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

Bartleby, the Scrivener: A Story of Wall-Street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지음 | 공진호 옮김 | [문학동네]

 



멜빌 탄생 202주년: 멜빌의 의식 내면을 들여다보기


 

더위의 한 가운데에 새로운 달이 시작되었다. 81일이 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모비 딕의 작가 허먼 멜빌. 181981일 생이므로 오늘은 그의 탄생 202주년 되는 날이다. 매년 한번 씩은 모비 딕을 읽어보려 한다. 작년에는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일러스트 모비 딕을 읽어보았으므로, 올해는 다시 작가정신에서 출간한 아셰트 클래식 모비 딕을 읽어볼 계획이다. 오늘은 중단편 소설 필경사 바틀비를 다시 읽고 정리해본다.


몇 년 전에 필경사 바틀비를 읽고는 난감하다는 느낌을 받았더랬다. 이건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자 하는 걸까, 짧은 소설임에도 도저히 접근이 불가능해 보였던 소설이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번역자 공진호의 해설을 우연히 펼쳤다가 눈에 들어온 부분이 있었다.


 

이 소설은 읽는 사람에 따라 프로테우스처럼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무엇을 원하느냐에 따라 얻는 것이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이 각종 이데올로기를 표방할 잠재성을 품고 있지만, 어느 한 가지를 주장하며 그것이 전부인 양 취급하면 곤란하다.”(106)


 

번역자의 도움말을 읽는 순간 아차 싶었다. 모비 딕에서도 독자들이 각자 나름의 읽기로 해석하고 발견한 수많은 상징과 알레고리들이 있지 않았던가 싶었다. 멜빌이 글을 쓸 때는 한 단어 한 단어를 음미하듯다루었다는 역자의 설명과 함께 용기를 내어 다시 필경사 바틀비를 읽어보았다. 그래서 다시 이 책을 읽으며 내 해석이 옳고 그름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 다만 나의 이해와 해석이 유일하다고 생각하지는 말 것을 기준으로 읽기로 했다.


이 소설의 배경은 뉴욕 맨해튼의 월스트리트(Wall Street)이다. 말하자면 벽이 둘러쳐진 거리인데, 지금의 뉴욕은 과거에 유럽에서 이주한 네덜란드 인들이 뉴암스테르담으로 불렀던 곳이다. 그리고 이들이 미국 원주민으로부터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세운 방벽이 바로 지금의 맨해튼의 다운타운을 동서로 막았던 장벽이었던 셈이다. 19세기에 인종 문제/백인 우월주의적 시각을 예민하게 감지했던 허먼 멜빌이 이 소재에 주목했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소설의 화자는 스스로를 초로에 든’ 60세 가량의 변호사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바틀비는 화자가 고용한 필경사였다. 문제는 바틀비가 필사 작업을 시작한 지 사흘이 지나면서 고용주인 화자의 지시를 따르지 않기 시작하면서 표면화되었다. 바틀비가 필사한 필사본을 검증하는 작업에 바틀비가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I would prefer not to.

 

화자가 심부름을 부탁하거나 다른 직원의 의견을 들으며 바틀비를 압박해도 얼굴은 아무 생각 없는 듯 태연했고, 회색 눈은 흐릿하게 가라앉은상태로 모든 지시를 거부하고 있었다. 화자를 비롯한 사무실의 직원들도 당혹감을 느끼며 충격을 받은 것은 물론이다. ‘도대체 왜?’냐고 물으면 대답은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로 돌아올 뿐이다. “소극적인 저항처럼 열성적인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없다.”(38) 도저히 합리적인 기준으로 판단할 길이 없는 상황이다.


화자인 변호사는 쓰라린 당혹감으로 바틀비의 거부를 무시하거나 심지어는 바틀비를 피해 본인이 나가기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사무실을 이사하고 나서도 여전히 이전 사무실 건물에 나타나 배회한다는 건물주의 불평을 들으며, 화자는 손을 더 이상 쓸 수 없었다. 급기야 건물주는 바틀비를 부랑자로 몰아 맨해튼의 유명한 교소도인 툼스구치소로 보낸다. ‘툼스(tombs)'는 구치소의 별칭이었는데 섬뜩하게 무덤을 의미한다. 곧 이 구치소의 이미지는 죽음과 이어지고 있었다.


바틀비가 구치소에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화자는 바틀비를 면회하러 구치소로 간다. 다소 속물적이기도 했던 화자는 바틀비에 대한 걱정을 하면서 구치소 조리장에게 돈까지 쥐어주며 좋은 식사를 대접해달라고 부탁까지 한다. 하지만 바틀비의 대답은 나는 오늘 식사를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며 구치소에서 식사까지 거부한다.


화자가 바틀비를 또 다시 방문했을 때, 그는 굉장한 두께로 둘러친 벽에 갇힌 안마당에웅크리고 누워있었다. 식사를 거부하던 바틀비는 눈을 뜬 체 사망한 상태였고, 면회간 화자가 바틀비의 눈을 감겨주며 성경 구절을 중얼거린다. 화자는 바틀비가 항상 벽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그가 결국 죽어간 구치소 안마당의 잔디밭을 영원한 피라미드의 심장인 듯 했다라고 언급한다.


이 대목과 관련하여 번역가의 지적이 눈에 띈다. 1851년 말, 32살의 청년 작가 멜빌이 너대니얼 호손에게 보낸 편지의 대목을 언급하는 다음 내용이 흥미롭다.

 

저는 불과 몇 년 전에야 발육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이집트의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씨앗과 같습니다. 삼천 년 동안 한 알의 씨앗에 불과했지만, 영국 땅에 심겨 발아하여 푸른 초목으로 성장하고는 죽어 흙으로 돌아간 씨앗 말입니다. 스물다섯 살까지만 해도 저는 땅에 심기기 전의 그런 씨앗처럼 발육하지 못했습니다.”(99)

 

이 대목에서 청년 멜빌의 고뇌를 일부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1850년 여름, 집 근처로 이사 온 호손과 급격히 친해진 멜빌은 셰익스피어를 재발견하게 되고 모비 딕 초고를 비극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전면 개정하기에 이른다. ‘영국 땅에 대한 언급은 셰익스피어 문학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당시 미국은 여전히 문학적으로 척박한 환경이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문학적으로 큰 영향을 준 전통을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중요한 건 이 편지의 대목에서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피라미드가 다름 아닌 무덤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바틀비가 수감되었던 구치소 깊은 곳에 두터운 벽 속에 갇힌 잔디밭을 피라미드의 심장으로 보는 것이 이해가 된다. 역자의 표현대로 바로 구치소의 잔디밭은 죽음의 잠재성과 생명의 잠재성이 혼재한 공간으로서 이해할 수 있겠다.


