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들어진 위험 (Outgrowing God)

: 신의 존재에 대한 의심이 시작된 당신에게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지음 | 김명주 옮김 | [김영사]

 


찌르레기 무리의 움직임 패턴으로부터 인간의 본성과 대량 학살을 모형화할 수 있을까

 


이 책의 마지막 문장(“나는 우리가 과감하게 용기를 내어 성장함으로써 모든 신을 단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352)은 신이란 인간이 만든 허구적 개념임을 끊임없이 설파해온 리처드 도킨스의 요점을 한 마디로 정리한 것이다. , 만들어진 위험은 수십 년 동안 신의 부재와 종교의 허구성을 지적해온 그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입문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도킨스는 진지하고 집요하게 논점을 파고들기 보다는 몇 가지 사항에 집중하여 대체로 가볍게 자신의 생각을 제시한다는 느낌을 준다. 다만 나는 이 책의 핵심적인 주장(‘신은 뻥이다’)보다는 인간에 초점을 맞추어서 생각해보고 싶다.


도킨스가 다루고 있는 여러 논점 중에서 5장의 선해지기 위해 신이 필요할까?’라는 주제를 우선 불러와본다. 흔히 서양의 3대 종교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로 여겨지고, 이 종교들은 아브라함의 종교라는 근원에서 나왔다고 한다. 도킨스는 종교를 이야기할 때 기본적으로 본인이 잘 알고 익숙한 기독교를 염두에 두고 논의를 전개한다. 다만 5장의 주제에 대해 저자는 흥미로운 통계자료를 제시한다. ‘신이 우리를 언제나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종교를 가진 인간은 더 선하다는(도킨스의 표현에 따르면, ‘하늘의 거대한 감시 카메라 이론’) 암묵적인 전제를 다음의 사례로 검토한다.


20137월에 조사된 미국 연방교도소의 기결수에 관한 조사다. 자료에 따르면, 수감자의 28%가 개신교 그리스도인, 24%가 카톨릭 그리스도인, 5%가 이슬람교였다. 나머지는 불교도, 힌두교도, 유대교, 아메리카 원주민 등이었다. 여기서 도킨스는 50%이상의 재소자가 종교를 갖고 있다고 언급하며, 종교가 사람을 선하게 만든다는 전제는 설득력을 잃는다고 주장한다.


그의 논증에는 대체로 동의는 할 수 있겠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석연치 않은 부분도 있다. 예컨대 종교와 무관하게 미국의 백인과 흑인의 재소자 비율을 보면 실제 인구 구성비율과 크게 차이가 날 정도로 흑인의 비율이 높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점은 흑인들에게 결함 혹은 문제가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단순히 결론을 내리기 쉽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법이 제정되는 배경 혹은 기준에 대한 내막을 좀 더 들여다봐야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백인들과 흑인들의 마약 사범들이 주로 손을 뻗는 마약의 종류가 인종별로 뚜렷이 나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만일 흑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마약에 대한 처벌 규정이 백인 마약 사법에 적용되는 규정보다 비관용적이고 더 엄격하게 제정되어 있다면 어떻게 될까? 결과는 흑인 마약 사범이 백인 마약 사범보다 더 많이 검거될 여지가 발생하며, 이들이 더 중한 처벌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이 점은 여러 사람들이 이미 지적해오고 있으므로 새로울 것은 없다.


