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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화판 - 권윤덕의 그림책 이야기
권윤덕 지음 / 돌베개 / 2020년 5월
평점 :
《나의 작은 화판》
: 권윤덕의 그림책 이야기
권윤덕 지음 [돌베개]
그림책 작가의 작업 노트와 철학: '인간은 치유하며 성장 한다'
최근에 그림책에 대한 관심이 생겨 아내와 함께 읽게 된 책이다. 권윤덕 작가를 알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자세한 정보 없이 손에 든 책이었지만 인상 깊게 읽었다. 저자는 1995년 아이와의 일상을 소재로 그려낸 《만희네 집》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25년 이상 그림책 작업에 전념해온 작가다. 특히 작업 전반을 보다 편리한 디지털 작업이 아니라 수묵화나 불화와 같은 전통적인 도구와 방법을 계속 활용하며, 각 작업마다 표현 기법을 새롭게 탐구하면서 제한적인 조건들을 극복해왔다.
《나의 작은 화판》에는 1995년에 출간한 첫 책부터 2016년에 펴낸 《나무 도장》까지 20여년의 작업을 대상으로, 작가의 삶과 작업에 대한 철학이 오롯이 담겨 있다. 특히 아이가 어렸을 때 아이를 눈높이에서 지켜보면서, 아이의 삶 속으로 들어가 함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울러 일상에서부터 거대한 역사에 이르는 폭넓은 주제를 표현해내기 위해 새로운 표현 기법을 시도하고 연마하는 모습도 책에 녹아있다. 물론 그 과정 자체는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어린 아들과 1년 간 헤어져 중국에서 수묵화를 배우거나, 노동 현장을 취재하다가 냉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진행 과정에서 부딪히는 양상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사람들과의 연결됨을 고민하며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다.
“그림 한 장을 완성하기까지는 만만치 않게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림은 내가 익히고 느낀 만큼 그릴 수 있고, 내가 애쓴 만큼 표현할 수 있다. 내 능력과 노력을 넘어 기대하면 곧 허영이고 헛붓질이다.”(183)
저자는 50페이지 전후의 그림책 한 권을 만들어 내려면 관련 자료를 공부하고나 취재하고, 이를 소화하여 그림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만들어내는 데 최소 2-3년이 걸린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작업에 맞는 새로운 그림 기법(표현 방법)을 연구하는 과정이 포함된다. 또 여러 권의 더미북을 제작하며 사람들에게 의견을 묻고 대화하며 만들어나가는 과정도 거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림책이 아이들을 위한 책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무지와 편견을 깨는 기회였고, 새롭게 배우는 점이 많았다. 이건 작업의 어려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을 포함한 다양한 독자가 어떻게 읽을까, 메시지가 어떻게 전달되고, 독자가 어떻게 받아들일까도 고민하는 과정도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은 작업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반드시 고려해야 하며 넘어야할 단계였다.
책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예기치 못하게 13년이라는 긴 호흡을 필요로 했던 《꽃할머니》작업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한중일 세 나라의 그림책 작가들이 평화의 연대를 위한 공동작업으로 시작되었다. 저자는 한국 그림책 작가로 참여했고, 이 작업에서는 ‘위안부’ 할머니들에 주목했다. 이 주제는 수많은 분들이 국가의 폭력으로 고통을 받으며 인권이 유린된 역사이기에, 그만큼 많은 고민을 요구하기도 하고, 예기치 못한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저자는 “어떻게 하면 개인의 일과 역사적 맥락을 연결할 수 있을까 계속 질문”(203)하며, ‘폭력을 직접 묘사하지 않고 폭력을 이야기’하기 위해 고민하며 작업의 방향과 나아감을 결정했다. 10년이 넘는 지난한 작업의 경험은 저자에게 ‘50년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던 경험’이었다.