여기에 더하여 모비 딕의 출간(1851) 이후 평단과 대중 독자의 외면을 받은 이후 2년 반 후에 출간된 필경사 바틀비를 보면 멜빌이 느꼈을 불안과 두려움을 조금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를테면 작가로서보다 집안의 가장이자 생활인으로서 허먼 멜빌을 들여다보면 필경사 바틀비를 수긍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멜빌이 모비 딕을 출간한 해에 그는 이제 결혼 4년차에 장남을 둔 가장이었다. 아직은 혈기 왕성하고 초기 두 편의 소설이 큰 성공을 거두었기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비 딕이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고, 이듬해에 차남이 태어났고, 다시 2년 후에는 첫딸도 태어났다. 생활인으로서 멜빌은 거듭되는 작품의 상업적인 실패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실제로 멜빌이 호손에게 보낸 편지에는 돈이 나를 저주하네요!’라는 고통을 호소하는 내용도 있었다.


여기에 185312월에 모비 딕을 출판했던 출판사 건물에 화재가 발생하여, 초판 300부마저 전소되는 사건이 있었다. 나는 이 사건이 가장으로서 큰 책임감을 느꼈을 멜빌에게 상당한 심리적 타격을 주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모비 딕이 출간된 후 2년 남짓 지난 시점에서 필경사 바틀비가 수록된 단편집이 출간되었고, 이 소설의 뒷 부분에 바틀비의 과거에 관한 소문을 덧붙인 대목을 주목해본다. 바틀비가 워싱턴의 사서(, dead letter) 우편물 담당 부서의 하급 직원이었다는 설정이었다. 번역자의 주석에 따르면 여기서 말하는 사서배달 불능 우편물을 말한다. 주소가 잘못되어 전달할 길이 없거나, 보낸 이와 받는 이 모두 이사를 가거나 사망한 경우 반송도 되지 못하는 우편물을 매년 대량으로 모아서 불에 태운다는 것이다.

 

옮긴이의 설명에 따르면 당대의 평론가들은 바틀비의 모델로 워싱턴 어빙, 에드거 앨런 포, 랠프 월도 에머슨등의 동시대 작가를 언급했다고 하지만, 나는 바틀비가 멜빌이 가치관뿐만 아니라 그가 다른 시기에 겪었던 다양한 체험이 녹아 형성된 캐릭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바틀비가 처한 상황은 벌이가 변변치 않은 가장으로서 받는 심리적인 부담감과 자신의 이상과의 불일치, 모순적이고 불합리한 사회에 대한 반감과 모비 딕과 같이 야심차게 준비한 작업에 대한 사회의 냉대에 대한 좌절감 등이 응결된 멜빌 자신의 내면 풍경이 아니었던가 생각해본다.

 

물론 바틀비가 바로 허먼 멜빌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필경사 바틀비의 화자인 변호사가 바틀비에게 동정심을 느끼면서 그가 우주에서 철저하게 혼자라 느꼈을 법하고, ‘대서양 한복판의 난파선 조각이라고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대목은 바로 멜빌 자신의 고립감을 표현해낸 듯하다. 23세가 되던 1842년에 그는 포경선을 탔는데, 이 고립된 공간에서 폭압과 격무로 고통을 받다가 마르키즈 제도에서 탈주한 경험을 떠올렸을 법하다. 포경선을 탈출한 멜빌은 골짜기에서 생활하다가 다시 오스트레일리아 포경선을 타고 섬에서 나오게 되는데, 여기서 직무수행을 거부한 죄로 짧게 구금된 적이 있었다. 나는 특히 이 점에 주목해본다. 이 당시의 경험을 모아 보면 바틀비가 바로 멜빌이 아니었나 싶다. 불합리하고 모순된 공간에서 합리적이고자 선택한 행동으로 그는 수감된 당시의 경험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필경사 바틀비의 한 대목과도 상통한다.

 

뭐라고! 꼼짝도 하지 않으려는 그가 부랑자요 방랑자라고? 그가 부랑자가 되지 않으려 한다는 것 때문에 너는 그를 부랑자로 치부하려는 거로군.”(74)

 

결국 바틀비는 해석에 따라 이기적인 자본주의’, ‘억압적인 법률과 질서’, ‘합리주의를 대변하는 변호사 화자의 지시를 거부하기로 선택한 인물이다. 그런 이유로 바틀비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지금은 좀 더 합리적인 사람이 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54)

 

결국 바틀비는 사회가 강요하는 합리주의적 규범을 따르지 않기로 선택하고, 이 선택을 고집스럽게 긍정했을 뿐이다. 물론 그 결과 이집트의 피라미드 같은 무덤교도소에 갇히게 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따라서 나는 필경사 바틀비가 무엇보다도 허먼 멜빌의 내면 풍경을 표현해낸 작품이라고 보고 싶다. 구치소의 벽에 갇혀 있던 바틀비는 멜빌 내면에 있는 자아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당시에 멜빌이 처했던 상황까지도 고려해서 읽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대부분의 아이디어는 번역자가 제공한 것이므로 이번에 다시 소설을 읽으면서 정리하게 된 사항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결국 작가가 처한 상황과 경험들을 이해하고 상상함으로써 작품에 보다 더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덧붙이는 사항]

 

그리고 한 가지 흥미로운 단어에 주목해본다. 바로 부랑자라는 단어다. 멜빌은 28세이던 1847년에 첫 소설 타이피의 속편으로 오무: 남양 모험기 Omoo: A Narrative of Adventure in the South Seas를 발표하는데, 이 오무(omoo)라는 표현이 바로 타히티어로 부랑자라는 의미라고 한다. 내가 주목한 지점은 단테의 신곡 연옥편에 OMO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단어와의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 것이다. 그 이유는 이 단어가 라틴어로 사람을 뜻하는 homo를 가리킨다는 역자의 설명 때문이었다.

 

눈구멍은 보석이 빠진 반지 같았으며

사람 얼굴에서 OMO를 읽는 자는

거기서 손쉽게 M자를 알아볼 것이다.”

(신곡 연옥, 김운찬 옮김, 열린책들)


여기서 번역자의 설명이 이어지는데, ‘중세의 속설에 따르면 조물주가 사람 얼굴이 이 글자를 새겨 넣었다고 한다. 좌우의 O는 두 눈, ‘M은 코와 눈썹 언저리를 가리킨다고 설명하고 있다. 중세에 사람을 가리키던 이 말이, 근대에 들어와 유럽에서 들어온 이들이 타히티에 전파한 단어가 아닐까 상상해보았다. 타히티를 방문한 유럽인들이 오모 omo라는 단어를 쓰는 광경을 타이히 원주민들이 보았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 아닐까. 배를 타고 꾀죄죄한 몰골로 들어와서 거들먹거리던 유럽인들이 타이티 원주민의 눈에는 부랑자로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말하자면 중세에 omo라는 단어는 조물주가 빚은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근대에 들어와 타히티에서는 omoo라는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로 사용된 것은 아닐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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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8-03 13: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비딕 파이팅이요!!! 작가정신 :-)

다만 ‘나의 이해와 해석이 유일하다고 생각하지는 말 것’을 기준으로 읽기로 했다.
이 문장 참 좋은 것 같아요.
남들을 따라 갈 수 없지만, 나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도 있음을 느끼는 것도 또 좋은 것 같아요.

