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 - 제3판 나남신서 410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 나남출판 / 2010년 11월
구판절판


말하는 섹스라는 상징은 우리의 사회를 나타내는 상징의 하나이다. 현장에서 적발되고 심문을 당하며 속박되고 동시에 수다스러운 상태에서 지칠 줄 모르고 대답하는 섹스. 스스로 비가시적이게 될 정도로 충분히 환상적인 어떤 메커니즘이 어느 날 섹스를 사로잡은 것이다. 그 메커니즘은 섹스로 하여금 쾌락과 무의지적인 것, 동의와 심문이 서로 섞이는 상호작용 속에서 자기와 타인들의 진실을 말하게 만든다. -97쪽

권력의 관점에서 분석을 실행하고자 한다면 국가의 주권이나 법의 형태 또는 지배의 전반적 단일성을 애초의 여건으로 상정해서는 안 되는데, 그것들은 오히려 권력의 말단 형태일 뿐이다. 내가 보기에 권력은 우선 작용영역에 내재하고 조직을 구성하는 다수의 세력관계, 끊임없는 투쟁과 대결을 통해 다수의 세력관계를 변화시키고 강화하며 뒤집는 게임, 그러한 세력관계들이 연쇄나 체계를 형성하게끔 서로에게서 찾아내는 거점, 반대로 그러한 세력관계들을 서로 분리시키는 괴리나 모순, 끝으로 세력관계들이 효력을 발생하고 국가 기구, 법의 표명, 사회적 주도권에서 일반적 구상이나 제도적 결정화가 구체화되는 전략으로 이해되어야 할 듯하다.-112쪽

내재성의 규칙 :(전략) 성이 인식의 영역으로 성립된 것은 성을 가능한 대상으로 정립한 권력관계로부터이고, 역으로 권력이 성을 표적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앎의 기법, 담론의 절차가 성을 에워쌀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앎의 기법과 권력의 전략이 제각기 특별한 역할을 맡고 상호간의 차이에 입각하여 서로 연결될지라도, 앎의 기법과 권력의 전략 사이에는 아무런 외재성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권력 -앎의 "국지적 중심"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 예컨대 고해하는 사람과 고해하는 신부 또는 신자와 고해신부 사이의 관계에서 출발할 것인데, 그들 사이의 관계에서 억제해야 할 "육욕"의 영향 아래 갖가지 형태의 담론, 이를테면 자기 성찰, 심문, 고백,해석, 대담은 일종의 끊임없는 왕복 운동 속에서 복종의 형태와 인식의 도식을 전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요람이나 침대 또는 침실에서 아무리 사소한 섹스의 표시일지라도 그것에 관심을 쏟는 부모, 유모, 하인, 교육자, 의사에 의해 교대로 감시당하고 둘러싸이는 어린이의 육체는 특히 18세기부터 권력 -앎의 또 다른 "국지적 중심"이었다. -118쪽

"징수"는 더 이상 권력의 메커니즘의 주된 형태가 아니고, 권력에 복종하는 세력들에 대해 선동, 강화, 통제, 감시, 최대의 이용, 조직화의 기능을 하는 다른 부품들 사이에서 단지 하나의 부품일 경향이 있다. 즉, 세력들을 가로막거나 굴복시키거나 파괴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세력들을 산출하고 증대시키며 정리하게 되어 있는 권력. 그때부터 죽음의 권리는 생명을 관리하는 권력의 요구 쪽으로 옮겨가거나 적어도 그러한 권력의 요구에 기대고 그러한 권력의 요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따르는 경향이 있게 된다. -153쪽

예전에는 이승의 지배자이건 저승의 지배자이건 군주만이 행사할 수 있는 죽음의 권리를 침해하는 방식이기에 범죄였던 자살이 19세기에는 사회학적 분석의 영역으로 들어간 최초의 행위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에 놀랄 이유가 없는데, 생명에 대해 행사되는 권력의 경계와 틈새에서 개인적이고 사적인 죽을 권리가 출현한 것은 자살 덕분이다. 그토록 기이하면서도 그토록 규칙적이고, 발현의 측면에서 그토록 지속적이며 따라서 개인의 특별한 사정이나 사고로는 그다지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그러한 죽으려는 고집은 생명의 관리가 정치권력의 책무로 대두된 사회에 대해 최초로 경악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현상의 하나였다. -155쪽

생명에 대한 권력의 조직화는 육체의 규율과 인구조절이라는 두 가지 극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양면을 지닌, 이를테면 해부학적이고 생물학적이며, 개별화하고 명시하며, 육체의 수행능력 쪽으로 향하고 생명의 과정 쪽으로 눈을 돌리는 그 광범위한 기술체계가 고전주의 시대에 정립되었다는 점에서 이제부터 권력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아마 죽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온통 에워싸는 것이 될 것이다. 최고 권력을 상징하던 죽음의 오랜 지배력은 이제 은밀하게 육체의 경영과 생명의 타산적 관리에 포함된다. 다양한 규율, 가령 초등학교, 중등학교, 병영, 일터가 고전주의 시대에 급속하게 발전한 현상, 또한 정치적 실천과 경제적 관측의 영역에서 출생률, 수명, 공중보건, 주거, 이주의 문제가 대두된 현상,따라서 육체의 제압과 인구의 통제를 획득하기 위한 다수의 다양한 기법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현상, 이러한 현상들을 통해 "생체-권력"의 시대가 열린다.-156쪽

