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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그림

: Over to You!

존 버거(John Berger) & 이브 버거(Yves Berger) 지음 | 신해경 옮김 | [열화당]

 



그림과 화가의 생애를 매개로 부자 간 이어지는 속 깊은 편지

 



작년에 어떤 그림을 급하게 읽고 새해 다시 천천히 읽고 있다. 편지로 이어지는 아버지와 아들의 속 깊은 대화라니! 그림과 화가를 매개로 장황한 설명을 하지 않고도 그림을 그리고 사진과 미술에 대한 평론을 썼던 존 버거와 화가인 아들 이브 버거. 이들 각자의 추상적인 언어가 이렇게 장황한 설명 없이도 소통되는 관계일 수 있다니 놀랍고 또 부럽다. 연인이나 여성들만의 세계처럼 느껴졌던 이런 공감 충만한 대화, 이심전심의 소통이 부자 사이에서도 가능했었던 거구나... 신선했고 놀라웠다. 한편으로는 두 사람이 그만큼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대화를 나누었으리라 생각한다.

 


오늘 읽은 대목 중 인상적인 부분.

아들 이브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다.


 

"이십 년 넘게 그림을 그려 온 지금, 제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은 이전과는 달라요. 이제는 하나의 구성이나 이미지로 작용하는, 통일성 있는 그림에 도달하는 문제가 아니에요. 꽤 애를 먹긴 했지만, 거기에 도달하는 법은 알아낸 것 같아요.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라 간직할 가치가 있는 그림은 어떤 그림인가 하는 문제예요. 제 그림 대부분이 굳이 남에게 보이는 채로 있어야 할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지요. 그래서 저는 계속 작업을 해요. 다시 또 다시, 한 장 또 한 장. 일종의 끝없는 복구 과정이에요. 하지만 늘 이번에는 좋은 그림이 나올 거라는 희망에 이끌리지요.


 

가끔 절망이 자라 희망을 누를 때, 제 의지가 눈앞의 현실을 직면하고 굴복할 때, 모든 야심이 깨지고 남은 하나는 완전히 바보 같을 때, 너무나 드물지만 이 모든 조건이 만났을 때, 그 때 비로소 간직할 가치가 있는 그림이 깨어나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마법 같은 거예요." (81)


 

이 인용문에서 '그림'이란 단어를 ''로 바꾸어도 어색하지 않다. 자신의 그림()'남에게 보이는 채로 있어야 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계속 작업을 방해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간직할 만한 가치가 있는 그림이 드물다고 느끼듯, 자신의 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렇게 '다음에는 좋은 그림()이 나올 것이라는 희망'에 이끌리고, 마법에 유혹당하는 일이 하루를 충만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올해는 그렇게 차근차근 천천히, 그리고 꾸역꾸역 체하지 않게 읽고 쓰고 싶다.

 

 

아직 내가 존과 아들 이브의 글을 많이 접해보진 못했지만, 두 사람은 자신이 써내려가는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이 단어를 쓰고 있는지를 명료하게 알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두 사람의 문장은 가뿐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고, 나를 오래 머무르게 붙든다.


 

나는 유치원 이후로 그림을 제대로 배운 적은 없다. 하지만 존 버거의 스케치가 마음에 들어 나도 뭔가 그려볼 수 있을까 궁금했다. 작년 말에 볼펜으로 뭔가를 그려보기 시작했다. 복잡한 꽃이나 음영 표현은 아직 못하지만 내가 아끼는 물건의 윤곽만을 처음 그려보기 시작했다. 내 시계, 그리고 카메라와 같은 사물들. 아래는 펜으로 나와 많은 시간을 보냈던 클래식 필름 카메라를 그려보았다. 오랜 시간 그리다보면 존과 이브의 대화에서 그들이 대화를 나눈 각자의 고민거리와 이야기를 좀 더 이해해볼 수 있을까.



(c) 초란공, 내 카메라, 2021






"이십 년 넘게 그림을 그려 온 지금, 제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은 이전과는 달라요. 이제는 하나의 구성이나 이미지로 작용하는, 통일성 있는 그림에 도달하는 문제가 아니에요. 꽤 애를 먹긴 했지만, 거기에 도달하는 법은 알아낸 것 같아요.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라 간직할 가치가 있는 그림은 어떤 그림인가 하는 문제예요. 제 그림 대부분이 굳이 남에게 보이는 채로 있어야 할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지요. 그래서 저는 계속 작업을 해요. 다시 또 다시, 한 장 또 한 장. 일종의 끝없는 복구 과정이에요. 하지만 늘 이번에는 좋은 그림이 나올 거라는 희망에 이끌리지요.



