된다. -144쪽

1970년대 이후 1980년대까지 영화산업 쇠퇴의 주요 원인으로 대략 세 가지가 거론될 수 있었을 것이다. 첫째는 TV의 광범위한 보급으로 인한 영화 관객의 축소였다. 이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는데, 다만 한국의 경우 미국이나 유럽,일본에 비하여 TV쇼크가 다소 늦게 도착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둘째는 검열의 강화로 인한 표현의 자유의 축소 경향이었다. 1972년 유신을 정점으로 한국영화의 표현의 자유는 극도로 축소되었고, 한국영화는 현실의 어느 곳에도 발을 붙이지 못하고 현실성이 증발된 기이한 판타지 공간으로 도피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셋째는 박정희 정권의 영화정책 실패의 후유증이었다. 소위 메이저 기업화 정책은 이미 1960년대 중후반에 그 파탄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권은 그 정책적 기조를 1970년대까지 이어나갔다. 이에따라 제작과 수입 등 영화 공급 부문은 소수의 영화사들에 의해 독점화되었으며, 한국영화의 제작은 점점 더 외화수입쿼터를 따기 위한 들러리에 지나지 않게 된다. 1970년대 한국영화산업의 비극은 이와 같은 개별적인 요인들이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147쪽

어 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TV의 보급에 영화가 대응하는 방식은 대형화(스펙터클), 표현 강도의 강화(폭력, 섹스)등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영화산업은 대형화의 길을 택하기에는 자본력이 부족했고, 표현 강도를 강화하기에는 검열의 수위가 장애가 되었다.-147쪽

일제시대 이후 군사정권을 거치는 동안 거의 1970~80년의 기간 동안 영화는 산업이라기보다 대중적 영향력이 큰 이데올로기 통제수단으로 취급되었다. 산업적 지원책이나 정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정책들은 빈번하게 이데올로기 정책(검열, 제작에 대한 간섭, 광고나 상영에 대한 단속 등)과 모순을 일으켰다. 이러한 모순이 한국영화산업의 산업화 혹은 근대화를 지연시켰으며, 1970년대 한국영화산업의 몰락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에 들어서면서 영화는 점점 이데올로기 통제 대상에서 부가가치 창출과 자본 재생산을 위한 본격적인 의미의 산업으로 자리매김한다. -183쪽

1990년 초를 전후한 대기업의 영화산업 진출에는 몇 가지 배경이 존재한다.첫째, 비디오 유통에서의 직배의 영향이다. 삼성,대우,엘지 등의 가전 3사는 한국에서 VCR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1980년대 중반부터 비디오 프로그램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영화산업에 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1991년을 기점으로 비디오 시장에까지 할리우드 영화사들의 직접배급이 시작되자 대기업들의 프로그램들은 총체적인 어려움에 직면한다. 대형 흥행작들은 직배사의 수중에 있었고, 직배를 거치지 않은 흥행작의 경우 국내 기업들 간의 경쟁으로 몇만 달러 수준이던 판권료가 몇십만 달러로 뛰어올랐다. 뿐만 아니라 대안으로 떠오른 한국영화의 판권료 또한 수억 원에 이르게 되었다(권미정,<90년대 한국영화의 제작방식 연구: 자본과 인력의 변화, 그 영향을 중심으로). 당시 한국영화의 평균 제작비가 5~6억원 선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제작비에 육박하는 금액을 비디오 판권료로 지불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대기업으로 하여금 직접적인 영화 제작에 참여하도록 만들었다. -184쪽

문재철- <1980년대 이후의 영화비평과 이론의 흐름> 중 일부를 옮겨본다 / 제5,6 공화국으로 대표되는 정치적 억압, 그리고 그 배후에 놓여 있던 계급과 민족모순, 그리고 무엇보다 변혁의 주체로서 민중에 대한 자각은 개인적 울분의 형태로 진행되었던 1970년대까지의 낭만적 저항에서 벗어나 영화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을 강조하면서 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저항을 가능케 했다. 더 나아가 문화적 차원에서 볼 때, 문화적 자유화에 따라 외국영화가 범람/하고 UIP 직배 등으로 대변되는 미국의 신식민주의적 통제가 노골화된 시기이지만 동시에 탈식민지적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문화적 정체성을 본격적으로 탐색했던 때이기도 하다.-208~209쪽

1980년대 초반의 상황을 맥락화하자면 두 가지가 지적될 수 있겠다. 하나는 기존 충무로 시스템으로 대변되는 한국영화의 상업주의와 값싼 대중영합주의에 대한 비평적 개입의 문제다. 물론 영화비평계에서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1950년대 후반 이래 지속되어 왔었는데 1980년대를 시작하는 시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였다. 다시 말해 한국영화의 전근대성을 어떻게 비평적으로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는 한국영화비평의 오랜 숙원이었고 1980년대 영화비평이 해결해야 할 역사적 유산이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영화의 사회적 역할과 관련된 것이었다. 물론 이 역시 기존 리얼리즘 비평의 문제의식이긴 했다. 하지만 이영일을 위시한 우파 민족주의 비평계열이/보여 주던 관념적 리얼리즘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고 어떤 식으로든 한국영화의 변화를 위해선 해결해야 할 시급한 당면 과제였다. -209~210쪽