살아가는 행위는 더 이상 죽음의 우연과 숙명성 속에서 때때로 떠오를 뿐인 그 접근 불가능한 기반이 아니라, 앎의 통제와 권력의 개입이 이루어지는 영역으로 어느 정도 넘어가는 것이 된다. 이제 권력은 법적 주체, 즉 권력의 최종적 권한이 죽음인 법적 주체뿐만 아니라 생명체를 다루게 되고, 권력이 생명체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지배력은 생명 자체의 차원에 놓이게 될 것이다. -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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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없는 수단 - 정치에 관한 11개의 노트
조르조 아감벤 지음, 김상운.양창렬 옮김 / 난장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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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들에게는 우리가 [오늘날] 생명vita이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단일한 용어가 없었다. 그들은 의미론적으로나 형태적으로 구분되는 두 용어를 사용했다. 즉, 모든 생명체 (동물, 인간 혹은 신)에 공통되는 살아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표현하는 조에, 한 개인이나 집단에 고유한 살아가는 방식이나 형태를 의미하는 비오스bios. 근대의 언어들에서는 이 대립이 어휘에서 차츰 사라져갔다. -13쪽

인간(역량을 지닌 존재로서의, 다시 말해서 제작할 수도 있고 제작하지 않을 수도 있는,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는, 자신을 잃을 수도 발견할 수도 있는 존재)은 삶이 행복에 부여되어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14쪽

권력체계에서의 의학적-과학적 이데올로기가 결정적인 기능을 차지한다는 사실, 그리고 정치적 통제를 목적으로 과학을 빙자하는 사이비 개념의 사용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 따라 나온다. 즉, 주권자가 각각의 상황에서 삶의 형태에 대해 조작해왔던 벌거벗은 생명의 추출과 똑같은 추출이 오늘날에는 신체, 질병, 건강에 관한 사이비-과학적 표상에 의해, 또한 삶과 개인의 상상력이라는 보다 광범위한 영역을 '의료화'함으로써 대대적이고 일상적으로 실현되고 있다. -19쪽

따라서 권리선언은 신적인 기원을 가진 왕의 주권에서 국민주권으로의 이행이 실현되는 장소로 간주되어야 한다. 선언은 구체제의 붕괴에 뒤이어 나타난 새로운 국가질서에 삶이 편입되도록 보장해줬다. 선언을 통해 신민suddito이 시민cittadino으로 전환됐다는 사실은 출생, 즉 자연적인 벌거벗은 생명 자체가 여기에서 처음으로(이런 전환의 생명정치적 귀결을 우리는 이제야 가늠하기 시작할 수 있다)주권의 직접적인 담지자가 됐음을 의미한다.-31쪽

인민popolo이라는 용어의 정치적 의미에 관한 모든 해석은 이 말이 근대 유럽의 여러 언어에서 언제나 가난한 자, [사회적] 혜택을 받지 못하는 자, 배제된 자를 가리켜왔다는 특이한 사실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즉, 동일한 하나의 용어가 구성적인 주체를 가리키는 동시에, 권리상은 아니더라도 사실상 정치로부터 배제된 계급도 가리키는 것이다. -38쪽

보호검속에서 문제가 된 자유의 '보호'는 아이러니하게도 긴급사태의 특징인 법의 중지로부터의 보호였다. 여기에서 새로운 것은 이제 이 제도가 자신이 근거하는 예외상태에서 이탈해 정상상태에서도 효력을 지닐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수용소란 예외상태가 규칙이 되기 시작할 때 열리는 공간이다. 이 점에서 본질적으로 법질서의 일시적 중지였던 예외상태는 이제 영속적인 공간적 배치를, 즉 그 자체로 정상적인 법질서의 바깥에 항구적으로 머무는 배치를 얻게 된다. -49쪽

그렇기 때문에 수용소에서 저질러진 잔학행위에 관한 올바른 물음은, 다른 인간 존재에게 도대체 어떻게 그처럼 잔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는가라는 위선적인 물음이 아니다. 훨씬 더 정직하고 유용한 물음은, 인간 존재가 어떤 법적 절차와 정치적 장치를 통해서 자신의 권리와 특권을 완전히 빼앗겨버리기에, 더 이상 범죄처럼 보이지 않게 될 정도로 이들에 대해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는 지점(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진정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된다)에 이르게 됐는가를 주의 깊게 탐구하는 것이다. -51쪽

아감벤은 여기서 수단 없는 합목적성, 목적과 관련해서만 의미를 갖는 매개성, 목적 없는 수단을 각각 구분하고 있다. 첫째, 춤은 본디 춤 자체가 목적인 미학적 차원에 속하지만, 신체 운동의 매개적 성격을 전시하는 수단의 차원에서만 몸짓일 수 있다. 둘째, 포르노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몸짓은 본디 관객에게 쾌락을 주는 목적에 종속된 수단의 차원에 속하지만, 그 몸짓의 매개성 자체가 수단으로-존재함 속에서 포착되고 중단되는 한에서만 몸짓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와 달리 무언극(마임)은 목적 없는 순수 수단이 전시하는 몸짓의 차원의 매개성을 가장 분명히 보여준다. -70쪽

