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를 넘어 비아냥으로,꼬집다 못해 발기발기 찢고 흔적조차 드러남 없이 불태워 버리고팠던 지배계급의 못된 게으름과 패덕을 고발하기 위해 그림으로 도발한 당대의 까발림은 혁명 그 자체보다도 한껏 드라마틱한 일들이었/다. 세상이 뒤집어지는 형국 아래 치부의 치부가 꺼풀을 벗고 모순의 모순이 뚜껑을 열고 제 발로 기어 나오는 극단의 현실 앞에서 도망갈 귀족도 도리질할 왕도 이제 더는 없었다. 안팎을 뒤집어 버리고, 기다리며 참고 있던 자들이 급기야 전부를 부정, 접수하려는 혁명적 변혁상황 속에서 오랜 감시와 관찰이 빚어준 정치적 직간은 이미 민중 본연의 자산이었고 결코 권력도 빼앗지 못할 주관적 가치로 정착되어 가고 있었다. 포르노그라피의 정치성은 이처럼 의도적 고안물로 정착한, 보다 정교하고 치밀한 계략의 하나로 이해해야만 했다.-9쪽
1장 : 소프트코어의 정치전략과 황색매체의 문화전술 중 / 첫째, 현 단계 한국 사회의 소프트코어 문화는 하드코어의 정치적 대용물로 기능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만일 그렇다면 소프트코어의 문화적 대리만족 정도는 어디까지이며 그 표현의 한계치는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둘째, 소프트코어의 경계확장 및 파괴욕구가 부딪치고 있는 현실적 장애와 정치적 통제는 문화적으로 서로 관계가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셋째, 한국의 소프트코어 유통 미디어는 무엇으로 대표되고 있으며,그 현실은 어떤가? 넷째, 만일 한국 소프트코어 문화의 정책적 방임이 하드코어의 양산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면, 그때 나타날 문화적 컨텐츠의 실상은-25쪽
행여 이 땅에서 하드코어가 그 본연의 생생한 의미, 즉 거칠지만 솔직하고 난잡할망정 처절히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미지를 담아내는 용기로 인정, 유통되길 기대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거꾸로 보면 소프트코어만으로도 명분이 서지 않는데 하물며 하드코어의 표현의 한계를 지적한다든지 제작과 유통불가의 조건을 지탄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 일이었다. 따라서 동영상과 영화형식의 경우, 연기단계로까지 격상된 하드코어의 계발이 저지되었던 것도 문제고, 더 나아가 성을 매개로 한 미디어들의 사회적 유통 자체를 외형적으로 홀대하거나 문화단위로조차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인식의 양면성도 더 큰 문제로 방치되어 왔다는데 우리는 당분간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29쪽
60년대의 박승훈과 염재만이 대표작가들이었고, 마광수와 장선우 감독의 경우는 90년대를 달군 좋은 예였다. 어쩌면 이미 시시해져버린, 그래서 왜 또 이즈음 다시 외설과 예술의 쟁론인가 하는 역비판 대상이 될 만큼 이들의 이름은 이제 솔직히 질릴 정도로 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외설, 주조의 여전한 꼬리표? 예술과 표현의 자유를 빙자한 하드코어 유통욕구의 예비방출? 소프트코어와 하드의 전략적 동거? 사회계약론적 합의 도출을 의식한 문화적 이반과 문자 및 영상매체의 항거? 문화상품으로서의 가치재창출과 재생산구조를 의식한 임의적 스캔들라이제이션?-31쪽
