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하 시집 [창비]
'지옥의 묵시록'을 읽다가 남기는 잡문
학창 시절에 교과서에 나온 시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시집을 들여다 본 적이 없다. 국어와 문학을 제일 싫어하고 고통스러워했던 내가 아닌가. 그런데 '어쩌다' 나이가 들어 시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나 역시 궁금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다만 책을 읽다보면 가끔 책에서 소개되는 시집이나 시인에 대해 알게되고, 궁금해지긴 했다. 아마도 아직 남아있는 '중년의 호기심', 이게 하나의 계기가 된 것이 아닐까. 모든 결과는 무언가의 우연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은가. 그렇게 더듬더듬 시도를 해보게 된듯하다.
학창 시절에 무언가를 좋아하고 몰입해본 것이 없는 사람이 나이가 들어 그 무언가에 손을 대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사람은 나이가 들 수록 이전에 형성된 관성으로 계속 살아가게 마련아닌가. 학창 시절에 음악을 좋아하고 그 세계를 탐험해보지 않은 이가 나이들어서 클래식이나 재즈를 듣기란 매우 어렵다.
내가 시에 그것도 뒤늦은 나이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뭘까.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 나이가 들 수록 '나도 모르겠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젊은 시절의 치기가 빠져서일까, 아니면 나의 '별볼일 없음'을 이제서야 스스로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무의식 속에 쌓아둔 나의 결핍감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면 호기심이란 그럴듯한 이유를 둘러댄 오랜 아쉬움인지도.
어느 책에선가 보았던 이산하 시인의 <악의 평범성>을 읽기 시작했다. 그것도 단지 호기심에서. 아직 시를 어떻게 읽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그나마 내게 아직 이런 호기심이 있었다는 것이 신기할따름이다. 그렇게 시읽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첫 번째 시 '지옥의 묵시록'부터 '턱' 걸려버렸다. 머뭇머뭇 문지방 밖에서 주저하면서 방안을 쳐다보는 소심한 강아지처럼 나는 시의 눈치를 살핀다.
시는 울음을 이야기한다. 벤야민과 니체의 울음을 말이다. 이탈리아 토리노의 어느 공원에서 아침 산책 중이던 니체는 어느 마부가 모질게 때리는 말의 목을 끌어안고 울었다는 이야기. 니체의 연보에는 그가 우는 동안 간질 발작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시의 마지막 문장 "나는 저렇게 표면이 심연인 듯 울어본 적이 없었다."(10)에서 머뭇거려진다. '표면이 심연인 듯'한 울음은 또 무엇일까. 금새 이해가 되진 않는다. 이 부분이 무척 궁금했다. 사람들은 이 시를 어떻게 이해할까. 이런 궁리를 하는동안 반나절이 지났다.
어느 순간 '아이의 울음'을 떠올렸다. '닭똥같은 눈물'을 똑똑 떨어뜨리면서 온 몸으로 우는 아이들의 울음을 말이다. 매일 같이 품에 안고 다니는 인형을 잃어버린 아이는, 세상이 무너진다. 자신의 세계가 무너졌을 때 보여주는 아이들의 울음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아마 그런 것이 아닐까. 표면과 심연 사이에 아무런 장애물도 없이 우는 그런 울음이란.
나는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했던 아이였던 것 같다. 그러니 이 문장이 곧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내가 '표면이 심연인 듯'한 울음을 울었던 때를 기억하지 못하는 어른이 되었기 때문일까.
오늘은 시 한 편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