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수종과 나비
장 도미니크 보비 지음, 양영란 옮김 / 동문선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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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종과 나비

: Le Scaphandre et le Papillon

장 도미니크 보비(Jean-Dominique Bauby) 지음 | 양영란 옮김 | [동문선]

 



내부로부터 갇힌 자가 바라본 자신의 몸과 세계, 그리고 존재증명

 


사랑스러운 가족과 사회적 성공을 거머쥔 한 남자가 있었다.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찾아온 불가항력의 사건으로 이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면 당사자는 어디에서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게다가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단지 왼쪽 눈꺼풀을 깜빡이는 일과 왼쪽 부분의 입으로 반쪽짜리 미소를 지을 수 있을 뿐이라면 말이다. 이 불가항력의 사건은 실제로 한 남자에게 발생한 일이었다.


 

장 도미티크 보비는 1995128일 당시까지 세계적인 패션잡지 <Elle>의 편집장이었다. 멋지게 차려입을 줄 알고, 문학과 스포츠카를 사랑했으며, 사회에도 영향력을 가졌던 남자였다. 사건 당일 그는 BMW신차의 시운전을 하며 비틀스의 노래 내 삶 속의 어느 하루 A day in the life'를 듣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모습은 보비가 정상인으로 기억하는 자신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갑자기 어지러움을 느끼며 쓰러진 그를 살펴본 의사는 뇌일혈이란 진단을 내렸다. 3주 동안의 혼수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았지만, 전신 마비 상태로 깨어났다.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번개를 맞거나,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일명 -인 신드롬 locked-in syndrome'으로 불린 이 증상으로, 의식은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전신이 마비된 몸속에 영원히 유폐되었다.


 

의식이 깨어난 후 사망에 이르기까지 전신마비 상태로 15개월이라는 짧은 생애를 더 살았던 보비는 대략 반 년 남짓한 기간 동안, 자신이 글자들의 빌보드 차트라고 유머스럽게 부른 글자배열판과 왼쪽 눈꺼풀을 깜빡거리는 행위만으로 사람들과 소통했다. 오늘 만난 잠수종과 나비는 이렇게 태어났다. 이 책은 한 순간에 자신이 누리던 모든 것에서 멀어진 한 인간이, 고집스럽게 자신을 찾고 세상과 소통하고자 했던 희망과 비통의 기록이다.


 

의사들이 자신의 증상을 -인 신드롬이라 불렀을 때, 저자는 자유로운 의식을 상징하는 나비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흐느적거리는몸을 심해 다이버들이 사용하는 잠수종(diving bell)에 비유했다. 엄청나게 무거운 잠수종 속에 들어가면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다. 물 밖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겠다. 43년 동안 온전한 신체로 살다가 어느 날부터 이 무거운육체 속에 갇힌 영혼으로 지내야만 했을 저자의 삶을 상상해내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몸 혹은 육체라고 불리는 대상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리고 나의 의식 혹은 마음이라 불리는 개념도 떠올려본다. 나는 흔히 나의 몸과 마음/정신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나의 육체가 갑자기 제 기능을 멈추는 사태를 겪었다면, 나는 무엇인가? 내 코에 앉은 파리 한 마리도 쫓지 못하는 존재가 되는 것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들을 곁에서 만지고, 끌어안을 수도 없다면 말이다. 게다가 정상적으로 침을 삼킬 수조차 없어서, 가족과 지인들 앞에서 흘러내리는 침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면, 과연 나라는 존재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표현대로 우리의 은 그저 하나의 그릇에 불과한 것일까?


 

이 책은 비장애인의 입장에서 장애인을 바라본 시선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를 보여주는 보기 드문 기록이다. 특히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자는 오랜 시간 비장애인의 영역에 있다가, 그 경계를 넘어 장애인의 영역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운명의 장난이라도 이런 비통한 사태가 있을까. 한순간에 뒤바뀐 한 사람의 시선은 나에게 완전히 새로운 관점의 전환을 보여주었다. 장애를 안고 살았던 짧은 시기에 저자가 남겼던 체험의 기록은 내부로부터 감금된 자가 자신의 몸과 주변을 돌아보고, 세상을 향해 소통하고자 했던 한 사람의 존재증명이었다.


일상을 누리지 못하게 되면서 저자의 의식이 마주한 것은 심연과도 같은 깊고 광막한 절망감이었다. 그는 불구가 된 자신의 몸을 바라보고, 전신마비를 겪고 있는 장애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 말한다. “날개 꺾인 새, 목소리를 잃은 앵무새. 불길한 전조의 새로 자신을 표현하는 동시에, “우리들이 병원의 풍경을 망치고 있음을 나도 잘 안다”(53)라고 잠수종 속의 의식은 표현했다.


 

병원에서 어느 날 유리에 비친 자신의 끔직한몰골을 보고 저자는 미친 듯이 웃어댄다. 그러나 육체라는 굴레에 갇힌 상태에서, 그가 그렇게 웃어댔다는 사실을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고개를 젖히고, 호탕하게 소리 내어 웃을 수도 없었을 테니까. 그는 이렇게라도 해야 자신이 감당해야 했던 불운을 농담으로라도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44)라고 고백한다.


 

저자가 냉혹한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며 또 배워야 했던 것은 일종의 체념을 배우는 일이었다. 자신의 몰골을 거울에서 발견했을 때 웃을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일요일에는 찾아오는 사람도 없기에 그는 더욱 고립된 자신의 모습을 기록했다. 비장애인으로 살아가던 시절, 아마도 저자는 신랄한 유머감각을 보유한 사람이었을 듯하다. 거대한 불운의 한 가운데에서도 그는 완전히 유머감각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가 물리치료사의 안마를 받는 날, 자신을 국제 사이클 대회를 앞둔 자전거 경주계의 다크호스로 상상한다. ‘물리치료사가 고된 전지훈련으로 파열된 자신의 근육을 불어주고 있는 중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다만 이 유머 감각은 점차 새로운 체념으로 바뀌어 간다.


 

극적인 삶의 격변 사태를 경험한 사람에게 그 이전에 누리던 일상은 이제 이례적이고 소중한 순간이 된다. 아버지의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아들 딸의 축하를 받은 그는 이 강요된 기념일이 얼마나 소중해지는 순간인지를 일러준다. 자신이 새로운 곳으로 떠나기 전에, 이런 말들을 가족들에게 꼭 해주고 싶었을 듯싶다. 다만 팔을 들어 아이들을 안아줄 수 없다는 좌절감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에서 그가 짊어지게 될 삶의 무게를 간접적으로나마 공감하게 되었다. “일요일은 지루한 사막과 다름없다”(146)라고 언급했을 때, 그는 이미 일요일마다 찾아오는 극한 고립감과 두려움에 체념하고 받아들이기를 배워야 했던 것이다.


