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비디오를 위한 변명
유정서 지음 / 도서출판 동재 / 2003년 7월
품절


우리나라 비디오 소프트웨어 산업의 역사는 80년대 초중반을 기점으로 지금까지 대략 20여년의 연륜을 쌓아 왔다. 80년대 후반, 하드웨어의 급속한 보급을 배경으로 90년대 초 중반에 이르러 최고의 호황을 누렸으나 대여시스템에 편중된 시장구조의 근본적 한계와 누적된 모순의 드러남, 그리고 뉴 미디어의 거센 도전으로 90년대 후반부터 심각한 전환기를 맞게 된다. -239쪽

"영화와 비디오는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새삼스럽게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일이 왜 중요한가라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영화보다 한 수 아래의 영상매체 쯤으로 간단하게 대답하려 드는 사람도 적지 않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실제로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하며 대답 또한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이 질문에 정확하게 답하지 못하는 한 영화와 비디오는 항상 혼돈되는 매체이거나 아니면 영화보다 한결 뒤떨어지는 매체라는 편견에서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이다.실제로 비디오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적지 아니 왜곡되어 있는 것도 어쩌면 비디오 산업에 종사하는 주체들이 이런 근본적인 문제들을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생각해온 탓도 없지 않다. -240쪽

비디오를 많이 보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겠지만, 고객들은 꼭 시간을 내서 극장에서 봐야 할 영화와 시간 날 때 비디오로 감상해야 할 영화를 따로 구분할 줄 안다. 또한 와이드 스크린과 화려한 사운드가 받쳐줄 때는 더없이 감동스러웠던 영화가 비디오로 보았을 때는 도무지 뭐하는 영화인지 모르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리고 극장에사 20만 정도의 관객이 든 영화는 대단하게 생각하면서도 대여점을 통해 40~50만은 족히 보았을 B급 액션영화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한마디로 좋은 영화와 잘 나가는 비디오라는 등식은 언제나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영화를 아무런 고려사항 없이 오직 미학적인 관점에서 평하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비디오는 그런 식으로만 얘기되어서는 안되는 매체다. -241쪽

80년대 초부터 비디오 시장이 급격히 커지기 시작하자 한 때 영화의 사양화를 우려하는 소리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왔듯이 비디오의 성장은 영화시장을 결코 잠식하지 않았으며 우리나라의 경우는 오히려 영화가 비디오 시장에 적지 않은 신세를 졌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중략) 영화가 후발 미디어의 도전을 거뜬히 극복하고 공존의 길을 성공적으로 걸어온 데 비해 비디오의 현실은 적지 아니 우려스런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비디오는 영화처럼 1차 저작물의 가치를 지니지 못해 상품가치가 한정되어 있는데다 시장의 주체들은 이들 뉴미디어와 구분되는 비디오만의 고유영역을 개발하고 개척하는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어보이기 때문이다. / 비디오의 고유 기능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건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영화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매스 미디어적 예술이고 인터넷이 특정 개인을 상대로 한 퍼스날 미디어라면 비디오는 '홈비디오'라는 말이 상정하듯 가정에서 온 가족이 함께 향유하는 홈미디어인 셈이다. 문제는 이런 고유영역을 가꾸려는 노력이 얼마나 경주되고 있는가-244~245쪽

비디오 감상 인구는 조금씩만 늘고 있는데도 마진을 무시하고 재벌기업 특유의 마켓 쉐어 위주의 마케팅으로 시장 규모만 늘려놓은 메이저 제작사의 전철이나, 장사가 조금 된다니까 영상소프트웨어의 상품적 특성을 무시하고 우후죽순격으로 난립했던 대여점의 마인드, 더 나아가 대여점의 사활이 제작사나 유통사의 이익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식의 근시안적인 영업관행은 이제 더 이상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250쪽

국내제작 성인비디오는 1980년도 말 처음 선을 보인 이래 작품의 수준이 조악하고 저급하다는 주류문화권의 비판에 시달리면서도 우리나라 비디오 시장의 유일한 틈새시장을 형성해왔다. 특히 최근 몇 년간은 성인비디오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지면서 충무로에서 활동했던 중견감독이나 재능있는 신인들이 대거 제작에 참여하고 출연배우의 수준도 대폭 높아지면서 질과 양적인 면에서 상당 수준의 성장세를 보여왔다. -252쪽

