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화판 - 권윤덕의 그림책 이야기
권윤덕 지음 / 돌베개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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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화판

: 권윤덕의 그림책 이야기

권윤덕 지음 [돌베개]

 


그림책 작가의 작업 노트와 철학: '인간은 치유하며 성장 한다'

 


최근에 그림책에 대한 관심이 생겨 아내와 함께 읽게 된 책이다. 권윤덕 작가를 알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자세한 정보 없이 손에 든 책이었지만 인상 깊게 읽었다. 저자는 1995년 아이와의 일상을 소재로 그려낸 만희네 집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25년 이상 그림책 작업에 전념해온 작가다. 특히 작업 전반을 보다 편리한 디지털 작업이 아니라 수묵화나 불화와 같은 전통적인 도구와 방법을 계속 활용하며, 각 작업마다 표현 기법을 새롭게 탐구하면서 제한적인 조건들을 극복해왔다.


 

나의 작은 화판에는 1995년에 출간한 첫 책부터 2016년에 펴낸 나무 도장까지 20여년의 작업을 대상으로, 작가의 삶과 작업에 대한 철학이 오롯이 담겨 있다. 특히 아이가 어렸을 때 아이를 눈높이에서 지켜보면서, 아이의 삶 속으로 들어가 함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울러 일상에서부터 거대한 역사에 이르는 폭넓은 주제를 표현해내기 위해 새로운 표현 기법을 시도하고 연마하는 모습도 책에 녹아있다. 물론 그 과정 자체는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어린 아들과 1년 간 헤어져 중국에서 수묵화를 배우거나, 노동 현장을 취재하다가 냉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진행 과정에서 부딪히는 양상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사람들과의 연결됨을 고민하며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다.


 

그림 한 장을 완성하기까지는 만만치 않게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림은 내가 익히고 느낀 만큼 그릴 수 있고, 내가 애쓴 만큼 표현할 수 있다. 내 능력과 노력을 넘어 기대하면 곧 허영이고 헛붓질이다.”(183)


 

저자는 50페이지 전후의 그림책 한 권을 만들어 내려면 관련 자료를 공부하고나 취재하고, 이를 소화하여 그림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만들어내는 데 최소 2-3년이 걸린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작업에 맞는 새로운 그림 기법(표현 방법)을 연구하는 과정이 포함된다. 또 여러 권의 더미북을 제작하며 사람들에게 의견을 묻고 대화하며 만들어나가는 과정도 거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림책이 아이들을 위한 책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무지와 편견을 깨는 기회였고, 새롭게 배우는 점이 많았다. 이건 작업의 어려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을 포함한 다양한 독자가 어떻게 읽을까, 메시지가 어떻게 전달되고, 독자가 어떻게 받아들일까도 고민하는 과정도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은 작업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반드시 고려해야 하며 넘어야할 단계였다.


 

책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예기치 못하게 13년이라는 긴 호흡을 필요로 했던 꽃할머니작업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한중일 세 나라의 그림책 작가들이 평화의 연대를 위한 공동작업으로 시작되었다. 저자는 한국 그림책 작가로 참여했고, 이 작업에서는 위안부할머니들에 주목했다. 이 주제는 수많은 분들이 국가의 폭력으로 고통을 받으며 인권이 유린된 역사이기에, 그만큼 많은 고민을 요구하기도 하고, 예기치 못한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저자는 어떻게 하면 개인의 일과 역사적 맥락을 연결할 수 있을까 계속 질문”(203)하며, ‘폭력을 직접 묘사하지 않고 폭력을 이야기하기 위해 고민하며 작업의 방향과 나아감을 결정했다. 10년이 넘는 지난한 작업의 경험은 저자에게 ‘50년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던 경험이었다.


 

창작을 하는 사람들에게 재능, 혹은 천재성이란 말은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재능은 어느 시인의 표현대로 (글쓰기든 창작이든) 쉽게 포기하지 않고, 창작에 대한 열정이 고갈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오늘날 예술가의 재능은 단지 작품의 시장성만을 기준으로 판단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볼 일이다. 예술가는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여기에 공감하는 자다. 나아가 이러한 인식을 자신의 삶 속에 녹여 각자에게 익숙한 매체를 통해 이를 구체적인 대상으로 재현해내는 이들이다. 사회의 규범 속에서 살아가는 대중들이 외면하기 쉽거나 미처 인지하지 못한 삶의 진실들을 캐어내어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대중은 그 속에서 보편적인 경험과 진실을 발견하고 공감하게 될 것이다. 저자는 내가 생각하는 예술가의 역할을 그대로 보여준다. 저자의 삶 자체가 이미 하나의 예술작업이라고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가 아이들과 책읽기 수업을 할 때, 만나게 되는 아이들에 대한 시선이 좋아 이 부분도 기억에 남는다. “마음이 아픈 어린이 뒤에는 상처로 가득한 부모가 있었고, 그 가족 뒤에는 개인의 힘으로 뛰어넘기 어려운 사회구조가 막아서고 있었다.”(250) 고통과 상처를 경험했던 사람이 다시 타인, 특히 자녀에게 이러한 고통을 전가하는 사례는 흔히 발견된다. 이런 문제가 개인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사회구조적인 문제의 결과일 수도 있다는 데 저자는 주목한다. 그 역시 작업을 하면서 본인의 아픈 과거를 새롭게 마주한다. 더불어 개인과 사회의 관계, 개인과 개인의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고 이를 형성해나가기도 한다. 이 점은 넉넉하지 않은 부모의 노동으로 아이들과 함께 하지 못해 방치되다시피 하는 아이들, 그리고 이 상황에 죄의식을 항상 갖고 살아가야만 하는 부모들을 만나 함께 이야기와 고민을 나눈다. 이 때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열게 되는데, 서로가 이어지는 모습이 푸근하고 따뜻하게 다가온다. 그림책은 이렇게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나 역시 어른이 되어 늦게나마 그림책이 지니고 있는 힘을 새롭게 배워가는 중이다



"어린이는 나름 나름의 기질과 재주를 가지고 태어난다. 각자 그것을 밑천 삼아 사회 안에서 서로 보완하고 어울어지면서 저마다의 행복과 의미를 찾아간다. 사회의 기존 가치나 질서와 끊임없이 갈등하고 화해해 가면서, 새롭고 다양한 삶의 형태가 만들어진다." - P96

"사실 그런 주제를 끌어가는 힘의 원천은 나의 간절함 외에 다른 것은 없다. 달리 말하면, 이 사회에서 나가떨어지지 않겠다는 절박함이 내게 있었다." - P156

"처음에 그림책을 구상할 때는 소박한 발상에서 출발한다. 취재와 스케치를 거듭하면서 종종 그 발상이 너무 보잘것없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도에 포기하지 않으려면 거듭해서 질문하고 좀 더 깊이 탐색해 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 P187

"그림책은 어린이는 물론, 어른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는 매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 P217

"사람이든 동물이든 누구나, 사랑받으면 덜 아프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 P248

"‘저 사람만 없애 버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자신과 타자를 폭력적으로 구분 짓기 시작한다. (...) 그리고 없애야 할 적이 만들어지는 순간, 사람들은 그 대상에 대해서라면 아무리 잔인한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 P291

"가해자임을 알아차리고 인정하는 일은 부단한 과정일 수밖에 없다. 끊임없이 자기가 놓인 구조를 의심하고 되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해자성‘을 인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계를 새롭게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이제껏 당연시되어 온 폭력을 멈추게 할 힘이 깃들어 있다."