 

잠수종이 한결 덜 갑갑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면, 나의 정신은 비로소 나비처럼 나들이 길에 나선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다.” (16)


열쇠로 가득 찬 이 세상에 내 잠수종을 열어 줄 열쇠는 없는 것일까?” (188)

 


저자 장 도미니크 보비는 갇힌 의식이 되어 짧은 병원 생활을 했다. 오로지 눈꺼풀만을 움직여서 한 인간의 몸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며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 그의 비통한 기록은 나에게 완전히 새로운 시선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그가 잠수종으로 표현한 육체의 욕구와 바람, 몸에 새겨진 기억의 편린을 이야기 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하루아침에 바뀌어버리는 유일무이한 사태 앞에서 저자는 자신을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살아 있는 한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았던자신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그에게 지금 내가 꺼낼 수 있는 건 숙연함과 경외의 감정이다



"발뒤꿈치가 아프다. 머리는 망치로 얻어맞은 듯하고, 온몸은 잠수종 속에 갇힌 듯 갑갑하게 조여온다." (13)

"지금 현재로서는 끊임없이 입 속에 과다하게 고이다 못해 입 밖으로 흘러내리는 침을 정상적으로 삼킬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 기분일 것 같다." (27)

"목욕할 때와 마찬가지로 내 낡은 조끼를 입을 때면 여러 가지 추억이 고통스럽게 내 기억을 되살린다. 그렇지만 나는 이러한 현상을 계속되는 삶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고집스럽게 나 자신이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32)

"그렇게라도 해야 내 운명을 바꿔 놓은 그날의 사고 이후, 줄곧 내가 감당해야 했던 불운을 농담으로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44)
-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몰골‘을 보고 미친듯이 웃어댔다는 저자의 고백

"다만 감각적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머릿속에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맛과 냄새에 대한 기억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기억이야말로 감각의 무궁무진한 보고이다." (56)

"물리치료사의 안마를 받는 동안이면, 나는 어느 새 다음날에 벌어질 프랑스 일주 국제 사이클 대회를 앞둔 자전거 경주계의 다크호스가 된다. 물리치료사는 고된 전지훈련으로 파열된 내 근육을 풀어주고 있는 중이다." (168)
- 저자에게 남은 일말의 체념섞인 유머

"열쇠로 가득 찬 이 세상에 내 잠수종을 열어 줄 열쇠는 없는 것일까? (...) 다른 곳에서 구해 보아야 겠다. 나는 그곳으로 간다." (188)
- 베르크 플라쥬, 1996년 7-8월에 남긴 저자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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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6-07 21: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론 물리학에서는 이 모든 세상이 시물레이션이라는 이론이 아주 지지 받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곳은 어느새 과거가 되는 걸 보면 끄덕끄덕하게도 되고요.
나의 기억 속에 도대체 나는 있었던지. 어차피 기억도 선택적이라고 하는 마당에요.
격지 않으면 뭐라고 말 할 수 없지만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는 책 같습니다 :-)

초란공 2021-06-07 20:36   좋아요 2 | URL
정말로 가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내가 사는 곳이 진짜인가? 이런생각이요. 그래서 영화 <미나리>에서 윤여정 배우가 손자한테 중요한 팁을 알려주는 거겠지요. 화장실에서 쉬할 때 꼭 볼을 꼬집어보라고요 ㅋㅋㅋ

그레이스 2021-06-07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몸을 잠수종으로 의식을 나비로 비유했네요. 나들이 길에 나선 정신.... 아름답지만 안타까움이 전해집니다.
책 도서관에 있어서 빌려오려구요.
책 소개 감사합니다 ~

초란공 2021-06-08 14:35   좋아요 1 | URL
써놓고 보니 장애와 몸에 관한 문제를 막연하게만 본 듯 싶네요. 그래이스님은 어떻게 읽으실지 궁금합니다~!

그레이스 2021-06-08 14:36   좋아요 1 | URL
빌려왔어요;;
 
땅의 예찬 - 정원으로의 여행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안인희 옮김 / 김영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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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예찬 (Lob der Erde)

: 정원으로의 여행

한병철 지음 | 안인희 옮김 | [김영사]


 

 

철학자-정원사의 신학, 행복한 경험의 시론

: -정원-꽃에 대한 사랑 고백

 


니체와 하이데거, 푸코와 베냐민을 이야기하고, 아름다움과 에로스에 대해, 신자유주의의 폐해와 인간의 소외의 문제, 고전과 현대문학을 넘나들며 우리가 사는 세계를 진단하던 재독철학자 한병철이 이번에는 정원사가 되었다. 언젠가 매일 정원 일을 하기로마음먹은 저자는 3년 동안 땅을 일구며 자신만의 비밀 정원을 가꾸어나갔다. 땅의 예찬은 저자가 정원을 가꾸면서 경험한 땅에 관한 명상이다. 철학, 미학, 문학을 이야기하던 철학자가 정원사로서 자신의 내밀한 생각을 고백한 기록이기도 하다. 나는 이 책을 땅-정원-꽃을 키워드로 하여 읽어보고자 했다.


 

: 구원의 관문

 

철학자에게 땅은 무엇인가? 그에게 땅이 예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땅이 행복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다른 저서에서 지적했던 신자유주의의 영향, 특히 디지털화를 다시 소환한다. ‘디지털 digital손가락을 의미하는 디기투스 digitus'에서 온 말(75)이다. 하나, 둘 셀 수 있는 것, 헤아리기에 기반한다. 그러므로 디지털화는 모든 대상을 정량화하여 비교가능하게만든다(29). 저자에 따르면 땅과 관련하여 고려할 때, ‘디지털화완전한 땅을 사라지게’(28) 하여 인간을 땅으로부터 분리시킨다. 그 결과 우리는 조상이 지니던 땅에 대한 섬세한 감성을 잃고, 땅이 무엇인지 더는 알지 못하는’(31) 존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저자는 땅이야말로 인류가 디지털화에 저항하고 우리의 감각과 기억을 되돌려줄 수 있는 대상이라고 본다. 곧 철학자에게 땅은 예술가, 놀이하는 여인, 유혹하는 여인이면서 감사의 감정을 일으키는 존재’(182)이기에, 그에게 땅은 행복의 원천이다. 여기에서 구원에 관해 저자가 인용한 하이데거의 한 마디는 의미심장하다. “구원이란 위험에서 구해낸다는 뜻만이 아니다. 무언가를 풀어주어 본래의 본질로 되돌린다는 뜻이다.”(32) 그러므로 정원사가 된 철학자에게 땅은 본래의 본질로 되돌아갈 수 있는 구원의 관문이 된다. 저자가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며 한국에서 많은 식물의 씨앗을 가져와 심고 키운 일 역시 병든 아버지가 존재하는 고향, 자신의 본질에 되돌아가고자 하는 자연적인 행위일 것이다. 이렇게 철학자가 땅을 만나고, 땅과 연결되는 공간이 바로 정원이다.