발음조차 크게 차이나지 않는 외설과 예술의 병치는 결국 그 배치나 사용 의도의 고의성 여부를 떠나 자칫 둘 가운데 하나는 극히 불온하며 바람직스럽지 못한 메뉴임을 주입시키려는 또 하나의 폭력적 파시즘으로 이 땅에 뿌리깊이 자리한다. 그리하여 모랄리티의 인간적 엄존이 무시당하거나 사회집단 고유의 도덕적 자기통제 자체가 자율신경에 의해 적합히 담보되지 않을 경우, 국가는 늘 개입하거나 처벌공간을 향한 임의동행 주체로 나설 만반의 준비가 끝난 뒤임을 과시하고 있던 터였다. 이러한 사고는 결국 도덕적 판단기준뿐만 아니라 사회정의를 판가름하는 척도의 하나로까지 발전하는 기이한 양상을 낳는다. -32쪽
성정치적 지배논리 확산은 고스란히 하드코어와 소프트코어 사이의 이상스런 균열논리를 양산해낸다. 사실상 갈라지거나 찢어져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던 단위들이었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하드코어의 지하화와 소프트코어의 정치적 편승으로 구체화된다. 여기서 말하려는 지하화와 정치적 편승개념은 사실상 권력의 억압과 이를 강력히 의식한 문화생산 주체들의 합리적 선택 결과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막상 이들 사이의 현실관계가 진정 생존을 위한 전략적 공모인지, 아니면 비동시적 요소들의 동시적 혼존이거나 필연을 가장한 우연적 변인들의 유약한 결합인지는 분명치 않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는 수 없이 잠시 끌어안고 있는 불안한 공존인지, 혹은 아무 상관없는 단위와 아웃풋의 강제 진열인지 의문 그 자체는 풀기가 매우 모호하다. -39쪽
자신의 존재양식에 관한 그 어떤 관심에도 아랑곳없이 에로 비디오는 하드코어와 소프트코어의 정치적 중재수단으로 이 땅에 자리한다. 동시에 이 땅의 대표적 영상 소프트코어임을 자처한다. 그것은 일단 하드코어의 급진성을 강력히 의식하되 소프트코어의 유연성을 내세움으로써 권력과의 타협점을 끝없이 모색한다. 물론 여기서 정치적 중재라 함은 인적, 물적 공세에 기반한 실질적,가시적 전략수행의 부산물로 구체화된 게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중문화의 간접 잠식과 장르별 공존을 의식한 시장점유 방식의 우회성을 여지없이 반영한다. 뿐만 아니라 예술적 공헌이나 문화적 기여 따위의 공공담론을 의식할 겨를 없이 치고 빠지거나 챙기고 다시 만들 궁리를 하는 동안 자의든, 타의든 유통망에 인입된 인구들에게 모종의 잠정적 배설감을 제공하고 그로써 일정량의 대리만족과 사후 예감을 성적으로 담보한다는 점에서 그 공격 효과 역시 의외로 크다. -44쪽
'빨간 마후라'를 '빨간 보자기'로 바꾸거나 이미 업힌 뒤 다시 기대려는 의도는 예술성과 상업성 가운데 어느 한 쪽을 추구하려는 진/영의 정치진술과는 다른 의도를 반영한다. 그러니까 이들의 빠른 투자와 이탈전략 속에는 이미 작가주의의 심각함도 버거운 부담일 뿐 전혀 힘이 되지 않고 있고 대박용 상업주의가 추구하는 거대 인기의 자원으로 기술과 자본도 매력의 변수로 끼어들 틈이 없다.-54~55쪽
국가의 포르노그라피 인식이 늘 통제의 강박과 단속의 예고 속에서 스스로 경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도 그렇게 강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알고도 방임하고 일정한 도를 넘어설 때 '칼끝'만을 살짝 보이고 칼집에 도로 넣거나 살점 일부만을 도려 무작위로 상처낸 후 흐르는 피의 향기와 흔적에 놀라/알아서 치우도록 시장 주변의 공포효과만을 극대화시키려는 모종의 억지정책이 주류를 이루어 왔다면 그것은 다분히 정치적 합리주의의 기본틀을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81~82쪽