- 심아정,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 자료집>, 2018, 61-62면에서 재인용 - P326

"법은 긑이 없고, 법은 한 곳에 집착되어 있지 않으니, 이미 집착된 법과 기술을 깨트려 나가야 한다." 전통으로 이어져 온 법을 익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지만, 그 법을 깨트리는 단계에 이르러야 새로운 그림, 자신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뜻이다.
- 중국 화가 자유푸(1942- )의 화집 서문의 글귀에서 재인용함.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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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5-07 0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희네집 우리집 아이들이 어렸을 때 같이 봤던 책이네요. 아이들이 어릴 때는 같이 그림책을 보는게 너무 좋았었는데 아이들이 크고 나니까 일부러 찾아서 읽어지지는 않는게 좀 아쉬워요. 좋은 그림책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런 그림책을 만드는 분의 이야기가 인상적입니다. 저도 한번 읽어보고싶네요.

초란공 2021-05-07 08:38   좋아요 0 | URL
아 그러셨군요~ 자녀분들도 각별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을 것 같아요~
 

, 만들어진 위험 (Outgrowing God)

: 신의 존재에 대한 의심이 시작된 당신에게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지음 | 김명주 옮김 | [김영사]

 


찌르레기 무리의 움직임 패턴으로부터 인간의 본성과 대량 학살을 모형화할 수 있을까

 


이 책의 마지막 문장(“나는 우리가 과감하게 용기를 내어 성장함으로써 모든 신을 단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352)은 신이란 인간이 만든 허구적 개념임을 끊임없이 설파해온 리처드 도킨스의 요점을 한 마디로 정리한 것이다. , 만들어진 위험은 수십 년 동안 신의 부재와 종교의 허구성을 지적해온 그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입문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도킨스는 진지하고 집요하게 논점을 파고들기 보다는 몇 가지 사항에 집중하여 대체로 가볍게 자신의 생각을 제시한다는 느낌을 준다. 다만 나는 이 책의 핵심적인 주장(‘신은 뻥이다’)보다는 인간에 초점을 맞추어서 생각해보고 싶다.


도킨스가 다루고 있는 여러 논점 중에서 5장의 선해지기 위해 신이 필요할까?’라는 주제를 우선 불러와본다. 흔히 서양의 3대 종교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로 여겨지고, 이 종교들은 아브라함의 종교라는 근원에서 나왔다고 한다. 도킨스는 종교를 이야기할 때 기본적으로 본인이 잘 알고 익숙한 기독교를 염두에 두고 논의를 전개한다. 다만 5장의 주제에 대해 저자는 흥미로운 통계자료를 제시한다. ‘신이 우리를 언제나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종교를 가진 인간은 더 선하다는(도킨스의 표현에 따르면, ‘하늘의 거대한 감시 카메라 이론’) 암묵적인 전제를 다음의 사례로 검토한다.


20137월에 조사된 미국 연방교도소의 기결수에 관한 조사다. 자료에 따르면, 수감자의 28%가 개신교 그리스도인, 24%가 카톨릭 그리스도인, 5%가 이슬람교였다. 나머지는 불교도, 힌두교도, 유대교, 아메리카 원주민 등이었다. 여기서 도킨스는 50%이상의 재소자가 종교를 갖고 있다고 언급하며, 종교가 사람을 선하게 만든다는 전제는 설득력을 잃는다고 주장한다.


그의 논증에는 대체로 동의는 할 수 있겠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석연치 않은 부분도 있다. 예컨대 종교와 무관하게 미국의 백인과 흑인의 재소자 비율을 보면 실제 인구 구성비율과 크게 차이가 날 정도로 흑인의 비율이 높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점은 흑인들에게 결함 혹은 문제가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단순히 결론을 내리기 쉽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법이 제정되는 배경 혹은 기준에 대한 내막을 좀 더 들여다봐야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백인들과 흑인들의 마약 사범들이 주로 손을 뻗는 마약의 종류가 인종별로 뚜렷이 나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만일 흑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마약에 대한 처벌 규정이 백인 마약 사법에 적용되는 규정보다 비관용적이고 더 엄격하게 제정되어 있다면 어떻게 될까? 결과는 흑인 마약 사범이 백인 마약 사범보다 더 많이 검거될 여지가 발생하며, 이들이 더 중한 처벌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이 점은 여러 사람들이 이미 지적해오고 있으므로 새로울 것은 없다.


달리 말해보자면, 법은 개인의 존재를 보존하는데 기여하는 인간의 사회적 장치다. 판단의 기준을 인간이 만들고 제시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복잡한 인간 사회 속에서 절대적 기준이 되기에 법 자체는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다. 또 한편으로 모든 사람은 죄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주장한 사도 바울의 원죄 개념’(이제 보니 이 원죄 개념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먼저 제시한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인 것 같다)처럼, 어떤 죄가 규정된 순간, 사회적으로 범죄자가 양산되기 시작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한 마디로 법이 그 땐 문제없었지만, 지금은 문제다라는 특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것. 시대와 사회에 따라 법이 다르다. 인간이 라고 규정한 항목과 기준이 상대적이란 의미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도킨스의 기결수와 종교 분포 비율만 가지고 선함과 악함의 정도와 종교와의 관계를 판단하는 증거로 쓰기에는 여전히 부족함이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다시 말하면, 2013년 자료를 조사할 당시의 죄에 대한 관념과 법 규정에 대한 인식이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인지도 검토해야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정부의 불합리한 정책에 종교인들이 거리로 많이 나와서 시위를 하다가 범법자가 되어 수감된 것인지 자세한 내막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혹은 미국 내 이슬람 교도들에 대한 조롱과 차별에 분노한 나머지 일부 이슬람 교도들이 범법 행위를 하고 수감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일단 통계숫자는 대략적인 방향을 지시하는 인덱스로 사용될 수 있겠지만, 개별적인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지 않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도킨스의 주장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제시하는 자료가 보다 설득력 있는 것이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타성,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도킨스의 논증에 대해

 

이 책에서 나의 흥미를 자극한 부분은 생명 탄생의 설계 방식을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에는 DNA가 있다. 그리고 DNA는 흔히 생명체를 만드는 청사진이 담겨 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도킨스는 표현이 주는 모호함과 왜곡가능성을 지적하고, 보다 정교하게 이 DNA의 역할을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DNA청사진이란 표현은 매우 잘못된 표현으로, 오히려 생명체를 만드는 방법에 관한 지시 세트’(271)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아기의 DNA를 고려할 때, 아기의 신체 각 부분은 DNA와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DNA에 아기의 각 부분을 만들어내는 모든 암호는 이미설계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DNA는 오히려 케잌을 만드는 레시피와 비슷하다. DNA의 정보는 어떤 의미로든 아기의 지도가 아니다라고 의미를 밝힌다. 여기서 두 가지 흥미로운 생명 탄생의 설계 방식을 제시하는 데, 하나는 하향식 설계, 다른 하나는 상향식 설계를 언급한다.