 

정원: 사랑을 배우는 공간

 

정원사가 된 저자에게 정원이란 장소는 감각성과 물질성이 넉넉한공간(22)이다. 다양한 관목과 꽃을 돌보면서 삶과 죽음, 소멸과 부활을 마주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또 정원은 노동을 통하지만 오히려 삶의 고난에서 벗어나 원기를 얻는’(79) 공간이다. 책의 정황으로 볼 때, 저자가 겪는 삶의 고난은 머나먼 한국에서 소멸해가는 아버지와 관련이 있을 테다. 그래서였을까.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부터 기호학자, 문학이론가였던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을 떠올린다. 이 책은 바르트의 어머니가 사망한 직후, 다섯 살이던 어머니가 겨울 정원에 서 있는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시작된 애도의 노래다. 사진을 통해 사랑하는 존재의 부재를 인식하며, 떠나간 사람에 대한 사랑을 고통스럽게 확인한다. 바르트가 어머니의 사진을 끌어안고 숭배하듯, 정원사도 병상에 있는 아버지 곁에서 머물며 산에서, 길에서 만난 꽃들을 신령들께 제물로 바치고, 온 마음을 다해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철학자가 정원일을 하면서 배우는 것은 단연코 사랑하기이다. 정원에서의 시간은 타자의 시간’(23)이며, ‘사랑을 담은 인식이야말로 꽃을 구원한다(25). 나아가 꽃에 물주기는 꽃들과 함께 머무는 것’(76)을 배우는 일이다. 정원일은 단순한 일이 아니라 명상이며, 정적 속에 머무는 일’(175)이기도 하다. 정원사는 대지를 체험하며 땅과 만난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인의 신은 이다. 흔히 물신이라 부르는 이 상징적 존재는 땅, 아름다움, 선을 완전히 파묻어버렸다. 반면 정원사-철학자에게 정원은 디지털화로 잊힌 현실을 되찾게 해주고, 경험과 기억의 언어가 머무는 곳, 나아가 신을 발견하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정원사가 정원에서 배우는 사랑하기는 원자화되고 소외된 인류가 대지()와의 관계를 새로 맺는 일, 단절된 연대의 부활을 의미할 것이다.



: 그늘에서 피는 꽃과 늦둥이 꽃에 대한 애착

 

철학자-정원사인 저자는 정원이 신을 믿게 만든 성스러운 장소’(128)라고 말한다. 그는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면서 겨울에도 꽃을 볼 수 있기를 바랐다. 겨울꽃을 심고, 겨우내 동백꽃에는 천으로 감싸주며 돌보았다. 책을 읽으며 알게 된 것은 저자가 겨울꽃, 특히 그늘을 좋아하는 꽃과 느릿느릿 조심스럽게 피어나는 늦둥이꽃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그늘을 좋아하는 꽃은 이른바 그늘식물인데, 저자는 수국과 옥잠화를 여러 번 언급한다. 그가 이 꽃들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이유는 이들이 그늘을 환하게 밝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밝은 빛이란 의미를 지니는 저자의 이름을 떠올리며, 그가 수국을 특히 닮았단 생각을 했다.

 

늦둥이 꽃은 옥잠화처럼 계절에 늦게개화하는 꽃을 가리킨다. 죽음과 탄생의 멜랑콜리가 뒤섞이는 낙엽 쌓인 정원에서 대부분의 꽃들이 시든 후 두 번째로 개화하는 이런 꽃들에 저자는 무엇보다 애착을 보인다. 이들은 겨울 한복판에 두 번째 봄을 정원에 불러들이는 존재들이다. 수국을 비롯하여 옥잠화는 함께 있는 다른 존재들을 압도하며 몰아내거나 무성하게 자라지 않는다. 기꺼이 낯선 타자들과 함께하며 제 존재를 스스로 밝히는 존재이기에, 저자는 수국과 옥잠화를 기꺼이 사랑한다. 저자에게 정원이란 공간이 신을 믿게 만든 성스러운 장소가 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겨울꽃들은 숭고하다 못해 신적이다. 그들은 내 정원에서 신을 체험하게 하기 때문이다(126). 그러므로 저자에게 꽃(특히 겨울꽃)은 신의 현현(顯現)인 셈이다. 땅의 예찬이 정원사의 신앙고백이자 철학자의 신학이 되는 이유다. 하지만 무엇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꽃과 정원의 존재, 그리고 땅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철학자-정원사인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가 땅으로 되돌아가, 땅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땅과 연결되기를 희망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 희망하기가 바로 정원사의 시간방식(180)이다. 정원사는 새로 심은 씨앗이 내년에 싹을 내고 꽃이 피기를 희망하며 기다린다. 이 희망은 정적 속에 머물며 기다리는 가운데 미래의 시간, 타자의 시간에 머문다. 그렇기에 저자는 내 땅의 찬가는 다가오는 땅을 향한 것”(180)이라고 단언한다. 책을 읽으며 문득 우리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본다. 많은 이들이 땅을 투기의 대상으로만 바라본다. 우리는 땅을 착취하고 경외심을 거둠으로써 땅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자연과의 교감이나 연결고리가 끊어진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저자는 대지에 대한 감성, 상상력의 언어를 잃은 현대인들을 위해 그가 정원일을 통해 배운 아름다움과 경험한 것들을 땅에 대한 사랑의 찬가로 노래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땅에 대한 섬세한 감성을 모두 잃어버렸다. 땅이 무엇인지 더는 알지 못한다." (31)

"땅으로 돌아가기란 행복으로 돌아가기가 된다. 땅은 행복의 원천이다." (32)

"우리가 땅에서 떨어져나간 것의 쓰라린 대가가 어쩌면 죽음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67)

"디지털 문화는 인간을 작은 손가락 존재로 축소시킨다. 디지털 문화는 헤아리는 손가락에 기반을 둔다. 하지만 역사는 이야기다. 역사는 헤아리지 않는다. 헤아리는 것은 역사 이후의 범주다." (75)

"오늘날 헤아릴 수 없는 것은 모조리 존재하기를 멈춘다. 하지만 존재는 이야기이지 헤아리기가 아니다. 헤아리기에는 역사이자 기억인 언어가 없다." (76)

"꽃에 물주기는 꽃들과 함께 머무는 일이다." (76)

"땅의 낯섦, 다름, 그 독자적 생명에 나는 자주 놀라곤 했다. 육체노동을 하면서 비로소 나는 땅에 내밀히 알게 되었다. (...) 정원에서 나는 삶의 고난에서 벗어나 원기를 얻는다." (79)

"그늘을 환하게 밝히는 것은 수국이다. 수국은 도취시키는 꽃이니 나는 그것을 사랑한다." (106)

