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혁명의 시대
이해영 엮음 / 새로운세상 / 1999년 12월
품절


신현준, <1980년대 문화적 정세와 민중문화운동> 중 일부를 옮겨본다.

80년대 한국 사회를 치열하게 살아가려고 한(모두가 실제 치열하게 살았는가는 다른 문제다) 사람들에게 문화는 중요한 주제가 아니었다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어떤 정치적 입장을 선택했다고 해도 문화는 정치나 경제에 비해 우선순위 면에서 밀려나 있었다. 그 이유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지배세력이든 저항세력이든 중도세력이든 80년대의 절박한 상황은 여유로워 보이는 문화라는 단어와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214쪽

1980년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개정된 제5공화국 헌법은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제8조)라고 적혀 있으며, 이를 대통령의 취임선서에까지 다짐하도록 규정했다(제44조). 또한 교육혁신과 문화창달은 80년대 4대 국정지표의 하나로 지정되었다. 이런 전통문화의 계승과 민족문화의 창달이라는 목표는 60~70년대 박정희 정권에 의해 확립된 것과 크게 다른 것이 아니다. 당시의 정권은 80년대의 문화정책을 '새문화정책'이라고 불렀지만 새로운 정책은 목표와 집행 양면에서 70년대의 연장이었다. 정책의 목표면에서는 민족 문화의 창달이라는 기치 아래 각종 관변인물에 대한 지원과 관변행사의 주최가 계속되었다. 집행 면에서는 관 주도의 각종 행사와 각종 윤리위원회의 검열이 지속되었다.-220쪽

70년대의 문화정책이 주로 전문/예술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면, 80년대는 정책의 대상을 전문 문화예술인부터 국민 전체로 확대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대중문화가 퇴폐화, 낭비화되었고 세대 간, 지역 간 문화갈등이 심화되었다"는 나름의 현실 인식에 기초한 것이었다. 여기에 기초하여 국민정신개혁운동이라는 이름의 정화운동이 전개되었고, 국민의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대중문화의 형식에 대한 관심이 기울여졌다. 즉, 정책의 외연이 이전 시기보다 확대된 것이다. -220~221쪽

둘째로 정책 대상의 변화는 정책 방향의 변화를 수반했다. 그것은 퇴폐적, 향락적, 외래적이라고 간주된 대중문화에 대한 규제가 육성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완화의 대상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대중문화를 억압 일변도로 다스릴 수 없다는 현실 인식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컬러TV의 조기방영, 프로스포츠의 확대, 영화검열(및 극장 설립규정)의 완화 등의 현안들은 모두 범국민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들이었다.이는 또한 좁은 의미에서 문화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국민의 일살적 생활양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러 조치들을 낳았다. 몇 가지 예만 들어도 통행금지 해제, 중고생 교복자율화, 대학로의 개장 같은 현상들은 80년대 대중의 삶이 70년대와 크게 달라지는 영향을 미쳤다.-221쪽

한마디로 80년대의 문화정책은 대중문화를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 방향은 대체로 규제완화의 방향을 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규제완화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가라는 점이다. 먼저 지적할 것은 대중문화에 대한 규제완화가 선별적이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한 예로 영화검열 완화의 경우 주로 저급한 영화에만 선별적으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즉 불온한 문화의 금지는 여전했고 1981~83년 사이에는 이전보/다더욱 강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불온한 반대자들이 3S정책이라고 불렀던 표현은 당시 정책의 새로운 기조를 말해 준다. 70년대 문화정책이 원칙적으로 외래 퇴폐문화를 금지하면서 실제로는 모든 문화에 대한 규제를 단행했던 반면, 80년대는 퇴폐문화에 대한 선별적 해금을 실시하면서 이런 조치가 체제와 그리 불편하지 않게 어울리도록 관리하는 양상을 취했다. 즉, 정책담당자가 보기에 퇴폐적이지만 별달리 위협적이지 않은 한도 내에서는 방치힌다는 것이 당시 문화정책의 이데올로기로 보인다. 70년대와 비교한다면 정책의 지배적 원리가 금지의 논리에서 방치의 논리로 전화한 것이다.-221~222쪽

따라서 정책의 성과가 그다지 문화적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단적인 예로 앞서 언급한 국풍81의 경우 탈품과 그룹사운드 공연이 한자리에서 치러지고 민속놀이 줄다리기와 스케이트보드가 같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광경이 연출되었다. 행사의 내용이 다양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는 아닐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런 형식의 다양성 사이에 어떤 일관성을 형성하려는 노력이 부재했다는 점이다. 국풍 81을비롯한 관제행사들은 새로운 문화적 모델을 제공하지 못했다. 이를 통해 문화의 탈정치화를 통한 정치적 이용이라는 80년대 문화정책의 기조가 형성되었다는 성과를 빼면 말이다. -222쪽