초란공 2021-08-04 00:01   좋아요 1 | URL
<모비 딕>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책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이따금씩 이 책에 대한 글이 올라오면 반갑기도 하구요.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책에서 찾고 이야기하는
‘눈밝은 독자들‘이 있어서 더 즐겁지요~
 
펠리시아의 여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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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시아의 여정 (William Trevor: Felica's Journey)

윌리엄 트레버(William Trevor) 지음 |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부조리함 속에서 삶의 균형 감각 회복하기


 

여행은 익숙함과의 결별로 시작하며, 여행의 본질은 경계 넘기에 있다. 경계를 넘나드는 여행길 위에선 익숙함이 주는 안정감과 낯선 환경의 긴장감 사이에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펠리시아의 여정의 작가 윌리엄 트레버가 1950년대에 아일랜드의 경기침체로 교사직을 잃고 영국으로 이주했던 것처럼, 소설 속 인물 펠리시아도 아일랜드에서 영국으로 경계를 넘어 자신의 여정을 시작한다.

 

소설에는 아일랜드인이 겪은 고난의 역사와 산업자본주의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 있다. 펠리시아는 자본이 구축해놓은 육가공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가족을 돌보는 일처럼 가부장적인 규범이 여성에게 기대하고 강요해온 일까지 맡도록 요구받았다. 여기에 아일랜드와 긴장 관계에 있던 영국군에 입대한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가족으로부터도 외면 받는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사회의 안전망 밖으로 내몰린 펠리시아는 아이의 아버지이자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떠난다.

 

영국에 도착한 펠리시아가 처음 도움을 청한 사람이 힐디치다. 구내식당 매니저로 일하며 좋은 평판을 유지하는 그는 상당히 비밀스러운 사람이었다. 소설이 나오기 전인 1980년대에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광우병 파동이 발생했다.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펠리시아가 다니던 육가공 공장이 폐업한 것은 이익만을 추구하는 경제 시스템의 본질적인 문제점이 광우병 파동과 함께 드러난 것이다. 힐디치가 이런 상황에서도 스테이크를 즐겨 먹는 설정은 그가 모순적이고 뒤틀린 내면을 지닌 인물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이런 그 앞에 가족과 사회의 규범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부실한 사회복지제도의 안전망 밖으로 밀려난 체 길을 잃은 펠리시아가 나타난다. 힐디치는 그녀와 새로운 우정을 꿈꾸며, 도움의 손길을 건넨다. 힐디치가 멀리서 펠리시아를 지켜보고 따라다니는 장면은 그가 과거에 송장 담당 직원이었다는 설정과 편집증적 증세가 교차하며 소설의 긴장감을 더한다.

 

사실 힐디치는 어린 시절에 배신을 당하고 입은 상처와 트라우마를 간직한 사람이었다. 상처 받은 내면의 아이는 스스로 치유하며 성숙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에 대한 신뢰를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그가 여성들과 정상적으로 교제하지 못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여성들과의 우정을 영원히 지속하길 열망했음에도 말이다. 어린 시절의 상처와 트라우마는 힐디치를 괴물로 만드는데 일조했을 것이다.


힐디치의 집에서 가까스로 도망쳐 나온 펠리시아는 트럭을 타고 멀리 떨어진 도시로 이동한다. 이곳에서 그녀는 내 예상을 벗어나 밑바닥 인생을 선택한다. 노숙자가 된 펠리시아는 큰 맥락에서 시장주의와 사회의 규범이 만들어낸 디아스포라다. 다만 그녀는 스스로를 희생자로 여기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구속하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노숙 생활을 선택하여 비로소 자유와 독립을 얻었다.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던 혁명가의 이름에 걸맞게 펠리시아는 살인마의 위협으로부터, 삶을 구속하는 시스템으로부터 자신을 지켰다.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며, 펠리시아는 조니를 찾았을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새로운 생을 얻었고, 사회가 강요하는 헛된 희망과 의미를 더 이상 찾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자신이 아니었다.

 

저자는 이 소설이 선함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지만, 내겐 선과 악의 문제보다 부조리함 속에서 삶의 균형 감각을 회복하는 이야기로 다가왔다. 마지막에 펠리시아가 두 손을 뒤집어 다른 쪽도 햇볕을 쬐고 고개를 살짝 기울여 얼굴의 반대편도 따뜻하게”(321) 하기 때문이다. 삶의 부조리함은 비극인지 희극인지 명확하지 않은 양극단 사이의 연속체 어딘가에 위치할 것이다. 펠리시아는 과거 자신을 어리석었다고 생각했지만, 한때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만의 여정을 지나왔다. 펠리시아는 부조리함 속에 기울어져 있던 자신의 삶을 바로잡고자 하는 의지를, 그녀의 강력한 회복력과 함께 보여주었다. 펠리시아의 여정은 끊임없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물처럼 계속될 것이다.




 

"그녀는 계속 멀미를 한다. 화장실에서 어떤 여자가 말한다."(9)

"만일 자신이 다시 시작한다면 복지제도나 그곳 컴퓨터와는 완전히 거리를 두고 살 거라고. 일단 서류를 작성하면 영원히 괴롭힘을 당한다는 것이다." (152)

"그의 어머니는 말하곤 했다. 뭔가를 원할 때면 잘못된 걸 얻기가 쉽다고, 그리고 때로 어머니 역시 그러곤 했다고." (227)

"우정이 끝나면 힐디치 씨는 늘 이런 식으로 고통을 겪는다. (...) 그 후로는 자신이 겪은 기억의 소멸을 자비의 선물로, 심지어는 자신의 비밀스러운 영역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의문을 가지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241)

"어렸을 때 번창하던 주조공장도 지나가는데, 한 시절의 번영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이제 아무 쓸모 없어진 마당과 삭막한 건물 외관의 검은 벽돌과 돌들뿐이다." (269)

"그는 매번 우정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두 사람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기를, 그들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잘 어울린다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300)

"그녀는 이제 예전의 자신이 아님을 안다. (...) 한때 그녀의 것이던 순수함은 시간이 흐르며 이제 어리석음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남아 있고, 상실을 경험한 예전의 그녀는 지금의 자신으로 이끈 사람이기에 소중하다." (312)

"그녀는 이제 지금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앞을 내다볼 뿐 지난 일을 곱씹지 않는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다." (314)

"그녀는 떠오르는 생각 속에서 굳이 의미를 찾지 않고, 목적 없는 여정에서도 더 이상 의미를 찾지 않으며, 시간과 사람이 뒤죽박죽 섞인 가운데에서도 어떤 규칙을 찾지 않는다. (...) 그녀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 거리에서 저 거리로 돌아다닌다. (...) 새벽이면 그녀의 고독 속에 행복이 깃든다." (320)

"그녀는 두 손을 뒤집어 다른 쪽도 햇볕을 쬐고 고개를 살짝 기울여 얼굴의 반대편도 따뜻하게 한다."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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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이너프 - 평범한 종을 위한 진화론
다니엘 S. 밀로 지음, 이충호 옮김 / 다산사이언스(다산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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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이너프 (Good Enough)

: 평범한 종을 위한 진화론

다니엘 S. 밀로 (Daniel S. Milo) 지음 | 이충호 옮김 | [다산사이언스]

 



이 세계는 왜 그토록 다양할까?