"겨울꽃들은 숭고하다 못해 신적이다. 그들은 내 정원에서 신을 체험하게 하는 것" (126)

"우리는 고요함과 침묵을 잊었다. 나의 정원은 고요함의 장소. 정원에서 나는 고요함을 만든다." (146)

"땅은 아름답다, 아니 거의 마법을 지녔다. 우리는 땅을 보호해야 한다. (...)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보호라는 의무를 지운다. 나는 그것을 배웠고 경험했다."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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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이후 사이언스 클래식 14
스티븐 J. 굴드 지음, 홍욱희.홍동선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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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이후 (Ever Since Darwin)

: 다윈주의에 대한 오해와 이해를 말하다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 지음 

 홍욱희·홍동선 옮김 | [사이언스북스]

 


[독서일기] 스티븐 제이 굴드와 처음 만나다


최근에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1941.09.10-2002.05.20)의 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다. 여러 책에서 끊임없이 언급되어 이름만 익숙했던 과학자였는데,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처음 읽을 책으로 1977년에 출간된 굴드의 첫 에세이집 다윈 이후 Ever Since Darwin을 골랐다. 굴드의 프로필을 보다가 그의 기일이 바로 오늘(05/20)인 것을 알게 되어, 짧은 독서일기를 써보기로 했다. 오늘이 19주기가 되는 셈인데, 굴드는 암으로 만60세를 막 넘은 시기에, 활발히 글을 쓰고 연구하던 학자로는 안타깝게 일찍 세상을 뜬 셈이다.


처음 읽기 시작한 다윈 이후(1977)는 굴드가 1974년부터 2001년까지 27년간 미국자연사박물관에서 발간하는 월간지 <자연사>에 연재한 300편이 넘는 에세이 중 초창기 글에 해당한다. 이 책이 나온 1977년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초판(1859)이 나온 지 118년 째 되던 해였다. 책을 읽으면서 놀랐던 대목은 다윈이 주장한 자연 선택 이론이 사실상 논쟁의 종지부를 찍었던 것이 1940년대였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는 이미 유전자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 많은 것이 알려져 있던 시기였음에도 말이다. 나아가 DNA의 이중나선 구조가 발견(1953)되기 불과 10여 년 전이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이처럼 많이 언급된 주제이면서도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한 오해를 낳았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겠다. 다시 말해서 당대에는 다윈조차도 진화의 보다 포괄적이고 명료한 이해를 위한 지식(이를테면 분자수준에서의 진화 현상에 대한 이해)이 아직 온전하지 못했던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겠다.


이 책에서 굴드는 다윈과 진화론에 얽힌 오해를 다시금 의혹의 눈길로 검토한다. 또 지질학과 고생물학을 연구하는 학자답게 생명의 진화에 대한 주제뿐만 아니라, 인류의 진화, 그리고 지구의 진화에 대한 논의도 이어나간다. 다윈의 진화론 이후 격렬한 논쟁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보다 정교하고 이해의 폭이 넓어진 이론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굴드는 기본적으로 이런 작업을 30년 가까이 지속했다. 그는 무엇보다 다윈주의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자 했던 것 같다. 매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놀라운 과학적 사실들이 발견되어 기존의 과학지식에 더해진다. 80년대 이후 새롭게 더해진 과학적 사실과 이해를 반영한 굴드의 견해는 이후의 저서를 계속 읽어나가면서 참고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읽은 부분(주로 1부 다윈주의)에서는 다윈 이론의 핵심을 이야기한 부분을 기억해두기로 한다

다윈 이론의 핵심은 자연 선택이 단순히 부적자(the unfit)를 제거하는 것이 아닌, 진화의 창조적 추진력이라는 점에 있다. 더구나 자연 선택은 반드시 적자(the fit)를 만들어 내야만 한다.”(8)


굴드는 4장에서 이 표현을 조금 바꾸어 다시 언급한다.


다윈주의의 본질은 자연 선택이 적자를 창조한다는 주장에 담겨 있다. 변이는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그 방향은 임의적이다. 그것은 소재를 공급해줄 뿐이다. 자연 선택은 진화라는 변화의 방향을 지시한다. 그것은 선호되는 변이 종들을 보전하고 점진적으로 적응도를 쌓아 올린다.”(57)


자연 선택은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국지적 적응(local adaptation) 이론이다. 거기에는 완성의 원리가 없으며, 전반적인 개선의 보장도 없다.”(58)


이처럼 굴드는 다윈주의에 주목하는데, 자연 선택 개념의 핵심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개체들을 제거하는 부정적인 역할보다는 이 개념의 창조성에 방점을 둔다. 나아가 진화의 메커니즘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국지적 적응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오늘은 처음 굴드의 책을 읽기 시작했으므로 이 점만 언급하기로 한다.


독자는 각자의 관심사와 당면한 문제를 책에서 발견하기 마련이다. 굴드의 글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지점은 그의 (다윈주의 Darwinism가 아니라) ‘다원주의’(pluralism)적 시각이었다. 대개 과학자들은 종교와 과학을 대립적인 구도에 놓고 종교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반면 굴드는 처음부터 비판 대상을 배제하지 않고, 고려할만한 주제들을 모두 링 위에 끌어들이고 있었다. 굴드의 에세이에서는 대상의 어떤 점들이 설득력이 떨어지는지를 하나하나 검토해가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예를 들면, 인류의 진화를 이야기하는 2부에서 저자는 진화적 변화의 은유 장치로서 사다리론관목론을 언급한다. 굴드는 진화가 종분화’(speciation)과정으로 새로운 종이 갑작스럽게출현하는 과정이 반복된다는 관목론을 지지한다. 반면 찰스 다윈의 관점은 사다리론에 해당하는데, 이 이론은 진화가 느리고 지속적인 변형을 통해 새로운 종이 나타난다는 시각이다. 저자는 이 두 개념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이론과 대척점에 있는 이론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자신의 이론이 왜 더 설득력을 가지는지 차근차근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런 저자의 학문적 자세는 비판 대상이 다윈과 같은 대가의 주장이기 때문에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관점으로 봤을 때 말이 너무나 안 되어 보이는 이론에도 똑같이 적용하고 있었다.


굴드는 1장을 마무리하며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신에 대한 외경과 자연 과학적 지식은 다 같이 소중히 다루어져야 한다. 생물계의 완벽한 조화로움이 사전에 계획되지 않았다고 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이 감소하는가?”(30) 처음 읽을 때는 주목하지 않았지만, 독서일기를 기록하면서 다시 훑어보니 이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과학자로는 보기 드문 모습인데, 굴드의 에세이에서 계속해서 드러나는 태도이기도 하다. 이 부분이 굴드의 글쓰기에서 하나의 특징으로 볼 수도 있겠다. 비판하는 대상의 위상을 단순히 축소하고 배제하지 않고, 대상 혹은 현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정말로 이해하고자하는 노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자는 이런 과정을 거쳐 스스로 판단을 내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굴드의 책은 절판이 많이 되어 구하기가 쉽지 않지만(절판되었다고 원가보다 높게 중고책을 판매하는 분들....그러지 마시길. 여러 출판사에서 절판된 책을 다시 출간해주셨으면 좋겠다), 앞으로 더 읽게 될 굴드의 에세이가 기대된다.