달리 말해보자면, 법은 개인의 존재를 보존하는데 기여하는 인간의 사회적 장치다. 판단의 기준을 인간이 만들고 제시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복잡한 인간 사회 속에서 절대적 기준이 되기에 법 자체는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다. 또 한편으로 모든 사람은 죄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주장한 사도 바울의 원죄 개념’(이제 보니 이 원죄 개념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먼저 제시한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인 것 같다)처럼, 어떤 죄가 규정된 순간, 사회적으로 범죄자가 양산되기 시작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한 마디로 법이 그 땐 문제없었지만, 지금은 문제다라는 특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것. 시대와 사회에 따라 법이 다르다. 인간이 라고 규정한 항목과 기준이 상대적이란 의미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도킨스의 기결수와 종교 분포 비율만 가지고 선함과 악함의 정도와 종교와의 관계를 판단하는 증거로 쓰기에는 여전히 부족함이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다시 말하면, 2013년 자료를 조사할 당시의 죄에 대한 관념과 법 규정에 대한 인식이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인지도 검토해야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정부의 불합리한 정책에 종교인들이 거리로 많이 나와서 시위를 하다가 범법자가 되어 수감된 것인지 자세한 내막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혹은 미국 내 이슬람 교도들에 대한 조롱과 차별에 분노한 나머지 일부 이슬람 교도들이 범법 행위를 하고 수감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일단 통계숫자는 대략적인 방향을 지시하는 인덱스로 사용될 수 있겠지만, 개별적인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지 않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도킨스의 주장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제시하는 자료가 보다 설득력 있는 것이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타성,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도킨스의 논증에 대해

 

이 책에서 나의 흥미를 자극한 부분은 생명 탄생의 설계 방식을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에는 DNA가 있다. 그리고 DNA는 흔히 생명체를 만드는 청사진이 담겨 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도킨스는 표현이 주는 모호함과 왜곡가능성을 지적하고, 보다 정교하게 이 DNA의 역할을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DNA청사진이란 표현은 매우 잘못된 표현으로, 오히려 생명체를 만드는 방법에 관한 지시 세트’(271)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아기의 DNA를 고려할 때, 아기의 신체 각 부분은 DNA와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DNA에 아기의 각 부분을 만들어내는 모든 암호는 이미설계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DNA는 오히려 케잌을 만드는 레시피와 비슷하다. DNA의 정보는 어떤 의미로든 아기의 지도가 아니다라고 의미를 밝힌다. 여기서 두 가지 흥미로운 생명 탄생의 설계 방식을 제시하는 데, 하나는 하향식 설계, 다른 하나는 상향식 설계를 언급한다.


도킨스가 이야기하는 하향식 설계는 생명체 구성의 모든 암호가 이미 구체적으로 완성되어 있다는 청사진을 이야기한다. 나이가 들어 내 얼굴 어딘가에 점이 나타났다면, 이건 이미 내 DNA의 어딘가에 묻혀 있던 부위가 어느 시점에서 기능을 발휘하여 내 얼굴에서 발현된 것이다. 이 하향식 설계(혹은 청사진 개념)는 느리지만 지속적으로 생장하고 변화하는 생명체를 만들어가는 데 매우 비효율적인 생명 설계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반면 상향식 설계는 애초에 모든 것이 결정되고 지정된 청사진이 아니라, 전체 움직임이나 행동이 국지적 규칙만을 따라 출현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도킨스는 상향식 설계 방식의 예로 흰개미 언덕과 찌르레기 떼의 군무를 언급한다. 그 중에서 거대한 찌르레기 떼의 사례가 더 흥미로운데, 이 새의 무리는 수만 마리의 개체가 무리를 이루어 함께 날면서도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정밀하게 조정하고 일사분란하게 방향을 바꾸며 대형을 구성한다. 이를 레이놀즈라는 프로그래머가 이 움직임의 패턴을 재현해 냈는데, 그 방법은 단지 각 개체에게 옆에 있는 새를 주시하고, 그에 따라 움직이도록 규칙을 정한 것뿐이었다.