 -굿 이너프의 머리말을 읽고 든 생각들

 



나는 머리말이 긴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많은 경우, 머리말을 먼저 읽기 시작했다가 지쳐서 본문을 읽을 때 이미 흥미를 잃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범한 종을 위한 진화론이란 부제를 달고 출간된 굿 이너프는 처음부터 나의 흥미를 끌었다. 특히 저자가 이어지는 페이지에서 나는 다윈주의와 신다윈주의가 신자유주의와 공통점이 많음을 똑똑히 보여줄 것이다”(15)라는 부분에서 단번에 낚였다본래 리뷰란 책을 다 읽고 쓰는 글이니까, ‘머리말만 읽고 쓰는 이 글은 프리뷰내지는 본격적으로 읽기 위한 워밍업 단계의 글쓰기라고 할 수 있겠다.


머리말을 읽으면서 다소 혼란스러웠던 점은 자연 선택개념을 비판적으로 보는 듯한 저자의 태도였다. 최근에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의 자연사 에세이를 읽고 있는데, 여기에서 알게 된 신다윈주의적 해석과 더불어 이 책을 좀 더 읽어보면서 분명해지는 것은 저자가 자연 선택개념 자체를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선택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양상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저자는 진화를 설명하는 메커니즘에는 적응적 메커니즘인 자연 선택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비적응적 메커니즘이 있다는 점을 언급하고자 한다. 저자가 언급하는 비적응적 변화 메커니즘에는 유전적 부동’, ‘지리적 격리’, ‘창시자 효과를 들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본문에서 살펴볼 예정이다. 중요한 것은 자연 선택개념이 적응을 통한 적자의 선택이라면, 비적응적 변화 메커니즘의 중심 원리는 이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실제 이야기에 미천한 개체들도 살아남아 번식한다”(19)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저자의 목적 내지는 의도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종 내 다양화를 설명하는 것’(26)이 책의 목적이라고 밝힌다. 그러고보니 진화를 이야기하는 많은 책들이 진화의 메커니즘을 보편적으로 설명해낸 다윈과 월리스의 공으로 자연 선택을 들면서도, 어느 종 내에 있는 개체들의 다양성에 대해서 주목한 책이 있던가 싶다. 그러므로 저자는 자연 선택으로 설명되기 힘든 개체의 다양성에 주목해보겠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학창 시절에 한 반 내에 있는 학생들의 키가 상당히 다양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여기에 누가 생존에 유리한 적자’(the fit)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스티븐 제이 굴드는 판다의 엄지에서 발끈하듯 이렇게 말한 대목이 나온다. “우리는 (나처럼 키가 작은 사람들은) 높은 지능이 키가 큰 사람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판다의 엄지, 212)고 말이다. 굿 이너프의 저자 다니엘 밀로 역시 이 현상(개체 내 다양성)자연 선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밀로에 따르면 개체의 크기 차이는 적응’적인 것이 아니다. 그 역시 자연 선택과 적응을 실재하는 원리로 인정하지만, “개체에서 나타나는 변이는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관용을 통해 허용되는 것”(47)이라고 정리한다. 이를 위해 저자가 주목하는 개념이 바로 과잉중성’, ‘평범성이다. 이 개념들에 대해서는 역시 본문을 좀 더 읽어가면서 정리해야 할 듯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에서 선택되지 않고 남겨지는 존재들에 대해 관용지대가 있으며, 여기에 다양한 존재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저자가 주장하는 굿 이너프이론의 핵심이라고 이해한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판다의 엄지13장에서 뇌의 크기와 지능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을 언급한다. 19세기 중반 유럽 사회에 출몰한 이 망령은 머리 큰 사람이 높은 지능을 갖는다는 추정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활동으로 이어졌다. 당대의 지식인들이 뇌의 크기에 주목하여 그 크기를 비교해보았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 답을 알고 있지만, 수십 년에 걸쳐 유명 인사의 뇌 무게를 측정한 자료를 보고 나서야 개체 사이의 차이와 지능과의 관계가 모호하다는 것이 밝혀진 셈이다. 보다 자극적인 자료를 언급하면, 1883년에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의 시신이 해부되어 그의 뇌가 측정되었는데, 뇌의 무게가 2,000그램으로 나왔다. 반면 1924년에 해부된 아나톨 프랑스의 시신에서 나온 뇌의 무게는 1,017그램이었다. 그 사이에 월트 휘트먼의 뇌 무게는 1,282그램이었다. 우리는 투르게네프의 지능이 아나톨 프랑스의 지능보다 2배 높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질문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지만, 내가 볼 때 이 사례는 다니엘 밀로가 비판하는 자연 선택혹은 적응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이 개념이 탁월함이란 개념으로 불행하게 연결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밀로는 이 사태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며, ‘굿 이너프이론 혹은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며 개체 간 차이를 설명하는 진화론에 주목한다.


다니엘 밀로는 다윈이 1859년에 종의 기원을 발표한 이후, ‘변화를 동반한 계승이라는 개념은 큰 문제없이 받아들여졌으나, ‘자연 선택개념은 거센 반발에 부닥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굴드는 다윈 이후에서 자연 선택 이론이 1940년대에 와서야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고 했다. 아마도 이 개념은 물리학의 여러 법칙처럼 예외 없이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예외 사례, 혹은 다르게 설명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밀로에 따르면 '내생공생설' 혹은 '세포 내 공생설'(endosymbiosis) 개념을 처음 주장하고 도입했던 린 마굴리스 역시 자연 선택 개념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마굴리스는 자신을 변화를 동반한 대물림의 지지자인 동시에 그것의 주요 행위자로 일컬어지는 자연 선택의 적’(43)이라고 정의했다. 이쯤 되면 자연 선택개념에 어떤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을까 자문하게 된다.


저자가 우려하고 비판하는 지점은 자연 선택 개념에 대한 집착이 지나치게 되면 우리의 삶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데 있다. 곧 적응을 통한 생존, 완벽한 종, 최적화된 종에 대한 지나친 의존이 자본주의적, 경쟁적, 비용-편익적 해석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왜곡된 다윈주의가 이미 우생학과 같은 분야에 적용되었다는 점이다. 나아가 과학적 방법이라는 명분 아래 조직적으로 제기된 인종 및 성차별적 주장들을 떠올릴 수 있고, 우리는 인간우월주의적, 인간중심적인 시각이 굳어지도록 한 영향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도 알고 있다. 또 다른 예로 동물에 대한 데카르트의 기계론적인 관점(동물은 영혼이 없고, 그저 자동으로 움직이는 기계라는 관점)이 다양한 맥락으로 확대되고 왜곡되어 어떻게 인간중심적인 동물관을 낳게 되었는지 떠올려보아도 좋을 것이다.


오늘은 본문을 읽고 리뷰를 작성하기 전에 느낀 것들 위주로 정리해보았다. 오래간만에 흥미로운 머리말을 읽었다. 저자가 던지는 새로운 시각과 문제의식을 만날 때마다 멈춰서 내가 이해하고 있던 개념들을 다시 떠올려 보기도하고, 저자의 의도를 파악해보고자 했다. 저자의 접근 방식을 이렇게 역사가의 서술 방식에 비유해서 이해해보면 어떨까말하자면 저자가 이 책에서 접근하는 방식은 역사의 주체를 누구로 볼 것인가의 문제에서 토마스 칼라일이 영웅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방식에 대해, 하워드 진이 민중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고자 한 접근방식과 유사하지 않을까 싶다.