"다윈 이론의 핵심은 자연 선택이 단순히 부적자(the unfit)를 제거하는 것이 아닌, 진화의 창조적 추진력이라는 점에 있다. 더구나 자연 선택은 반드시 적자(the fit)를 만들어 내야만 한다."(8)

"다윈주의의 본질은 자연 선택이 적자를 창조한다는 주장에 담겨 있다. 변이는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그 방향은 임의적이다. 그것은 소재를 공급해줄 뿐이다. 자연 선택은 진화라는 변화의 방향을 지시한다. 그것은 선호되는 변이 종들을 보전하고 점진적으로 적응도를 쌓아 올린다."(57)

"자연 선택은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국지적 적응(local adaptation) 이론이다. 거기에는 완성의 원리가 없으며, 전반적인 개선의 보장도 없다."(58)

"신에 대한 외경과 자연 과학적 지식은 다 같이 소중히 다루어져야 한다. 생물계의 완벽한 조화로움이 사전에 계획되지 않았다고 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이 감소하는가?"(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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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모자 2021-05-20 14: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풀하우스>도 꼭 읽어보세요!

초란공 2021-05-20 15:34   좋아요 1 | URL
오~ 추천 감사합니다! 읽기 리스트에 포함!

초딩 2021-05-20 15: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어디 다른 책에서
단속평형을 강명 깊게 끄덕이며 봤습니다~~

초란공 2021-05-20 15:35   좋아요 1 | URL
저는 좀 더 읽어봐야 겠네요~ 기대됩니다^^

베터라이프 2021-05-20 1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판본이 복각판인지 새로 쓴 판인지 모르겠지만 이리 보니까 매우 반갑네요. 저는 범우사판으로 갖고 있는데 아마 2002년도 쯤 헌책방에서 구했을거에요. 이때는 허버트 스펜서를 잘 모를때라 그냥저냥 읽었는데 이젠 기억도 가물해서 한번 구해서 다시 읽어봐야겠네요. ^^ 하여튼 잘 지내시죠? 그러고 보니 범우사인지 범양사인지 가물하네요. 집에 가서 찾아봐야겠습니다 ㅋㅋ

초란공 2021-05-20 18:20   좋아요 1 | URL
책의 성격상 범우사 보단 범양사일 듯한한데요?^^ 하긴 70년대 나왔으니 40년이 넘었네요~

고양이라디오 2023-01-31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굴드팬 확인!ㅎ 저도 <다윈 이후>로 굴드책을 처음 만났는데 반갑습니다.

상대방의 의견도 충분히 존중하고 이해하는 굴드의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글쓰는 독자의 팩트체크와 번역가의 일에 대해 생각해보다

- 조지 오웰의 평론(문학을 지키는 예방책)을 중심으로

 



몇 달 전에 어느 블로거분이 내 블로그에 댓글을 달아 주셨다. 내가 딱 1년 전(2020516)에 올린 글에서 잘못된 부분(사실 내가 크게 실수한 것)에 대해 지적하고 수정해주신 것이다. 내가 이 댓글을 그동안 발견하지 못해서 몇 달간 방치되었다. 내가 올린 글은 조지 오웰의 평론집 책 대 담배(민음사, 2020)중에서 문학을 지키는 예방책이란 글을 읽고 적은 글이었는데, 바로 아래 부분이 문제가 되었다.

 

반면 작가들은 혹독하게 탄압받고 있다. 일리아 에렌부르크나 알렉세이 톨스토이 같은 문학 매춘부들이 막대한 돈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작가들에게 가치 있는 유일한 표현의 자유 같은 것은 박탈당하고 만다.”(책 대 담배, 38)

(내가 올렸던 글: blog.aladin.co.kr/712851116/11720954)


 

여기서 알렉세이 톨스토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가 아니었는데도 나는 조지 오웰이 비판한 사람이 레프 톨스토이로 착각하고 글을 썼던 것이다. 난 이 대목을 읽고 계속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글을 올릴 때까지도 나의 의혹에 대해 아무런 확인을 하지 않았다.

 

내 블로그에 댓글로 친절하게 알려주신 블로거의 설명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알렉세이 톨스토이와 레프 톨스토이는 다른 분이에요. 알렉세이 톨스토이가 문단의 창부라고 비난 받은 요인은 스탈린 정권을 찬양해서인데, 레프 톨스토이는 재정러시아 시대 사람입니다.

 

... 이 대목을 읽은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과거에 내가 남긴 독후기며 리뷰에서 자신 있게써댄 여러 의견들에는 또 얼마나 많은 오해와 헛발질이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글을 쓰면서 내가 떠올린 의혹들에 대해 확인하고 검토할 생각을 그동안 게을리하고 있었다는 점을 시인해야겠다. 여기에 나는 한술 더 떠서 역시 조지 오웰은 대문호 톨스토이까지 비판하는 것처럼 이 사람 앞에는 비판의 사각지대는 없었다라는 식의 어처구니없는 평까지 달아놓았던 것이다. 너무나 부끄럽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내가 틀린 부분을 알았으니, 이를 바로잡아야겠기에, 다시 기본적인 사실을 조사하여 나의 잘못을 바로잡기로 한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나는 온라인 서점의 서재든 개인 블로그이든 아무리 편하게 글을 올리는 공간이라고 해도, 글쓰는 사람이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인 불문율을 지켜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조금의 의혹이라도 있다면, 스스로 검증하고 검토해볼 것. 그리고 답을 알아내지 못하더라도 검토하는 시늉이라도 할 것. 나아가 전혀 자신이 없다면 내 글에 집어넣지 말 것! 나는 최소한의 의무도 소홀히 했던 것이다. 내 블로그에 댓글을 달아주셨던 분은 출판 분야에서 일하시는 분일까, 아니면 문학 전공자가 아닐까 싶다. 아무쪼록 나의 무지와 실수를 지적하고 바로잡아주신 점에 대해 감사를 드린다.

 

조지 오웰의 책은 많이 읽지 못했는데, 공교롭게도 나는 이번에 문제가 된 부분을 언급한 조지 오웰의 평론이 실린 평론집을 몇 권 소장하고 있었다. 나는 첫 번째 책으로 책 대 담배(민음사, 2020, 문학을 지키는 예방책제목의 글, 38), 두 번째 책으로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이론과실천, 2013, 첫 번째 책에 실린 글과 동일한 제목의 글, 341),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10, 문학 예방이란 제목의 글, 239)를 서로 비교해보았다. 과연 이 부분에 대해 번역자는 주석이나 추가 설명을 하고 있을지부터 살펴보았다.

