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는 독자의 팩트체크와 번역가의 일에 대해 생각해보다

- 조지 오웰의 평론(문학을 지키는 예방책)을 중심으로

 



몇 달 전에 어느 블로거분이 내 블로그에 댓글을 달아 주셨다. 내가 딱 1년 전(2020516)에 올린 글에서 잘못된 부분(사실 내가 크게 실수한 것)에 대해 지적하고 수정해주신 것이다. 내가 이 댓글을 그동안 발견하지 못해서 몇 달간 방치되었다. 내가 올린 글은 조지 오웰의 평론집 책 대 담배(민음사, 2020)중에서 문학을 지키는 예방책이란 글을 읽고 적은 글이었는데, 바로 아래 부분이 문제가 되었다.

 

반면 작가들은 혹독하게 탄압받고 있다. 일리아 에렌부르크나 알렉세이 톨스토이 같은 문학 매춘부들이 막대한 돈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작가들에게 가치 있는 유일한 표현의 자유 같은 것은 박탈당하고 만다.”(책 대 담배, 38)

(내가 올렸던 글: blog.aladin.co.kr/712851116/11720954)


 

여기서 알렉세이 톨스토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가 아니었는데도 나는 조지 오웰이 비판한 사람이 레프 톨스토이로 착각하고 글을 썼던 것이다. 난 이 대목을 읽고 계속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글을 올릴 때까지도 나의 의혹에 대해 아무런 확인을 하지 않았다.

 

내 블로그에 댓글로 친절하게 알려주신 블로거의 설명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알렉세이 톨스토이와 레프 톨스토이는 다른 분이에요. 알렉세이 톨스토이가 문단의 창부라고 비난 받은 요인은 스탈린 정권을 찬양해서인데, 레프 톨스토이는 재정러시아 시대 사람입니다.

 

... 이 대목을 읽은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과거에 내가 남긴 독후기며 리뷰에서 자신 있게써댄 여러 의견들에는 또 얼마나 많은 오해와 헛발질이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글을 쓰면서 내가 떠올린 의혹들에 대해 확인하고 검토할 생각을 그동안 게을리하고 있었다는 점을 시인해야겠다. 여기에 나는 한술 더 떠서 역시 조지 오웰은 대문호 톨스토이까지 비판하는 것처럼 이 사람 앞에는 비판의 사각지대는 없었다라는 식의 어처구니없는 평까지 달아놓았던 것이다. 너무나 부끄럽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내가 틀린 부분을 알았으니, 이를 바로잡아야겠기에, 다시 기본적인 사실을 조사하여 나의 잘못을 바로잡기로 한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나는 온라인 서점의 서재든 개인 블로그이든 아무리 편하게 글을 올리는 공간이라고 해도, 글쓰는 사람이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인 불문율을 지켜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조금의 의혹이라도 있다면, 스스로 검증하고 검토해볼 것. 그리고 답을 알아내지 못하더라도 검토하는 시늉이라도 할 것. 나아가 전혀 자신이 없다면 내 글에 집어넣지 말 것! 나는 최소한의 의무도 소홀히 했던 것이다. 내 블로그에 댓글을 달아주셨던 분은 출판 분야에서 일하시는 분일까, 아니면 문학 전공자가 아닐까 싶다. 아무쪼록 나의 무지와 실수를 지적하고 바로잡아주신 점에 대해 감사를 드린다.

 

조지 오웰의 책은 많이 읽지 못했는데, 공교롭게도 나는 이번에 문제가 된 부분을 언급한 조지 오웰의 평론이 실린 평론집을 몇 권 소장하고 있었다. 나는 첫 번째 책으로 책 대 담배(민음사, 2020, 문학을 지키는 예방책제목의 글, 38), 두 번째 책으로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이론과실천, 2013, 첫 번째 책에 실린 글과 동일한 제목의 글, 341),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10, 문학 예방이란 제목의 글, 239)를 서로 비교해보았다. 과연 이 부분에 대해 번역자는 주석이나 추가 설명을 하고 있을지부터 살펴보았다.

 

조지 오웰의 평론집 세 권에 실린 동일한 글을 비교해보니, 흥미로운 점 몇 가지가 있었다. 우선 가장 먼저 나온 나는 왜 쓰는가에 이 대목에 관한 충실한 주석이 실려 있었다. 번역자의 주석을 여기 그대로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주석13, 239) Illya Ehrenburg(1891-1967). 러시아 및 소련의 작가이자 언론인. 소련 시절 많은 작품을 썼으며, 2차 대전 당시에는 소련을 선전하기도 했으나 스탈린과 거리를 두는 대담한 글을 쓰기도 했다. 전후에는 검열을 비판하는 소설 해빙기(1954)를 출간했고, 스탈린 치하에 금기시됐던 인물들에 대한 언급을 담은 회고록을 내기도 했다.