여기서 잠시 옆길로 빠져본다. 나는 찌르레기 집단의 움직임 패턴에 적용된 상향식 설계 기준을 인간의 대량 학살(genocide)에 관한 사례에 적용하여 모형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류 역사에 기록된 의도적인 대량 학살의 양상을 들여다보면, 애초에 그 주동자를 악한 인간으로 단정해버리기 쉽다. 대량 학살을 자행한 히틀러와 스탈린을 악의 화신이라고 규정해버린다면, 우리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하향식 관점(‘그들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악한 인간이었다’)을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반면 우리가 대량학살의 메커니즘을 이해할 때, 찌르레기의 군무를 설명할 수 있는 상향식 관점을 적용하면, 대량학살을 효과적으로 모형화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학계에서 이미 이런 시도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지만, 나는 단순한 아마추어 독자일 뿐이므로 이런 연구에 대해 아시는 분은 알려주시길...) 다시 말하면, 대량학살에는 이 작업을 지시한 지도자가 있고, 이를 숭배하는 측근과 대중을 위협하는 수단이 있으며, 그 결과 아무도 이들을 저지할 힘을 지닌 상대 집단이 없다면, 대량학살이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찌르레기 군무 패턴을 프로그램할 때 적용된 규칙(‘국지적 규칙만을 따르면 된다’)은 대량학살을 모형화 할 때, 전범 재판장에 섰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업무 수행 규칙(‘나는 공무원이므로 명령에 따르기만 했을 뿐이다’, ‘나는 내가 맡은 일을 성실히 수행했을 뿐이다’)만을 적용하면 된다. 결국 600만 명의 유대인이 최종 해결책으로 스러져갈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하는데, 히틀러나 아이히만 그 자체를 으로 규정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그리고 독일군 집단이라는 시스템이 돌아가는데 필요한 능력(지시에 따르기)만으로도 집단 학살이 가능하다는 점을 찌르레기의 움직임 패턴을 설명하는데 활용했던 상향식 관점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히틀러의 인종주의(유대인 혐오/반유대주의)나 스탈린의 이데올로기가 더해지면, 그 구성원들은 심리적 단결과 함께 인류의 범죄에 대한 책임을 덜어버리는 상황이 된다.


잠시 옆길로 샜는데, 다시 인간의 본성을 이야기하는 도킨스의 논점으로 돌아온다. 도킨스는 인간이 이타성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면서 참고할만한 사례로 굶주린 박쥐를 소개한다. 야행성인 박쥐는 매일 밤 먹이를 구하러 다니지만, 언제나 성공하진 않는다. 따라서 운 좋게 먹이를 구한 개체는 그날 허탕치고 먹이를 구하지 못한 같은 동굴 출신의 박쥐에게 자신의 먹이를 나누어 준다고 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다른 동굴에 있는 박쥐에게는 그런 행위를 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도킨스는 친절에 대한 진화적 압력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다’(315)고 언급한다. 아직 명료하게 밝혀진 사항은 아니지만, 진화라는 개념이 성공적인 유전자가 유전자풀에 점점 많아진다는 것’(306)을 의미한다는 것을 상기한다. 이 점이 친절의 진화적 바탕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이타심에 대한 개념 역시 언제나 이타적/이기적행동이 함께 언급된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굶주린 박쥐의 경우도 먹이를 구한 개체의 호혜적이타주의행동이 다른 동굴 출신의 박쥐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타심이 적용되는 경계가 분명히 있다는 점을 언제나 고려해야 할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어느 개체의 이타심의 발로라고 부를 수 있는 팔이 안으로 굽는 행동은 이 집단의 경계 밖에서 봤을 때 언제나 이기적 행위로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속한 집단에 대한 이타심’(곧 다른 집단에게는 이기심에 해당)의 발로가 곧 집단과 의 생존 확률을 더 높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비전공자이므로 내 마음대로 펼쳐보는 상상에 불과하다.