도킨스가 이야기하는 하향식 설계는 생명체 구성의 모든 암호가 이미 구체적으로 완성되어 있다는 청사진을 이야기한다. 나이가 들어 내 얼굴 어딘가에 점이 나타났다면, 이건 이미 내 DNA의 어딘가에 묻혀 있던 부위가 어느 시점에서 기능을 발휘하여 내 얼굴에서 발현된 것이다. 이 하향식 설계(혹은 청사진 개념)는 느리지만 지속적으로 생장하고 변화하는 생명체를 만들어가는 데 매우 비효율적인 생명 설계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반면 상향식 설계는 애초에 모든 것이 결정되고 지정된 청사진이 아니라, 전체 움직임이나 행동이 국지적 규칙만을 따라 출현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도킨스는 상향식 설계 방식의 예로 흰개미 언덕과 찌르레기 떼의 군무를 언급한다. 그 중에서 거대한 찌르레기 떼의 사례가 더 흥미로운데, 이 새의 무리는 수만 마리의 개체가 무리를 이루어 함께 날면서도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정밀하게 조정하고 일사분란하게 방향을 바꾸며 대형을 구성한다. 이를 레이놀즈라는 프로그래머가 이 움직임의 패턴을 재현해 냈는데, 그 방법은 단지 각 개체에게 옆에 있는 새를 주시하고, 그에 따라 움직이도록 규칙을 정한 것뿐이었다.


여기서 잠시 옆길로 빠져본다. 나는 찌르레기 집단의 움직임 패턴에 적용된 상향식 설계 기준을 인간의 대량 학살(genocide)에 관한 사례에 적용하여 모형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류 역사에 기록된 의도적인 대량 학살의 양상을 들여다보면, 애초에 그 주동자를 악한 인간으로 단정해버리기 쉽다. 대량 학살을 자행한 히틀러와 스탈린을 악의 화신이라고 규정해버린다면, 우리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하향식 관점(‘그들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악한 인간이었다’)을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반면 우리가 대량학살의 메커니즘을 이해할 때, 찌르레기의 군무를 설명할 수 있는 상향식 관점을 적용하면, 대량학살을 효과적으로 모형화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학계에서 이미 이런 시도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지만, 나는 단순한 아마추어 독자일 뿐이므로 이런 연구에 대해 아시는 분은 알려주시길...) 다시 말하면, 대량학살에는 이 작업을 지시한 지도자가 있고, 이를 숭배하는 측근과 대중을 위협하는 수단이 있으며, 그 결과 아무도 이들을 저지할 힘을 지닌 상대 집단이 없다면, 대량학살이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찌르레기 군무 패턴을 프로그램할 때 적용된 규칙(‘국지적 규칙만을 따르면 된다’)은 대량학살을 모형화 할 때, 전범 재판장에 섰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업무 수행 규칙(‘나는 공무원이므로 명령에 따르기만 했을 뿐이다’, ‘나는 내가 맡은 일을 성실히 수행했을 뿐이다’)만을 적용하면 된다. 결국 600만 명의 유대인이 최종 해결책으로 스러져갈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하는데, 히틀러나 아이히만 그 자체를 으로 규정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그리고 독일군 집단이라는 시스템이 돌아가는데 필요한 능력(지시에 따르기)만으로도 집단 학살이 가능하다는 점을 찌르레기의 움직임 패턴을 설명하는데 활용했던 상향식 관점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히틀러의 인종주의(유대인 혐오/반유대주의)나 스탈린의 이데올로기가 더해지면, 그 구성원들은 심리적 단결과 함께 인류의 범죄에 대한 책임을 덜어버리는 상황이 된다.


잠시 옆길로 샜는데, 다시 인간의 본성을 이야기하는 도킨스의 논점으로 돌아온다. 도킨스는 인간이 이타성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면서 참고할만한 사례로 굶주린 박쥐를 소개한다. 야행성인 박쥐는 매일 밤 먹이를 구하러 다니지만, 언제나 성공하진 않는다. 따라서 운 좋게 먹이를 구한 개체는 그날 허탕치고 먹이를 구하지 못한 같은 동굴 출신의 박쥐에게 자신의 먹이를 나누어 준다고 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다른 동굴에 있는 박쥐에게는 그런 행위를 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도킨스는 친절에 대한 진화적 압력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다’(315)고 언급한다. 아직 명료하게 밝혀진 사항은 아니지만, 진화라는 개념이 성공적인 유전자가 유전자풀에 점점 많아진다는 것’(306)을 의미한다는 것을 상기한다. 이 점이 친절의 진화적 바탕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이타심에 대한 개념 역시 언제나 이타적/이기적행동이 함께 언급된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굶주린 박쥐의 경우도 먹이를 구한 개체의 호혜적이타주의행동이 다른 동굴 출신의 박쥐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타심이 적용되는 경계가 분명히 있다는 점을 언제나 고려해야 할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어느 개체의 이타심의 발로라고 부를 수 있는 팔이 안으로 굽는 행동은 이 집단의 경계 밖에서 봤을 때 언제나 이기적 행위로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속한 집단에 대한 이타심’(곧 다른 집단에게는 이기심에 해당)의 발로가 곧 집단과 의 생존 확률을 더 높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비전공자이므로 내 마음대로 펼쳐보는 상상에 불과하다.


도킨스는 책에서 자연선택은 우리 뇌에 제한된 친절의 바탕을 심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선택은 불친절의 바탕도 심는다. (...) 인류 역사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은 그 균형이 이동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6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친절한 방향으로.”(306)라고 언급했다. 앞서 언급한 나의 생각을 여기에 적용해보자면, 친절의 바탕을 심는 것은 내가 속한 집단에 대해서이며, 불친절의 바탕을 심는 것은 타 집단에 대해서라고 생각하면 이해할만 하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 이 균형의 이동이라는 도킨스의 주장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이 점에서 도킨스는 인간이 점차 친절한 방향으로 진화해왔다는 논리로 주장하는 듯하다. 나는 이 논리가 인지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의 저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주장했던 논지와 유사하다고 본다.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스티븐 핑커는 이 두툼한 책에서 인간이 폭력성이 역사 이래 줄곧 감소해왔음을 엄청난 데이터와 자료들을 제시하며 논증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의 생각은 인간이 본성에 대한 스티븐 핑커의 논점은 자기기만적이라고 보았다. 그 이유는 스티븐 핑커가 갖고 있는 인간에 대한 본성을 이미 하향식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그의 관점은 인간이 폭력적인 존재이지만 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역사의 교훈과 교육을 통해 선한 존재로의 교정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이 지점이 도킨스의 인간에 대한 이타심혹은 친절 행위의 진화적 바탕을 이루는 생각과 같은 맥락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앞서 찌르레기의 움직임 패턴에서도 언급했듯이, 나는 인간을 어떠한 존재로 규정하지 않고도 인간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시 말해 인간이 선하다거나 악하다혹은 본래 폭력적이다라고 규정하는 대신, 어떤 특정 조건에서 인간은 어떤 행동도 할 수 있는 가능성 있는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나는 단지 이 논리를 대량 학살을 모형화할 때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본다. 인간의 친철에 대한 진화적 바탕을 도킨스도 단정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이 부분은 앞으로의 연구결과가 더 밝혀줄 것이라고 기대해본다.


오늘은 도킨스가 이 책 , 만들어진 위험에서 하고자 했던 이야기(앞선 조상들의 지적 용기에 영감을 받아 더 멀리 나아가야 한다’(341)는 것과 모든 신을 단념해야 한다’(352))보다는 겨울철 찌르레기 군무에 관한 사례를 흥미롭게 읽다가 잠시 딴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전공자분들이 보시면 나의 엉터리 이야기에 당혹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책을 읽을 때, 저자가 의도한 부분만 배운다면 재미없지 않은가. 책을 읽다가도 가끔은 엉뚱한 생각도 필요하다. 도킨스가 책에서 언급한 용어를 빌리자면, 우리는 종종 지적 용기를 내어 생각의 골디락스 존(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갑지 않은, 생명의 출현에 적당한 구역)’을 벗어날 필요도 있다.