 

(주석14, 239) Alexei Tolstoy(1883-1945). 공상과학소설과 역사소설을 특히 많이 쓴 작가. ‘백작 동지란 별명으로 불리곤 했다. 스탈린 체제를 옹호하는 선전 글을 많이 썼기에, 러시아 귀족 중 거의 유일하게 소련에서 귀족 칭호를 공공연히 쓸 수 있는 인물이었다.

 


어떤가?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115)의 번역가 역시 이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자세한 주석을 남겨놓아 다른 독자가 나와 같은 오해의 소지를 명백히 없애주었다. 다만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본문에서 문단의 창부라고 언급하고 있는 대목은 해당 작가의 역할과 책임을 조지 오웰이 비판하고 있는 맥락이기 때문에, 에렌부르크의 경우 스탈린과 거리를 두었다는 행적 보다는 소련을 선전했던 과거 행적에 주목하여 좀 더 정리해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이 설명만으로는 조지 오웰이 왜 에린부르크를 그토록 비판했는지 이해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두 번째 책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이론과실천, 2013)의 경우는 어땠을까? 흥미로운 점은 번역자가 같은 대목에서 예렌부르크한 사람에 대해서만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

 


(341면 각주) 예렌부르크(Il'ya Grigor'evich Erenburg, 1891-1967). 우크라이나의 소설가이자 시인, 평론가.


 

이 책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의 번역가는 예렌부르크에 대해 간결하게 각주를 달아놓았다. 그러나 본문의 맥락에서 이 사람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정보를 알려주긴 해도, 맥락과 어떤 연관을 갖고 있는지 여전히 정보가 많이 부족하다. 나를 더 당황하게 만든 지점은 알렉세이 톨스토이에 대한 주석이 아예 없다는 점이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나처럼 알렉세이 톨스토이를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로 오해했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국문학을 전공한 번역자가 이 부분을 잘못 볼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가능성은 번역자와 해당 출판사의 편집자 모두 독자가 레프 톨스토이라고 오해할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너무 명백하니까 말이다. 아무래도 번역가나 편집자는 독자가 해당 인물에 대해 자세히 조사할 필요도 없다고, 레프 톨스토이가 아니라는 것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을 것 같다. 중년이 다 되어 문학을 읽기 시작한 나 같은 어설픈 독자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독자가 여기에서 과연 오해할 여지가 있을까 판단했을법하다. 다만 이 판본의 아쉬운 점은 예렌부르크에 대한 주석이 기계적인 부연 설명이 아니라, 독자가 맥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추가되었으면 하는 점, 그리고 알렉세이 톨스토이에 대해서도 주석을 달아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비교한 책은 민음사의 책 대 담배(민음사, 2020), 내가 직접 읽고 블로그에 독후기를 올리며 인용했던 바로 그 책이다. 이 책은 작은 총서 쏜살문고로 나온 판본으로 해당 부분(38)을 비롯하여 주석은 아예 없다. 나는 오스카 와일드의 오스카리아나를 비롯하여 쏜살문고 시리즈를 좋아하지만, 조지 오웰의 이 평론집(책 대 담배)에는 아쉬운 점이 많다. 조지 오웰의 글에 아무런 주석이 없어서, 그래서 나의 게으름(팩트체크를 하지 않은 것)을 보완해줄만한 장치가 아예 없었다는 것.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이제 책 대 담배를 한 번 읽었을 뿐인데, 책이 말 그대로 해체될 위기에 있다는 점이다. 책을 구입하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책을 소장한다는 것은 누구나 여러 번, 언제나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구입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 가벼운 판본들에 대해 열**들 출판사처럼 사철제본까지 바라지는 않겠지만, 여러 번 펼쳐보아도 책의 모양이 그대로 유지될만한 책을 만들어주셨으면 좋겠다. 내가 소장한 이 책은 한 번 읽었고, 이제 이 글을 쓰면서 여러 번 펼쳐보았는데, 종이들이 떨어져 나올 위기에 있다.

 

또 사족인 줄 알지만 오웰의 동일한 평론 제목에 대한 번역에도 할 말이 있다. 2010년에 처음 출간되어 2011년에 5쇄를 찍은 나는 왜 쓰는가의 해당 평론의 제목은 문학 예방(The Prevention of Literature)이다. 물론 모든 번역 작업은 번역자의 경험과 가치관에 따라 결정되는 문제이므로, 여기에 정답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시작해야 겠다. 다만 이 제목은 개인적으로는 너무 간결하고 함축적이어서 이 표현을 보고 어떤 내용일지 짐작해보기가 쉽지 않다. 반면, 2013년에 출간된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2020년에 출간된 책 대 담배에 실린 해당 글의 제목은 문학을 지키는 예방책으로 공교롭게도 동일하다. ‘문학 예방보다는 글의 내용이나 성격을 추측하기 친절하게 풀어 번역이 된 것 같다. 다만 영어 제목 The Prevention of Literature을 번역하여 이렇게 동일한 표현이 나왔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다.