노출은 정치의 장소이다. 동물의 정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동물들이 항상 이미 열림 속에 있고, 스스로의 노출을 전유하려고 하지 않으며, 그것에 개의치 않고 열림 속에 머물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동물들은 거울에, 이미지로서의 이미지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반대로 인간은 스스로를 재인하고 싶어 하기에, 즉 자신의 겉모습 자체를 전유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이미지를 사물과 분리해 이름을 붙인다. 이렇게 인간은 열림을 하나의 세계로, 그러니까 어떤 병영도 없는 정치투쟁의 장으로 변형시킨다. 진리를 대상으로 삼는 이 투쟁은 역사storia라고 불린다. -104쪽

진리, 얼굴, 노출은 오늘날 지구적 내전의 대상이다. 그 전쟁터는 사회적 삶 전체이고, 그 돌격대원은 미디어들이며, 그 희생자는 지구상의 모든 인민이다. 정치인들, 미디어 통치가들, 광고업자들은 얼굴, 그리고 이 얼굴이 여는 공동체의 비실체적 성격을 이해했다. 그들은 얼굴을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확고하게 통제해야 할 비참한 비밀로 변형시킨다. 오늘날 국가권력은 더 이상 정당한 폭력 사용의 독점(각 국가가 국제연합이나 테러리스트 조직과 같은 여타 비주권적 조직과 점점 더 가까이 공유하고 있는 독점)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의견 doxa)의 겉모습에 대한 통제에 기반하고 있다. 정치가 자율적 영역으로 구성되는 것은 스펙터클의 세계에서 얼굴이 분리되는 것과 한 짝을 이룬다. 스펙터클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소통이 그 자체에서 분리된다. 이렇게 노출은 그 스스로를 이미지들과 미디어들을 통해 축적된 하나의 가치로 변형한다. 새로운 관료계급은 이런 [노출의] 지배를 경계의 눈빛으로 지켜본다. -106쪽

사실 주권자가 예외상태를 공포하고 법의 효력을 중단시킴으로써 폭력과 법의 비구분 지점을 표시하는 자라고 한다면, 경찰은 항상 그런 '예외상태'에서 움직인다 경찰이 매 사례마다 결정을 내릴 때 제시하는 '공공질서'와 '안전'이라는 이유는 폭력과 법 사이의 비구분 지대를 이룬다. 이 지대는 주권에서의 비구분 지대와 완전히 대칭을 이룬다. -116쪽

오늘날 지구상에서는 잠재적으로 범죄자가 아닌 국가의 수장이 단 한 사람도 없다. 오늘날 주권이라는 슬픈 법의를 입고 있는 자라는 누구든, 동료들로부터 언젠가는 범죄자로 취급되는 차례가 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애석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경찰관과 사형집행인의 복장을 하기로 기꺼이 동의한 주권자는 마침내 오늘날 범죄자와의 원초적인 인접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119쪽

정치철학의 기초가 되는 '행복한 삶'이란 더 이상 주권이 자신의 고유한 주체를 만들기 위해서 전제하는 벌거벗은 생명일 수 없으며, 우리가 오늘날 신성화하려고 헛되이 시도하는 근대 과학과 생명 정치에서 말하는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 불가입적 외부성일 수도 없다. 반대로 '행복한 삶'이란 '충족한 삶', 절대적으로 세속적인 삶이며, 삶 자체의 고유한 역량을 완성하고, 그것의 고유한 소통가능성을 완성하는 데 도달한 삶이다. 이 삶에는 주권도 법도 그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없다. -125쪽

혁명은 자본, 권력과 타협해야 하곤 했다. 마치 교회가 근대 세계와 협정을 맺어야 했듯이 말이다. 권력을 향해 나아가는 진보주의의 전략을 이끌던 좌우명이 그런 식으로 조금씩 형태를 갖춰갔다. 모든 것에 양보해야 한다. 반대파와 모든 것을 화해해야 한다. 지성은 텔레비전, 광고와 화해하고, 노동계급은 자본과 화해하며, 언론의 자유는 스펙터클한 국가와 화해하고, 환경은 산업발전과 화해하며, 과학은 의견과 화해하고, 민주주의는 투표기계와 화해하며, 죄의식, 개종은 기억, 충실성과 화해해야 한다. -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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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화 - 인정(認定)이론적 탐구 나남신서 245
악셀 호네트 지음, 강병호 옮김 / 나남출판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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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장되어 가는 상품교환의 행위(28)영역에서 주체는 사회적 삶의 참여자보다는 관찰자로 행동하도록 강제된다. 가능한 수익에 대한 쌍방적 계산은 순수하게 사실적이고, 가능한 한 무감정적인 태도를 요구한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와 동시에 주체는 상황과 관련된 모든 요소를 "물화하며"지각하게 되는데, 교환되어야할 대상들, 교환 상대자 그리고 마침내는 인성적 잠재력까지 양적으로 가치증식될 수 있는 속성이란 측면에서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가 그에 상응하는 사회화 과정에 힘입어 상습적인 습관이 되면, 그래서 그것이 개인의 행동을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규정하게 되면, 그러한 태도는 "제2의 자연"이 된다. 이러한 조건에서 주체는 자신의 환경세계를, 직접 교환과정에 관여하고 있지 않을 때조차도, 한낱 물건으로 주어진 것이란 본에 맞춰 지각한다. 그러므로 루카치에게 "물화"란, 단지 관찰하는 행동이란 습관 혹은 습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찰하는 관점에서는 자연환경, 사회세계 그리고 자신의 인성적 잠재력은 단지 초연하게 그리고 물건 같은 것으로 파악될 뿐이다. -28~29쪽

