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놀로지와 낭만주의 -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이호규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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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테크놀로지와 낭만주의의 밀월 관계 : 전기의 출현을 계기로)에서는 테크놀로지 유토피아란 레오 마르크스의 '테크놀로지의 숭고함(sublime of technology)'의 은유로 집약되어 설명될 수 있다는 점을 피력하였다. 계몽사상은 테크놀로지의 지위를 과거 어느 때보다 격상시켰다. 불완전한 것을 완전하게 만드는 행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어 '테크네(techne)'에서 비롯된 테크놀로지는, 근대성이 시작되면서, 지식, 과학, 그리고 합리성과 함께 사람들에게 중요한 화두로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산업혁명은 사람들에게 테크놀로지가 물질의 풍요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행복한 미래를 약속한다는 신념을 갖게 하였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사회 공학'이라는 용어가 나타나면서 사회의 모든 분야를 테크놀로지에 근거한 인식의 틀로 바라보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렇게 테크놀로지는 근대성이 시작되면서 사회 발전, 나아가 사람들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인식되었다.-6쪽

레오 마르크스의 '테크놀로지의 숭고함'을 차용하여 데이비드 나이는 디지털 매체의 출현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디지털의 숭고함'으로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다. '테크놀로지의 숭고함'과 '디지털의 숭고함'은 모두 테크놀로지 유토피아를 대변하는 은유로, 저자는 두 은유에서 사용되고 있는 '숭고함'이라는 개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칸트에 의해 논의가 시작된 숭고함의 개념은 웅대한 자연에 대해 사람들이 존경심과 공포심을 동시에 갖게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레오 마르크스는 테크놀로지가 인간과 자연의 중간 지대(middle scape)로서 자연의 경이로움을 반영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게 되었다. '테크놀로지 유토피아'는 근대성의 시작에서 비롯된 자연의 대상화와, 사람들이 갖게 된 자연을 이해하고 정복할 수 있다는 인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때 자연을 정복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테크놀로지는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도구였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자연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와 경이로움의 정신 상태가 테크놀로지에 반영되게 되었을까?-6쪽

은유는 과학과 테크놀로지를 공중에게 알리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은유는 우리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면서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만든다. 오늘날의 대중매체에서는 수많은 과학적인 발견과 테크놀로지들의 발전이 보도되고 있다. 과학적인 성과와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대개 우리의 삶을 크게 변화시킬 파격적인 혁신으로 묘사되곤 한다. 은유는 세상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견해를 커뮤니케이션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이러한 점에서 은유는 다양한 담론들을 연결시키는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할 뿐더러 토의를 위한 공통의 장을 제공한다(Maasen&Weingart,1995.각주 12번)-11쪽

테크놀로지를 은유로 설명한다는 것은 과학자들이나 기술자들이 은유를 일반인들에게 알리는 단방향의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다. 오히려 언론인들이나 광고인들이 과학에 의해 나타난 테크놀로지들을 설명하기 위해, 현재의 문화적인 이야기(narrative)와 세상에 대한 이미지들과 어울릴 수 있는 은유들을 사용하기를 원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해당 테크놀로지들을 일반인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테크놀로지와 대중매체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일반인들의 희망과, 과학 혹은 테크놀로지를 표현하는 데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대중매체는 은유들을 통해 어떠한 주제를 일반인들에게 친숙하게 하고, 고착화시키며 또한 극적으로 만든다.(Burke,1989,각주 14번)-12쪽