 

조지 오웰의 평론집 세 권에 실린 동일한 글을 비교해보니, 흥미로운 점 몇 가지가 있었다. 우선 가장 먼저 나온 나는 왜 쓰는가에 이 대목에 관한 충실한 주석이 실려 있었다. 번역자의 주석을 여기 그대로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주석13, 239) Illya Ehrenburg(1891-1967). 러시아 및 소련의 작가이자 언론인. 소련 시절 많은 작품을 썼으며, 2차 대전 당시에는 소련을 선전하기도 했으나 스탈린과 거리를 두는 대담한 글을 쓰기도 했다. 전후에는 검열을 비판하는 소설 해빙기(1954)를 출간했고, 스탈린 치하에 금기시됐던 인물들에 대한 언급을 담은 회고록을 내기도 했다.

 

(주석14, 239) Alexei Tolstoy(1883-1945). 공상과학소설과 역사소설을 특히 많이 쓴 작가. ‘백작 동지란 별명으로 불리곤 했다. 스탈린 체제를 옹호하는 선전 글을 많이 썼기에, 러시아 귀족 중 거의 유일하게 소련에서 귀족 칭호를 공공연히 쓸 수 있는 인물이었다.

 


어떤가?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115)의 번역가 역시 이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자세한 주석을 남겨놓아 다른 독자가 나와 같은 오해의 소지를 명백히 없애주었다. 다만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본문에서 문단의 창부라고 언급하고 있는 대목은 해당 작가의 역할과 책임을 조지 오웰이 비판하고 있는 맥락이기 때문에, 에렌부르크의 경우 스탈린과 거리를 두었다는 행적 보다는 소련을 선전했던 과거 행적에 주목하여 좀 더 정리해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이 설명만으로는 조지 오웰이 왜 에린부르크를 그토록 비판했는지 이해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두 번째 책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이론과실천, 2013)의 경우는 어땠을까? 흥미로운 점은 번역자가 같은 대목에서 예렌부르크한 사람에 대해서만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

 


(341면 각주) 예렌부르크(Il'ya Grigor'evich Erenburg, 1891-1967). 우크라이나의 소설가이자 시인, 평론가.


 

이 책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의 번역가는 예렌부르크에 대해 간결하게 각주를 달아놓았다. 그러나 본문의 맥락에서 이 사람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정보를 알려주긴 해도, 맥락과 어떤 연관을 갖고 있는지 여전히 정보가 많이 부족하다. 나를 더 당황하게 만든 지점은 알렉세이 톨스토이에 대한 주석이 아예 없다는 점이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나처럼 알렉세이 톨스토이를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로 오해했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국문학을 전공한 번역자가 이 부분을 잘못 볼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가능성은 번역자와 해당 출판사의 편집자 모두 독자가 레프 톨스토이라고 오해할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너무 명백하니까 말이다. 아무래도 번역가나 편집자는 독자가 해당 인물에 대해 자세히 조사할 필요도 없다고, 레프 톨스토이가 아니라는 것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을 것 같다. 중년이 다 되어 문학을 읽기 시작한 나 같은 어설픈 독자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독자가 여기에서 과연 오해할 여지가 있을까 판단했을법하다. 다만 이 판본의 아쉬운 점은 예렌부르크에 대한 주석이 기계적인 부연 설명이 아니라, 독자가 맥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추가되었으면 하는 점, 그리고 알렉세이 톨스토이에 대해서도 주석을 달아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비교한 책은 민음사의 책 대 담배(민음사, 2020), 내가 직접 읽고 블로그에 독후기를 올리며 인용했던 바로 그 책이다. 이 책은 작은 총서 쏜살문고로 나온 판본으로 해당 부분(38)을 비롯하여 주석은 아예 없다. 나는 오스카 와일드의 오스카리아나를 비롯하여 쏜살문고 시리즈를 좋아하지만, 조지 오웰의 이 평론집(책 대 담배)에는 아쉬운 점이 많다. 조지 오웰의 글에 아무런 주석이 없어서, 그래서 나의 게으름(팩트체크를 하지 않은 것)을 보완해줄만한 장치가 아예 없었다는 것.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이제 책 대 담배를 한 번 읽었을 뿐인데, 책이 말 그대로 해체될 위기에 있다는 점이다. 책을 구입하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책을 소장한다는 것은 누구나 여러 번, 언제나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구입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 가벼운 판본들에 대해 열**들 출판사처럼 사철제본까지 바라지는 않겠지만, 여러 번 펼쳐보아도 책의 모양이 그대로 유지될만한 책을 만들어주셨으면 좋겠다. 내가 소장한 이 책은 한 번 읽었고, 이제 이 글을 쓰면서 여러 번 펼쳐보았는데, 종이들이 떨어져 나올 위기에 있다.

 

또 사족인 줄 알지만 오웰의 동일한 평론 제목에 대한 번역에도 할 말이 있다. 2010년에 처음 출간되어 2011년에 5쇄를 찍은 나는 왜 쓰는가의 해당 평론의 제목은 문학 예방(The Prevention of Literature)이다. 물론 모든 번역 작업은 번역자의 경험과 가치관에 따라 결정되는 문제이므로, 여기에 정답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시작해야 겠다. 다만 이 제목은 개인적으로는 너무 간결하고 함축적이어서 이 표현을 보고 어떤 내용일지 짐작해보기가 쉽지 않다. 반면, 2013년에 출간된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2020년에 출간된 책 대 담배에 실린 해당 글의 제목은 문학을 지키는 예방책으로 공교롭게도 동일하다. ‘문학 예방보다는 글의 내용이나 성격을 추측하기 친절하게 풀어 번역이 된 것 같다. 다만 영어 제목 The Prevention of Literature을 번역하여 이렇게 동일한 표현이 나왔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다.

 

정리해보자. 조지 오웰이 자신의 평론 The Prevention of Literature에서 비판했던 알렉세이 톨스토이는 레프 톨스토이와 다른 사람이며, 생존했던 시대마저 달랐던 인물이었다. 알렉세이 톨스토이는 스탈린 시대의 사람이었고, 레프 톨스토이는 재정러시아 시대 사람이었다. 독자마다 얇고 가벼운 판본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충실한 주석을 더 좋아하는 독자도 있다. 어느 것이 더 좋은지는 취향의 문제일 수 있다. 나는 후자의 취향에 가깝다. 다만 이번 기회에 배운 점은 아무리 가벼운 독후기를 쓰더라도 일말의 의혹이 있다면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써야 한다는 점이었다. 당연한 과정인데도,나는 이를 소홀히 했다. 이건 글쓰는 사람의 기본적인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임의 필요성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참고로 나처럼 글의 맥락에 맞는 번역가의 주석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조지 오웰의 평론집에 한하여 다른 독자들에게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10)를 우선 권하겠다.