루카치에 따르면 "물화"는 일종의 도덕적으로 그릇된 행동, 그러니까 도덕원칙에 대한 위반으로 개념화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도덕적 어휘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일 수 있는 주체의 의도가, 그러한 왜곡 자세에는 빠져있/기 때문이다. -29~30쪽

하이데거에게 "마음씀"이란 개념이 그런 것처럼, 루카치에게는 공감하는 실천이란 아이디어가 지배적인 주체-객체 도식에의 고착을 근본적으로 부정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하는 것 같다. 이러한 종류의 행위형식을 전제하면 주체는 더 이상 인식되어야 할 실재에 중립적으로 마주 서 있지 않을 것이다. 주체는 항상 이미 질적인 의미로 개시되는 세계와 실존적 관심 속에서 관계를 맺고 있을 것이다.-37쪽

근원적으로 주어진 지지하는 자세를 떠나는 것은 환경세계의 요소들을 그저 물적 실체로, 그러니까 한낱 "전재자"로 경험하는 태도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데, 이로써 우리를 이끌어왔던 주제와 다시 연결된다. 물화는 이제 그에 상응하여 하나의 사고습관, 그러니까 습관적으로 굳어진 관점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을 취함으로써 주체는 공감하고 관심 갖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마찬가지로 그의 환경세계는 질적으로 개시되어있다는 특성을 상실한다. -43쪽

"인정" 개념은 이런 기초적 수준에서 듀이의 "실천적 관여"뿐만 아니라 하이데거의 "마음씀", 루카치의 "공감"과도 기본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세계가 가치로 가득 차 있다는 경험을 자양분으로 하는, 세계에 대한 실존적 관심의 우선성이라는 생각 말이다. 그러므로 인정하는 자세는 다른 사람이나 물건이 우리 현존재의 생활에 대해 갖고 있는 질적인 의미에 대한 적절한 가치평가의 표현이다. -45쪽

듀이가 언급한 "술사화(predication)"란 개념 주목. 술사화는 우리가 인식 대상을 고정시키려고 시도할 때 행하는 언어적 추상화의 예이다.-46쪽

원 명령적 지시 : 아이는 엄마가 그 대상을 가져다주기를 바라고 그 대상을 갖게 되었을 때 만족한다. 또 다른 하나는 원표명적 지시로 아이는 엄마가 그 대상을 함께 보기를, 그리고 그 대상의 이름을 불러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렇게 해주면 만족한다. 이상 피터 홉슨과 마이클 토마셀로의 견해 정리.-52쪽

루카치가 자신의 개념전략을 통해 수행하는 물화와 객관화의 동일시는 사회발전과정에 대해 대단히 의문스러운 상을 제시한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루카치는 선행하는 인정의 중립화를 요구하고 그것을 제도적으로 지속시키는 모든 사회적 혁신을 물화의 경우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는 결국 막스 베버가 근대 유럽에서 사회의 합리화과정으로 묘사했던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사회의 총체적 물화의 원인으로 파악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루카치는 공감이란 근원적 태도가 그것의 사회구성적 기능으로 인해 결코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고 주장해야 하기 때문에, 그의 사회상은 여기서 한계에 부딪힌다. 사회의 모든 과정이 그것이 객관화하는 태도를 강제한다는 이유만으로 물화되었다면 인간의 사회성은 이미 해체되었어야 한다. 이러한 모든 곤란한 귀결은, 루카치가 물화와 객관화를 하나로 만듦으로써 채택한 개념전략의 결과들이다. 이로부터 앞으로의 고찰을 위해 얻어질 수 있는 교훈은, 물화과정을 루카치가 자신의 텍스트에서 한 것과는 다르게 개념화해야 한다는 것이다.-66쪽

"물화" 개념의 새로운 규정을 위한 열쇠로 삼고 싶은 것이 바로 이 망각의 계기, 기억상실의 계기이다.우리가 인식활동을 하면서 그것이 인정하는 자세 취하기의 덕택이라는 감을 상실하는 만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한낱 감각 없는 객체로 지각하는 경향을 발전시킨다. 여기서 한낱 객체, 나아가 "물건"에 대한 언급을 통해 의미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기억상실과 더불어 다른 사람들의 몸짓표현을 우리에 대한 반응요구로 즉각 이해하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69쪽