진화 메커니즘에는 목적이 없다고 말한다. 우연히 생존한 개체들(혹은 적자)이 보상을 받기 때문이다. 아마도 밀로의 관점에서 현대 사회가 자연 선택을 통해 적응한 개체들은 일종의 영웅중심 서술에 치우친 결과에 비견되지 않을까 싶다. 그에 반해 저자는 자연을 구성하는 수많은 보통의 존재들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보는 셈이다. 이들은 결코 완전하거나 최적화된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그 자체로 충분한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고 자연의 수많은 개체의 종내 다양성을 갖는 이유에 대해 저자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해진다. 머리말만 읽고도 단번에 저자의 팬이 되어버렸다.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머리말을 읽고 나름대로 이해한 사항을 정리하면서 워밍업을 끝내야겠다. 이제 본문을 읽을 준비가 된 것 같다. 본문에 대한 리뷰는 다음 기회에.



 

[덧붙이는 말]

[1] 저자가 머리말에서 언급한 세 대륙에서 다섯 인종 집단을 대상으로...”(30)라는 대목에 대한 나의 생각이다. 저자가 왜 다섯 인종이라고 표현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지구상에 인종은 하나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생물학적으로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은 하나다. 우리가 흑인, 백인, 황인 등으로 구분하는 인종개념은 정확히 말하면 틀렸다고 지적할 수 있다. 스티븐 제이 굴드가 이 문제를 자신의 에세이에서 여러 번 지적하는데, 그에 따르면 종(species)이란 종은 생물 다양성의 기본 단위로, 자연 상태에서는 서로 교잡하지 않고 영구적으로 격리된 개체군들이다.”(플라밍고의 미소, 216)라고 언급한다. 반면 우리가 이야기하는 인종사이에 자녀를 낳을 수 있으므로, 이 각각의 인종은 다른 종이 아니다. 굴드에 따르면 오히려 이 인종은 지리에 따른 변이를 나타내는 아종’(subspecies)라고 이해해야할 것 같다. 물론 굴드는 이 아종 개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데, 결국 우리가 언급하는 인종개념은 아종에 가깝고, 결국은 편의상의 분류라는 점이다. 저자는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인종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 역시 서양인들이 타 민족에 대해 품어온 오랜 우월주의적 시각의 잔재라고 이해한다. 특히나 생물학의 맥락에서 언급하는 저자의 경우, 이 인종이라는 용어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인종이라는 용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2] 본문에 나오는 그림의 설명이나 캡션의 텍스트 크기가 너무 작아서 읽기 고통스럽다는 점이 이 책에서 발견한 단점이다. 아마 이 책을 편집하신 분은 독수리 시력 3.020-30대 편집자가 아닐까 싶다. 몇 년 전까지 나도 작은 글자를 읽는데 큰 문제없었지만, 최근에 갑자기 작은 글씨를 읽는 것이 힘들어졌다. 그림에 제시된 설명을 읽는 것이 고통스러울 정도다. 특히 본문 텍스트와 그림의 텍스트의 폰트 크기에 균형을 맞춰 주셨으면 좋겠다. 반면 미주이 폰트 크기는 더 작아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책 읽듯이 읽는 부분이 아니니까.

 


[3] 계속해서 스티븐 제이 굴드를 언급하는 점을 양해부탁드린다. 현재 굴드의 책을 읽고 있기 때문이다. 내게는 새로운 독서 활동이란 끊임없이 이미 읽은 책을 떠올리고, 비교하면서 상호작용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지금은 밀로의 책을 굴드와 많이 견주어가며 읽고 있지만, 훗날 다시 이 책을 읽게 되면, 또 다른 맥락에서 이해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다니엘 밀로의 글쓰기 전략이나 시각이 굴드의 시각과도 닮은 부분이 보이는 지점이다. 실제로 저자는 본문에서 다윈의 책을 제외하고는 굴드의 책을 다수 언급한다. 또 아직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저자가 리처드 도킨스를 비판적으로 언급하는 대목이 나오는 데, 이런 관점은 도킨스의 저서를 비판적으로 읽는 활동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킴 스티렐리는 자신의 책 유전자와 생명의 역사에서(원제가 Dawkins vs. Gould: Survival of the fittest .) 도킨스와 굴드의 논쟁을 비교한 바 있다. 국내에서는 도킨스의 영향력이 상당한 반면, 안타깝지만 굴드가 빨리 사망해서 그런지 보다 주목을 덜 받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다니엘 밀로의 굿 이너프는 굴드 이후 도킨스와 대척점에서 그의 서적을 비판적으로 읽는데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다윈주의와 신다윈주의가 신자유주의와 공통점이 많음을 똑똑히 보여줄 것이다." (16)

"실제 진화 이야기에는 미천한 개체들도 사아남아 번식한다." (19)

"이 책에 실린 주장 중 어느 것도 확고하게 입증된 자연 법칙인 ‘변화를 동반한 대물림‘이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어느 주장도 자연 선택의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며, 단지 자연 선택이 널리 보편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부정할 뿐이다." (36)

"나의 불경한 성배는 진화생물학이 등한시하고 진화윤리학이 경멸하는 특징인 과잉과 중성과 평범성의 기원이다. 나는 다윈주의의 편향을 뒤집어 탁월성 추구를 자명한 원동력이 아니라 문제점으로 바라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40)

"자연 선택은 실재하고 적응도 실재한다. 하지만 개체들을 서로 구별하는 속성들, 특히 크기 차이는 적응적인 것이 아니다. 이러한 변이들은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관용을 통해 허용되는 것이다." (47)

"탁월성에 크게 집착하며 살아가는 나는 그것을 추구하는 노력의 무용성과 마조히즘적 성격을 잘 안다. 비록 자본주의 제도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자연은 사실 생존과 생식 외에는 아무 보상도 주지 않는다. 그리고 최적 상태보다 훨씬 못하더라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안전망이 생존과 생식을 보장해준다."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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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7-11 14: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윈의 진화론이 신자유주의에 기름을 부은 것 같군요.
과학자는 모른다는 말을 못해 그것을 이론으로 말한다고도 하는데,
그 말한다는 것은 또다른 외부에 의해 또는 어떤 의도를 위해 순수한척 가설되어진 것 같기도합니다.
2000년대가 넘어 이제겨우 시상하부 MPA (전시각중추)가 먹이소유본능을 담당하는 것을 밝혔는데
과학이 그 방대하고 거대한 진화를 장담하겠습니까 ㅎㅎ

초란공 2021-07-12 09:17   좋아요 2 | URL
다윈의 진화론의 경우, 타인이 해석한 다윈주의를 다윈 자신이 마음에 안들어 했던 정황도 떠올려 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편견에 어떻게 변형되고 왜곡될 수 있는지 이미 다윈이 살아 있던 당대에 보여주었으니까요. 진화론은 그런점에서도 방대한 분야인듯 합니다. 오늘부터 더 더워질 모양입니다. 한 주 시원하게 보내세요~

scott 2021-08-06 15: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이달의 당선작 추카~*
이책 찜!👆

초란공 2021-08-06 18:1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08-06 16: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

초란공 2021-08-06 18:1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초딩 2021-08-06 17: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초씨 집안의 영관입니다!!!!! ^^ 정말 축하드려요!