 

 


라틴어 서적의 한글 표기에 관해

 

여기서 조지 오웰의 같은 평론을 언급한 김에 한 가지 더 추가해보겠다. 해당 평론(‘The Prevention of Literature’)의 앞부분에서 조지 오웰은 존 밀턴의 책 아레오파지티카을 언급하는데, 이 책제목 대한 표기가 눈에 들어왔다. 이 책 제목 Areopagitica는 나의 짧은 언어 지식으로 판단해도 분명히 라틴어 제목이다. 그리고 라틴어에서 g는 모두 //소리가 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서 나는 개인적으로 고전 라틴어 발음만 찾아보았다고 인정해야 겠다) 그런데 밀턴(1608-1674)의 시대에는 중세 라틴어를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이 시기에 g소리가 어떻게 바뀌거나 확장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중세 라틴어에서 g소리가 // 소리뿐만 아니라 // 소리로도 확장되어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 명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나의 부실한 고전라틴어 발음 지식만을 가지고 판단해본다면, ‘Areopagitica아레오파티카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한 답을 얻진 못했지만, 내 견해를 지지해줄만한 증거는 몇 가지 있다. 우선 박상익 교수가 연구하고 옮긴 아레오파기티카(인간사랑, 2016)였다. 박상익 교수(역사학)는 밀턴 연구로 학위를 받으신 것으로 알고 있고, 언론자유의 경전이라고 불리는 이 책을 전면재번역하여 개정판을 낸 분이다. 내가 중세라틴어 발음에 대한 지식이 없긴 하지만, 밀턴 전공자가 아레오파티카로 발음을 옮긴 것이 한 가지 간접적인 증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또 하나 참고해볼만한 증거는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 나오는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라는 문장이다(데카르트가 이 문장을 썼을 161911월 즈음). 여기서 이 문장은 코기토 에르고 숨으로 읽힌다. 따라서 g'에 대응하는 소리는 모두 //소리임이 분명하다. 데카르트의 시대 역시 분명히 중세 라틴어의 전통을 이어받아 사용했을 것이므로 Areopagitica의 발음표기는 아무래도 아레오파티카로 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 내 견해다.

 

사실 이 발음표기 문제는 먼저 언급한 인명을 착각한 상황만큼 중대한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언어 지식이 빈약한 이공계 전공자가 이 문제로 한 번 고민해봤다면, 이 평론을 번역한 어문학 전공자, 교수님은 당연히 이 점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특히 언제나 글을 쓰고 글을 다듬고 하는 인문계 전공자들이야말로 나보다 훨씬 더 민감하게 이런 부분을 검토하고, 라틴어 발음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시지 않았을까 추측만 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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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1-05-19 08: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이쿠 저도 초란공님 쓰신 글 보고 실수한 기분에 놀라서 나는 왜 쓰는가 찾아보니 같은 책의 리어, 톨스토이, 그리고 어릿광대의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의 그 톨스토이가 맞네요ㅋㅋㅋ알렉세이 톨스토이는 왜 선전선동가 질을 해서 사람 헷갈리게 하고 그래…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5-19 08: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쓰신 글에서 인용구만 바꾸시면 조지오웰이 성역도 없고 톨스토이 깐 것도 맞아요 ㅋㅋㅋㅋ

초란공 2021-05-19 09:05   좋아요 1 | URL
ㅋㅋㅋ 그렇네요.. 이렇게 부끄러운 소행을 꼼꼼히 읽어주시다니 ...^^;;
 
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 - 균이 만드는 지구 생태계의 경이로움
멀린 셸드레이크 지음, 김은영 옮김, 홍승범 감수 / 아날로그(글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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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

균이 만드는 지구 생태계의 경이로움

멀린 셸드레이크(Merlin Sheldrake) | 김은영 옮김 | [아날로그]

 

 

'곰팡이가 만든 세상을 읽는 방법'


 

이번에 만난 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는 아마 상반기에 읽은 과학서적 중에 가장 흥미로운 책이 아닐까 싶다책의 저자는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그는 10대 시절에 이미 자신의 방에서 버섯을 길렀던 인물이다그리고 지칠 때까지 부모님에게 질문을 하기도 하고가을과 낙엽 냄새를 좋아했던 사람이었다흐드러지게 핀 꽃송이에 얼굴을 파묻기도 했던 추억을 이야기한다저자는 세상을 향해 곤두박질치듯 달려들라’(375)고 격려하던 아버지의 관심과 보살핌을 격려 삼아 흐드러지게 핀 꽃송이에 얼굴을 파묻기도 했던 추억을 이야기한다이러한 경험이 기반이 되어그는 한 줌의 흙 속에서 우주를 발견하고이 세상의 비밀을 밝혀내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 멀린 셸드레이크는 균류를 연구하는 생물학자이자 생태학자다그런데 어떻게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탐구하게 되었을까책 속에서 띄엄띄엄 보이는 저자에 관한 정보들은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우리의 교육 시스템에서 이런 사람이 탄생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마저 들었다이 책은 곰팡이와 같은 균류가 만드는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식물을 비롯한 생태계의 놀라운 네트워크를 통해 바라보는 과정이 우리가 알고 있던 기존의 지식을 다시 검토하게 하는 것이다저자의 전문적인 지식과 소양문학적 상상력그리고 튼튼한 필력은 생명을 이루는 네트워크에 대한 이해를 보다 생생하게 이끌어주고 있다.

 

미생물이 인간 사회 전체에 그토록 큰 영향력을 발휘해왔다는 점은 이미 우리가 경험하는 바다인간은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 간주해왔지만사실 우리는 수많은 생명의 가지 중에서 우연히 성공하여 살아남은 곁가지 하나에 불과하다이 책에는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로 놀라운 이야기들이 담겨 있지만이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공생균사체 네트워크그리고 수평적 유전자 전이와 같은 것들이 아닐까 싶다나는 식물이 단지 줄기와 잎뿌리로 명확하게 구분된다고만 알고 있었지만저자는 식물의 정의혹은 식물이라는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명확히 할 수 없다고 알려준다그 주된 이유는 미생물이 생명활동에 단순히 개입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매우 중요한 역할도 담당하기 때문이다그런 의미에서 식물의 뿌리 중심에 균류가 자리 잡고 있고균사체 네트워크가 뿌리 사이뿐만 아니라 식물과 식물 사이를 이어주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은 나에게 놀라운 사건이었다게다가 자신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탐색하고 해석하는 곰팡이라니!