주체들이 마지막에 언급된 성격을 갖는 자기제시의 제도에 강하게 편입되면 될수록 개인의 자기물화 경향이 증가할 것이라는 나의 추정이다. 잠재적으로는 개인들로 하여금 특정 감정과 느낌을 소유하고 있는 척 하기를 강제하는, 또는 자신의 감정을 완결된 것으로 고정하도록 강제하는, 모든 제도화된 유무형의 장치는 자기물화하는 태도의 형성을 촉진한다.
-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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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타클의 사회 - 문화교양 7
기 드보르 지음, 이경숙 옮김 / 현실문화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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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타클을 시각 세계의 남용이나, 이미지들의 대량유포 기술의 산물이라고 이해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것은, 현실적인 것이 되고 물질적으로 번역된 세계관이다. 그것은 대상화된 세계관이다.-11쪽

스펙타클은 엄청나게 긍정적인, 반박 불가능하고 접근 불가능한 어떤 것으로서 나타난다. 그것은 오로지 "겉으로 보이는 것은 좋은 것이며, 좋은 것은 겉으로 보인다"고 말할 뿐이다. 스펙타클이 원칙적으로 요구하는 태도는 수동적 수용인데, 실은 스펙타클은 아무런 응답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신의 겉보이기 방식에 의해서, 즉 외양의 독점에 의해서, 이같은 수동적 수용을 이미 달성하고 있다. -14쪽

스펙타클은, 경제가 살아있는 인간들을 완전히 예속시키는 정도만큼, 살아있는 인간들을 자신에게 예속시킨다. 스펙타클은 자신을 위해 발전하는 경제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사물의 생산의 참된 반영이며, 생산자들의 허위적인 대상화이다.-15쪽

스펙타클은 활동을 관찰이라는 범주의 견지에서 파악하고자 한 서구 철학체계가 지닌 모든 취약점들을 상속받고 있다. 나아가 그것은 이 사유로부터 자라나온 정밀한 기술적 합리성의 끊임없는 확산에 기반을 두고 있다. 스펙타클은 철학을 현실화하지 못한 채, 현실을 철학화한다. 각 개인의 구체적 삶은 사변적인 우주로 격하되었다.-17쪽

스펙타클이 번쩍거리며 다양하게 바뀌는 중에도, 진부함이 현대 사회를 지배한다. 이것은 전세계에 걸쳐서, 그리고 상품소비의 발전 덕분에 선택할 만한 역할들과 대상들이 증가한 듯이 보이는 모든 지점에서 그러하다. 종교 및 가족의 잔존물들(계급권력의 주요 세습유물들)과 그것들에 의해 보장되는 도덕적 억압은, 이 세계의 즐거움이 긍정될 때에는 언제든지 서로 한 몸이 된다.- 이 세계는 억압적인 사이비 즐거움에 불과한 것이 된다. 또한 현존하는 모든 것을 인정하는 점잖은 순응도, 순전히 스펙타클적인 반란과 한 몸이 될 수 있다. 이것은 경제적 풍요가 생산을 확대시켜 이같은 원재료들을 가공하는 과정에 이르게 되면 곧바로, 불만족 그 자체도 상품이 된다는 단순한 사실을 반영한다.-42쪽

유명인사 소비하기는 각기 다른 유형의 개성들을 피상적으로 대변하고, 이런 각 유형들이 소비의 총체에 대한 동등한 접근권을 갖고 있으며, 거기서 유사한 행복을 찾아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자신의 인격 속에 체제 자체를 구현하고 있다고 칭송받는 인물들은 그들의 실제 모습 때문에 유명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가장 사소한 개인적 삶의 현실을 은폐함으로써 위인이 된 것이고, 누구나 이 사실을 알고 있다.-44~45쪽

풍요한 소비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주로 청년과 기성세대 사이의 스펙타클적 대립이 허위적인 역할들 중에서도 맨앞에 등장한다. 이것이 허위적인 까닭은,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서의 기성세대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기존의 것에 대한 변혁자로서의 젊음이란 것도 현재 청년기에 있는 사람들의 / 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경제체제, 즉 자본주의의 역동성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사물들이 지배하고, 사물들이 젊은 것이다. 다시 말해, 사물들이 서로 대결하고 서로를 대체한다.-45~46쪽

헤겔은 세계를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의 변혁을 해석해야만 했다. 그러나 헤겔은 그 변혁을 단지 해석하기만 함으로써, 철학을 철학적으로 완성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을 형성하는 세계를 이해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역사적 사유는 아직 항상 너무 늦게 등장하는, 사실을 뒤쫓아가며 그 사실의 정당성을 선언하는 의식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그것은 오로지 사유 속에서만 분리를 초월하였다. 모든 현실의 의미는 그 역사적 완성에 의존하는 동시에 이 의미는 현실이 자신을 역사의 완성으로 만드는 동안 드러난다는 역설은, 17세기와 18세기의 부르주아 혁명을 사유한 이들이 헤겔철학에서 이들 혁명의 결과와 화해만을 찾아내려 했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유래한다.-57쪽

이데올로기가, 절대권력의 소유를 통해 절대적 존재가 된 후, 부분적 지식에서 벗어나 전체주의적 허위성으로 바뀔 때, 역사에 대한 사유는 역사 자체가, 심지어 가장 경험적인 지식의 차원에서조차, 더이상 존재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파괴된다. 전체주의 관료제 사회는 영속하는 현재 속에 사는데, 이 중단없는 현재 속에서 발생한 모든 일은 관료제를 위해 관료제의 경찰이 접근할 수 있는 장소로만 존재한다. 나폴레옹이 이미 천명한 적이 있는 "기억의 에너지를 지도하는 통치자"라는 웅대한 기획은 과거의 부단한 조작, 즉 그 의미와 사실 자체 양자 모두의 조작에서 총체적으로 구현된다.-88쪽