성인비디오의 숨통을 수시로 죄어버리는 당국의 명분은 대체로 추상적이기 이를데 없는 미풍양속의 저해라든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청소년보호 정도다. 우선 오늘날과 같이 다양한 개성이 존중되는 사회에서 자의적으로 해석되기 쉬운 미풍양속과 같은 모호한 잣대를 들이대는게 과연 합리적인가 하는 의구심을 지우기 어렵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비디오 하나만 잡으면 마치 그 미풍양속이라는 것이 저절로 확립되는 듯이 유독 비디오에만 민감한 심의당국의 일방적 태도다.-253쪽

비디오 대여점의 수익구조는 다음 세가지 요소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된다. 테이프 구매비, 회전률, 그리고 대여료가 바로 그것이다. 예로 들어 테이프의 구매비는 저렴하고 회전률과 대여료가 높을 때, 대여점은 최고의 수익은 보장받을 수 있다. 반면 대여점이 가정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테이프의 구매비는 높고 회전률은 저조하며 대여료는 낮을 때이다.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이런 상황이 최근 비디오 대여점이 처한 현실일 것이다. -258쪽

현재 비디오 테이프의 가격은 한마디로 '흥행 가능성'이 얼마나 높으냐에 따라 차등 적용되고 있다. 엔터테인먼트 상품의 속성에 비춰 흥행성이란 얼핏 타당성 있는 기준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현실적으로 그 기준은 이른바 개봉작이냐 아니냐로 도식화되는 모순을 가져왔다. 관객에게 선보일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상 상품이 흥행 여부를 떠나 개봉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거니와 이왕 만들어진 영화를 극장에 거는 일 또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마디로 개봉 여부는 영상물의 질을 결정하는 적합한 기준이 전혀 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모순된 기준이 적용되면서 비개봉작의 출시 빈도는 점점 줄어드는 대신, 흥행 여부는 안중에도 없이 오직 비디오 가격을 높이기 위해 억지 개봉하는 무늬만 개봉작들이 늘어나 사실상 비디오 테이프의 가격이 전체적으로 인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런 황당한 결과는 테이프 가격에 대한 불만을 초래해 비디오 시장의 테두리 안에서 함께 공존해야 할 대여점과 출시사 간에 불신의 벽만 높여 놓는데 한몫을 했다. -259쪽

한편 대여료 문제도 현재의 비디오 대여점을 곤혹스럽게 하는 커다란 요인 중의 하나다. 테이프의 구매가와 평균 회전률에 훨씬 못미치는 대여료가 일반화된데는 일부 몰지각한 대여점의 대여료 덤핑 공세가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사실 회전 수명이 다해 속된말로 이미 본전을 뽑은 프로는 단돈 100원을 받아도 이익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얼핏 그럴싸해 보이는 이같은 발상 역시 일반 생필품과 문화상품의 속성을 구/ 분하지 못한 어처구니 없는 단견에 지나지 않는다. 화장지나 비누처럼 사 두기만 하면 어차피 소비하게 될 생필품은 가격만 싸다면 당장 필요하지 않아도 일단 구매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상 상품이란 재미가 없으면 싸다 못해 거저 주어도 시간이 아까워 안보게 되어있다. 결국 구프로라는 미명하에 턱없이 책정된 대여료는 비디오라는 상품에 대한 이미지를 싸구려화시켜 멀쩡한 신프로의 가격까지 덩달아 낮추어야 하는 출혈을 초래한 것이다. -259쪽

비디오 산업 침체의 원인에 관한 한 그의 해답은 의외로 명백하고 간단하다. 바로 비디오 대여점의 몰락인 것이다. 대여 위주로 형성된 우리나라 비디오 시장에서 대여점은 필연적으로 상품의 사실상 최종 소비자 간주돼 왔다. 이를테면 렌탈용 비디오를 제작, 출시하고 유통하는 제작사나 유통사가 얻는 모든 수익은 대여점이 상품을 구매하는데서 시작되고 끝나는 구조라는 이야기다. -261쪽

영상 소프트웨어 산업의 특징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절묘한 균형 속에서 성장 및 답보 상황이 결정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최근 급속한 성장을 보이고 있는 게임산업이나 인터넷 산업은 궁극적으로 pC라는 하드웨어의 급속한 보급을 전제로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비디오 소프트웨어 산업 역시 88올림픽을 분수령으로 한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의 급속한 하드웨어(VCR)의 보급을 배경으로 급격한 성장세를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느 누가 VCR 한 대를 구입했다면 그것은 곧 소프트웨어 소비자의 자연적 증가를 의미한다. 더욱이 하드웨어의 보급률이 소프트웨어의 보급률을 앞지르는 상황이라면 소비자들은 상품/의 질에 대해서도 거의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당연히 별다른 판촉활동이 없어도 프로를 출시만 하면 나가게 되어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외국 직배사들이 속속 상륙하고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너도나도 비디오 소프트웨어 산업에 뛰어들고, 비디오 대여점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나던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의 상황이었다. -267~268쪽