사람들이 대상의 정확한 실체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 은유는 대상을 사람들에게 가깝게 다가설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요즈음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매체가 출현하면 바로 등장하는 것이 해당 매체를 일반인들에게 알리는 은유들이다. 우리에게 소개되는 은유들은 일반인들로 하여금 해당 매체를 소개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을 수용케 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즉, 이때 은유는 생경한 매체를 일반인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사람들이나 집단들의 가치관을 반영한다. 또한 사회에서 회자되는 은유들은 일반인들이나 사회가 새로운 매체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자신들의 미래의 모습에 대한 상상을 투영하기도 한다. 새로운 매체 혹은 테크놀로지를 묘사하는 은유들이 어떻게 생성되고 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논의도 중요하지만, 이 부분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은유가 사람들로 하여금 새롭게 나타나는 매체가 자신들의 희망을 실현시킬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는 점이다. 물질과 이상이 결합됨으로써, 사람들은 자신들이 단순히 물질을 수용하기만 하면 자신들의 꿈이 현실화된다는 믿음, 나아가 신화 속에 살게 된다.-13~14쪽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둘러싼 은유들은 테크놀로지의 급속한 발전의 시대에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가져올 수 있는 혼란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게 하는 기능을 하였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종종 희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가져왔지만, 그것들을 설명하는 은유들은 과학자나 전문가에게만 친숙한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일반인들이 어떠한 주저함도 없이 받아들이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근대성에 방향을 제공한 것은 바로 유토피아 논의이다. 즉, 근대성이 칸트가 주장한 계몽이라고 하였을 경우에는, 비록 그가 실천 이성을 강조하였지만, 그 어떠한 실천적 방향이 설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진보 개념의 등장은 근대성의 방향을 설정하면서 이상향의 논의를 공간의 유토피아에서 시간의 유토피아로 전환시켰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그 어디에 있는 이상향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완전성을 위해서 계속해서 나아가는 과정을 강조하게 되었다. 유토피아 이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의 문제점을 잊게 하고, 그것들이 미래에 해결될 것이라는 허위의식 역할을 하였다.-23쪽

근대의 이상향 논의는 과학적 합리성과 테크놀로지와의 결합으로 인해 과거와는 달리 실천성을 갖게 되었다. 과학적 합리성은 약 16세기에 나타났는데, 이는 현실은 사람의 추상적인 이성으로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음을 뜻한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합리성에 근거하여 명확하게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에만 의존했던 이상향은 테크놀로지와의 결합으로 한층 구체화되었다. 테크놀로지를 매개로 한 꿈의 실천성보다 더 이상 현실적인 논의는 없다. 테크놀로지는 현재화되어 있으며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테크놀로지는 자연과 사람에 대한 통제를 가능하게 하며, 불완전한 사람들이 미래에는 완전한 사람으로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주기 때문에 바로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진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테크놀로지와 유토피아의 논의의 결합은 기술 결정론을 낳게 되면서기술과 사회를 동일한 차원에서 고려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특히 시간과 공간의 벽을 헐어 버린 전신의 출현은 테크놀로지에 대한 경외감과 사회에 대한 유기체 모델과 결합하면서 당시의 사회 질병들을 해결할 수 있는 매체로 간주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4쪽

이러한 전통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지배적인 사회인식론으로서 사회 전반에 걸쳐서 영향을 주고 있다.-24쪽

사람들의 몸과 마음은 세상에서 매우 복잡한 체계의 네트워크이다. 사람들은 변화하는 주변의 환경을 단지 마음만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감각기관과 마음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환경의 변화를 감지하고 이해한다. 또한 사람들의 생각은 매우 무의식적이다. 자신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는 단지 자신들이 창조한 상징을 통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모든 것들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다. 단지 이름이 있는 것만이 전달될 수 있다. 따라서 상징은 해당 사회에서 인정하고 있는 생각들만을 반영하고 있다. 상징들은 해당 사회에서 지적으로 용인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는 바로 사회의 제반 권력관계에 의해서 상징이 결정됨을 의미한다.-27쪽

근대성 이후 새로운 견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의 현재 조건이란 예정되어 있거나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변화될 수 있는 무엇이라는 의식이다. 비록 속도는 느리지만 사람들을 과거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다는 신념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사람들은 현재의 환경 변화에 단순히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개조함으로써 완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정치는 일종의 계획이 되었으며, 이상향의 개념은 처방이 되었으며 또한 바람직한 목적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즉, 과거의 이상향 철학은 단순히 그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공간의 유토피아를 기술하는 차원이었으나 근대성 이후의 이상향은 시간의 유토피아를 위한 처방의 차원으로 전환되었다.-38쪽

테크놀로지의 위험성에 대해 경종을 울린 학자로서 자크 에륄(Jacques Ellul)을 들 수 있다. 그는 지금까지 테크놀로지를 논의한 많은 학자들 중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학자로서 테크놀로지의 유토피아를 강조하는 학자들과는 달리 테크놀로지는 지구에 천국을 건설하지 않고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테크놀로지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천국이 아니라 역으로 강제 수용소와 같은 전체성을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으며 우리들을 규정하는 테크놀로지에 의해 조성된 감옥은 바로 전체주의와 같다. 이는 사회가 테크놀로지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 아래 에륄은 결과적으로 사회는 테크놀로지에 의해, 테크놀로지를 위하여, 그리고 테크놀로지를 위해 존재하고 있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자크 에륄은 테크놀로지를 거론할 때, 전체성, 합리성, 효율성 등의 용어를 종종 사용하였다. 그는 주장하기를, 기술적인(technical) 과정은 독립적인 합리성, 즉 자체 내의 논리에 의해 작동되는 합리성에 의해 진행된다. 이러한 합리성의 결말은 삶의 모든 영역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것이다. -43쪽

