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가 소멸된 시대에 《오뒷세이아》를 읽는다는 것
- '국제 팔레스타인 연대의 날'(11월 29일)에
호메로스 지음 | 이준석 옮김 [아카넷] (2023)
우연한 기회에 벼르고 벼르던 《오뒷세이아》를 읽었다. 고전학자 천병희 교수가 첫 원전을 번역한 지 40년 만에 나온 이준석 교수의 원전 번역서다. 졸린 눈을 비벼가며 처음 읽던 과정에서 눈길이 머문 지점은, 오뒷세우스라는 인물보다 ‘크세니아(Xenia)'라고 불리던 고대 세계의 환대문화였다.
《오뒷세이아》에서 발견하는 고대의 환대문화는 그 구체적인 실천 방식이 아주 특이했다. 우리는 초면인 누군가를 만나면 데면데면하게 어색해하고 때로는 불편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현실에 살고 있다. 특히 대도시의 아파트 거주자를 염두에 둔다면 말이다. 하지만 고대 세계, 특히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이방인을 만나게 되면, 상대방의 정체를 먼저 묻지 않았다. 주인이 가장 먼저 하던 일은, 이방인을 집안으로 초대하여 따뜻하고 안전한 자리에 앉힌 다음 음식을 정성껏 대접해야 했다. 상대방이 만족스럽도록 배불리 먹이는 일이었다. 역자에 따르면, 주인이 아무리 상대방이 궁금하다고 해도, 상대방의 정체를 먼저 묻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한 이후라야, 주인은 통성명을 하고 이방인에게 오게 된 사연을 들려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주인은 이방인이 하룻밤 묵기를 원하면 따뜻한 잠자리를 마련해주고 심지어 떠날 때는 선물도 얹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관습은 분명히 ‘낯선 이를 벗으로 만들어주는’ 전통이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봤을 때 이처럼 말도 되지 않는, 가성비 제로인 고대의 환대 문화가 작동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오뒷세이아》를 읽다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모든 이방인과 거지들은 제우스에게서 오니까요.”(342)
20년 만에 고향 이타카로 돌아온 오뒷세우스가 처음 만난 사람은,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가문을 위해 일하던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였다. 이 말은 그가 아테네의 손길로 허름하고 늙어 보이는 몰골로 돌아온 주인 오뒷세우스를 알아보기 전에 하던 말이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이방인이나 거지들은 제우스가 변장하여 인간 앞에 나타난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이러한 관습이 지켜질 수 있었다고 이해되었다. 물론 이러한 행동과 관습의 실천이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공동체의 삶을 규제하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규범으로서는 작용했을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번에는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가 다음과 같이 덧붙이며 말한다.
“내 당신을 삼가 존중하고 아끼게 된다면, 그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 손님을 보호하시는 제우스를 내가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내 그대를 가엾게 여겨서니까요.”(357)
그렇다. 이 말에서 한 가지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리 공동체의 불문율처럼 여겨진 환대의 관습이라고 해도 공동체의 규범을 ‘강제’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존재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역시 환대의 문화는 인간의 본성상 자연스러운 진화의 결과는 아닌 것이다. 공동체의 관습을 강제하는 힘은 바로 제우스에 대한 믿음이었다. 신 또는 신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과 두려움이 있었다는 점이다. 《오뒷세이아》를 읽는 동안 거의 3,000년 전의 고대 문화를 접하게 되면서, 고대인들이 모르는 상대, 타인과의 만남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그들의 윤리학이 바로 환대의 문화임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고대 그리스의 신이라는 것도, 고대인들이 세계를 이해하는 한 가지 이해 및 설명 방식으로서 만들어진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고대인들에게 ‘제우스’ 혹은 ‘여러 신들’이란 세계를 이해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을 규정하는 ‘고대 세계의 윤리학’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을까. 나는 이렇게 정리해 본다.
특히 《오뒷세이아》를 읽으면서 ‘환대(Xenia)'라는 전통 혹은 관습에 주목하게 된 것은, 현대의 그리스에는 환대의 전통이 사라져 버린 것 같기 때문이다. 현재 그리스에 있는 여러 섬은 시리아를 비롯하여 목숨을 걸고 지중해를 건너온 난민들을 수용하는 시설이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은 EU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받고 이 수용소들을 운용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현재의 그리스가 동방으로부터 유럽으로 밀려드는 난민을 막는 최전선의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독일은 꽤 많은 난민들을 수용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몇 년 전 우리 사회의 난민 수용 논란의 양상에서 볼 수 있었듯이,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는 유럽으로 밀려드는 난민들을 붙들어둘 수 있는 전초기지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목숨을 걸고 살아남은 난민들도 이미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고 있다는 것을 떠올려보자. 《오뒷세이아》에서 고대 세계의 기본적인 불문율처럼 작동하던 환대의 문화였으나 현재 그리스에서는 이 ‘벌거벗은 생명들’인 난민을, 곤궁한 환경에 수용하는 역할을 그리스가 자처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아이러니했던 것이다.