2장 한국의 문화통제와 하드코어 중/ 논쟁의 현장은 이데올로기의 잣대로 분할되는 치열하을 드러내기도 했고, 관찰과 분석주체가 성의 대립으로 한층 격화, 진화하기 어려운 양상으로 커져가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었다.(물론 서양의 경우로 국한되는 것이었지만 말이다.)페미니즘과 그 외곽의 입지, 그리고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를 중심으로 분화하는 포르노그라피의 지적 담론은 어느덧 제작과 유통 당사자들의 욕망이나 정치경제학적 자기 지탱논리와는 전혀 관계없는 별도의 논쟁구조를 튼실하게 확보해 나간다. -125쪽
급진적 반포르노그래피론이 페미니즘의 요새를 분열시키고 투쟁의 거점분산과 세력분할을 도모할 수 있었다면 궁극적으로 자유의지론자들까지 포함, 이들 모두를 또 다른 비판대상으로 몰아넣은 진영은 막상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사실상 좌파의 포르노 비판은 비교적 명쾌한 계기에서 출발한다. 주지하는 것처럼 마르크스의 사회철학과 부르/주아 비판론 위에서 자본주의 사회구조의 물적 토대를 근본부터 분쇄, 개선 시킬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지 않는 한 반남성적 포르노론을 주창하려는 급진주의자들이나, 이들과 의식을 공유하되 성적 자기본능의 문제를 투쟁과정에서 변별해내려는 자유의지론자들 모두는 근본은 놔둔 채 지엽에만 집착하려는 허구의 존재들일 뿐이라는 게 사회주의적 포르노 비판론의 기본이었다.-130쪽
이제까지 진행된 포르노 논의구조는 도덕론적 결정론, 즉 극단의 배격과 폐기론으로부터 성적 자기결정권을 둘러싼 남성과 여성 진영의 다양한 성정치적 주관주의, 그리고 적극적 수용과 교화를 목적으로 삼는 예외적 예찬과 순수를 바탕으로 삼는 폭력적 저항 담론에 이르는 등 일련의 진동과 왕복의 궤도를 반복하는 것들이었다. 그들은 각기 자신의 정당한 성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변명하거나 타자의 논리에 제동과 반격을 가하는 진지한 사고를 잃지 않았고, 추종과 동의의 부피와 관계없이 논리적 자존의 세계를 고수해 왔다.-146쪽
에로물이라 지칭하는 개념은 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본격적인 핑크화 경향에 편승, 노골적인 하드코어의 유포를 차단, 대행하고 민중부문의 문화적, 감각적 욕구를 원색적으로 해소하는 대리매체로 작동한다. 따라서 그것은 곧 성인물이란 용어와 이음동어의 용례로 유포되기 시작했고, 노골적으로 지하 유통된 하드코어 포르노그라피나 그 복제망을 은폐하면서 문화적 두둔의 매체로 움직인다. 뒤집어 보면 복제 포르노의 대속장치이자 감시와 처벌주체인 권력의 의도적 비의도성을 노골적으로 변명해주는 편리한 도구로 이들 매체는 본격 기능한다.-183쪽
유감스럽게도 이 나라 문화지평 안에서 음란과 외설의 반어는 건전이란 형용사였다. 한번 더 뒤집어 말하면 이 땅에서 음란은 건전치 못한 일체의 것들이었고, 건강하지 않은 생각과 행동, 인식과 언동, 혹은 자세마저 그것은 다 외설적이거나 방탕한 기류에 편승하려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 공권력이 음란성이란 편리한 잣대 하나만으로 정치적 통제력을 확장할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는 주지하는 것처럼 청소년에 대한 유해성 차단과 장치다.-185,186쪽
대체 음란성과 유해성이 별다른 여과장치 없이 등치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무엇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음란물의 유통과 청소년 의식발달의 저해? 지하유통을 통한 시장의 황폐화와 여리고 순수한 10대들의 교육적 역기능 확장? 학업의 저해와 성의식 왜곡의 자동적 등치? 옐로우 미디어의 범람과 사회질서 유기의 일방성, 무책임성 강화? 국가의 직무유기와 지역사회의 혼돈 지속?-192쪽