(십계명의 ‘살인하지 못한다‘는 내용에 대해)
"이 규칙은 알고 보니 "너희 부족 사람들을 살인하지 말라"는 뜻일 뿐이었다." - P108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나의 주님이자 구세주를 천사로 느낍니다. 나는 그를, 소수의 추종자에 둘러싸인 고독한 상황에서 유대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차리고 그들에 맞서 싸울 사람들을 소집한 분으로 느낍니다. 고행자가 아닌 전사로서 가장 위대했던 분으로 느낍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주님께 무한한 사랑을 느끼며, 마침내 주님이 어떻게 온 힘을 다해 일어나 채찍을 쥐고 독사와 살무사 같은 무리를 사원에서 쫓아냈는지 들려주는 <성경> 구절을 통독했습니다. 세계를 위해 악독한 유대인가 맞섰던 주님의 싸움은 정말 격렬했습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야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의무는 가만히 앉아 당하는 게 아니라, 진리와 정의를 위한 전사가 되는 것입니다."
-히틀러의 유대인 혐오 발언(1922) - P122

"(...) 그리고 우리가 올바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뭔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날이 성장하고 있는 그 골칫덩이들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내 민족에게도 의무가 있습니다."
- 히틀러의 유대인 혐오 발언(1922): 앞의 인용에 이어서 - P122

"친절의 진화적 바탕은 무엇일까? 8장에서 우리는 진화란 성공적인 유전자가 유전자풀에 점점 많아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 P306

"내가 말하는 건 지적 용기이다.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가능성을 심사숙고하고 이렇게 말할 용기. "설마 그럴 리가. 그래도 틀릴 셈 치고 그 가능성을 조사해보자."" - P340

"나는 우리가 과감하게 용기를 내어 성장함으로써 모든 신을 단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책의 마지막 문장 -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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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비평

(2021년 봄 191호)

: 우리 시대의 노동 이야기


한영인(문학평론가) [창비]

 

'우리 시대의 노동 이야기'를 읽고



요즈음 편리한 기계 장치를 이용하면서도, 인간의 삶, 혹은 당장 나의 삶에 주는 변화에 대해 고민을 하곤 합니다. 기계가 인간의 작업 영역을 대체하기 시작한지도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저는 현대기술사회에서 인간과 기계가 공유하는 작업 영역이 앞으로 어떻게 이동해갈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어 갈지 많이 궁금합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앞으로 노동의 모습은 정말로 많이 달라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노동이 새롭게 지니게 될 의미와 인간의 위치 혹은 인간과 기술과의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질지 점점 더 궁금해집니다.


그런 고민 속에서 이번 <창작과비평>의 문학평론에서는 우리 시대의 노동 이야기를 우선 읽어봤습니다. 문학평론가 한영인은 세 편의 소설에서 그려지는 보다 현실적인 노동의 문제를 다룹니다. 아직 문학평론이라는 글의 형식이 개인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필자가 노동은 인간의 사회적 정체성은 물론이고 생명 보전과도 밀접하기에 인간 존재와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대면하고자 하는 작가일수록 이 과제를 피해가기 어렵다.”라고 언급한 부분에 공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점은 작가뿐만 아니라 삶을 영위하는 모든 이의 문제이기도 하겠지요.


한영인 평론가는 세 편의 소설에 담긴 노동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소설가 장강명의 공장 밖에서와 김혜진의 9번의 일은 소설 속 주인공이 속하고 노동을 수행하던 집단에서 퇴직할 위기에 몰린 상황을 설정하고 있는 반면, 김세희의 프리랜서의 자부심은 앞의 소설들 속의 주인공이 이후에 선택할 만한 노동의 모습(프리랜서)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대체로 한영인 평론가의 분석은 작품들에서 다루어지는 인물의 묘사가 단편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듯합니다. 혹은 인물의 성격이나 행동에서의 변화가 설득력 있게 뒷받침되고 있지 않다는 아쉬움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평론가는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다양한 페르소나를 탐구해야한다는 주문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평론 중에서 필자가 김세희 작가의 소설 한 대목에 대해 언급한 점이 기억에 남습니다. 작품의 마지막에 민용이 한 말 마침내,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는 생각에 대해 덧붙인 필자의 한마디. ‘독립한 개인만이 타인과의 대등한 결합에 두려움 없이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인상 깊네요. 소설이란 이야기를 통해 각자 나름의 답을 발견하는 공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허먼 멜빌이 자신의 소설에서 과수원의 도둑들이라고 언급했던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로 노동은 인간의 본질을 규정할 정도로 인간과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왜 미래는 불확실하다는 불안을 갖게 되었는지 궁금해지는 요즈음입니다.


아울러 노동자 투쟁에 대한 장강명 작가의 중립적인 시선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선에서 현상을 바라보는 일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다만 사회에서 보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회의 아래층을 꾸준히 마주하고 바라보는 일은 계속 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작가를 비롯한 예술가들의 역할이니까요. 사람들이 겪는 문제와 고통, 아픔을 제일 먼저 감지하고, 이를 들여다보고 각자의 작업에서 재현해내는 작업이 이들의 역할이 아닐까도 생각해봤습니다.


<창작과비평>을 읽는 계기가 아니었으면 선뜻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 문학평론을 읽으니 소설 속에서도 이렇게 사회와 인물에 대한 다양한 분석과 평가를 내릴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평론에 소개된 소설에서 작가들이 바라본 노동에 관한 진실이 어떤 것이었는지 추가로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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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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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444)

 

 

인간-되기는 동사다: 대체 불가능한 인간관계의 형이상학

 


*탁월하게 생각하도록 된 이런 두뇌도 장래에는 한 사상가가 만들어낼 게다.” 거의 200년 전, 독일의 한 문인은 이 문장을 후대에 남겼다. 그는 훗날 인공지능 기술과 생명을 합성하는 단계에 이른 현대의 과학기술을 상상이나 했을까.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201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처음 발표한 클라라와 태양을 읽으며, 문득 괴테가 쓴 이 문장을 떠올렸다. 이시구로는 인공지능로봇을 화자로 설정하고, 이 로봇의 생각들을 상상하며, 과학기술과 공존하는 인간 세상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인공지능로봇 AF(Artificial Friend)인 클라라는 아이들을 돌보는 로봇이다. 클라라가 다른 AF와 다른 점은,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더 강하다는 점이다. 마침내 그녀는 조시라는 소녀에게 선택받고 인간과 함께 지내며 인간의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을 배워나간다. 조시는 유전자 편집기술을 통해 태어났지만 건강이 좋지 못하다. 조시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가족들은 불안해한다. 이에 클라라는 조시를 돌보는 일에서 그치지 않고, 만일의 경우 조시가 될 것을 부탁받는다. 클라라가 마주하는 혼란스러움은 이런 국면에서 비롯된다.