파시즘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계엄상태이며, 이를 수단으로 하여 자본주의 사회는 국가를 사회관리에 대규모로 개입시킴으로써 자신을 구원하고 또한 자신에게 미봉적인 합리화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같은 합리화 자체는 그 수단들이 엄청나게 비합리적이라는 부담을 지고 있다. 비록 파시즘이, 공황으로 인해 파산하거나 사회주의 혁명의 무력감에 기만당한 프티 부르주아지와 실업자들을 재규합함으로써, 이미 보수화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핵심거점들(가족, 재산권, 도덕질서,국가)의 방어를 돕고 있긴 하지만, 파시즘 자체는 근본적으로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그것은 있는 모습 그대로 나타난다. 즉, 인종,혈통, 지도자 등의 케케묵은 사이비 가치들이 규정하는 특정 공동체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신화의 폭력적 재생이 그것이다. 파시즘은 기술적으로 장비를 갖춘 복고주의이다. -89쪽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이 겪은 개별적인 악에서는 물론 개별적인 악의 교정에서도 진정으로 자신을 인식할 수 /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수많은 악들의 교정에서도 자신을 인식할 수 없다. 오직 삶의 변두리로 추방되었다는 절대적 악 속에서만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 -97~98쪽

시간의 사회적 전유, 즉 인간노동에 의한 인간의 생산은 계급들로 분할된 사회 내에서 발전한다. 순환적 시간의 사회가 처해 있는 빈궁함 너머에 확립되어 있는 권력, 즉 사회적 노동을 조직하여 제한된 잉여가치를 수탈하는 계급은, 동시에 사회적 시간의 조직에서 나오는 시간 잉여가치도 수탈한다. 즉, 그 계급은 살아있는 것들의 불가역적 시간도 독점한다.-108쪽

사이비 순환적 시간은 현대의 경제적 생존의 소비시간이자, 증대된 생존의 소비시간으로, 이 시간 속에서 나날의 삶은 계속 결정권을 박탈당하고 더 이상 자연질서가 아니라, 소외된 노동 속에서 발전된 사이비 자연에 속박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 시간은 자연스럽게 전산업사회의 생존을 조정했던 고대의 순환적 리듬을 재구축한다. 사이비 순환적 시간은 순환시간의 자연적 잔존물에 의지하며 아울러 그것을 활용하여 새로운 동질적인 조합들, 즉 밤과 낮, 노동과 주말 휴식, 휴가의 정기적 반복을 편재한다. -127쪽

집중된 자본주의는, 가장 발달한 부문의 경우, 방향을 "완전히 구색을 갖춘" 시간 블럭들을 판매하는 쪽으로 정한다. 그리고 블럭 각각은 많은 다양한 상품들을 통합하는 단일한 통일된 상품이다. "서비스"와 여가가 팽창하는 경제에서, 이것은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계산된 지불의 정식을 낳는다. 즉, 스펙타클적 환경, 휴가의 집단적인 사이비 대체, 예약을 통한 문화적 소비, 그리고 "열정적인 대화들"과 "명사와의 만남"이라는 형태의 사교성 자체의 판매등이다. 이런 종류의 스펙타클적 상품은, 오로지 그것에 상응하는 현실들의 심화된 빈곤때문에 유통될 수 있음이 분명한데, 그것은 마치 신용으로 지불될 수 있음으로써 현대화된 판매기법의 시험적 품목에 적합한 것이 분명한 한 것과 같다.-128쪽

소비성 사이비 순환적 시간은, 좁은 의미로는 이미지들의 소비 시간으로서, 그리고 넓은 의미로는 시간소비의 이미지로서, 스펙타클의 시간이다. 이미지 소비의 시간, 즉 모든 상품들의 매개체는 불가분 스펙타클의 각종 수단이 힘을 쏟는 장이며, 또 그것들의 목표이며, 모든 구체적 소비의 장소와 그것의 주요형태이기도 하다. 자동차의 속도든 건조된 수프의 활용이든 어느 것에서든, 현대 사회가 끊임없이 추구하는 시간절약은, 미국인구의 경우에는 TV의 단순시청이 하루 평균 3시간부터 6시간을 점하고 있다는 / 사실로 구체적으로 번역된다. 시간소비의 사회적 이미지는 모든 스펙타클적 상품처럼, 여가와 휴가의 계기들에 의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정의상 바람직한 것으로 제시되는 계기들에 의해 배타적으로 지배된다. 여기서 이 상품은 명시적으로 현실적 삶의 계기로 제시되며, 중요한 점은 그것의 순환적 복귀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삶을 위해 마련된 계기들에서조차, 스펙타클은 여전히 더욱 더 강도높은 것이 되면서 관망되고 재생산될 수 있다. 진정한 삶으로 표상되었던 모든 것은 단순히 더 진정으로 스펙타클적인 삶으로 드러난다. -128~129쪽