초란공 2021-08-06 18:16   좋아요 2 | URL
이제 초씨가 알라딘 유력 가문이 되는겁니까. ㅎㅎㅎ

이하라 2021-08-06 18: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초란공 2021-08-06 18:1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1-08-06 18: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초란공 2021-08-06 18:1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1-08-06 18: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잘 모르는 부분의 책을 읽으시고, 좋은 글을 쓰시는 것에 매번 감탄합니다.
이 책에 대해 관심이 갑니다.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초란공 2021-08-06 18:32   좋아요 2 | URL
늦게 읽기 시작해서 아직 방황하고 있습니다. 항상 격하게 공감도 해주시고 풍성한 글을 써주셔서 저는 따라할 뿐이지요~~
 


홍대용과 항주의 세 선비

김명호 지음 | [돌베개]

 


'책꽂이에서 다시 발견한 책' - 홍대용과 항주의 세 선비


 

조선 후기를 무대로 등장하는 북학파와 관련해서 정리해본다. 북학파의 거두라고 불리는 연암 박지원 선생이 남긴 유명한 열하일기(김혈조 옮김, 돌베개, 2017, 개정신판) 외에 연암의 면모를 보다 심도 있게 파악할 수 있다고 알려진 문집이 바로 연암집(신호열, 김명호 옮김, 돌베개, 2007)이다. 그리고 이 연암집 번역에 참여했던 김명호 교수가 북학파에 속하는 홍대용의 북경기행의 면모를 보다 면밀히 연구하여 펴낸 책이 오늘 소개할 홍대용과 항주의 세 선비(김명호 지음, 돌베개, 2020). 공교롭게도 모두 돌베개 출판사의 작업물이다. 이렇게 한 분야에 대해서도 꾸준히 책을 번역하고, 책을 내는 사명을 지닌 출판사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무엇보다 나는 열하일기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고, 한국사에 대한 무지를 탈피할 실마리를 이 주제/분야에서 얻었다. 블로그와 서재에서 사용하는 내 닉네임 초란공역시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정진사라는 인물의 별명이다. 연암 선생은 청나라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러 떠나는 북경행 사신 행렬을 따라가는데, 여기에 새로운 문물의 이면을 보지 못하고 마음을 닫은 채 음식은 볶음계란만 찾던 정진사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연암은 정진사에게 볶을초’()자를 사용한 초란공(炒卵公)’이라는 별명을 지어준다. 정확하게 어떻게 하는 요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부추와 같은 채소를 넣은 계란 스크램블같은 간단한 요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튼 초란공은 연암 선생이 열하일기에서 희화화한 인물이면서도, 나에겐 세상에 대해 보다 호기심을 갖고 나를 세상에 던져 넣어 보라고 주문하는 반면교사인 셈이다.


이렇게 열하일기를 읽은 경험이 연암 선생과 북학파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이덕무와 박제가, 그리고 홍대용이란 인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물론 아직 제대로 읽은 저작은 거의 없다. 앞서 언급한 3권짜리 연암집860페이지(본문550여 페이지 + 주석 300여 페이지)에 달하는 홍대용과 항주의 세 선비을 소장하고 있지만, 아직 읽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뭐 언젠간 읽겠지상태). 열하일기를 읽을 때, 특히 기억에 남았던 부분은 연암 선생이 북경에서 청나라 문인/학자들과 글을 써서 대화를 나눈 필담장면이다. 이 필담은 연암 일행이 청나라 강희제의 여름 별장(이 시골에 있는 황제의 별장은 세계 최대 수준이다. 역시 중국의 스케일은 남다르다.)이 있는 열하(현 지명은 승덕)에서도 이어진다.


열하일기에 자주 등장하는 필담에는 엄성, 반정균, 육비라는 청나라 선비의 이름도 등장한다. 이 책은 연암 선생이 연행을 다녀온 1780년 이후 3년 간 메모해둔 종이 뭉치와 고증작업 등을 거쳐 탄생한 책이다. 홍대용은 연암이 처음 청나라 땅을 밟기 15년 전인, 1765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반년 간 이미 중국의 문물을 보고 새로운 체험을 하고 돌아온 상태였다. 이 때 홍대용이 과감하게접근하여 대화의 물꼬를 텄던 청나라의 학자가 바로 위에 언급한 세 사람이었다. 이들의 인연은 이후에도 계속된 이어져 연암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나이는 연암이 위였지만, 홍대용은 정말 혈기왕성할 시기에 청나라를 경험했던 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에 출간된 홍대용과 항주의 세 선비은 바로 홍대용과 청나라의 세 선비가 만남에서부터 서신으로 교류를 지속하고, 나아가 대를 이어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졌던 양국 지식인의 국제 교류의 역사를 담은 책이다.


그동안 이 책을 읽지 못하고 있다가 다시 꺼내들게 된 것은, 우선 이 책의 가치에 비해 주목을 많이 받고 있지 못한 것 같아 나의 생각을 기록해두고 또 소개를 하고 싶어서였다. 또 결정적으로 마침 계간지 창작과비평 191(2021년 봄)에 울산대 노경희 교수가 기고한 서평에서 다시 이 책과 만났기 때문이다. 세심한읽기와 대담한해석 이라는 제목의 서평에서, 노경희는 조선 후기 조선과 중국 지식인의 교류사에 대한 연구 결과물의 의의와 맥락을 개인적인 경험과 더불어 짚어주었다.