 

소설을 읽는 동안 줄곧 붙들었던 물음은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 되게 하는가’, ‘인간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였다. AF와 인간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점이 존재할까? AF와 인간 모두 어떤 대상에 대해 의혹을 품고 회의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구성원들과 반목하고 충돌하며 관습에 도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실천하는 의지에 기초하여 행위를 끌어내는 특성이 차이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 소설은 내게 상황을 제시하고 질문을 던질 뿐이다. 분명한 것은, 인간-되기의 과정이 결코 저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조시가 사망할 것에 대비해 새로운 조시를 제작하는 카팔디는 유물론자라 할 수 있다. 인간에게 고유함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이 대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클라라는 인간의 감정을 배우고 사랑을 느끼면서 자신이 조시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녀에게 조시가 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욕구와 충동, 감정 등을 동일하게 갖추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조시의 가족이나 그녀를 아는 모든 타인과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고, 기억을 복원해야하는 역동적인 과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클라라의 말에 따르면, ‘아주 특별한 무언가는 조시 안에 있던 것이 아니라, 조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442) 있었다. 그러므로 이 인간-되기는 사회 속에서 구성원들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고 함께 변화해가는, 비가역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인간만이 고유하고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개별적인 존재가 그 자체로 고유하고 특별하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형성하기에 그 자체로 고유한 것이다. 이 특별함은 비교불가능하다.

 

클라라가 인간의 감정을 학습하면서 혼란스러워 했던 인간의 특징이 바로 인간관계의 복잡성이다. 유전자 편집을 거쳐 태어난 아이들의 모임에서 조시가 달라지는 모습을 포착한 클라라는 인간의 다양한 페르소나에 혼란스러워 했다. 규칙적인 징후를 찾던 클라라에게 인간의 복잡한 페르소나는 일관성이 없어 보였을 것이다. 이렇듯 클라라와 태양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무미건조해지는 세계에서 인간-AF사이의 새로운 관계성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었다.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클라라가 헛간에서 해에게 간절히 기도하던 대목이었다. 헛간에 해의 무늬가 머물 면, 클라라에게 이곳은 해의 관대함이 드러나는 성스러운 장소가 된다. 해의 무늬가 서서히 헛간에서 물러나며 다른 모습으로 반사하고 희미해져가는 장면이 클라라의 간절한 기도와 교차하며 뭉클한 감동을 준다. 이 순간이 바로 클라라가 인간의 사랑을 이해하고 이를 구현한 순간은 아니었을까. 클라라와 태양인간-되기라는 물음과 인간이 맺는 관계에 대해 묻는 한 편의 철학 우화다.

 

 

 

*이 문장은 전영애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된 파우스트 [도서출판 길](2019)에서 인용함.  

**ver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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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6-04 20: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클라라 리뷰중 단연 초란공님 리뷰!
반짝 반짝 빛났는데
제 예감 적중 함요 ㅎㅎ
이달의 당선작
추카~추카~

초란공 2021-06-05 10:31   좋아요 2 | URL
scott님의 과찬에 항상 몸둘바를 모르겠네요.^^
고맙습니다.~

그레이스 2021-06-04 20: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초란공 2021-06-05 10:29   좋아요 2 | URL
감솨합니다~ 2관왕 그레이스님~^^

초딩 2021-06-04 22: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 참 .. 정말 이정도 되면 이건 이제 읽어야할 판이네요 ^^ ㅎㅎㅎ
초란공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초란공 2021-06-05 10:38   좋아요 1 | URL
감사해요~ 초딩님도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즐건 주말 보내시기를~
 
피에 젖은 땅 -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 걸작 논픽션 22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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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샤일록을 발견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피에 젖은 땅 (Blooldlands)》(2021)

    

 

저 멀리 애처롭게 스러져간 생은 얼마나 될까

 

76년 전 오늘(430), 베를린의 총통벙커라고 불린 깊고 어두운 곳에서 한 남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와 함께 순수한 인종으로 이루어진 제국 건설의 꿈도 막을 내렸다. 이 남자와 측근들은 자신의 마지막 날을 스스로 결정할 자유를 갖고 있었다. 이 시점에 그의 명령으로 죽어간 사람은 이미 600만 명에 달했지만,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이들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기회마저 누리지 못했다. 그런데 1930년대 초부터 1945년 까지 독일과 소련 사이의 동유럽에서 전쟁과 폭압으로 죽어간 사람은 나치가 살육한 유대인 수의 두 배가 넘었다. 우리에게 아우슈비츠로 알려진 학살의 역사는 같은 시기, 동유럽에서 벌어졌던 살육 과정의 단지 일부일 뿐이었다.

 

바로 이 지점이 유럽과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연구해온 역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가 주목한 부분이다. 피에 젖은 땅에서 저자는 이 책이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지도자들이 내린 명령으로 살육당한 사람들의 역사”(22)임을 밝히며, 이를 위해 블러드랜드라는 지역을 소개한다. 블러드랜드란 대략 현재 독일의 동쪽인 폴란드 중부에서 러시아의 서부까지, 북쪽으로는 발트해와 남쪽으로는 흑해 사이에 있는 지역을 가리킨다. 저자의 연구에 따르면 1933년에서 1945년 사이 대략 12년간, 블러드랜드에서 나치와 소비에트 세력의 정책으로 스러져간 사람이 1400만 명에 달한다. 이 숫자에는 전쟁 중에 전사한 이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이 책의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보다 10여 개국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동유럽을 배경으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보다 큰 틀에서 긴밀하게 연결 짓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역사적 사건들이 흔히 개별적으로 연구되곤 했다면, 저자는 이러한 제약을 뛰어넘어 10개 언어로 된 문헌을 면밀히 조사하며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동유럽 역사, 특히 히틀러와 스탈린이 주도한 대량학살의 역사를 한 흐름 속에서 조명했다.

 

간혹 다양한 사례와 희생자 통계에 압도되어 의미 파악에 어려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저자는 책에서 피해자 및 희생자들이 남긴 메시지들을 간간이 소개하고 있다. 나는 두 명의 폴란드계 문인을 떠올리며 저자가 풀어내는 이야기를 따라가보고자 했다. 한 명은 독일 문학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이하 라니츠키). 라니츠키는 이 책에서 꽤 상세히 소개되는 바르샤바 게토에서 거의 마지막까지 남았던 인물이다. 그는 훗날 부모와 형제를 죽인 나라의 문학에 대해 글을 쓰는 평론가가 된다. 또 다른 인물은 폴란드의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다(이하 쉼보르스카). 그녀는 1931년부터 평생 블러드랜드의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은 도시 크라쿠프에서 살았다. 블러드랜드의 어느 곳에서 수많은 생명이 스러져가는 동안, 두 사람은 엄혹했던 시대에 희생된 사람들과 함께 했고, 이들을 목격했으며, 마침내 생존했다. 책을 읽는 동안 두 사람이 있던 시공간이 어떠했을지, 그리고 이 시기를 살아낸다는 것이 어떤 의미였을지 상상해보고자 했다.

    

 

작은 상처 안에 내 몸을 누일 것이다

- 스탈린의 대공포 시대와 히틀러의 야망에 스러져간 이들

 

이 책의 초점은 1933년부터 1945년 사이, 동유럽의 블러드랜드라는 제한적이고 보다 명료하게 정의된 프레임에 속에 놓여 있다. 나는 크게 두 가지 분기점을 중심으로 읽어나갔다. 첫 번째 분기점은 1933년 블러드랜드의 곡창지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발생한 기근이었다. 이 사건은 공산당 서기장에 오른 스탈린의 집단화 정책으로 시행된 5개년 경제계획의 결과이기도 했다. 당이 농민들로부터 무리하게 거두어들인 곡물을 해외로 수출하여 발생한 기근으로, 이는 무엇보다 스탈린이 만들어낸 정치적 재앙이자 학살이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스탈린이 심각한 기아문제가 발생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집단화 과정은 농업대신 산업을 육성 하고자 했기에, 농민들은 농지 몰수 및 강제 이주를 당하며 삶의 기반을 완전히 잃고, 공장노동자가 되어야 했다. 여기에 더하여 스탈린은 식량 징발을 강제하여, 자국민을 굶주림 및 이와 관련한 질병으로 내몰았다. 그 결과 최소 330만 명(대부분이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죽어갔다.