급속한 산업화와 경제성장으로 인해 TV, 라디오, 오디오(80년대 후반부터는 VTR) 등의 전자 미디어의 보급률은 100%에 육박하였고 정부는 앞서 본 언론 및 방송 통폐합을 통해 이들 매스 미디어를 완벽하게 통제하였다. 아이러닉한 것은 각종 규제와 억압이 온존되는 상황에서 대중문화는 이전과 달리 화려하고 컬러풀해졌다는 점이다. 컬러/TV의 조기방영과 연예인 두발 규제의 완화와 더불어 영 일레븐, 젊음의 행진 같은 청소년용 오락 프로그램이 성행하였다. 또한 극장 설립과 영화 검열의 완화에 따라 에로 영화 등 저질 음란물에 가까운 외국 영화들이 다소의 가위질만을 거친 채 허용되었고 FM방송을 통한 영미 중심의 팝 음악의 조류들도 이전 시기에 비해 시차를 현격히 줄이면서 소개되었다.-234쪽

80년대 한국의 대중문화는 상업적 성격과 청소년 지향적 성격을 동시에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달리 말한다면 80년대에 10대 시절을 시작한 세대, 흔히 영상 세대라고 불리는 세대는 대중문화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감성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80년대의 대중문화 대 민중문화의 구도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이 대립구도는 상업문화 대 비상업적 문화라는 일반적 대립 구도 가운데 10대 문화 대 대학생 문화라는 특수한 대립을 내포하고 있다. 이때 대학생이란 대학에 실제로 다니는 사람이라는 의미보다는 대학생 연령의 세대라는 뜻에 가깝다. 쉽게 말해서 대학생이 되어서도 대중문화를 즐기는 사람은 10대 사춘기 시절의 경험에 고착된 철들지 않은 사람이라는 평을 받아야 했다. -235쪽

대중문화에 대한 정부의 통제는 완벽할 수 없고 그 틈새에서는 무엇으로 개념화하기 힘든 현상이 발생했다. 그 대표적인 것은 매니아 문화의 확산이/다. 이는 대중문화를 일회적 오락의 차원에서 즐기는 것이 아니라 심미적 감상의 수단으로 삼는 현상을 말한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극히 일부 계층에서 60년대부터 시작되었지만 80년대는 이런 현상이 일반 청소년층까지 확대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 대상으로는 영화나 대중음악 같은 오래된 대중문화의 형식뿐만 아니라 만화, 애니메이션, 컴퓨터 게임 같은 새로운 형식들도 포함되었다. -235~236쪽

적어도 80년대 후반 이후 대중문화는 고급문화나 민중문화 같은 외부를 갖지 않는 내재적 장이 되었다. 이는 대중문화를 거부하거나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도 대중문화 내부에서 전개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80년대 말 운동권 출신 노래패(노래를 찾는 사람들, 노래 마을)와 운동권 출신 영화인(박광수, 장선우 등)의 절반의 성공이라는 사건은 대중문화에 대한 시각의 점차적 변화를 가져왔다. -236쪽

80년대 한국에서 대중문화는 한편으로 본격적인 산업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해독할 수 있는 수용자층을 형성하는 과정이었다. 문제는 정부도 재야도 이런 과정을 의식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237쪽

현대의 대중문화는 상업적 매스미디어에 의해 대량으로 전달되고 대량으로 소비되는 문화라는 정의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즉, 대중매체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수준의 미디어가 복합적인 네트워크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문화라는 장은 정치에 일방적으로 종속된 장도 정치가 부재한 장이 아니라 복잡한 방식으로 정치적인 장이라는 주장이 가능하다.-237쪽

대중문화에서 대안을 모색하려고 한다면 대중문화로 오염되지 않은 외부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문화 내부를 경유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를 이른바 비즈니스의 정치라고 부를 수 있다. 즉 대중문화의 정치적 가치는 어떤 비즈니스를 수행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즉, 상업적 비즈니스의 형식을 취하는 실천의 본질적 한계를 미리 경계짓는 것이 아니라 허용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확장시킴으로써 문화정치가 수행된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237쪽

현대의 국민적 대중문화가 산업화 과정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미국화 과정의 산물이기 때문에, 대중문화에서 새로운 대안을 추구한다면 순수한 국민문화의 부활이 아니라 혼성화 과정을 거친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서 미국이란 실제의 미국이 아니라 상징적 미국이며, 따라서 좀 어폐가 있지만 미국 이외의 나라를 포함한 나라의 대중문화도 포함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국민적 대중문화란 탈미국화와 재미국화의 복잡한 과정의 산물이다. -238쪽