 

여기에서 나는 지인이 몇 년 전에 경험하고 내게 말해준 한 가지 사건을 떠올려 보았다그는 언젠가 출장을 가게 되어 세면도구를 챙기다가 몇 달 동안 아내와 칫솔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을 발견했다이후 이 충격적인(?) 사건이 잊혀 지는가 싶었는데그의 체질에 조금의 변화가 생겨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예를 들면 과거에 그는 매운 음식이나 피자를 먹으면 배탈이 나지 않았는데이제 그가 이런 체질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흥미로운 건 이 체질이 그의 아내가 결혼 전에 지니고 있던 특징이었다는 점이다뿐만 아니라 그 전에는 부부가 같이 있으면 모기가 지인의 아내에게만 몰려들어 지인은 모기에 물리는 적이 거의 없었다고 했다그런데 이제는 그가 아내보다 모기에 더 잘 물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분명히 몇 년 사이에 지인과 부인의 체질이 변해있었는데상대방이 갖고 있던 체질을 어느 정도 서로 공유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처음에 나는 이 변화가 단순히 노화(?)로 인한 개인적인 신체상의 변화일 것이라고 추측했다아니면 같은 공간에서 부부가 함께 지내며 서로가 닮아가는 것일까 하고 막연히 생각하기만 했었다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지인의 체질 변화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한 것이다저자에 따르면, ‘동물의 장 속에 사는 박테리아가 동물의 신경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화학물질을 생산할 수 있다’(186)고 한다이 분야는 상대적으로 새로운 분야인 신경미생물학에 속한 영역으로장내 미생물이 뇌와 상호작용을 하고나아가 심리적 상태인지 및 행동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설명(415, 주석10)이었다그러므로 지인 부부가 인지하지 못한 채 몇 달간 칫솔을 공유했던 경험을 통해 각자 지니고 있던 미생물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저자는 주석에서 서로 다른 기질의 쥐에 대한 언급을 한다여기에는 이 쥐들 사이에서 미소생물상을 교환하는 사례가 나온다. ‘정상적인’ 기질을 가진 쥐에게 소심한’ 쥐의 장내 미생물을 이식하자 과도한 경계심을 보이고 우유부단해졌다는 대목이다(415). 이 현상이 부부가 칫솔 공유를 했던 지인의 경험 및 이후의 체질 변화와 무관하지 않음을 짐작하게 한다저자는 진화의 새로운 공동저자로 공생과 수평적 유전자 전이를 강조하고 있는데이 두 개념으로 지인의 체질 변화에 대한 설명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특히 한국인들은 가족이 식사할 때 반찬과 찌개 등을 공유하곤 하므로가족들이 비슷한 체질을 갖게 되는 실마리를 이 대목에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아울러 흥미로운 점은 지인의 아내가 과거에 찬 음식과 매운 음식그리고 피자와 같은 음식을 먹고 배탈이 잘 났지만이제는 이 현상이 상당히 사라졌다는 점이었다나는 이 변화가 부부의 몸 속 미생물이 상대방의 몸특히 장 내부에 침투했고, ‘수평 유전자 전이를 통해 빠르게 상대방의 체질적인 특성을 공유하여장 내부에서 새로운 공생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증거로 이해하게 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이런 주제를 연구할 수 있는 분야가 신경미생물학인데, ‘장 내부의 세계를 통제하거나 조종하는 것’(416, 주석10)이 상당히 어렵다는 점을 시사한다특히 장 내부에는 변수가 너무나 많기에 이 미생물의 활동과 특정 행동 사이의 인과 관계를 밝힌 연구가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우리의 몸과 가족 사이의 관계 등에 대한 이해를 넓혀줄 수 있는 실마리를 이 작은 존재들이 쥐고 있었다.

 

그밖에 균사체 네트워크가 식물에 필요한 물질의 수송 네트워크 역할을 하는 이야기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빛을 내는 발광 곰팡이에 대한 이야기그리고 극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지의류에 대한 이야기 역시 무척 흥미로웠다하지만 무엇보다 이런 모든 현상들은 식물과 곰팡이가 각각 독립적으로 진화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공생을 통해 가능했다여기에는 배경으로서의 지구 환경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나아가 이런 현상의 이면에 그토록 많은 우연과 필연의 요소를 포함한 채 지금에 이르렀다는 점을 생각하면 생명과 지구의 역사가 경이롭게 다가오기도 한다이렇게 형성된 식물과 균류 혹은 곰팡이 연합은 다시금 지구 대기의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미칠 수 있었다는 인식이 새로웠다이것은 균근 관계가 생명의 진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한 줌의 흙은 그 속에 생명이 가득 차 있는 우주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우리가 단순히 생산성만을 높이기 위해 사용해온 화학비료가 땅 속의 균사체 네트워크를 얼마나 파괴할 수 있는지 안다면우리의 삶과 미래를 위해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지 판단하는 일이 보다 수월해질 것이다책을 읽고 나서도 여전히 생소한 개념들낯선 개념들이 많이 남지만누구든지 이 책을 읽음으로써 생태계 전체를 조망하는 새로운 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균사체는 정형화된 신체 형태가 없다."(97)

"균사체는 통제센터가 없다."(99) - P97

"환경에 묻혀 있는 균사체는 스스로 변신(shape-shift)한다. (...) 모든 개체는 개별적인 신체 구조를 갖는다. 완전히 똑같은 두 개의 균사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 균사체에 관한 발달론적인 ‘비결정론‘(indeterminism)
- P101

"우리는 보통 동물과 식물을 물질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물질이 끊임없이 지나가는 시스템이다." - P104

"융합하거나 번식할 때면 균사는 ‘타자’로부터 ‘자아’를 구분하며 ‘타자’의 종류도 구분한다." - P111

"‘인간과 비인간을 ‘진정한 정신’과 ‘진정한 이해력’을 기준으로 삼아 칼로 무 자르듯 깔끔하게 선을 그어 구분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고대의 신화’일 뿐이다."
- 다니엘 데닛(Daniel Dennett)의 말 재인용 - P122

"우리 몸속에 있는 미네랄 일부는 어느 시점엔가 지의류를 거쳤다."
-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 - P139

"곰팡이의 DNA는 지의류가 된 조류에서 발견된다. 인간 게놈의 최소한 8%는 바이러스에서 출발했다."
- 405, 주석 12 - P405

"지의류는 파트너쉽으로부터 생겨난 혁신의 놀라운 사례다. 연합체인 지의류는 부분의 합보다 훨씬 크다."
- 내부공생설을 주장한 린 마굴리스의 말. ‘초기 진핵세포는 지의류와 ‘매우 유사’하다고 주장.

"내부공생설은 21세기 진화생물학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이며, 나는 린 마굴리스의 흔들림 없는 용기와 열정에 큰 감명을 받았다."
- 내부공생설을 지지하는 리처드 도킨스의 말 재인용 - P148

"식물은 뿌리가 없습니다. (…) 식물이 가진 것은 균뿌리, 즉 균근입니다."
- 저자의 학부시절 교수가 수업중 한 말, 식물을 보는 새로운 시각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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