 

정리해보자. 조지 오웰이 자신의 평론 The Prevention of Literature에서 비판했던 알렉세이 톨스토이는 레프 톨스토이와 다른 사람이며, 생존했던 시대마저 달랐던 인물이었다. 알렉세이 톨스토이는 스탈린 시대의 사람이었고, 레프 톨스토이는 재정러시아 시대 사람이었다. 독자마다 얇고 가벼운 판본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충실한 주석을 더 좋아하는 독자도 있다. 어느 것이 더 좋은지는 취향의 문제일 수 있다. 나는 후자의 취향에 가깝다. 다만 이번 기회에 배운 점은 아무리 가벼운 독후기를 쓰더라도 일말의 의혹이 있다면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써야 한다는 점이었다. 당연한 과정인데도,나는 이를 소홀히 했다. 이건 글쓰는 사람의 기본적인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임의 필요성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참고로 나처럼 글의 맥락에 맞는 번역가의 주석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조지 오웰의 평론집에 한하여 다른 독자들에게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10)를 우선 권하겠다.

 

 


라틴어 서적의 한글 표기에 관해

 

여기서 조지 오웰의 같은 평론을 언급한 김에 한 가지 더 추가해보겠다. 해당 평론(‘The Prevention of Literature’)의 앞부분에서 조지 오웰은 존 밀턴의 책 아레오파지티카을 언급하는데, 이 책제목 대한 표기가 눈에 들어왔다. 이 책 제목 Areopagitica는 나의 짧은 언어 지식으로 판단해도 분명히 라틴어 제목이다. 그리고 라틴어에서 g는 모두 //소리가 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서 나는 개인적으로 고전 라틴어 발음만 찾아보았다고 인정해야 겠다) 그런데 밀턴(1608-1674)의 시대에는 중세 라틴어를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이 시기에 g소리가 어떻게 바뀌거나 확장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중세 라틴어에서 g소리가 // 소리뿐만 아니라 // 소리로도 확장되어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 명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나의 부실한 고전라틴어 발음 지식만을 가지고 판단해본다면, ‘Areopagitica아레오파티카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한 답을 얻진 못했지만, 내 견해를 지지해줄만한 증거는 몇 가지 있다. 우선 박상익 교수가 연구하고 옮긴 아레오파기티카(인간사랑, 2016)였다. 박상익 교수(역사학)는 밀턴 연구로 학위를 받으신 것으로 알고 있고, 언론자유의 경전이라고 불리는 이 책을 전면재번역하여 개정판을 낸 분이다. 내가 중세라틴어 발음에 대한 지식이 없긴 하지만, 밀턴 전공자가 아레오파티카로 발음을 옮긴 것이 한 가지 간접적인 증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또 하나 참고해볼만한 증거는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 나오는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라는 문장이다(데카르트가 이 문장을 썼을 161911월 즈음). 여기서 이 문장은 코기토 에르고 숨으로 읽힌다. 따라서 g'에 대응하는 소리는 모두 //소리임이 분명하다. 데카르트의 시대 역시 분명히 중세 라틴어의 전통을 이어받아 사용했을 것이므로 Areopagitica의 발음표기는 아무래도 아레오파티카로 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 내 견해다.

 

사실 이 발음표기 문제는 먼저 언급한 인명을 착각한 상황만큼 중대한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언어 지식이 빈약한 이공계 전공자가 이 문제로 한 번 고민해봤다면, 이 평론을 번역한 어문학 전공자, 교수님은 당연히 이 점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특히 언제나 글을 쓰고 글을 다듬고 하는 인문계 전공자들이야말로 나보다 훨씬 더 민감하게 이런 부분을 검토하고, 라틴어 발음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시지 않았을까 추측만 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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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1-05-19 08: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이쿠 저도 초란공님 쓰신 글 보고 실수한 기분에 놀라서 나는 왜 쓰는가 찾아보니 같은 책의 리어, 톨스토이, 그리고 어릿광대의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의 그 톨스토이가 맞네요ㅋㅋㅋ알렉세이 톨스토이는 왜 선전선동가 질을 해서 사람 헷갈리게 하고 그래…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5-19 08: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쓰신 글에서 인용구만 바꾸시면 조지오웰이 성역도 없고 톨스토이 깐 것도 맞아요 ㅋㅋㅋㅋ

초란공 2021-05-19 09:05   좋아요 1 | URL
ㅋㅋㅋ 그렇네요.. 이렇게 부끄러운 소행을 꼼꼼히 읽어주시다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