오늘(11월 29일)은 ‘국제 팔레스타인 연대의 날(International Day of Solidarity with the Palestine People)’이라고 한다. 유엔이 지정한 날로, 유엔은 ‘팔레스타인에게 주권을 부여하고 이스라엘 점령으로부터 독립을 보장하기 위한 즉각적인 조치를 촉구’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현대 이스라엘은, 제2차 대전 이후 나치의 박해 끝에 살아남은 25만 명의 유대인 난민을 수용하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생겨난 국가다. 조금 단순히 말하면 현재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의 근원은, 영국, 미국, 프랑스를 주축으로 한 국제 사회가 나치에 고통받았던 유대인들에게 ‘느닷없이’ 현재의 위치에 살도록 강제한 결과였다. 지중해의 동쪽 끝에서 풍요롭게 살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국제 사회는 유대인 난민을 데려다 앉혀놓은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굴러들어 온 유대인 난민들이 누가 보아도 잔인한 방법으로 ‘박힌 돌’(팔레스타인 거주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하면서 내몰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2007년 부터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완전 봉쇄한 상태에서 첨단 무기를 퍼붓고, 군부의 보호와 묵인 아래 많은 이스라엘 사람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폭행과 살인을 저지르고 있는 현실이다.
물론 ‘모든’ 유대인들이 현 이스라엘 정부의 행태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이스라엘의 인권 단체가 극우적인 이스라엘 정부의 잔인함에 분노를 표출하고 비판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더욱 힘든 현실은, 국제 사회가 이 문제의 해결에 친이스라엘 단체의 눈치를 보면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 단체는 미국의 눈치를 더 이상 보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강력한 장악력을 얻은 나머지, 미국의 정치 마저 한 손에 놓고 뒤흔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해 온 일본의 문학 연구자 오카 마리 교수의 책 《가자란 무엇인가》(두번째테제, 2024)에서 알게 된 사실은, 오바마 대통령도 민주당 후보로 나왔을 때, ‘나는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지지합니다.’라고 말하니, 친이스라엘, 친시오니즘 단체로부터 거액의 정치 자금이 흘러들어왔다는 사실, 그리고 미국의 급진 좌파로 여겨지는 버니 샌더스마저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추가 무기 공여 안에 찬성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정치가 얼마나 친이스라엘, 친시오니즘 단체에 의해 통제되고 장악되어 있는지를 실감하게 해 준다.
오늘이 ‘국제 팔레스타인 연대의 날’이기에, 최근에 읽은 《오뒷세이아》의 ‘환대’문화가 생각이 났더랬다. 비록 고대 세계의 ‘크세니아’가 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지켜진 관습이긴 해도, 낯선 이방인을 ‘또 다른 나’의 모습으로 바꾸어 생각해 보게 해주었던 전통은 아니었을까 싶다. 특히나 신변의 위협을 느껴 고향을 탈출한 이들이 ‘탄원자’가 된 경우, 고대 세계의 이 환대 전통은 ‘탄원자’에 대한 존중과 적절한 대우의 의무를 다해야 했던 문화를 《오뒷세이아》에서 확인하는 것이다. 작품 중에서 알키노오스라는 인물은 오뒷세우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손님과 탄원자는 모두 형제들이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입니다.”(209)라고 말이다. 나는 이런 대목을 만나면서 고대 세계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삶이 척박하고 고되긴 했을지언정, 어쩌면 지금 우리의 삶보다는 더 인간적이기도 했음을 생각해 본다. 반대로 현대 세계의 현실은 어떤가. 나는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총리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청소’하기 위해 공공연하게 ‘인간의 모습을 한 괴물(human monster)’, ‘인간의 모습을 한 동물(human animal)’이라고 언급하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대상화하고 타자화하는 집단의 잔인함을 깨닫는다. 충격이었다. 국제 사회가 바라보는 정의가 지나치게 이스라엘로 기울어진 현실에서, 아이러니하게도 환대로 넘쳐나던 고대 지중해 세계의 모습을 다시 상상해본다.
내게는 제우스로 대표되는 신이 사라져 버린 것이, 오늘날 ‘환대’의 전통마저 사라지게 한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조상 대대로 풍요롭게 살아온 장소를 점령하여, 빼앗고, 이들을 착취해 온 서구의 정복자들에게 《오뒷세이아》에서 발견하는 환대의 전통을 다시 이야기해 주었으면 좋겠다.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환대’는 낯선 이방인을 취약한 한 인간으로서 존중하고 보호하고자 했던 고대 세계의 윤리학이었다. 어쩌면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신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남기 위한 공존의 윤리학이 절실히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뒷세이아》를 통해 고대의 선조들이 내게 가르쳐준 지혜다. 우리에게는 지금 어느 시대보다도 함께 잘 살도록 도와주는 신이 필요할 때인지 모르겠다. 《오뒷세이아》에서 그러한 신을 만날 수 있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