따라서 테크놀로지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방법-과학, 탐구, 생산 등-들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이성에 의해 이용되는 수단이다. 이러한 테크놀로지 논리에 의해 규정되는 방법들은 매우 광범위하고 집약적/이다. 테크놀로지는 삶의 모든 영역을 심층적으로 변화시킨다. 즉 사람들, 자연, 과학 행위, 인간성에 대한 견해, 그리고 전통적인 종교뿐만 아니라 예술과 정치 등이 테크놀로지의 횡포에 의해 재구성된다. 여기서 지적할 것은 바로 자크 에륄은 테크닉(technique)과 기술적인 사물(technical objects)을 동일하게 취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비록 도구, 무기, 자동차, 컴퓨터 등이 기술적으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생산품이 에륄의 테크닉의 의미를 충분히 반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테크닉은 독립적인 사회 과정이다. 테크닉은 삶이 합리적이고 단계적인 절차성의 특징을 갖게 한다. 이러한 테크닉은 공장, 관료제, 연구와 발전을 위한 집단, 도시 계획, 위원회 등에서 지배적으로 관찰된다. 여기서 테크닉은 일종의 생각의 유형(mode of thinking)이라 이해함이 적절하다. 에륄은 일반적으로 물질의 테크놀로지보다는 테크닉을 강조하면서 자연스-43~44쪽

럽게 영향을 주는 생각의 유형을 경고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바로 이러한 테크닉에 근거한 사고방식을 명료하고 확실하게 남들에게 과시한다. 전문가들은 어떠한 문제를 평가하고 해결할 때 그들의 자신감으로 인해 해당 분야를 정복하였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일반 사람들에게 사고방식을 강요하면서 그들의 위상을 높이고자 한다.-44쪽

테크닉은 근대 사회로 이행되면서 과거의 모든 신성함을 부정한 근원적인 독특한 개체이다. 이러한 테크닉의 영향력은 신성함이라는 인지의 영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직을 운영하는 관료제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끊임없이 진행되는 분업화, 행정의 규칙들, 형태 그리고 절차 등이 많은 사회 과정을 위한 현대의 권위로서 자리매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효율성, 접근과 탈출의 속도감, 전문가의 지식이 관료제를 이끌어 가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특징들이 학계에서도 관찰되고 있다.-45쪽

이러한 테크닉 가치는 특히 현재의 산업계에서도 활발하게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갈브레이스(Galbraith)는 현재의 시장은 전혀 자유롭지가 않다고 주장한다. 만약에 자유롭지 않다고 한다면, 이는 정부 혹은 관료제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할 것이다. 경쟁이 만연한 시장에서 테크놀로지가 사용되면 될수록, 세분화, 자본, 그리고 시장의 조작 등이 더욱더 그 영향력을 갖게 될 것이다. 이를 갈브레이스는 테크노 구조(techno-structure)라고 명명하였다.(Galbraith,1967,각주 101번)
이러한 테크노 구조는 예를 들면, 규모의 경제라는 이름으로 모든 기업의 조직의 경영에 커다란 원칙으로 작동하고 있다.-46쪽

에륄은 이제는 테크놀로지가 개인화 차원까지 변화되었다고 한다. 요즈음 사람들을 일컬을 때 흔히들 '호모 파베르(Homo Faber)',도구를 만드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는 바로 정보를 공정하는 체계 혹은 복잡한 기계의 의미를 갖고 있다. 더욱이 테크놀로지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우주라는 실체를 관장하고 있는 법칙을 설명하기 위해 원인과 효과라는 은유를 사용하여 규정하고 있다. 우리가 환경을 이렇게 기계적인 시각에서 살펴볼 때,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기계의 효율성으로 대체하게 된다.(자크 에륄,각주 102번)-46쪽