가끔 절망이 자라 희망을 누를 때, 제 의지가 눈앞의 현실을 직면하고 굴복할 때, 모든 야심이 깨지고 남은 하나는 완전히 바보 같을 때, 너무나 드물지만 이 모든 조건이 만났을 때, 그 때 비로소 간직할 가치가 있는 그림이 깨어나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마법 같은 거예요."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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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공 2022-01-03 01: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존 버거 책 손에 들고 있었네요. 라이카 카메라 넘 잘 그리셨는데요?^^ 글자와 숫자까지 세심하게~ 앞으로도 계속해서 초란공님 스케치 그리신거 올려주시리라~ 생각하겠습니다^^

초란공 2022-01-03 11:40   좋아요 2 | URL
존 버거 옹이 새해부터 귀가 근질근질 하실듯 합니다^^ 반갑네요~ 쓰던 카메라를 다 꺼내서 그려볼까 하고 있습니다. ^^;; 주말 오후가 그림 하나 그리는데 훌쩍 가버리더라구요. ^^;;

mini74 2022-01-03 18: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그림 넘 좋은데요.~ 느낌있어요 *^^* 존 버거 궁금해지네요 ~

초란공 2022-01-03 22:19   좋아요 2 | URL
학창시절에 그림그리던 친구들을 보고 따분하겠단 생각을 했는데, 그려보니까 나름 재미가 있네요. 노안이라 힘들긴 하지만요^^;; 존 버거의 책은 그림이 참 맘에 드네요~
 
죄와 벌 2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8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문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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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 이문영 옮김

[문학동네] | (2020)

 



한 순간도 혼자일 수 없는 인간이란 존재를 발견하다’ - [2]

 



앞선 글에서는 죄와 벌의 주요인물인 로쟈가 살인을 저지른 동기를 정리를 해보고, 작품의 배경이 되는 도시와 주인공이 머문 공간의 의미를 이해해보고자 했다. 이번 글에서는 여러 등장인물들 나아가 인간이란 존재에 좀 더 주목해보았다.


 

피상적이나마 소설 전반에 대한 인상을 정리해본다면, 이 작품은 살인을 저지른 한 청년의 내부에 깊이 각인된 부조리한 사회의 환영을 언어로 풀어낸 소설이다. ‘모든 인간은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는 표현이 진부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비자연적인 죽음인 인간의 자살, 살인 행위의 경우, 이 표현이 더 이상 진부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사회 구성원 각자는 그가 속한 환경과 상호작용한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역사는 고스란히 그의 몸 안에, 그리고 공동체 전체에 기억된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역사 속에서 공동체(환경)과 상호작용하며 공진화한 하나의 문화적 기호혹은 상징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다. 그러므로 하나의 일탈 행동으로 보이는 범죄 행위 혹은 자살과 살인은 내게 하나의 메시지로 다가온다. 인간이 혼자 살아가는 존재였다면 이러한 문제는 적어도 매우 단순한 형태를 보여주었을 것 같다.


 

한 가지 예로 로쟈의 절친 라주미힌이 새 집으로 이사를 한 후 집들이 행사를 여는 장면을 떠올려본다. 라주미힌은 집에 초대된 사람들이 논쟁했던 주제가 범죄는 사회구조의 비정상성에 대한 항의”(1, 396)라는 주장이었다고 로쟈에게 말한다. 특히 라주미힌의 친척 형이자 예심판사인 포르피리는 로쟈와 라주미힌에게 범죄에서 환경은 많은 걸 의미해.”(1, 398)라고 말하는 대목도 마찬가지다. 또한 새로운 사상에 열중해있던 청년 레베쟈트니코프가 모든 것은 인간이 어떤 상황과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모든 것이 환경에 달려 있고, 인간 자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2, 150)라고 말하는 대목은 어떤가. 이런 주장들에서 환경의 지배를 받는, ‘문화적 기호로서의 인간을 생각해보게 된다.