창작을 하는 사람들에게 재능, 혹은 천재성이란 말은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재능은 어느 시인의 표현대로 (글쓰기든 창작이든) 쉽게 포기하지 않고, 창작에 대한 열정이 고갈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오늘날 예술가의 재능은 단지 작품의 시장성만을 기준으로 판단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볼 일이다. 예술가는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여기에 공감하는 자다. 나아가 이러한 인식을 자신의 삶 속에 녹여 각자에게 익숙한 매체를 통해 이를 구체적인 대상으로 재현해내는 이들이다. 사회의 규범 속에서 살아가는 대중들이 외면하기 쉽거나 미처 인지하지 못한 삶의 진실들을 캐어내어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대중은 그 속에서 보편적인 경험과 진실을 발견하고 공감하게 될 것이다. 저자는 내가 생각하는 예술가의 역할을 그대로 보여준다. 저자의 삶 자체가 이미 하나의 예술작업이라고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가 아이들과 책읽기 수업을 할 때, 만나게 되는 아이들에 대한 시선이 좋아 이 부분도 기억에 남는다. “마음이 아픈 어린이 뒤에는 상처로 가득한 부모가 있었고, 그 가족 뒤에는 개인의 힘으로 뛰어넘기 어려운 사회구조가 막아서고 있었다.”(250) 고통과 상처를 경험했던 사람이 다시 타인, 특히 자녀에게 이러한 고통을 전가하는 사례는 흔히 발견된다. 이런 문제가 개인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사회구조적인 문제의 결과일 수도 있다는 데 저자는 주목한다. 그 역시 작업을 하면서 본인의 아픈 과거를 새롭게 마주한다. 더불어 개인과 사회의 관계, 개인과 개인의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고 이를 형성해나가기도 한다. 이 점은 넉넉하지 않은 부모의 노동으로 아이들과 함께 하지 못해 방치되다시피 하는 아이들, 그리고 이 상황에 죄의식을 항상 갖고 살아가야만 하는 부모들을 만나 함께 이야기와 고민을 나눈다. 이 때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열게 되는데, 서로가 이어지는 모습이 푸근하고 따뜻하게 다가온다. 그림책은 이렇게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나 역시 어른이 되어 늦게나마 그림책이 지니고 있는 힘을 새롭게 배워가는 중이다.
"어린이는 나름 나름의 기질과 재주를 가지고 태어난다. 각자 그것을 밑천 삼아 사회 안에서 서로 보완하고 어울어지면서 저마다의 행복과 의미를 찾아간다. 사회의 기존 가치나 질서와 끊임없이 갈등하고 화해해 가면서, 새롭고 다양한 삶의 형태가 만들어진다." - P96
"사실 그런 주제를 끌어가는 힘의 원천은 나의 간절함 외에 다른 것은 없다. 달리 말하면, 이 사회에서 나가떨어지지 않겠다는 절박함이 내게 있었다." - P156
"처음에 그림책을 구상할 때는 소박한 발상에서 출발한다. 취재와 스케치를 거듭하면서 종종 그 발상이 너무 보잘것없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도에 포기하지 않으려면 거듭해서 질문하고 좀 더 깊이 탐색해 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 P187
"그림책은 어린이는 물론, 어른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는 매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 P217
"사람이든 동물이든 누구나, 사랑받으면 덜 아프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 P248
"‘저 사람만 없애 버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자신과 타자를 폭력적으로 구분 짓기 시작한다. (...) 그리고 없애야 할 적이 만들어지는 순간, 사람들은 그 대상에 대해서라면 아무리 잔인한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 P291
"가해자임을 알아차리고 인정하는 일은 부단한 과정일 수밖에 없다. 끊임없이 자기가 놓인 구조를 의심하고 되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해자성‘을 인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계를 새롭게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이제껏 당연시되어 온 폭력을 멈추게 할 힘이 깃들어 있다."
- 심아정,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 자료집>, 2018, 61-62면에서 재인용 - P326
"법은 긑이 없고, 법은 한 곳에 집착되어 있지 않으니, 이미 집착된 법과 기술을 깨트려 나가야 한다." 전통으로 이어져 온 법을 익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지만, 그 법을 깨트리는 단계에 이르러야 새로운 그림, 자신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뜻이다. - 중국 화가 자유푸(1942- )의 화집 서문의 글귀에서 재인용함.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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