도킨스는 책에서 자연선택은 우리 뇌에 제한된 친절의 바탕을 심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선택은 불친절의 바탕도 심는다. (...) 인류 역사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은 그 균형이 이동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6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친절한 방향으로.”(306)라고 언급했다. 앞서 언급한 나의 생각을 여기에 적용해보자면, 친절의 바탕을 심는 것은 내가 속한 집단에 대해서이며, 불친절의 바탕을 심는 것은 타 집단에 대해서라고 생각하면 이해할만 하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 이 균형의 이동이라는 도킨스의 주장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이 점에서 도킨스는 인간이 점차 친절한 방향으로 진화해왔다는 논리로 주장하는 듯하다. 나는 이 논리가 인지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의 저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주장했던 논지와 유사하다고 본다.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스티븐 핑커는 이 두툼한 책에서 인간이 폭력성이 역사 이래 줄곧 감소해왔음을 엄청난 데이터와 자료들을 제시하며 논증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의 생각은 인간이 본성에 대한 스티븐 핑커의 논점은 자기기만적이라고 보았다. 그 이유는 스티븐 핑커가 갖고 있는 인간에 대한 본성을 이미 하향식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그의 관점은 인간이 폭력적인 존재이지만 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역사의 교훈과 교육을 통해 선한 존재로의 교정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이 지점이 도킨스의 인간에 대한 이타심혹은 친절 행위의 진화적 바탕을 이루는 생각과 같은 맥락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앞서 찌르레기의 움직임 패턴에서도 언급했듯이, 나는 인간을 어떠한 존재로 규정하지 않고도 인간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시 말해 인간이 선하다거나 악하다혹은 본래 폭력적이다라고 규정하는 대신, 어떤 특정 조건에서 인간은 어떤 행동도 할 수 있는 가능성 있는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나는 단지 이 논리를 대량 학살을 모형화할 때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본다. 인간의 친철에 대한 진화적 바탕을 도킨스도 단정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이 부분은 앞으로의 연구결과가 더 밝혀줄 것이라고 기대해본다.


오늘은 도킨스가 이 책 , 만들어진 위험에서 하고자 했던 이야기(앞선 조상들의 지적 용기에 영감을 받아 더 멀리 나아가야 한다’(341)는 것과 모든 신을 단념해야 한다’(352))보다는 겨울철 찌르레기 군무에 관한 사례를 흥미롭게 읽다가 잠시 딴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전공자분들이 보시면 나의 엉터리 이야기에 당혹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책을 읽을 때, 저자가 의도한 부분만 배운다면 재미없지 않은가. 책을 읽다가도 가끔은 엉뚱한 생각도 필요하다. 도킨스가 책에서 언급한 용어를 빌리자면, 우리는 종종 지적 용기를 내어 생각의 골디락스 존(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갑지 않은, 생명의 출현에 적당한 구역)’을 벗어날 필요도 있다.





(십계명의 ‘살인하지 못한다‘는 내용에 대해)
"이 규칙은 알고 보니 "너희 부족 사람들을 살인하지 말라"는 뜻일 뿐이었다." - P108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나의 주님이자 구세주를 천사로 느낍니다. 나는 그를, 소수의 추종자에 둘러싸인 고독한 상황에서 유대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차리고 그들에 맞서 싸울 사람들을 소집한 분으로 느낍니다. 고행자가 아닌 전사로서 가장 위대했던 분으로 느낍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주님께 무한한 사랑을 느끼며, 마침내 주님이 어떻게 온 힘을 다해 일어나 채찍을 쥐고 독사와 살무사 같은 무리를 사원에서 쫓아냈는지 들려주는 <성경> 구절을 통독했습니다. 세계를 위해 악독한 유대인가 맞섰던 주님의 싸움은 정말 격렬했습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야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의무는 가만히 앉아 당하는 게 아니라, 진리와 정의를 위한 전사가 되는 것입니다."
-히틀러의 유대인 혐오 발언(1922) - P122

"(...) 그리고 우리가 올바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뭔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날이 성장하고 있는 그 골칫덩이들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내 민족에게도 의무가 있습니다."
- 히틀러의 유대인 혐오 발언(1922): 앞의 인용에 이어서 - P122

"친절의 진화적 바탕은 무엇일까? 8장에서 우리는 진화란 성공적인 유전자가 유전자풀에 점점 많아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 P306

"내가 말하는 건 지적 용기이다.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가능성을 심사숙고하고 이렇게 말할 용기. "설마 그럴 리가. 그래도 틀릴 셈 치고 그 가능성을 조사해보자."" - P340

"나는 우리가 과감하게 용기를 내어 성장함으로써 모든 신을 단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책의 마지막 문장 -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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