 

앞에서 로쟈의 살인 동기로 공리주의 같은 주제를 이야기했다. 하지만 극빈 속에서 갈 곳 없고 의지할 데 없는 청년이 삶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한 것이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로쟈에게 자신의 살인 행위는 사회에 대한 복수가 결코 아니었다. 사람을 압박하고 옥죄는 사회 환경 속에서 로쟈는 오랫동안 모멸감, 소외감, 좌절감, 서글픔 등이 쌓이고 억눌러진 응축에너지가 밖으로 흘러넘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피할 곳 없이 궁지에 몰린 인간은 자살하거나,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스스로를 억누르며 현실을 받아들이곤 한다고 앞에서 언급했다. 그렇다면 로쟈의 범행 역시 한 개인을 통해 사회의 문제가 표면 위로 드러나는 상황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혹은 세상에 구원을 요청하는 메시지로도 말이다


살인 행위 뿐만 아니라 자살 행위 역시 개인이 세상에 남기는 사회적 메시지다. 한마디로 억울하고 외롭다’라는 소리 없는 외침인지도 모른다. 로쟈는 타인을 죽임으로써 사회적 자살과 다름없는 자기 파괴적 상황으로 자신을 내몰았다. 하지만 역사상 많은 위인들이 이러한 모험을 감행하면서 역사를 자신에게 맞추는 데 성공한 인물이 아니었나. 이것이 로쟈의 논리였다. 바로 승자의 편에 서게 되는 결말이 로쟈에게 아름다움’, 하나의 미학적 성취가 되는 셈이었다. 따라서 로쟈의 범죄는 개인과 사회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사회가 개인에게 미친 작용에 대한 개인의 반작용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비록 그의 행위가 완결된 상태로 이루어질 수 없는 커뮤니케이션이었긴 하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유독 나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고독한 로쟈의 모습이었다. 그는 살인을 감행하기 전, 어느 교외 지역을 방황하는데, 정원에 핀 꽃들을 멍한 듯 오래도록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그의 모습에서 지독히 외로운 인간을 보았다. 신을 믿지 않던 그가 자신의 길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는 장면은 어떤가. 또 로쟈가 소냐에게 자신의 범행을 고백하며 폭풍 같은 대화를 나눈 뒤, 그녀에게 날 버리지 말아달라고 매달리는 모습에서도 외롭게 부유하는 인간을 발견했다. 로쟈는 소냐와 대화를 나누고 자신의 좁은 방으로 돌아온다. 그때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못 같은 걸 박는 소리를 듣고 처음으로 지독한 외로움을 느낀다. 자신이야말로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는 공간과 공기가 없었음을 절실히 깨닫는 장면이었다. 전직 하급 공무원이자 극빈으로 인한 좌절감, 우울감으로 무기력하게 술에 절어 살았던 마르멜라도프. 그가 술집에서 한 말이 있다. ‘사람이란 어디든 갈 데가 필요한 법이라고 말이다. 로쟈의 방황과 고독은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는 곳, 그가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로쟈는 고독한 인간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었다.


 

고독한 존재로 로쟈를 바라보니 다른 몇몇 인물들에게도 눈길이 갔다.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집이 있었지만, 진정으로 갈 곳이 없어 건초운반선에서 닷새 밤을 보냈던 마르멜라도프. 그는 또 거리에 나와 딸에게서 받은 돈으로 술을 마셔버린다. 그의 절망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취직이 되지 않았지만 집에 있기 부끄러워 낮에는 집 밖으로 나돌던 기억. 나 역시 갈 곳이 없었던 때가 있었다. 그의 부인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는 어떤가. 그녀는 몰락한 귀족 집안의 자녀였기에 교양을 갖추었지만 귀족 계급이라는 자존심과 허영심이 가득했던 인물이다. 비참하게 사망한 남편의 추도식을 분수에 넘치도록 화려하게 준비한다. 어쩌면 이 부부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경제적 제약이나 사회 규범, 관습 또는 가족이나 공동체 내에서 각자에게 주어지고 기대되는 역할과 체면에 우리는 ‘1아르신의 공간과 같은 상황에 우리 자신을 스스로 가두고 있지는 않은가. 카테리나가 피를 토하며 죽어갈 때, 그녀는 로쟈에게 꿈은 사라졌어요! 모두가 우리를 버렸어요!”(2, 246)라고 말한다. 고통 받는 이들에게 희망마저 사라질 때, 사람은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니다. 스비드리가일로프 역시 로쟈의 동생 두냐에 대한 마음이 거절당하자 자신이 자살할 장소를 정처 없이 비를 맞으며 찾아 헤맨다. 이런 인물들의 모습에서 도스토옙스키가 그려낸 인물들이 모두 무척이나 외로운 존재란 생각이 들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읽기를 죄와 벌로 처음 시작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번 독서는 소설 전반에서 고립되고 외로운 존재를 향한 작가의 끈질긴 시선을 느끼게 된 기회였다. 소설은 특히 가난하고 모욕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심을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었다. 소설의 시작부터 극빈의 상황 속에서 스스로를 혐오하고 모욕하던 마르멜라도프가 등장하는 것에 주목해본다. 로쟈는 범행 전날 술에 취해 숲 속에서 잠을 자다가 끔찍한 꿈을 꾼다. 꿈에서 비쩍 마른 암말은 주인의 잔혹한 채찍질에 죽어갔다. 무엇보다 이런 장면들에서 인간에 대한 작가의 깊은 연민을 발견한다.