스펙타클은, 역사와 기억을 마비시키는 현존하는 사회조직으로서, 역사적 시간이라는 토대 위에 건설된, 역사를 포기하는 현존하는 사회조직으로서, 허위적인 시각의식이다. -131쪽

관광, 즉 소비라고 간주되는 인간의 유통, 상품유통의 부산물은, 근본을 보면, 이미 진부화된 것을 관람하러 가는 여가활동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다른 장소들로 가는 것을 담당하는 경제조직은 이 / 미 그 자체로 장소들의 등가성에 대한 보증이다. 여행으로부터 시간을 제거한 바로 그 동일한 현대화는 또한 그것으로부터 공간의 현실성을 제거했다. 169번 : 환경의 모든 것을 조형하는 사회는 바로 그 자신의 영토를 형성하는 데 필요한 특별한 기술, 이같은 과제들의 집적의 공고한 기반을 발전시켜 왔다. 도시주의는 자본주의가 자연환경과 인간환경을 장악했음을 의미한다. 논리적으로는 절대적인 지배로 발전하면서 이제 자본주의는 공간의 총체성을 그 자신의 틀 속에서 재창조할 수 있고 재창조해야만 한다. -170번- : 도시주의에 의해 삶의 가시적인 동결의 형태로 충족되는 그 자본주의적 욕구는 헤겔적인 용어로서는 "시간의 경과 속에서의 쉼없는 생성"에 대한 "공간의 평화로운 공존"의 절대적 지배로 표현될 수 있다. -136~137쪽

"농촌은 정확한 모순, 즉 고립과 분리를 보여준다"(독일 이데올로기)도시주의는 도시를 파괴하고 다시 사이비 농촌을 재건하지만, 그 사이비 농촌은 그 역사적 도시에 의해 직접적으로 도전받았던 직접적인 사회적 관계는 물론이고 옛 농촌의 자연적 관계 또한 결여하고 있다. 새로운 인조농민들이 오늘날의 "조직화된 영토"안에서 주택과 스펙타클적 통제의 조건에 의해 다시 창조되고 있다. 늘상 농민들로 하여금 독립적 행동을 취하지 못하게 했고 창조적인 역사적 세력임을 자임하지도 못하게 했던 그 산재성과 협소성이 오늘날 또다시 생산자들의 특성이 되고 있다.(중략) 기술공학적 사이비 농민들로 구성되는 "신도시들"은 풍경에다 자신들이 입지하고 있는 역사적 시간과의 결렬을 뚜렷하게 새겨넣는다. 따라서 그들의 모토는 "여기서는 언제까지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역사적 부재의 세력들이 자신들만의 풍경을 꾸미기 시작하는 것은 도시들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 역사가 아직 해방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은 분명하다.-142쪽

스펙타클이라는 비판적 개념은 또한 의심의 여지 없이 모든 사항을 설명하고 추상적으로 부인하는 사회학적 및 정치적 수사학의 케케묵은 알맹이 없는 공식으로 속화될 수 있고, 그리하여 스펙터클적 체계를 방어하는 구실을 하기도 한다. 이제 명백한 점은 어떤 사유도 현존하는 스펙타클을 초월하여 나아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스펙타클을 둘러싸고 현재 존재하는 사유들을 넘어설 수가 없다는 점이다. 스펙타클의 사회를 효과적으로 파괴하는 데 요망되는 것은 실천적 힘을 작동시키는 인간들이다.-161쪽

피터 마샬 작, 기 드보르와 상황주의자들 중에서 : 상황주의자들은 다다, 초현실주의, 문자주의 Lettrism에 의해 영향받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 및 지식인들의 소규모 모임에 기원을 두고 있다. 시와 음악을 융합시키고 도시경관을 변형시키고자 했던 문자주의 인터내셔널은 1957년 잡지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을 창간했던 집단의 직접적인 선구자였다. 처음에 그들은 주로 "예술의 폐지"에 관심이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그들 이전의 다다이스트들과 초현실주의자들처럼 분리된 활동으로서의 예술과 문화라는 범주를 대체하여 그것들을 일상적인 삶의 부분으로 변형시키고 싶어했다. 문자주의자들처럼 그들은 노동에 반대하고 완전한 여흥을 옹호했다. 자본주의 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창조성은 엉뚱한 곳에 소모되고 억압받으며 사회는 배우들과 구경꾼들, 생산자들과 소비자들로 분할된다. 그들은 일단의 사람들이 아니라 상상력이 권력을 장악하기를 원했고 모든 이들이 시와 예술을 창작하게 되기를 원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들은 선언했다. 노동이나 권태따위는 지옥으로나 가라!-1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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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상태 What's Up 6
조르조 아감벤 지음, 김항 옮김 / 새물결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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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상태는 법률 차원에서는 이해될 수 없는 법률적 조치라는 역설적 상황에 놓이게 되며, 어떤 법률적 형식도 가질 수 없는 것의 법률적 형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다른 한편에서 법이 생명에 가 닿고 스스로를 효력 정지시켜 생명을 포섭하기 위한 근원적 장치가 예외상태라면 예외상태에 관한 이론은 살아 있는 자를 법에 묶는 동시에 법으로부터 내버리는 관계를 정의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 -14쪽