에륄 이외에 테크놀로지에 대한 비관적인 사고는 신마르크스주의에서도 찾을 수가 있다. 하버마스는 Technology and Science as Ideology(1970)에서 테크놀로지의 사회적 영향력을 언급하고 있다.(중략)/ 하버마스는 국가가 경제 발전을 제고시키기 위해서 사회에 개입하는 정도가 증가하고 있다고 역설한다. 과학과 테크놀로지를 결합시킴으로써 국가는 경제 발전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한다. 그 결과, 과학과 테크놀로지는 억압의 이데올로기 수단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는 앞에서 언급한 유토피아의 주장과 같이, 국가는 진보라는 이름으로 과학과 테크놀로지를 통해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로 인한 부자유는 비합리적이지도 않고 전체주의적이지도 않다. 다만 여가, 부, 그리고 향상된 지위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선다. (하버마스,각주 105번)-46,47쪽

테크놀로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담론들은 공히 기술결정론의 시각을 갖고 기술과 사회를 바라보고 있다. 테크놀로지를 긍정적으로 보건 그것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건 간에 거기에 내재된 기술결정론은, 테크놀로지가 외생적인 요소이며 자발적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사회관계와 조직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고 보고 있다.(Williams&Edge,1996,각주 109번) 또한 기술결정론적 관점에서 테크놀로지는 주어진 것이고 사회와 조직의 변화를 위한 효율적이고 신뢰할 만한 계기를 제공하며, 그 자체의 특성으로 인해 알려진 방향과 예정된 경로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기술결정론은 정부와 산업의 공적 담론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난다.그들은 테크놀로지의 변화는 불가피하고 그것의 속성상 특정한 사회 변화를 촉진시킨다.(Edge,1994,각주 109번)-48쪽

테크놀로지와 사회의 분리를 전제로 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담론은 단지 테크놀로지를 독립변인으로 설정하여 그 이외의 모든 요소들을 종속변인으로 간주함으로써 과연 테크놀로지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49쪽

테크놀로지를 통해 사람들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나아가 테크놀로지가 우리에게 이상향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인식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담론들을 집약해서 테크놀로지의 숭고함(technology sublime)이라 일컫고 있다. 이하 각주 114번 내용 - 테크놀로지의 숭고함에 대한 담론은 테크놀로지를 심미적이고, 감정적이고 감동적인 실체로 바라보고 있으며 심지어 테크놀로지를 경외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테크놀로지의 숭고함의 논의들은 사람들이 자연과 테크놀로지를 놀랍고 두려운 존재로 인식하게 한다.-50쪽

테크놀로지의 숭고함의 담론은 사람들이 제작한 테크놀로지를 자연의 세계의 아름다움과 동일시함으로써, 자연에서 느낀 경외심과 놀라움의 감각을 어떠한 비판적인 시각 없이 테크놀로지에 대한 경험과 동일 차원에서 취급한다. 존 러스킨의 연구에서 테크놀로지의 숭고함 논의를 이해할 수 있다. 러스킨에게 근대 문화의 맥락에서 도시와 테크놀로지는 바로 모든 사회 집단을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분리시켰으며, 인간으로 하여금 테크놀로지를 낭만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게 하였으며, 테크놀로지와 도시의 표면에 나타나는 그림과 같은 특성을 감상하게 하였다.(Ruskin,1979, 각주 120번)-53쪽

테크놀로지의 숭고함을 강조하는 담론들로부터 나타나는 특정한 감정과 경험은 잠정적이고 기만적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현재 사람들의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도덕 그리고 물리적인 틀에 포함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카슨, 각주 121번)-53쪽

테크놀로지의 숭고함의 담론은 테크놀로지, 민주주의, 그리고 목가적인 이상주의 등을 물질의 득이 영혼의 완성이라는 등식으로 치환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레오 마르크스는 이러한 현상을 '사람들이 테크놀로지가 노동 조건을 향상시킬 것이며 영혼의 삶 또한 향상시킬 것이라는 믿음을 제일 중요하게 간주하기 시작하였다.'는 이야기로 요약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숭고함의 신화는 세계 박람회와 같은 행사에 참가하/는 일반인의 태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숭고함의 신화는 테크놀로지, 자연 그리고 인류가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으며 그들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정치, 도덕, 그리고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급격한 산업 성장, 그리고 정치 현실의 변화로 인해 테크놀로지에 대한 숭고함의 경험이 개념적인 차원에서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원래 테크놀로지에 대한 숭고함은 기존의 겸손함에서 비롯된 숭고함이, 테크놀로지와 전기의 발전이 모든 사회의 악을 없앨 수 있는 만병통치약으로 간주되면서, 테크놀로지에 옮겨간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러던 숭고함의 개념이 테크놀로지가 노동자들과 주부들의 잡일을 -53쪽