 

또 소냐의 아버지 마르멜라도프가 사망한 후 로쟈는 늦은 시각에 소냐의 집을 찾는다. 소냐와 대화하던 로쟈는 갑자기 무릎을 꿇고 소냐의 발에 입을 맞추며 이렇게 말한다. “난 당신에게 절을 한 게 아니야, 난 모든 인류의 고통에 절을 한 거야.”(2, 75) 이 말은 고통 받는 인간에 대한 도스토엡스키의 연민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처럼 읽힌다. 나아가 역자가 도스토옙스키의 오랜 친구 스트라호프가 했다는 말을 인용한 부분에서 작가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지혜롭고 선하지만, 모든 이에게 버림받은 것 같은 불쌍한 사람이다.”(2, 439) 도스토옙스키의 전기까지 저술했다는 스트라호프의 말에 그 역시 고독한 친구 도스토옙스키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로쟈와 마르멜라도프, 카테리나, 그리고 스비드리가일로프와 같은 인물들에서 비로소 고독했던 도스토옙스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도 소설에서 로쟈 만큼 중요한 인물을 꼽으라면 힘들지 않게 소냐를 지목할 것이다. 그녀는 극빈 상태인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되고자 자신의 몸을 내놓았지만, ‘갈 곳 없는로쟈에게는 안식처이자 공기가 되어주는 인물이다. 또한 성서의 가장 핵심적인 가치인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성스러움과 속됨을 모두 지니고 있는 인물인 셈이다. 하지만 로쟈가 범행을 저지르고 막다른 골목에서 삶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소냐의 존재 때문이 아닐까 싶다. 로쟈가 자신의 범행을 고백하러 찾아간 대상도 소냐였고, 그에게 자수하여 고통을 받아들이라고 한 사람도 그녀였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는 로쟈의 형량을 낮추어주고 아직 남아있는 삶을 생각해보라고, 그래서 자수를 권하던 예심판사 포르피리도 소냐의 가치를 뒷받침해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반면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로쟈의 동생 두냐에게 고백한 마음을 거절당하자 자살하기에 이른다. 로쟈의 성격을 그대로 닮아 로쟈와 쌍둥이처럼 느껴지는 두냐는 스비드리가일로프에게 소냐와 같은 대상은 아니었다. 결국 그의 자살은 막다른 생의 골목에서 소냐와 같은 존재, 사람이 숨 쉴 공기가 곁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냐가 소설에서 맡은 역할은 그녀가 로쟈에게 단순히 공기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녀는 범행 후 찾아온 로쟈에게 성경 구절을 읽어주었다. 예수의 구원으로 죽은 지 나흘 만에 되살아난, 나자로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날 역시 로쟈가 범행 후 나흘 째 되던 날이었다. 소냐는 이처럼 인간의 부활이라는 상징적인 역할을 로쟈에게 부여하는 인물이다. 8년형이 선고된 시베리아 유형지에 따라가서 로쟈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따라서 이 소설은 형사상의 범죄를 저지른 범법자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처벌을 받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인간은 이것으로 끝나는 존재일뿐일까?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도스토옙스키를 상상한다.


 

로쟈는 동생의 약혼자 루진이 소냐에게 거짓 누명을 씌웠던 사건을 두고, 소냐에게 루진이 살아남아 계속 혐오스러운 짓을 하느냐, 아니면 계모인 카테리나가 죽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이에 그녀는 누가 살고 누가 살면 안 되고 하는 일에 누가 절 재판관으로 세운단 말이에요?”(2, 213)라고 대답한다. 나는 소냐의 답변이 도스토옙스키가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과 이 소설의 문제의식을 잘 보여준다고 느꼈다. 작가는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고 죄에 대한 벌주기가 다가 아님을, 고통 받는 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남아 있음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 타인에 대한 법정이 되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는 인식. 도스토옙스키는 나에게 타인에 대한 연민과 관대함을 가지라고 말한다.