 

소비에트 공산당에서 강력한 권력을 거머쥔 스탈린이 벌인 대표적인 잔혹 행위 두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스탈린의 대공포 시기(1937-38)에 이루어진 학살이며, 다른 하나는 소련이 독일과 동맹 관계를 맺고 있던 시기(1938-41)에 자행한 폴란드 박멸 행위다. 대공포 시기에 스탈린은 자신의 정적 레닌이 암살당한 것을 계기로 유대계였던 트로츠키와 그의 동료를 축출하거나 누명을 씌워 처형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군대나 정당, 내무인민위원회 등 내부 조직 숙청과 기관 장악에서 나아가 사회전체를 대상으로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는 기근으로 많은 농민들이 죽어간 소련 령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부농으로 밝혀진이들을 강제이주 시키거나 총살했던 부농박멸작전이 있고, 주로 폴란드계를 대상으로 했던 민족 박멸 작전이 있다. 저자는 이 두 작전에서 처형된 이들이 625483명에 달한다고 언급한다(192). 스탈린의 대공포시대는 스탈린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다지기 위해 자국민을 상대로 벌인 테러행위였다.

 

한편 히틀러는 1939년 봄, 폴란드 침공을 준비하라고 군에 명령을 내렸다. 같은 해 여름, 독일과 소련은 불가침 조약을 맺고, 폴란드를 함께 침공한다는 합의를 했다. 193991일에 독일은 탱크와 보병을 앞세우고, 폴란드 비엘룬시를 공습하며 침공했다. 며칠 후 독일 공군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도 공습하며 수만 명의 시민과 군인의 생명을 앗아갔다. 당시 16세였던 폴란드 시인 쉼보르스카는 이 시기에 크라쿠프에서 부상당한 폴란드 병사들을 봤던 기억을 되살려, 훗날 9월에 관한 기억이라는 제목의 시에 담아내기도 했다. 소련은 917일에 50만 명의 군인을 앞세우고 폴란드로 들어갔다. 928일에는 독일과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이하 라인’)이라는 새로운 국경을 확정하며 양국의 우정을 확인하는 새 조약에 서명했다. 이로써 폴란드인들은 제1차 대전이 끝난 1918년에 독립을 얻었지만, 11년 만에 다시 나라를 잃었다. 라인의 동쪽에서 소련군은 15만 여 명의 젊은이를 붉은 군대에 강제 편입시켰고, 새 질서에 위협이 될 만한 폴란드인 집단을 강제 추방시키기에 이른다. 이때 폴란드인 139794명이 카자흐스탄이나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만약 쉼보르스카가 소련군이 점령했던 라인동쪽의 리비프 같은 곳에서 살았다면, 그녀와 가족은 아마도 시베리아로 가는 열차를 탔다가 시베리아 초원의 어딘가에 묻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당시 폴란드계 소련인들이 폴란드 문화나 카톨릭교에 대해 보인 호의를 국가 간 첩보활동에 동참했다고 하며, 묵주를 가진 사람에게도 수용소 10년 형을 내렸던 것처럼, 예상치 못한 고난을 겪었을지도 모른다(175). 하지만 시인의 가족은 나치가 점령했던 라인의 서쪽에 있었다. 물론 이곳에 있던 폴란드인들의 고난 역시 만만치 않았다. 독일은 무엇보다 인종적 우월성에 집착했기에, 오랜 역사를 보유하고 지식인이 많았던 폴란드를 체계적으로 파괴하기에 이른다. 특히 폴란드의 옛 수도였고, 쉼보르스카가 살던 크라쿠프에서는 수많은 대학 교수들이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만약 쉼보르스카의 부모가 교수와 같은 지식인이었다면, 시인의 가정 역시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당시에 이미 사망한 상태였고, 과거에 지방 영주의 관리인이었기에 나치의 우선적인 처분 대상에서 벗어나 있었을 것 같다. 이 시기에 폴란드인에 대한 독일과 소련의 유린 행위는 주로 총살에 의지했다. 저자에 따르면 이 시기에 대략 20만 명의 폴란드인이 살해되었고, 100만 명이 자신의 터전에서 추방당했다. 당시에 특히 유명한 사건으로는 카틴 대학살이 있는데, 소련은 폴란드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재소자 4410명 전원을 카틴 숲에서 총살했다.

 

책을 읽으면서 줄곧 궁금했다. 시인 쉼보르스카는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내고 견디어낼 수 있었을까? 아우슈비츠는 이 시기에 세워졌지만, 아직 본격적인 학살 기능을 수행하지는 않았다. 저자에 따르면 이 시기의 강제 수용소는 노동력을 위한 집단 수용시설이었고, 가끔 의료적인 안락사를 위한 장소로 기능하고 있었다. 다만 당시에 쉼보르스카의 삶이 얼마나 위태로웠는지는 책에 소개된 정황과 크라쿠프의 위치로만 짐작해볼 뿐이다. 크라쿠프는 아우슈비츠와 대략 50 km 밖에 떨어지지 않았고, 주요 가스 학살 공장이 들어서게 되는 헤움노, 트레블린카, 소비부르, 마이다네크, 베우제츠 등에 둘러싸여 있었다. 스나이더는 30-40년대의 12년 동안 민간인 및 전쟁포로의 사망자를 1400만 명으로 추산하는데, 이 숫자의 약 4분의 1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1933-1941년 사이)에 이미 사망했다고 언급한다. 1400만 명의 절반 정도는 사실상 제대로 된 식량을 구하지 못해서 굶어 죽은 이들이었다. 이렇게 나치의 살육 시설에 둘러싸인 옛 도시에서 장차 폴란드의 대시인이 될 소녀가 견디어내고 있었다.

    

 

꺼지지 않는 불꽃이 나를 태웠다

- 최종해결책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을까

 

내가 주목한 두 번째 분기점은 1941622일에 시작하는 바르바로사 작전이다. 이날 독일은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깨뜨리고 소련을 침공했다. 새로운 재앙이 시작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했던 1933-1941년까지의 시기를 소련이 대량학살 대부분을 담당하다가 독일이 학살에 가세했던 시기라고 한다면, 1941년의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부터 1945년까지의 시기는 히틀러의 학살 작업이 두드러지는 시기다.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500만 명이 넘는 유대인과 300만 명이 넘는 전쟁포로를 포함하여 1000만 명 이상이 정치적으로 학살당했다. 이 두 번째 분기점부터는 폴란드계 유대인이었던 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삶을 더 많이 떠올렸다. 라니츠키는 베를린에서 가족과 지내다가 19381028일 오전, 독일 경찰의 방문을 받고 폴란드로 추방당한다. 스나이더는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3810, 독일은 폴란드 시민권이 있는 유대인 17000명을 독일 제국에서 폴란드로 추방했다.”(197) 라니츠키는 가족과 함께 이 때 독일에서 추방된 폴란드 유대인 그룹에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정의 밤폭력 사건은 라니츠키 가족이 떠난 지 2주 후인 119일에 발생했다. 반유대주의적 폭력은 이미 공공연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두 번째 분기점(1941-1945)에 대한 부분을 관심 있게 읽었다. 그 이유는 저자가 아우슈비츠로 대표되는 나치의 조직적 학살 기반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는지를 그 역사적 배경과 더불어 탁월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히틀러가 악인이었기 때문이거나, 집권 초기부터 유대인에 대한 최종적인 해결책을 주문했던 것이 아니었다. 규모 300만 명의 독일군은 동쪽으로 빠르게 진군하면서, 1941년 말까지 300만 명 이상의 소련군 포로를 생포했다. 소련군 포로들은 부족한 식량과 추운 날씨, 열악한 이송 여건 등으로 260만 명이 사망하고, 적어도 50만 명이 독일인의 손에 총살당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나치 친위대는 노동 수용소 성격을 지니던 장소를 본격적인 살육시설로 바꾸기 시작했다. 일명 학살 공장의 네트워크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독일은 세계의 해상력과 공군력에서 영국에 대한 우위를 점하지 못했기에, 대륙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한 제국 건설 외에 더 나은 대안을 찾을 수 없었다. 이러한 히틀러의 정치적 야망에 인종주의적인 성격이 가미되면서, 유대인들은 제국건설을 위한 최종 해결책의 대상이 되었다.

