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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예찬 - 정원으로의 여행 ㅣ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안인희 옮김 / 김영사 / 2018년 3월
평점 :
《땅의 예찬 (Lob der Erde)》
: 정원으로의 여행
한병철 지음 | 안인희 옮김 | [김영사]
‘철학자-정원사의 신학, 행복한 경험의 시론’
: 땅-정원-꽃에 대한 사랑 고백
니체와 하이데거, 푸코와 베냐민을 이야기하고, 아름다움과 에로스에 대해, 신자유주의의 폐해와 인간의 소외의 문제, 고전과 현대문학을 넘나들며 우리가 사는 세계를 진단하던 재독철학자 한병철이 이번에는 정원사가 되었다. 언젠가 ‘매일 정원 일을 하기로’ 마음먹은 저자는 3년 동안 땅을 일구며 자신만의 비밀 정원을 가꾸어나갔다. 《땅의 예찬》은 저자가 정원을 가꾸면서 경험한 땅에 관한 명상이다. 철학, 미학, 문학을 이야기하던 철학자가 정원사로서 자신의 내밀한 생각을 고백한 기록이기도 하다. 나는 이 책을 땅-정원-꽃을 키워드로 하여 읽어보고자 했다.
땅: 구원의 관문
철학자에게 땅은 무엇인가? 그에게 땅이 예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땅이 ‘행복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다른 저서에서 지적했던 신자유주의의 영향, 특히 디지털화를 다시 소환한다. ‘디지털 digital’은 ‘손가락’을 의미하는 ‘디기투스 digitus'에서 온 말(75)이다. 하나, 둘 셀 수 있는 것, 헤아리기에 기반한다. 그러므로 ‘디지털화’는 모든 대상을 정량화하여 ‘비교가능하게’ 만든다(29). 저자에 따르면 땅과 관련하여 고려할 때, ‘디지털화’는 ‘완전한 땅을 사라지게’(28) 하여 인간을 땅으로부터 분리시킨다. 그 결과 우리는 조상이 지니던 ‘땅에 대한 섬세한 감성을 잃고, 땅이 무엇인지 더는 알지 못하는’(31) 존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저자는 땅이야말로 인류가 디지털화에 저항하고 우리의 감각과 기억을 되돌려줄 수 있는 대상이라고 본다. 곧 철학자에게 땅은 ‘예술가, 놀이하는 여인, 유혹하는 여인이면서 감사의 감정을 일으키는 존재’(182)이기에, 그에게 땅은 ‘행복의 원천’이다. 여기에서 구원에 관해 저자가 인용한 하이데거의 한 마디는 의미심장하다. “구원이란 위험에서 구해낸다는 뜻만이 아니다. 무언가를 풀어주어 본래의 본질로 되돌린다는 뜻이다.”(32) 그러므로 정원사가 된 철학자에게 땅은 본래의 본질로 되돌아갈 수 있는 ‘구원의 관문’이 된다. 저자가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며 한국에서 많은 식물의 씨앗을 가져와 심고 키운 일 역시 병든 아버지가 존재하는 고향, 자신의 본질에 되돌아가고자 하는 자연적인 행위일 것이다. 이렇게 철학자가 땅을 만나고, 땅과 연결되는 공간이 바로 정원이다.
정원: 사랑을 배우는 공간
정원사가 된 저자에게 정원이란 장소는 ‘감각성과 물질성이 넉넉한’ 공간(22)이다. 다양한 관목과 꽃을 돌보면서 삶과 죽음, 소멸과 부활을 마주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또 정원은 노동을 통하지만 오히려 ‘삶의 고난에서 벗어나 원기를 얻는’(79) 공간이다. 책의 정황으로 볼 때, 저자가 겪는 삶의 고난은 머나먼 한국에서 소멸해가는 아버지와 관련이 있을 테다. 그래서였을까.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부터 기호학자, 문학이론가였던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을 떠올린다. 이 책은 바르트의 어머니가 사망한 직후, 다섯 살이던 어머니가 겨울 정원에 서 있는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시작된 애도의 노래다. 사진을 통해 사랑하는 존재의 부재를 인식하며, 떠나간 사람에 대한 사랑을 고통스럽게 확인한다. 바르트가 어머니의 사진을 ‘끌어안고 숭배’하듯, 정원사도 병상에 있는 아버지 곁에서 머물며 산에서, 길에서 만난 꽃들을 신령들께 제물로 바치고, 온 마음을 다해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철학자가 정원일을 하면서 배우는 것은 단연코 ‘사랑하기’이다. 정원에서의 시간은 ‘타자의 시간’(23)이며, ‘사랑을 담은 인식’이야말로 꽃을 구원한다(25). 나아가 ‘꽃에 물주기는 꽃들과 함께 머무는 것’(76)을 배우는 일이다. 정원일은 단순한 일이 아니라 ‘명상이며, 정적 속에 머무는 일’(175)이기도 하다. 정원사는 대지를 ‘체험’하며 땅과 만난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인의 신은 ‘돈’이다. 흔히 ‘물신’이라 부르는 이 상징적 존재는 땅, 아름다움, 선을 완전히 파묻어버렸다. 반면 정원사-철학자에게 정원은 디지털화로 잊힌 현실을 되찾게 해주고, 경험과 기억의 언어가 머무는 곳, 나아가 신을 발견하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정원사가 정원에서 배우는 ‘사랑하기’는 원자화되고 소외된 인류가 대지(땅)와의 관계를 새로 맺는 일, 단절된 연대의 부활을 의미할 것이다.