김종원이 말한 '이제부터'가 1980년대라면 그 주역은 기존의 학자나 평론가가 아닌 새로운 세대들이었다. 이 새로운 세대는 대학 내 영화서클을 중심으로 한 젊은 시네필들로 영화에 대한 순수한 애정에서 출발하였다는 점에서 기존 충무로를 중심으로 한 영화계가 지니지 못한 열정과 에너지를 지니고 있었다. 물론 시네필의 활동은 이미 유신 말기 때부터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오고 있었는데, 1977년 프랑스문화원에서 만들어진 '씨네클럽'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영화예술의 공간을 조성한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시네클럽'은 매주 영화감상과 토론의 시간을 열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대학 내 소모임으로 동호회가 결성되고 영화감상과 토론은 물론 초보적이기는 하나 8MM단편영화를 제작하면서 영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나갔다. 이 시기 씨네필들이 지니는 한국영화사적 의미는 각별하다. 열혈 영화광은 늘 존재했지만, 본격적인 의미에서 씨네필들이 왕성한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특히 이들은 집단을 이루고 나름의 통일된 목소리는 내는 등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과거의 씨네-212쪽

필들과는 달랐다. 이러한 씨네필들의 활동은 향후 1990년대를 거치면서 예컨대 문화학교 서울과 같은 형태의 예술영화 보기 운동으로 이어지면서 오늘날 시네마테크의 뿌리를 형성했다.-212쪽

가령, 199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시작된 대기업 자본과 그 이후 금융자본의 유입, 기획영화의 등장, 마케팅의 부각 등은 영화를 보다 산업적 틀 속에서 정의하게 했다. 더군다나 감독들 역시 서사적 상상력보다는 이미지의 매력에 집착하고 리얼리즘 영화보다는 장르영화에 치중하는 등 이전 세대와 확연히 구분되는 영화적 상상력을 보여 주었다. 게다가 수용문화 또한 변화했다. 관객들의 시각적 해독 능력은 과거에 비해 탁월해졌고, 여기에다 비디오, 텔레비전, 컴퓨터 등등의 시각적 매체는 영화 이미지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바꿔 놓았다. 소위 영상세대의 관객이 출현한 것이다. 그리고 1995년 부산영화제의 시작은 이후의 시기를 영화제의 시대라 할 정도로 영화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보다 강력하게 이끌어 내면서 한국영화를 글로벌 프레임 속에서 사고하게 해 주었다.-235쪽

이전까지의 시대가 전문적 소수가 주도하면서 비평의 공간을 채워 갔다면 이 시기에 이르러 가장 큰 변화는 관객들의 참여와 목소리가 커졌다는 것이다. 관객들이 영화를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존재에서 영화적 의미 생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주체로 거듭나게 된 것은 물론 영화를 비롯한 영상예술에 대한 사회문화적 관심이 증가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이른바 영상시대의 도래로, 영화를 일종의 차세대 중요산업으로 보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이제 영화는 단순히 보고 즐기는 것이 아닌, 새로운 문화적 자본으로서 기능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백두대간'과 같은 영화수입사의 예술영화 상영, '하이퍼텍 나다'등의 예술영화전용관, 문화학교 서울 등을 중심으로 시작된 예술영화 감상과 수용자 운동, 그리고 급기야는 시네마테크 설립('서울 시네마테크')에 힘입어 전문 비평가들만의 전유물에 가깝던 고급 예술영화가 대중들과 만나기 시작했다. 이는 관객 대중들의 영화 독해능력을 향상시킴과 아울러 영화에 대한 대중적 관심의 질적 변화를 이끌어 냈다. 기존의 영화비평이 지식과 정보의 소유를 통해 자신들을 대중과 차별화하고 있었다면 이제 비평의 영-238쪽

역은, 특히 저널비평의 영역은 대중들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많이 소유하게 되고 여러 가지 공간을 통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게 됨에 따라 질적인 변화를 갖게 되었다./이 당시 주간평론지 출간 붐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들이다. 물론 이는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1990년대 이후 소위 문화의 폭발과 연관해 이해할 수 있는 사안이기도 하다. 문화담론의 확산은 대중성의 확대에 편승했다. 1993년을 전후로 각 신문의 문화면이 양적으로 증가하였으며, 특히 한겨레신문의 문화 관련 칼럼 등이 저널리즘이라는 한계 속에서 영화비평의 대중화를 선도하였다. 특히 한겨레신문의 영화평은 신세대 젊은이들에 어필함으로써 문화적 담론의 대중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다.이는 씨네21의 창가으로 이어지면서 한국영화 저널지평담론의 큰 흐름을 주도하게 된다.-238쪽

이미 1980년대를 거치면서 다양한 형태의 대중문화가 자리잡아 가고 있었고 특히 소비문화와 결합된 문화산업은 상당한 대중적 기반을 획득하고있었다. 이와 같은 흐름이 사회과학의 몰락과 더불어 급상승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영화 연구는 자의든 타의든 문화 연구라는 보다 넓은 장 속에 자리매김 되기에 이른다. 이제 영화가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여겨지게 됨에 따라 영화는 질문의 최종적 목표가 아니라 재현과정의 일부로 간주되게 되었다. 그리고 영화를 하나의 문화적 과정으로 보게 됨에 따라 영화는 자기 완결적이고 동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계급, 인종, 성, 민족 등과 같은 사회적 분할에 따라 일상적 가치와 의미가 충돌하고 상호 작용하는 장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 결과 작가영화 대 대중영화, 대안영화 대 주류영화, 예술영화 대 할리우드 영화라는 이분법적 대당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이전의 영화비평이 보여 주던 정치적으로 경직된 측면도 완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중영화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터전과 대안적인 독법이 적극 논의되게 되었다.-242쪽

하지만 문화 연구의 도입이 영화 연구의 이론적 사유 방식이나 방법론과 관련하여 꼭 긍정적/인 영향만을 준 것은 아니었다. 개별 텍스트의 미학적 특징보다는 의사소통의 과정과 맥락에 더 집착한다는 점에서 영화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라 할 수 있는 영화적 특수성의 문제를 간과하는 한계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 의미화, 약호, 위치, 무의식, 이데올로기, 권력 등을 강조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미학을 불신하는 경향이 나타났다.-242~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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