사실 비디오 산업의 초창기인 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비디오는 그 자체가 놀랍고 충격적인 뉴미디어였다. 영화의 위기론까지 거론될 만큼 그 파급력은 참으로 위력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첨단 기술을 등에 업은 미디어 산업의 눈부신 발달로 새롭고 경이로운 매체들이 속속 등장하는 동안 이제는 아무도 비디오를 놀랍거나 새로운 미디어로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말하면 매체 자체의 신선도가 많이 약화된 것이다.-268쪽

결론적으로 이제 비디오 대여점은 단순히 비디오에만 대여해 주는 소극적 의미의 '가게'라는 의식에서 스스로 벗어나 영화를 비롯한 영상 소프트웨어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마케팅이 펼쳐지는 영상소프트웨어 사업 하나임을 인식하고 그 지역에서 가장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종합 영상문화공간으로 변해야 한다. -272쪽

제1기(맹아기): 80년대 초 비디오라는 매체가 이땅에 처음 보급되기 시작한 시기다. 새로운 매체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으므로 보급 속도는 비교적 빨랐으나 소프트웨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탓에 불법 복제물들이 기승을 부렸고 포르노 테잎과 같은 유해한 영상물도 많이 나돌았다. 이런 상황에서 형성된 비디오에 대한 부정적 편견은 매우 오랜 기간동안 비디오 시장에 악영향을 미쳤다. -274쪽

제2기(정착기):80년대 중후반 우리나라 비디오 시장의 기본 구조가 형성된 시기다. 하드웨어의 보급 속도가 빨라지면서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전문 소프트웨어 제작사들이 속속 생겨났고 이른바 '종합대리점'을 중심으로 한 초기 유통 시스템이 형성, 정착되었다. 비디오 대여점의 숫자도 급격히 늘어나 대여중심의 시장구조가 확립되었다. -274~275쪽

제3기(확대기):80년대 후반~90년대 초 대기업과 외국직배사의 상륙 등으로 비디오 시장의 규모가 급격하게 신장된 시기다. 특히 1998년의 서울 올림픽은 하드웨어가 급속하게 보급된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소프트웨어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자 국내 대기업과 외국 직배사가 속속 소프트웨어 시장에 뛰어들어 비디오 시장의 규모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대여점의 숫자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외형적으로는 최대의 호황기였지만, 이미 이 무렵부터 시장 구조를 왜곡시킬 수 있는 여러 가지 모순들이 누적되고 있었다. -275쪽

제4기(전환기):90년대 초 중반 대기업과 직배사의 약진으로 초기의 시장구조가 일대 변화를 맞이한 시기다. 거대 자본으로 무장한 국내 재벌 기업들이 속속 시장에 진출하고 양질의 소프트웨어를 무한정으로 확보한 외국 직배사가 연이어 상륙함으로써 중소기업 중심의 출시 구조, 종합도매상 중심의 유통 구조로 구축된 초기의 시장의 구조가 심각한 변화를 맞이한다. 시장의 주축을 이루던 중소 제작사들이 몰락하고 대기업과 직배사가 약진하는 한편 유통구조는 대기업 직관 시스템과 기존의 종합 도매상 체제로 양분된다. -275쪽

제5기(과도기): 90년대 중후반~2000년 현재 90년대 초기부터 누적되기 시작한 여러 가지 모순들이 한꺼번에 드러나며 총체적인 위기를 맞은 시기다. 판권료의 급등과 판매실적의 부진으로 악전 고투하던 대기업들은 IMF 위기를 맞아 거의 와해 위기에 처한 반면, 판권료의 부담이 없는데다 자체 유통라인을 유지하지 않아도 되는 외국 직배사의 시장지배구도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 와중에서 국내 메이저 출시사들은 사업 자체를 포기하거나 분사, 합병 등으로 활로를 모색하는 한편, 외국 직배사의 유통 대행사로 전락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불황의 골이 깊어지면서 대여점의 숫자도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했다. 전성기 때 4만여를 헤아리던 대여점이 이 무렵에는 1만여개 선으로 줄어든 것으로 집계 되었다.-2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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