 

다시 라니츠키가 머물던 폴란드의 바르샤바로 가본다. 동부 전선에서 독일은 식량 및 보급품의 부족,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 등으로 지지부진한 상황을 맞았고, 소련을 몇 주 만에 무너뜨리고 식민지를 건설하겠다는 전격적 승리는 점점 불가능한 목표가 되었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바르샤바 근교로 갔던 라니츠키 가족은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기 전에 이미 조성되었던 바르샤바 게토로 들어가게 되었다. 게토 시절 라니츠키는 독일어 번역 작업을 하며 평생 함께할 아내 토지아와 결혼을 했고, 아내와 함께 거의 마지막까지 게토에 남았다. 반면 그의 부모님과 형, 직장 동료와 두 아들은 가스시설이 있는 트레블린카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쉼보르스카의 시집 검은 노래에 수록된 시 유대인 수송은 수용소로 이송되는 열차 안의 풍경을 그린다. 죽음을 직감한 유대인들의 절망을 시인은 절제된 언어로 표현했다. 라니츠키는 1943118일 새벽, 트레블린카 수용소로 떠나는 행렬을 따라나섰다. 하지만 아내와 함께 극적으로 행렬에서 이탈했고, 2주 가까이 게토에 숨어 있다가 23일에 게토를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라니츠키의 자서전 나의 인생에는 부부가 어느 폴란드인의 집에서 2년 가까운 시간동안 숨어 지내며 어떻게 생존했는지를 회상한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삶이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상상해볼 뿐이다. 

 

트레블린카가 유독 기억에 남는 이유는 이곳이 라니츠키 부부의 가족이 사망한 곳이기도 했고, 또 이 수용소가 폐쇄된 이후 학살의 중심이 아우슈비츠로 옮겨가며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스탈린그라드를 비롯한 동부전선에서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아우슈비츠는 기존의 강제 노동수용소에 처형장이 더해진 학살 공장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저자는 유대인에 대한 최종 해결책이 전면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 노동력과 식량 확보와 같은 경제적 규모의 문제에 따른 정치적 해결책의 일환이었다고 주장한다. 나치의 살육 공장 시설 네트워크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의 동쪽과 서쪽에 걸친 폴란드에 주로 세워진 것은 이 지역이 독일과 소련이 충돌하던 핵심지역인데다, 장기화되는 전시상황, 그리고 바르샤바를 비롯한 폴란드 지역이 유럽의 유대인들에게 주요 정착지였다는 상황도 고려해야할 듯하다. 이 시기에 독일이 벌인 라인하르트 작전으로 1942년에 베우제츠, 소비부르, 트레블린카 등지에서 폴란드 유대인만 약 130만 명이 가스 시설에 처형되었다(456). 여기에 약 100만 명의 주민이 굶어 죽은 레닌그라드 봉쇄, 그리고 벨라루스와 바르샤바 봉기로 폴란드인 등의 소수 민족들에 대한 독일군의 보복과 총살이 계속 이어져 수십 만 명의 희생자가 더해졌다.

 

독일이 패망하고, 동아시아에서는 눈엣가시였던 일본이 힘을 잃자 사실상 가장 큰 승리를 거머쥔 소련은 이제 냉전 구도로 접어들고 있었다. 전후 새로운 재앙이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에 다시 불어오고 있었다. 히틀러의 반유대주의적 최종해결책은 이제 스탈린의 전후 인종청소 작업에도 이용되었다. 여기에 이데올로기적 명분이 가미되면서 유대인은 물론 독일인에 대한 보복과 소수민족 박해로도 이어졌다. 이 시기의 재앙적인 만행과 인권 유린을 더 자세히 정리하지는 않겠다. 다만 서구 유럽 문화에 반유대주의가 얼마나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폴란드인 등 다양한 민족이 여전히 큰 고통을 당했지만, 절대 다수는 인종주의라는 허울에 스러져갔던 유대인들이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은 유럽 사회에 퍼져 있던 반유대주의적 정서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은 악독하고 욕심 많은 인물로 그려지는데, 희곡은 정의가 샤일록을 응징하는 모양새로 끝난다. 이처럼 유대인에 대한 오랜 편견의 역사 속에서 유대인들은 희생 대상을 찾던 유럽의 지도자들에게 언제나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벌거벗은 진실이 그 이유를 누설하진 않으리라

- 대량학살과 인간본성에 대한 생각

 

책에서 저자가 초점을 맞추었을 법한 지점이 독일과 소련의 정치적 대량학살이기에, 이 부분을 좀 더 생각해보고자 한다. 인간 사회에서 대량 학살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일어나게 될까? 저자는 대량학살의 사례로 히틀러의 유대인 최종 해결책(홀로코스트)뿐만 아니라 소련 침공 직후 생포한 소련 전쟁 포로를 굶기기, 레닌그라드 봉쇄, 그리고 스탈린의 우크라이나 대기근 정책 등을 거론한다. 대량학살이 일어난 사례를 보면, 히틀러의 신념체계와 독일인들이 처했던 경제적 규모의 문제가 대량학살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한편 대량학살과 관련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와 긴밀한 관련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책에 소개된 여러 대량학살 사건으로부터 대량학살의 메커니즘 몇 가지 특징을 정리할 수 있겠다. 우선 히틀러나 스탈린처럼 대량학살의 씨앗이 되는 지도자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 주변에는 소수더라도 지도자에게 충성을 보이는 무리가 존재한다. 여기에 스탈린이 주장하던 유대인의 음모혹은 히틀러의 아리안 신화와 같은 허구적 명분이 필요하다. 이 허구의 신화는 집단 구성원들의 결속을 더해주는 힘도 지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특징은 대량학살의 초기 단계에 이를 막을 세력이 없었거나 미약했다는 점이다. 만일 누군가가 처형 대상과 수행자의 목숨 사이에 선택해야하는 상황에 있다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자신의 생존을 선택하고 학살임무를 맡은 수행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는. ‘모비 딕을 끝까지 추적해서 복수하겠다고 선언하는 선장 에이해브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의 광기 앞에 의문을 품은 일등항해사 스타벅이 있다. 하지만 스타벅도 선원들을 선동하는 에이해브를 끝내 저지하지 못하고, 결국 소극적 동조자가 되어 함께 파멸을 맞는다. 현실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는 대량학살의 여러 특징 중에서 이 부분에 주목해본다. 대량학살로 이어지기 전에 학살을 자행하기 시작하던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다른 세력이 있었다면, 대량학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대량학살은 분명히 인간에 의해 저지되고 중단될 수 있었다.