사실 열하일기에서 묘사되는 필담 에피소드에서 상황을 관통하며 대화 사이에 흐르는 뭔지 모를 긴장감은 당시 청나라에서 시행했던 문자옥때문이었다. 이 문자옥은 청나라에서 공식적으로 한족과 관련된 어떤 말이라도 했을 때, 당사자 본인을 포함하여 일가친적 9족을 멸하는 징벌이 따랐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티벳 불교를 받아들이고 타민족에게 포용력있는 모습으로 비춰진 청나라의 이면에는 한족 지식인들에 대한 억압/탄압 정책이 함께 적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에서 간 선비들이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비난하면서, 한족 지식인들을 만나 자꾸 이들로 하여금 한족의 역사나 정신과 관련한 문제를 묻고 대답을 요구하는 상황(특히나 증거나 남는 필담 과정에서)은 한족 선비들에게는 목숨을 건 아찔한 상황 속에서 몰래 나누는 대화였던 셈이다. 그러므로 서평에서 저자도 지적했듯이 청나라에 간 조선사신이 한족 선비와 만나 대화하는 일 자체가 단순한 교류를 넘어서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노경희의 서평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저자가 일본에 유학하던 시절에 교토대 후마 스스무 교수와의 개인적인 인연과 이 책이 놓여 있는 맥락을 짚어준 점이다. 그는 후마 스스무 교수의 연구를 이렇게 평한다. “한국 학계에서는 그(후마 스스무 교수)의 풍부한 자료 활용 능력과 근거를 중시하는 엄격한 학문 태도를 인정하면서도, 18세기 조선 학계가 보이는 복잡다단한 현상의 이면보다 남겨진 기록에만 집중하는 모습에 당혹감을 느꼈다.”(454) 곧 저자에 따르면 후마 스스무 교수가 바라본 조선 후기는 주자학만 신봉하는 단선적이고 평면적인’(454) 조선이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노경희는 홍대용과 항주의 세 선비에서 저자 김명호가 양국 지식인 교류의 모습을 홍대용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보다 다면적이고 역동적인 국면으로 과감하게해석한 점을 지적한다. 당시 조선의 지성계에 존명배청사상이 강력하게 지배하던 상황이었지만, 저자는 홍대용이 청나라에 다녀온 이후, 특히 엄성, 반정균, 육비로 지칭되는 청나라 지식인들과의 교류로 이 존명배청사상이 흔들리게 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정리하자면, 당시 조선 지식인의 입장에서 중화란 명나라의 계보를 잇는 강남 한족의 역사와 문화에만 해당할 뿐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문물을 보고 돌아온 여행 이후 홍대용의 입장에서는, 중화가 조선도 될 수 있으며, 같은 논리로 청나라 또한 중화가 될 수 있다는 논리로도 이어졌다는 것이다(창작과비평, 455). 그러므로 저자 김명호는 조선 지식인들의 세계관에서 존명의식에 균열을 겪고, ‘존명의식과 북학사상 사이의 모순사이에서 고민하고 자신의 논리를 찾아갔던 이로 홍대용을 호명하고 있다(창작과비평, 455).


끝으로 서평에서 노경희는 김명호가 책에서 지적하는 후속 과제에 주목한다. 귀국 이후 항주 문인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통해 홍대용의 후반기 사상이 어떻게 변모해가는가’(창작과비평, 456)라는 문제다. 이 부분은 저자 김명호와 후학들의 연구 활동으로 다시 빛을 보게 되길 바란다. 나를 비롯한 일반 독자들에게도 궁금해지는 지점일 것이다. 노경희는 국내 학계에 대해 다소 아쉬운 상황(보다 자주적인 해석이 필요하다는 견해)과 이 책의 의의를 정리했다. 현재 우리 역사 연구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는 일본과 중국의 학자들이 자신들의 배경과 관심사, 세계관으로 상황을 해석하고 인정받는 상황에서, 홍대용과 항주의 세 선비는 일본 및 중국의 학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우리 나름의 준거를 마련해주었다고 평가한다. 서평자가 이 책에 대해 짚어주는 의의를 들으니 이 책의 가치가 새롭게 보였다.


노경희는 저자 김명희가 홍대용과 항주의 세 선비에서 시도한 해석을 대담하다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사실 학자의 일이란 다른 학자들의 주장 혹은 견해에 공감하고 동의하는 일을 훨씬 넘어선다. 저자처럼 후마 교수의 연구를 인정할만한 점과 비판할만한 점을 지적하면서도, 다양한 차원에서 주제에 접근하여 우리 나름의 시각을 마련하는 일은 당연히필요하고, 또 요구되는 일이라고 본다. 개인적으로는 노경희 교수의 서평을 통해 홍대용과 항주의 세 선비의 이해를 위한 실마리 내지는 책을 읽으며 지닐 만한 화두를 얻은 셈이다. 이 책이 지니는 의의에 대해 공감을 하게 되니, 앞으로 애착을 갖고 이 책을 읽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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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7-04 12: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천안에 갈일이 있어서 근처 가볼 곳이 없을까하다 홍대용 과학관을 갔었어요
홍대용이 천안 출신이고 천안의 자랑인걸 그 때 알았어요.
과학관은 정말 훌륭했어요. 천제망원경으로 관측을 할 수 있게 미리 수업도 하고 관측도 하고요.
그리고 혼천의 등 여러 조선의 관측 기구도 있었고요.
무엇보다도 홍대용이 남긴 글과 시를 보고 놀랐습니다.
우선 중국에서 서양문물을 접하고 지전설을 아시아최초(맞을거에요)로 말했고
칼 세이건처럼
우주의 저 수많은 별들을 보면 우리 인간은 얼마나 작은가라는 시는 감탄을 금치 못했어요.
또 한번 우리 선조의 우수함과 그 우수함이 발현되지 못한것 그리고 지금 우리가 잘 모르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

초란공 2021-07-04 12:52   좋아요 3 | URL
아~ 홍대용 선생이 천안 출신이었군요! 선생의 이름을 딴 과학관이 따로 있다니 놀랍네요~ <열하일기>에도 ‘삼환부공설‘(우주 공간에 해/지구/달이 떠있다는 얘기)을 중국 학자들과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왔는데, 홍대용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레삭매냐 2021-07-10 12:14   좋아요 0 | URL
저도 홍대용 과학관 이야기를 들어서
언제 한 번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집에서 딱 100KM 라 선뜻 걸음이 떨
어지질 않네요 ㅋ

그레이스 2021-07-04 17: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천재적인 인물인듯요!

레삭매냐 2021-07-10 12: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이 다 있다는 사실에 한 번
놀라고,

책값에 다시 한 번 놀랐습니다.

초란공 2021-07-10 13:03   좋아요 1 | URL
가격이 ㅋㅋ 만만치 않습니다. ^^ 그래도 입김이 센 중국/일본 학자들의 조선 지성사 연구에 우리도 주도적으로 이 시기를 조망하는 책이 나온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바로 읽을 시간을 내기 힘들듯하여 아내의 외할아버님(올해 만 89세 되셨죠)께 이 책 재미있을 듯하다고 선물드렸더니, 재미있다고 아주 좋아하십니다. ㅋㅋㅋ 제 나이의 두 배가 되는 어른과 이 책으로 소통이 되네요. ㅋ
 
세미나책 - 세미나 시작부터 발제문 쓰기까지, 인문학공부 함께하기
정승연 지음 / 봄날의박씨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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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책

정승연 지음 | [봄날의박씨]



 

쉘 위 공부? - 인문학 공부를 위한 세미나 지침


 

필사’, ‘발제란 표현을 알게 된지 몇 년이 되지 않았다. 독서모임이나 세미나 모임에 참여도 해보고 나서야 나는 이 용어를 접하게 된 셈인데,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세미나책을 읽기 직전까지도 발제의 개념을 제대로 몰랐다. 1년에 3-4권 정도 읽으면 이미 포만감을 느꼈을 정도로 책읽기를 힘들어 했던 내가 책 읽기에 보다 관심을 갖게 된 것이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공부를 위한 책읽기는 혼자 못할 이유도 없지만 세미나를 통한 공부는 네트워크가 함께하는 공부 방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미나는 외부를 이어주어, 지금까지의 나를 벗어나게 해주는 접속구이기도 하다.