이제 소냐가 일관되게 보여주는 행동들은 법률이 해결하지 못하는, 보다 근본적인 사랑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바로 기독교적인 가치, 타인에 대한 사랑의 힘이다. 로쟈의 유형 생활이 계속 되면서 소냐가 다른 죄수들과 이들의 가족들에게도 보여주는 보편적인 인간애는 한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간다. 범죄 행위는 인정하되, 자신 죄를 인정하지 않았던 로쟈는 자신에 대한 수치심과 자기혐오에 빠져 있었다. 그런 까닭에 어머니와 동생 두냐, 그리고 소냐가 자신에게 보여주는 흔들림 없는 애정과 믿음에 불안해하고 심지어 불행하게 느끼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소냐는 로쟈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된다. 소냐 역시 자신을 쌀쌀맞게 대했던 로쟈가 어느 날 울면서 자신의 무릎을 끌어안은 순간, 그가 자신을 한없이 사랑하고 있음을 확신한다. 자신을 연민하고 스스로를 인정할 때에 비로소 타인을 받아들일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렇게 소냐의 사랑은 불행 속에 있던 사람을 점차 새롭게 태어나게 해주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범죄와 처벌을 통한 문제해결의 한계를 보았을 것 같다. 특히 미리 계획된 사형 선고 직전에 살아남은 강렬한 개인적 체험을 통해서 절감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연민을 독자에게 말하고 싶었을 것 같다. 로쟈가 자수를 하러 경찰서로 가던 중 센나야 광장에서 했던 생각에서도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리저리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그는 한순간도 혼자일 수 없다는 걸 스스로도 느꼈다.”(2, 396) 이 대목은 인간이란 존재가 무엇인가를 내게 말해주는 듯하다. 소냐가 말했던 것처럼 인간은 인간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라고. 인간은 어머니와 탯줄이 끊어진 순간 스스로의 운명과 싸워야하는 불완전한 존재다. 그래서 개개의 인간은 본래 지독히도 외로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의 삶은 고통이라는 공기 속에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로쟈가 인류의 모든 고통을 향해 절을 했던 것처럼, 인간의 고통에 연민을 느꼈을 도스토옙스키를 상상한다. 이번 독서는 타인의 고통을 향한 작가의 일관되고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가난하고 모욕당하던 이들의 고통을 이해하고자 이들에게 눈을 맞추고 귀를 기울이며 손을 내밀었던 작가의 모습을. 소냐를 통해 보여준 사랑의 가치는 자수하기 전에 비를 흠뻑 맞고 어머니를 찾은 로쟈를 무조건 적으로 품어준 어머니의 마음과 같았다. 갈 곳 없는 이들, 돌아온 탕자가 숨 쉴 곳을 마련해주는 일이었다. 인간이란 고독한 존재가 삶 속에서 서로 의지하고 지탱할 수 있는 힘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말하는 듯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누구든, 어떤 경우라도 또 다른 삶의 문을 두드릴 자격이 있다고



[1] "극빈은, 선생, 극빈은 죄입니다. 가난 속에서는 타고난 고귀한 감정을 여전히 유지할 수 있지만, 극빈 속에서는 누구도 절대 그럴 수 없지요. 사람들은 극빈 상태에 이른 사람을 지팡이로 내쫓는 게 아니라, 인간이라는 무리에서 빗자루로 아예 쓰렁내버려요, 모욕을 더 심하게 느끼라고요. 옳은 일이에요, 왜냐면 극빈 속에서는 자기가 먼저 자기를 모욕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술집이 있는 거지요!" (제1권, 24)
- 술집에서 마르멜라도프가 로쟈에게 하는 말

[2] "선생, 누구든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는 곳이 단 한 군데라도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제1권, 27)
"선생, 더는 갈 데가 없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느냐고요?" (제1권, 30)

[3]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더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마시는 거예요, 술을 마시며 거기서 연민과 감정을 찾곤 하지요. 즐거움이 아니라 오로지 슬픔을 말입니다. ... 순전히 고통받고 싶어 마신다고요!" (제1권, 28)

[4] "이따금 그는 녹음이 우거진 별장 앞에 멈춰 서서 울타리를 쳐다보고, 발코니와 테라스로 나온 잘 차려입은 여인들과 정원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특히 꽃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다른 것보다 꽃들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제1권, 86)

[5]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 죽기 한 시간 전 이렇게 말했던가 생각했던가 했지. 만일 절벽 높은 곳, 두 발로 간신히 설 수 있을 정도로 비좁은 공간에서, 더구나 사방이 낭떠러지와 대양, 영원한 어둠, 영원한 고독, 영원한 폭풍으로 둘러싸인 그런 곳에서 살아야 한 대도, 1아르신의 공간에 서서 평생을, 천년을, 영원을 살도록 내버려진대도, 그렇게 사는 게 지금 죽는 것보다 낫다고! 살 수만 있다면, 살 수만, 살 수만 있다면 말이지!" (제1권, 246)
- 1아르신의 공간이란 관과 같은 좁은 공간임을 말한다.