꽃: 그늘에서 피는 꽃과 늦둥이 꽃에 대한 애착
철학자-정원사인 저자는 정원이 ‘신을 믿게 만든 성스러운 장소’(128)라고 말한다. 그는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면서 겨울에도 꽃을 볼 수 있기를 바랐다. 겨울꽃을 심고, 겨우내 동백꽃에는 천으로 감싸주며 돌보았다. 책을 읽으며 알게 된 것은 저자가 겨울꽃, 특히 그늘을 좋아하는 꽃과 느릿느릿 조심스럽게 피어나는 ‘늦둥이’ 꽃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그늘을 좋아하는 꽃은 이른바 ‘그늘식물’인데, 저자는 수국과 옥잠화를 여러 번 언급한다. 그가 이 꽃들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이유는 이들이 그늘을 환하게 밝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밝은 빛’이란 의미를 지니는 저자의 이름을 떠올리며, 그가 수국을 특히 닮았단 생각을 했다.
‘늦둥이 꽃’은 옥잠화처럼 계절에 ‘늦게’ 개화하는 꽃을 가리킨다. 죽음과 탄생의 멜랑콜리가 뒤섞이는 낙엽 쌓인 정원에서 대부분의 꽃들이 시든 후 두 번째로 개화하는 이런 꽃들에 저자는 무엇보다 애착을 보인다. 이들은 겨울 한복판에 ‘두 번째 봄’을 정원에 불러들이는 존재들이다. 수국을 비롯하여 옥잠화는 함께 있는 다른 존재들을 압도하며 몰아내거나 무성하게 자라지 않는다. 기꺼이 낯선 타자들과 함께하며 제 존재를 스스로 밝히는 존재이기에, 저자는 수국과 옥잠화를 기꺼이 사랑한다. 저자에게 정원이란 공간이 신을 믿게 만든 성스러운 장소가 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겨울꽃들은 숭고하다 못해 신적이다. 그들은 내 정원에서 신을 체험하게 하”기 때문이다(126). 그러므로 저자에게 꽃(특히 겨울꽃)은 신의 현현(顯現)인 셈이다. 《땅의 예찬》이 정원사의 ‘신앙고백’이자 철학자의 ‘신학’이 되는 이유다. 하지만 무엇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꽃과 정원의 존재, 그리고 땅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철학자-정원사인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가 ‘땅으로 되돌아가, 땅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땅과 연결되기’를 희망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 ‘희망하기’가 바로 정원사의 시간방식(180)이다. 정원사는 새로 심은 씨앗이 내년에 싹을 내고 꽃이 피기를 희망하며 기다린다. 이 희망은 정적 속에 머물며 기다리는 가운데 미래의 시간, 타자의 시간에 머문다. 그렇기에 저자는 “내 땅의 찬가는 다가오는 땅을 향한 것”(180)이라고 단언한다. 책을 읽으며 문득 우리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본다. 많은 이들이 땅을 투기의 대상으로만 바라본다. 우리는 땅을 착취하고 경외심을 거둠으로써 땅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자연과의 교감이나 연결고리가 끊어진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저자는 대지에 대한 감성, 상상력의 언어를 잃은 현대인들을 위해 그가 정원일을 통해 배운 아름다움과 경험한 것들을 땅에 대한 사랑의 찬가로 노래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땅에 대한 섬세한 감성을 모두 잃어버렸다. 땅이 무엇인지 더는 알지 못한다." (31)
"땅으로 돌아가기란 행복으로 돌아가기가 된다. 땅은 행복의 원천이다." (32)
"우리가 땅에서 떨어져나간 것의 쓰라린 대가가 어쩌면 죽음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67)
"디지털 문화는 인간을 작은 손가락 존재로 축소시킨다. 디지털 문화는 헤아리는 손가락에 기반을 둔다. 하지만 역사는 이야기다. 역사는 헤아리지 않는다. 헤아리는 것은 역사 이후의 범주다." (75)
"오늘날 헤아릴 수 없는 것은 모조리 존재하기를 멈춘다. 하지만 존재는 이야기이지 헤아리기가 아니다. 헤아리기에는 역사이자 기억인 언어가 없다." (76)
"꽃에 물주기는 꽃들과 함께 머무는 일이다." (76)
"땅의 낯섦, 다름, 그 독자적 생명에 나는 자주 놀라곤 했다. 육체노동을 하면서 비로소 나는 땅에 내밀히 알게 되었다. (...) 정원에서 나는 삶의 고난에서 벗어나 원기를 얻는다." (79)
"그늘을 환하게 밝히는 것은 수국이다. 수국은 도취시키는 꽃이니 나는 그것을 사랑한다." (106)
"겨울꽃들은 숭고하다 못해 신적이다. 그들은 내 정원에서 신을 체험하게 하는 것" (126)
"우리는 고요함과 침묵을 잊었다. 나의 정원은 고요함의 장소. 정원에서 나는 고요함을 만든다." (146)
"땅은 아름답다, 아니 거의 마법을 지녔다. 우리는 땅을 보호해야 한다. (...)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보호라는 의무를 지운다. 나는 그것을 배웠고 경험했다."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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