경감시킨다고 하는 개인적인 차원으로 전환되면서 기존의 사회에 국한된 숭고함에서 일상생활의 숭고함으로 확장되게 되었다.(데이비드 나이,각주122번)인간과 테크놀로지의 공존을 강조하는 것은 기술의 숭고함에 대한 중산층의 에토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숭고함은 "커뮤니케이션 ,교환, 움직임이 인류애, 계몽, 그리고 진보를 가능하게 한다. 고립과 떨어짐은 야만성의 증거이며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제임스 캐리,각주 123번)는 생각과 일맥상통한다. -53쪽

거시적인 입장에서 살펴보면,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의 연속이며 계몽주의와의 단절을 도모하지는 않았다. (중략) 낭만주의는 계몽사상이 이룩한 원칙들과 업적들을 환영하였다. 예를 들면 낭만주의는 계몽사상과 마찬가지로 미신으로부터의 사람들의 해방과 개인의 자율성을 가능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환영하였다. 비록 중세시대의 향수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지만 낭만주의자들은 결코 중세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낭만주의자들이 가진 중세시대에 대한 향수는, 계몽사상이 개인의 자율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중세시대에 있던 공동체의 미덕을 잃을까 우려한 데서 빚어졌기 때문이다.-57쪽

숭고함이라는 용어는 1674년 보일로(Boileau)가 롱기누스를 번역하면서 문학계에 소개하였다. 낭만주의에서의 숭고함은 신의 세계를 대치하는 개념으로서 초월성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역할을 하였다. 계몽주의에 의해서 과학이 신의 세계를 대체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초월성의 세계를 인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낭만주의자들은 숭고함의 은유를 이용하여 자연의 위대함을 관조함으로써 사람을 경외심과 존경의 마음으로 가득하게 하고, 이로부터 초월의 세계를 느끼고자 하였다. 낭만주의자들이 가졌던 숭고함의 의미는 칸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칸트는 사람의 마음과 감상의 대상의 숭고한 관계를 설명하면서, 숭고함은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판단하는 사람의 마음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칸트의 숭고함에 대한 설명으로 인해 논의의 초점이 대상에 내재하고 있는 성격에서, 사람의 의식과 대상 사이의 관계로 이행되었다(crowther,1989,각주 149번). 숭고함은 자연이 아니라 자연이 숭고하다고 느끼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67쪽

낭만주의들의 숭고함은 사람들의 마음과 자연 사이에 벌어진 간극을 없애고자 하였다.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자연을 생명이 없는 분석 대상으로 간주하면서 자연은 사람의 마음과 멀어지게 되었다. 낭만주의는 자연을 사람들이 이용하는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도모하였다. 유럽에서 시작한 낭만주의와 테크놀로지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미국의 국가 건설에 필요한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였다. 레오 마르크스의 테크놀로지 숭고함의 레토릭은 사라져/가는 농경사회의 전원적인 이미지를 대체하기 위해 나타났다. 숭고함의 담론은 산업화의 영향력과 산업화가 초래한 진보에 대한 놀라움과 공포심을 공히 포함하고 있다. 테크놀로지의 숭고함에 대한 담론은 바로 대중산업화로 인한 사회의 변혁에 대한 자본주의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등장하였다.(Porter,1986,각주 161번) 테크놀로지의 숭고함의 담론은 개인들을 소유적인 개인주의(posessive individualism)로 전환시키면서 산업화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단순한 기능을 하는 테크놀로지가 아니라 자신들이 소유하였을 때 테크놀로지에 내재되어 있는 미-70쪽

적인 가치를 동시에 얻게 된다고 하는 심리적인 만족감을 사람들로 하여금 갖게 하였다. 이와 더불어 테크놀로지를 미화시킴으로써 정부의 경제 발전 계획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이 계획에 대한 당시 미국 국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고취시킬 수 있었다. 즉, 산업화로 인해 나타난 모순들을, 국민들로 하여금 테크놀로지를 소유/소비함으로써 자신들도 국가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함으로써, 해소하고자 하였다.(Wilson,1992,각주 162번)-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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