[6] "알고 있니, 두냐, 너희 둘을 보고 있자니 넌 완전히 그 애 판박이더구나, 얼굴보다 성격이 말이다. 너희 둘 다 우울증 환자 같고, 둘 다 무뚝뚝하고 흥분 잘하고, 둘 다 오만하지만 둘 다 너그럽기도 하고 말이다." (제1권, 372)
- 로쟈의 대칭이 되는 동생 두냐. 로쟈와 소냐의 관계는 스비드리가일로프-두냐와 대비된다.

[7] "범죄는 사회구조의 비정상성에 대한 항의라는 거지." (제1권, 396)
- 로쟈의 친구 라주미힌이 논쟁했다는 논의의 주제.
"범죄에서 ‘환경’은 많은 걸 의미해." (제1권, 398)
- 포르피리가 로쟈와 라주미힌에게 한 말.
"모든 것은 인간이 어떤 상황과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모든 것이 환경에 달려 있고, 인간 자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2권, 154)
- 레베쟈트니코프가 로쟈에게 하는 말.

[8] "난 당신에게 절을 한 게 아니야, 난 모든 인류의 고통에 절을 한 거야." (제2권, 75)
-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소냐의 발에 입을 맞추는 로쟈.

[9] "그녀가 물에 뛰어들 수 없었다면, 벌써 그렇게 충분히 오래 그런 처지에 머물러 있으면서 어떻게 미치지도 않았을까? (...) 대체 무엇이 그녀를 지탱해주었는가?" (제2권, 77)
- 소냐에 대한 로쟈의 의문.

[10] "누가 살고 누가 살면 안 되고 하는 일에 누가 절 재판관으로 세운단 말이에요?" (제2권, 213)
- 혐오스러운 루진이 죽어야 할지, 아니면 가난 속에서 피를 토하고 죽어가는 계모 카테리나가 죽는 것이 정당한지를 묻는 로쟈의 질문에 소냐가 한 말.

[11] "그럼 날 버리지 않을 거야, 소냐?" (제2권, 218)
"날 버리지마. 소냐, 버리지 않을 거지? (...) 하지만 왜 날 안아주지? 내가 혼자 감당하지 못하고 ‘너도 괴로워해보, 난 홀가분해질 테니!’하며 다른 사람에게 짐을 지워서? 그런데도 이렇게 비열한 사람을 당신은 사랑할 수 있나?" (제2권, 222)

[12] "이 사람은 이미 이 모든 걸 스스로 알고 있답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어떻게 사람 없이 살 수 있다는 걸까!" (제2권, 232)
"라스콜니코프(로쟈)는 자신의 골방으로 들어가 방 한가운데 섰다. (...) 마당에서 뭔가 두드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어디선가 못 같은 것을 두들겨 받는 모양이다. (...) 한 번도,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이 이토록 지독하게 외롭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제2권, 238)
- 혼자 남은 로쟈, 고독한 인간의 모습.

[13] "뭐, 친구, 상관없어. 좋은 곳인걸. 누군가 자네에게 묻거든 그렇게 대답하게, 미국으로 떠났다고 말일세." (제2권, 375)
-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살할 곳을 찾아 헤매다가 자살 직전 소방서 앞에 있던 보초 앞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

[14] "그는 고백하기 위해 그녀를, 소냐를 맨 처음으로 찾았다. 그에게 사람이 필요했을 때, 그녀에게서 사람을 찾았다." (제2권, 390)

[15] "그는 센나야 광장으로 들어갔다. 사라들과 이리저리 부딪쳐 불쾌했지만, 몹시 불쾌했지만, 그런데도 사람들이 더 많아 보이는 곳으로만 걸어갔다. 혼자 남을 수만 있다면 세상 모든 걸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순간도 혼자일 수 없다는 걸 스스로도 느꼈다." (제2권, 396)

[16] "그가 사랑한다는 것, 그가 그녀를 한없이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마침내 이런 순간이 왔다는 것을 이해했고, 더는 의심하지 않았다. (...) 그들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창백하고 초췌했다. 하지만 이 병들고 창백한 얼굴에는 새로워진 미래, 새로운 삶을 향한 완전한 부활의 여명이 이미 빛나고 있었다. 사랑이 그들을 부활시켰고, 한 사람의 마음은 다른 한 사람의 마음을 위한 무한한 생명의 원천을 간직하고 있었다." (제2권, 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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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1-02 20:3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도선생님의 사형 판결과 시베리아 유형의 경험이 많이 반영된거 같아요. 그리고 도선생님 책을 보면 가난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래서 더 공감이 많이 갑니다 ^^