책 읽기에 보다 관심을 갖게 되었을 때, 방법론적인 책을 여러 권 본 기억이 있다. 원래 매뉴얼 같은 안내서를 가까이하지 않았지만, ‘1만권 읽기와 같은 제목을 단 책들의 저자는 과연 책을 어떻게 읽는지 궁금했었다. 속독과 다독의 비결을 알려주는 책을 여러 권 읽어보았지만, 대부분의 책에서 소개해주는 책읽기의 방법론은 인문학 공부에 크게 도움이 안 되는 독서법이었다. 어느 자기계발서 저자는 책을 마무리하며 이 방법은 인문학 서적에는 적절하지 않습니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는데, 그래도 이 경우는 저자가 솔직한 경우였다. 내가 관심 있는 인문학 공부의 책읽기, 공부하기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책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런 책들을 몇 권 읽고 내린 결론은 내 관심사를 파악해서 내 속도대로 읽어나가자는 것이었다.


세미나책은 나의 경험에 비추어 크게 기대하고 읽어 나가지는 않았지만, 의외로 저자의 인문학 세미나 경험과 공부에 대해 생각해볼 거리를 많이 던져주어서 만족스러웠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기 시작해서야 비로소 처음 인문학 공부를 시도했다. 이 때 처음 경험해보았던 것이 세미나식 공부였다. 다만 나를 괴롭혔던 것은 다소 기계적인 측면이 있는 내용 요약하기가 아니라 발제문 만들기였다.


내가 관심있게 읽은 부분을 중심으로 간단히 정리해보자. 저자에 따르면, 발제란 질문을 던질만한 문제를 찾는 일’(140)이다. 따라서 발제자는 세미나에서 고민할 문제를 만들어오되, 형식적으로는 이 문제를 만들기까지 고민했던 전후 맥락을 기록’(141)한다. 이것이 발제문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나는 과연 발제문이 무엇인가하는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이전에 내가 만들어간 발제문은 마감에 급급하여 끄적거린 요약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정작 중요한 질문을 곁가지취급을 했고, 이 질문은 내용 이해를 위한 요약과도 따로 놀았던 셈이다. 그런 점에서 과거에 우왕좌왕하며 고민하던 경험이 전혀 쓸모없지는 않았다는데 위안을 삼는다.


발제와 발제문 만들기는 이 책에서 내가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었고, 나 스스로 발제란 무엇인지 납득할 수 있었다. 저자 역시 지속적으로 참가하는 세미나 공부를 통해 이 부분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정리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밖에 이 책은 세미나 구성과 읽기, 발제문과 에세이 쓰기, 말하기와 같은 공부의 뼈대가 되는 방법론을 이야기하되, 다른 방법론 책과 달리 인문학 공부란 무언인가라는 저자의 공부론을 접할 수 있어서, 이 부분이 좋았다. 이를테면 인문학 공부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의식적 차원의 공부’(6)이며, 그런 의미에서 세미나/공부란 말로 바뀐 내 지식과 정서를 타자와 만나게 하는 장소’(161)이면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발굴해 내는 작업’(202)이라는 견해에 공감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의 공부는 어떠해야 할까 생각해본다. 저자가 학창시절 참여했던 운동권 공부얻은 지식으로 세상을 바꾸는 공부였다면, 이 책의 (인문학) 공부는 나를 바꾸는 공부가 되어야 한다는 언급도 인상 깊다. 저자는 공부의 주제로 삼을 만한 것이 마음이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87)이라고 말한다. 어떤 책을 읽을 때 납득이 가지 않거나 생경하게 다가올 때, 바로 이 지점에서 이 문제를 파고들어야 내 삶에 무언가를 남길 수 있다고 전한다. 그러므로 내가 품고 있던 문제, 내가 결핍감을 느끼는 지점, 나의 욕망이 무엇인지 들여다봐야 한다는 주문일 테다. ‘나의 공부역시 이 지점을 향해야 할 것이다.


언젠가 고미숙 작가의 어느 글에서 공부’(工夫)는 중국 무술 쿵후’(功夫)와 발음이 같다는 언급을 읽은 기억이 난다. ‘쿵후는 공부의 ’()에 힘쓰기()가 더 들어간 셈이니, 몸을 중심으로 익히는 공부라고 볼 수 있겠다. 마찬가지로 선인들의 공부(工夫)는 단순히 지식을 머리에 넣는 행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익히고 숙달하는 과정을 전제한다. 말하자면 몸과 머리에 역사를 담고 쌓아가는 개념이라고 볼 수도 있다. 들어온 지식이 내 안에서 겉돌지 않고, 나의 삶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어야 공부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부는 인문학 열풍의 정체가 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공부라고 진단한다. 이를 나의 말로 표현하자면, ‘인문학 열풍의 원인은 지식이 스펙 쌓기처럼 물신화되어 버린데 있다고 생각한다. 요즈음 뉴스를 보면 경제력뿐만 아니라 지식을 가진 이가 경쟁력을 가진 존재가 되고, 이것이 하나의 권력이 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공부’(工夫)란 무엇인가를 묻는 일은 의미심장하다. 나의 공부가 어떠해야하는지를 묻는 일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스스로에게 묻고 점검해야할 물음이 되어야 할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미나책은 세미나를 통한 인문학 공부의 지침을 알려주는 것뿐 아니라, ‘공부란 무언인가를 다시 생각해보게 해준 책이다. 이 책은 많은 책을 읽기 위한 테크닉과 같은 일방적이고 기능주의적인 시각에 충분히 보완이 될 만한 견해와 시각을 담고 있다. 이제 내 삶을 들여다보고 나를 바꾸는 공부를 할 때다. 쉘 위 공부?

 

 




[1] "(인문학 공부는) 좀 더 의식적인 차원의 공부입니다." (6)

"인문학 공부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다른 관점’의 획득입니다. (...) 그것은 곧 ‘자기 갱신’이기도 합니다." (20)

"(인문학 공부를 통해) 그 과정을 반복하는 사이에 바뀌는 것은 나의 일상이고, 일상이 바뀌면 ‘욕망’, 그러니까 원하는 게 바뀝니다." (23)

[2] "‘마음이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피해서는 안 되는 ‘공부’의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파고들어야 내 삶에 무언가 남길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87)

[3] "발제문은 무엇일까요? 그 시간에 고민한 ‘문제’와 발제자가 그 ‘문제’를 만들기까지 고민했던 전후 맥락을 기록한 글입니다." (141)

"세미나에 있어서 발제문은 ‘읽기’와 ‘말하기’ 사이에서 그 둘을 이어 주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 내가 정말 문제라고 생각하는 바에 대해서도 납득 가능한 설명을 붙여 주어야 합니다." (142)

[4] "세미나는 말로 바뀐 내 지식과 정서를 타자와 만나게 하는 장소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내 말의 한계를 발견하고, 다른 사람의 한계를 봅니다. 그리고 잘만 한다면 내 존재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언가로 변환시킬 수도 있습니다." (161)

[5] "텍스트에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들이 잠재되어 있는데, ‘읽기’란, ‘세미나’란, ‘공부’란 바로 그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들을 발굴해 내는 작업인 것입니다." (202)

[6] "공부는 내 인생과 서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나 자신과 함께 공진화해 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매번 새롭게 주사위를 던져 보는 것뿐입니다." (205)

[7] "‘공부로 인생역전’ 한다는 건 공부를 발판 삼아 출세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인생의 성질을 바꾸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어떻습니까? 공부, 하고 싶지 않으신가요?"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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