현대의 전체주의는 예외상태를 통해 정치적 반대자뿐 아니라 어떠한 이유에서건 정치 체제에 통합시킬 수 없는 모든 범주의 시민들을 육체적으로 말살시킬 수 있는 (합)법적 내전을 수립한 체제로 정의될 수 있다.이때부터 항구적인 비상 상태의 자발적 창출이 (반드시 그렇(15)게 한다고 선언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 국가의 본질적 실천이 되었다)-15~16쪽

예외상태란 상이한 권력 형태들(입법,행정 등)이 아직 구분되지 않은 원초적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하지만 앞으로 살펴볼 것처럼 예외상태는 오히려 텅 빈 상태, 즉 법의 공백 상태에 근거하고 있으며, 아무런 구분 없이 충만한 원초적 권력이라는 생각은 자연 상태라는 개념과 유사한 법적 신화소로 간주되어야 한다.-21쪽

권력 분립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이 오늘날 의미를 잃어버렸으며 행정 [집행] 권력이 사실상 부분적으로는 입법권을 흡수해버렸다는 것이다. 의회는 더이상 법률을 통해 시민들에게 의무를 부과하는 독점적 권한을 가진 주권 기관이 아니다. 행정 권력이 선포하는 여러 법령을 인가하는 존재로 축소되어버린 것이다. -42쪽

예외상태의 고유성이 법질서의 (부 (51)분적 혹은 전면적 )효력 정지라면 그러한 효력 정지가 어떻게 여전히 법질서 속에 포함될 수 있을까? 아노미가 법질서 안에 자리매김될 수 있다는 것일까? 그렇지 않고 만약 예외상태가 단순한 실제 상황이라면 , 즉 법률 바깥에 존재하거나 법률에 위배되는 것이라면 어떻게 법질서가 결정적 상황에 고유한 하나의 공백을 포함하는 일이 가능할까? 과연 이 공백의 의미는 무엇일까?-51~52쪽

긴급 사태는 적법하지 않은 것이 적법한 것이 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을 넘어, 특수한 개별 사례마다 예외를 통해 [법률] 위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 되고 있다. / 긴급사태라는 형태를 띠는 한 예외상태는 - 혁명이나 헌정 질서의 사실상의 수립과 더불어 - '비합법적'이지만 절대적으로 '법률적이고 헌법적인' 하나의 조치로 모습을 드러내며, 이는 새로운 규범(혹은 새로운 법질서)의 생산으로 구체화된다.-54 / 59쪽

예외상태는 규범의 공백에 대응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규범의 존립과 정상 상황에 대한 규범의 적용을 보증하기 위해 질서 안에 하나의 픽션적 공백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공백은 법률 내부에 존재하지 않으며 법률이 현실과 맺는 관계, 법률의 적용 가능성 그 자체와 관련되어 있다. -65쪽

법질서 바깥에 있으면서도 그러한 법질서에 속해 있다는 것이야말로 예외상태의 위상학적 구조이며, 논리적으로 볼 때 예외에 관해 결정하는 주권자의 존재가 사실상 이러한 구조에 의해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주권자 또한 벗어남-속함이라는 모순 어법에 의해 특징지어질 수 있다. -72쪽

예외상태는 어디까지나 현실에 대한 효과적인 규범화가 가능하게 하기 위해 아노미의 지대를 법 속에 도입하는 셈이다. -75쪽

현대의 공법 이론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민주주의 국가들이 겪은 위기에서 비롯된 전체주의 국가들을 독재 체제로 정의하는 일이 관습으로 정착되어 있다. 그리하여 히틀러도 무솔리니도 프랑코도 스탈린도 모두 똑같이 독재자로 제시되어왔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무솔리니도 히틀러도 독재자로 정의될 수 없다. 무솔리니는 국왕에 의해 합법적으로 임명된 수상이었으며, 히틀러도 바이마르 공화국의 적법한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제국 총통이었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탈리아 파시즘 체제와 독일 나치즘 체제의 특징은 현행 헌법 (알베르티노 법과 바이마르 헌법)을 존속시킨 채, '이중 국가'라고 예리하게 정의된 패러다임에 기초해 법률적으로 정식화되지는 않았지만, 합법적인 헌법 옆에 예외상태에 힘입어 제2의 법적구조물을 둘 수 있었던 데 있다. 법률적 관점에서 이런 체제를 '독재'라는 용어로 묘사하는 것은 전혀 적합하지 않다. 게다가 오늘날의 지배적인 통치 패러다임을 분석하기 위해 민주주의 대 독재라는 말라비틀어진 대립 도식을 이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95쪽

동란은 주권자의 죽음과 일치하며, 법의 효력 정지는 장례 의식 속에 통합되어 있다. 이는 마치 주권자가 본인의 '존엄한'인격에 모든 예외적 권력, 즉 호민관의 영원한 권한에서부터 보다 크고 무제한적인 전 집정관의 최고 명령권까지를 흡수해 이른바 살아 있 131 / 는 유스티티움이 됨으로써 죽음의 순간에 자신 속에 있던 가장 내적인 아노미적 성격을 드러내는 동시에 동란과 아노미가 자신으로부터 해방되어 도시전체를 뒤덮는 것을 보는 것처럼 보인다. -131 /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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