초란공님의 글은 논문으로 쓰셔도 될거 같아요 😅

초란공 2022-01-02 21:10   좋아요 5 | URL
페크님의 글쓰기 공부로 올해는 글 다이어트를 해야겠습니다^^;; 읽으실 때 많이 불편하실 것 같아요^^

새파랑 2022-01-02 21:20   좋아요 3 | URL
저는 전혀 안불편하고 너무 좋은데요~!! 다시 죄와벌을 꺼내 읽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

페크pek0501 2022-01-02 21: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길게 써 보는 게 소원입니다. 글쓰기에도 꽤가 나나 봐요. 블로그 초창기엔 제법 긴 글을 쓰곤 했는데 이젠 간단하게 써서 올릴 생각을 하게 되어요. 올리는 횟수만 따져서 그런가 봐요. ㅋㅋ

mini74 2022-02-10 17: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 축하드립니다 *^^*

초란공 2022-02-10 21:08   좋아요 2 | URL
mini74님 정말 부지런하십니다~ ㅋㅋ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2-02-10 18: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완전 축하드려요. 이 좋은 작품으로 당선되시니 부럽습니다~!!

초란공 2022-02-10 21:09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 감사합니다. 좋은 작품인데 너무 우려먹은 느낌도 들고.. 좋은 작품의 후광효과인가요. ㅋㅋㅋ 부끄럽습니다.ㅋ

그레이스 2022-02-10 19: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축하드려요~~

초란공 2022-02-10 21:09   좋아요 2 | URL
그레이스님 감사해요~

scott 2022-02-10 23: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도끼옹이 죄와 벌로
이관왕의 기쁨을 ^ㅅ^
 
죄와 벌 1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88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문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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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 이문영 옮김

[문학동네] | (2020)

 



한 순간도 혼자일 수 없는 인간이란 존재를 발견하다’ - [I]

 


올해는 세기의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가 남긴 5대 걸작 중 가장 먼저 세상에 나왔고, 가장 많이 언급되는 소설은 죄와 벌이다. 한 달 전에 이 소설을 다시 읽어보았지만, 무엇을 어떻게 정리할지 떠오르지 않아서 한동안 책표지만 들여다보고 시작하지 못했다.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이 새롭게 보였기 때문이다. 오늘이 마감날이라는 마음으로 독후 기록을 남겨본다. 쓰다보니 길어져서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누었다. 앞부분은 무엇보다 소설을 이해하는 배경 혹은 단서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룰듯하다. 보다 개인적인 생각들은 뒷부분에서 정리해갈 계획이다.


이 소설은 도스토옙스키가 8년의 시베리아 유형살이를 마치고, 도박으로 더 잃을 것이 남아있지 않았던 시기에 절박하게 써내려가야 했던 작품이었다. 유럽에서는 다소 늦은 감이 있었지만 급속하게 자본주의화 되어가는 19세기 중반의 러시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무더운 7월의 어느 날, 페테르부르크의 도시 빈민 지역에 세 들어 살던 로디온 로마노비치 라스콜니코프(이하 로쟈’)는 망설이며 광장으로 나오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그는 가난에 짓눌려있던 법학부 대학생이었다. 지긋지긋한 가난과 더위 때문이었을까. 로쟈는 자신의 물건을 맡긴 전당포 고리대금업자 자매를 도끼로 살해하고 금품을 훔쳐 나온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범인이 누구인지 분명함에도 추리심리소설처럼 읽힌다. 소설의 대부분은 범죄를 저지른 청년이 사건 후 여러 사람들과 엮이며 벌어지는 약 2주 간의 일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소설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범죄자에 대한 구원의 가능성을 묻고 있기도 하다.



 

그는 왜 살인을 저질렀을까


 

다큐멘터리의 나레이터처럼 소설가가 하고 싶은 말을 다소 지루하지만 명료하게 읊곤 하는 톨스토이와 달리, 도스토옙스키는 많은 정보를 인물의 내면 의식이나 대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지독한 가난을 겪고 있던 배고픈 청년이 살인을 저질렀다. 독자는 그의 살인 동기를 텍스트에서 캐내야 한다. 가난만으로도 살인의 동기는 충분히 설득력 있다고 할지 모르겠다. 정말 그럴까? 하지만 로쟈가 살인을 저지른 이유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황당하게 들리지만 그의 입에서 말하는 살인의 이유는 역사에서 등장했던 혁명가의 진실에 더 잘 부합하는 듯하다. 배가 고파 빵을 훔친 청년이 낙인찍히고 감옥에 가지만, 나폴레옹과 같은 인물은 사람들이 우상을 세우고 숭배까지 받는 현실인 것이다. 나폴레옹은 한 공동체를 파괴하고, 학살을 자행했으며, 자신의 군대를 버리거나 무모한 전투에 수 십 만 명의 부하를 잃었는데도 말이다. 이보다 더 부조리한 현실이 있을까.