80년대 이전부터 추진되었고 변화를 추동한 힘은 한국의 문화산업의 자생적인 성장이라기보다는 대외적 압력의 효과였다. 80년대 후반은 미국의 시장개방 압력이 가시화된 시기였고 태평양을 오가며 실무/협상이 이루어졌다. 80년대 초,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국내의 구조조정을 대체로 완료한 미국은 새롭게 재편된 산업구조에 부응하는 세계 시장의 형성에 나섰는데, 그중에서도 문화산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간주되었다. 시장개방과 관련된 협상들 중에서 문화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분야는 다름아니라 저작권을 비롯한 지적재산권 협상이었다. 1987년 저작권법 개정이 이루어지면서 이제까지 외국의 저작물을 저작권 협약 없이 무단으로 출판했던 관행은 국제법적으로 제재받게 되었다.-238~239쪽

이는 단지 불법복제물의 단속의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였다. 문화는 이제 단지 상품이 아니라 재산 혹은 자본이 되었다. 즉, 문화산업은 재화나 서비스를 판매한 대가로 수입을 획득한 것보다는 재화나 서비스를 사용할 권리를 판매하고 이로부터 일정한 사용료를 수취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의 대외적 압력은 이미 이때부터 문화산업을 비롯한 한국의 산업구조의 전반적 구조조정을 요구하는 문제였다. 1987년의 저작권 협약은 몇 가지 유예조항을 두는 등 제한적이었으므로 이런 변화가 보다 가시화되는 시기는 1996년의 저작권법의 개정을 전후로 하는 90년대 중반이다. 그렇지만 80년대 후반에도 가시적인 제도의 변화가 있었다. 상징적인 변화는 1988년부터 시작된 다국적 문화산업의 한국시장 진출이었다. -239쪽

80년대의 민중문화운동을 논하는 일이 우울한 이유 역시도 그 운동이 어떤 의미에서든 문화의 정치적 사용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모든 사람이 그랬던 것도 아니며, 나름의 객관적 필요성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해도 이런 평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렇다면 문화는 정치로부터 초연해야 하는가. 80년대의 인식은 이런 주장을 부르주아 예술관이라고 불렀고 나는 아직도 여기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그렇지만 원칙적으로만 동의할 뿐이다. 문화와 정치를 분리시켜 사고하는 관습 자체를 탈피할 수는 없었을까. 앞서 지적했듯 문화 내부에서 정치가 전개되고, 이런 정치는 관습적 의미의 정치와 다르다고 사고할수는 없을까. 그렇다면 문제는 문화의 정치적 사용 자체라기보다는 어떤 정치에 어떻게 사용되었는가이고 나아가 정치의 문화적구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추론할 수도 있다. -240쪽

이런 논점들은 80년대에는 토론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건 다행일까./불행일까.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표현은 당시를 살아온 사람의 분열적 의식을 드러내 준다. 그건 참 다행한 일임과 동시에 불행한 일이었다. 외래문화로부터 독립되고 상업적 힘에 오염되지 않은 문화를 건설할 수 있다는 꿈은 불가능하지만 아름다운 꿈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불가능함은 강화되었다. -240쪽

민중문화에 주목했던 80년대의 운동들이 정치적 강령에 대해 조금 유연한 태도를 보일수는 없었을까. 대중문화의 형식들에 대해서도 나름의 문화적 가치를 인정할수는 없었을까. 외래 문화에 대해서도 그 맥락을 통찰하고 보다 여유롭게 수용할 수는 없었을까. 그래서 90년대 이후에는 민중형식에 대한 탐구의 성과를 계승하고, 이를 글로벌한 감각과 결합시킬 수는 없었을/까. 그래서 한국의 대중문화를 일정 수준으로 끌어올려 국민적 독창성과 세계적 보편성을 고루 갖추게 할 수는 없었을까. 자연발생적으로 창조되는 국지적 문화형식들을 존중하고, 이를 보편적으로 전국적인 정치에 일방적으로 종속시키지 않을 수 없었을까, 그럴 수 있었다면 대중문화를 단지 안락한 수단으로 평가절하하지도, 그렇다고 독해와 맹신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았을 것이다. -241~242쪽

대중문화의 윤리는 재미의 윤리다. 80년대의 문화운동이 아직 가치있다면 문화를 윤리의 문제로 사고했다는 점이고, 가치가 없다면 재미의 문제를 사고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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