온라인상의 하드코어가 무분별한 폐쇄성이나 배타적 공간을 요구한다면, 오프라인상의 소프트코어는 제한적 음란성과 유약한 본능 충족의 아쉬움을 유통과 수요 촉발의 원천으로 삼는다. 영상의 하드코어가 다 보여주고 모조리 까발려버림으로써 욕구의 처참한 재생산을 촉발하는 데 관심 기울이는 것과는 달리, 소프트코어를 주조로 삼는 성인물은 성애의 현장을 차마 다 드러내지 못하는 대신 미진한 욕구의 중복 충족을 통한 독자적 문화양식의 창출을 도모한다. 그것이 지하 B급 비디오 양식이든, 아니면 별도의 빨간 딱지든 이/미 격조와 고상함에서 자유로워진 성인물들은 대사와 색상, 풀롯과 감흥, 그리고 의상과 조명이란 영화적 기본 변수와도 굳이 엄격한 관계를 지키려 들지 않았다.-208~209쪽
몇 가지 사법적 준칙만으로 통제와 자율의 기틀을 다잡기 어려울만큼 이미 거대하게 커져버린 음란물 유통시장이나 자본주의 기층문화와 모호하게 겹쳐진 환경의 윤곽은 사실 권력이 헤집고 들어가 질서를 외치고 범법을 색출한다는 것 자체가 극히 무모한 일임을 잘 반증한다. 그것은 성인 전용의 핑크산업 통계를 위해 국가의 공권력이 단순한 경로로만 집행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그리고 등급을 마련하여 유통과 관람을 제한하려는 규제안 작성의 행정적 기초로 활용되거나 시민사회를 향한 국가의 경고를 대집행하려는 치밀한 의도 또한 적절히 은폐하고 있었다. 이는 곧 은근한 공포효과의 확산과 정치적 학습효과의 유포를 절충,배합하려는 국가의 의도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일이었다.-220쪽
황색매체의 범람과 이들을 통한 음성적 정보 컨텐츠의 교류를 차단하려는 정부의 개입은 일단 건전성과 계몽성이라는 보수적 기준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려 하지 않는 자기엄숙성을 전제로 깐다. 게다가 정부의 입장은 늘 단호하며 한치의 오류도 인정할 수 없다는 자기완결성 혹은 무결점주의의 강박을 통해 한층 근엄하며 공포효과의 예비를 암시하려는 모종의 긴장구도 또한 배제하지 못한다. 이러한 자세는 바로 정치행정적 경직성과 적실성 약한 완벽주의 사고체계를 양산해낸다. -221쪽
음란의 형식이 영상 미디어를 거치든 아니면 인쇄매체로 전달되든 국가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본능 구가를 허용할 수 없다고 공언한 당국의 통제 도구는 물론 권력이다. 이를 더욱 공고히 포장하고 강제적 적합성을 부여하기 위해 권력이 법체계 보완과 구속력을 담보하려 드는 것도 논란의 여지는 없다. 강제력을 동원하여 서가에서 색깔 있는 책들을 솎아내고 압수,수색하거나 인터넷망을 역추적하여 하드코어의 임의(혹은 악의적)유포를 적발해내는 힘의 사용 기반은 크게는 사회윤리이고,좁게는 질서유지를 핑계삼는다.-265쪽
끝간 데 없이 벗기고 질펀하게 향락의 현장을 전달하려는 사람들과 숨든 도망다니든 그들의 작업결과를 기어이 보고 즐기겠다는 시각적 쾌락주체의 본능적 공모는 어떻게 맞아떨어지는 것일까? 만드는 이들과 보는 자들 사이의 계약론적 관계가 감각적 합의와 이윤 축적으로 기막하게 맞바뀌는 이익 교환으로 설명된다면, 이들 사이를 불특정하게 파고드는 국가의 정치적 의도는 대체 무엇일까?-268쪽
90년대 초에도 음란과 외설의 변별보다 무의식적 동일시 효과와 그 의도치 않은 문화적 해악이 암시되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 자신뿐 아니라 선진자본주의 국가군 역시 명쾌한 분류기준이 없고, 그에 따라 해석과 계도의 문화 인프라가 있을 수 없다는 무의식적 안일의 사회심리를 말해 주기도 했다. -29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