 

다시 잠시 더 이전의 과거로 돌아가 보자. 스탈린이 기획했던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서방세계에 잘 알려지지 못했던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소련과 원만한 외교관계를 맺고 싶었던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은 193311월에 소련을 정식승인하게 되는데, 이런 정세로 스탈린이 기획한 테러와 학살이 내부적으로 은폐되는 것에서 나아가 서방 세계로부터 외면 받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또 나치 독일이 193991일 새벽, 대대적인 공습과 함께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 바 있다. 하지만 스나이더에 따르면 이들은 아무런 실질적인 군사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만일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적극적인 행동을 취했더라면, 폴란드인, 벨라루스인들에 대한 학살 및 강제이주, 그리고 300만 명에 달하는 소련군 포로들의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나아가 나치의 살육 공장 네트워크의 건설이나 레닌그라드 봉쇄로 스러져갔던 많은 이들의 운명도 달라졌을 것이다.

 

티머시 스나이더가 결론에서 제시하는 대량학살에 관한 문제의식 역시 이 지점을 향한다. 저자는 그런 (대량학살) 정책을 어떻게 방지할 수 있을까?”(706)라고 묻기 때문이다. 나아가 저자는 이를 위해 범죄자들이 저지른 행동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이들이 왜 대량학살을 벌였는지 그 동기를 이해하는 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이 작업이 바로 우리 인간, 혹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샤일록과 같은 인물이 존재했기에, 그러한 행동을 했던 것이 아니다. 샤일록은 그 자체로 악이 아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샤일록이 왜 그런 말과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고, 그들에게 왜 그러한 행동이 당연하게 말이 되었는지를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처한 환경에서 나도 샤일록이 될 수 있는 존재임을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다.

 

작가 올더스 헉슬리는 역사가 주는 교훈이란 사람들이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나는 아직 헉슬리가 언급한 통찰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에 완전히 동의하고 싶지는 않다. 역사에서의 가정은 무의미하다고 하지만,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인간이란 존재와 인간이 구성하는 집단의 보편적인 구성 원리를 파악하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가 인간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독일의 소련 침공에 대응했다면, 최소한 자국민을 많이 학살하며 은폐되었던 스탈린식 학살까지는 아니더라도, 국외에서 유대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던 나치의 살육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대량학살의 메커니즘을 들여다보면, 외부 세력이 재앙을 막을 수 있는 단계, 사람에 의해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언제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병사는 당신들의 시가 될 수 있었다

 

피에 젖은 땅을 읽는 내내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집검은 노래를 곁에 두고 펼쳐보았다. 이 글의 소제목은 모두 시인의 시집에 나오는 문장을 인용하거나 조금 수정하여 가져왔다. 티머시 스나이더는 자신의 책에서 아우슈비츠의 역설을 이야기한다. 본격적인 살육공장에서 스러져간 이들은 생존한 사람이 거의 없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우슈비츠는 기존의 강제노동시설에 살육시설이 더해졌기에, 생존자들의 증언이 더 잘 알려질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다만 저자도 책에서 한정한 시공간에서 자행된 살육이 유대인에 대한 희생자 수보다 최소한 2배 이상 많다는 점도 상기시켜준다. 또 홀로코스트에서 희생된 유대인의 4분의 3정도는 1943년 봄에 아우슈비츠의 가스실과 화장 복합 시설이 들어섰을 때 이미 희생된 상태(677)였음을 지적한다. 소련의 경우를 포함하면, 소련과 나치 체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살해된 이들의 90%이상은 이미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이 가동되기 전에 발생했다. 이 지적은 이 시기의 역사를 조금은 다른 각도로 조망할 수 있게 해주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저자가 책에서 초점을 맞추는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좀 더 폭넓고 균형감 있게 이 시기에 벌어진 대량학살의 역사를 조망할 수 있는 여지도 남겨주었으면 하는 점이다. 예를 들어 1940-45년 사이, 처칠은 이 지역의 식량을 강제로 징발하여 300만 명으로 추정되는 인도인을 굶주림으로 사망하게 만든 사건에 책임이 있다. 처칠이 내린 조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네팔과 인도 동부 벵골 지역을 통해 일본군이 침략해 들어올 수 있다는 전략적인 우려와 판단에서 취해지긴 했지만, 이 역시 정치적 학살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또 이 사건은 블러드랜드라는 공간적인 배경을 벗어나 있지만, 대기근이 의도적으로 유발된 정황, 그리고 영국에 의해 굶어죽는 사람들이 외면당했던 정황이 있기에 우크라이나 대기근과 비교하기에 좋은 사례로 여겨진다. 저자가 1945년 이후 소련이 승리를 거머쥔 뒤 독일인에 대한 스탈린의 강제 이주 및 전후 인종청소와 반유대주의적 행보를 언급하고 있는데다, 1958-60년에 마오쩌둥의 중국이 기근으로 약 3,000만 명을 죽게 했다는 언급(774, 주석7)을 한 이상, 연합국 측의 유사 학살 행위 역시 함께 언급되었더라면 보다 균형 있는 서술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책에서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저자의 논점 하나는 아우슈비츠로 대표되는 정치적 대량학살의 기원과 그 여건이 형성되는 과정을 추적하며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저자는 그 기원을 제1차 세계대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따져보고 있다(27). 또 저자의 다른 논점은 유럽 사회에 광범위하고 오랫동안 뿌리내려온 인종주의, 특히 반유대주의를 재발견한 점이다. 허구적 기준인 를 잣대로 삼아 인종을 평가하고 편견을 용인해온 서구 유럽의 역사가 1930-40년대, 블러드랜드라는 특정 시공간 속에서 상호작용하여 어떤 재앙을 낳을 수 있었는지 명확히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지금도 매일 인종이라는 허구적 개념을 기반으로 인간에 대해 자행되는 크고 작은 폭력을 접하고 있다. 역사가 끊임없이 재발견되고 다시 쓰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올더스 헉슬리가 말한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인간이 현재 우리 대부분의 모습일지라도, 우리에게는 대량학살을 막을 수 있는 잠재력과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 스나이더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가 정확한 숫자를 기반으로 역사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러져간 모든 이들에 대한 애도작업도 함께하며 인간의 폭력적 행위에 대해 이해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꼈다. 샤일록은 원래 악독한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샤일록이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된 까닭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이 새롭게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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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30 0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30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ott 2021-05-07 15: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이달의 당선작 추카~~
왠지 1등 의 기운이 ㅎㅎㅎ

북플로 초란공님 이 페이퍼에 댓글 달았었는데,,,,(리뷰 올라오자 마자)
살아졌으요 ㅠ.ㅠ

초란공 2021-05-07 18:18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이달의 페이퍼 당첨 되신 것도 축하드리구요~ Scott님의 엄청난 자료와 글로 항상 풍성하게 배울것이 있어요~ 음악도 잘 모르는 것이 많지만 음악이야기 올려주시는 것도요~ 눈호강 귀호강 제대로 해요~^^

초딩 2021-05-08 1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행복한 주말 되세요~!

초란공 2021-05-08 20:0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초딩님도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이하라 2021-05-09 0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즐거운 날 되세요~

초란공 2021-05-09 10:36   좋아요 0 | URL
이하라님 감사합니다. 평안한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