 

로쟈에게 이 문제는 지극히 중요한 문제였던 것 같다. 그는 이와 관련한 논문까지 써서 발표하기도 했으니. 논문에서 그는 인간을 두 가지 범주로 나누었다. ‘열등한(평범한) 부류비범한 부류. 평범한 부류는 인구를 늘리고 공동체의 재료가 되는 사람으로, 예의바르고 순종적이다. 반면 비범한 부류는 재능과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로, 사회에 새로운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들은 자신의 능력과 양심에 따라 기존의 법과 질서를 뛰어넘는 이들이기도 하다. 그럼으로써 세계를 움직이고 인도하는 이들이라는 것이다. 고대 서양 철학의 질료와 형상과 같은 전통적인 이분법 논리의 전통에서 형성된 가치관처럼 여겨진다. 여기서 형상본질혹은 내재 원리혹은 이데아에 가까운 개념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 범주에 속하는 인물로 로쟈는 예수, 마호메트, 나폴레옹 등을 언급한다. 로쟈는 이들이 기존의 법과 질서를 파괴한 이들이 아닌가라고 묻는다.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타인을 파괴할 권리가 부여된다는 논리였다.


 

이 논리는 사회에 아무 쓸모없고 모두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인 전당포의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죽여서 그의 재산을 수많은 이들의 극빈해결에 사용하는 것이 이라는 공리주의적인 입장을 뒷받침한다. 공리주의의 기원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이는 우리가 근대라고 부르는 인류사의 한 시기를 특징짓는 사상이다. 특히 자본주의가 확장해가던 서구 문명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고 또 위력을 발휘했다. 소설이 끝날 때까지 로쟈는 자신이 한 행위를 인정하지만, 자신의 죄는 인정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와 같은 존재를 죽인 것뿐이라고 말이다. 수많은 선행을 위해 하나의 범죄쯤은 불가피하다는 궤변으로 들린다. 다만 역사 속 위인들의 행적을 보면 로쟈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대의를 위해 일어선 모든 혁명가는 대개 그랬으니까.


 

하지만 소설의 후반에서 로쟈는 소냐에게 자신이 나폴레옹이 되고 싶었고, 그래서 죽였어. (...) 난 이미 내가 나폴레옹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깨달은 셈이지.’(2, 230)라고 고백하기에 이른다. 살인의 동기가 공리주의적인 대의를 지향하긴 했지만, 자신은 이런 일을 할 만한 인물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무고한 전당포 자매를 왜 죽어야 했을까? 로쟈는 여전히 자신이 저지른 죄를 인정하지 않지만, 이 지점에서 범행에 대한 정당성을 상실하고 만다. 러시아어로 범죄선을 넘다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소설의 후반에서 로쟈는 자신이 예수나 나폴레옹과 같이 선을 넘을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었고, 그래서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살해한 것이라고 말을 바꾼다. 역사의 메시아처럼 타인을 죽이는 일을 성공시켜 하나의 예술로 만들고 싶었다고. 그렇게 하지 못한 자신을 비열한 쓰레기라고 비하하면서 스스로를 미학적 이라고 부른다. 이상하게 들리지만 로쟈는 자신이 인간을 죽인 일에 부끄러움을 느끼지는 않는다. 거사에 실패한 자신에게 실망감과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미학적 수치로 표현하며 스스로를 조롱한다. 소설가이자 번역가 김연경은 살다, 읽다, 쓰다에서 로쟈의 살해 동기를 메시아 콤플렉스’(117)로 설명한다. ‘내가 예언자이자 혁명가인가 시도해보았더니 아니더라라는 거다. 그러므로 김연경은 로쟈의 살인을 오만한 자기중심주의와 자폐적인 선민의식의 산물’(같은 책, 118)로 표현한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로쟈에게 소냐는 자수를 권한다. 이에 로쟈는 놈들(일차적으로 경찰과 사법당국일 듯)이야말로 수백만의 사람들을 괴롭히는 사기꾼에 비열한이며, 자신을 겁쟁이, 바보라고 비웃을 것이라고 하면서 경찰서에 가기를 거부한다. 로쟈는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를 더 두려워하는 듯하다. 이에 반해 소냐는 너무 괴로울 거야.”라며 로쟈를 걱정한다. 소냐는 이 문제가 로쟈 자신의 문제라는 것, 자신에게 거짓된 상태로는 살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역자의 설명에 따르면, 도스토옙스키는 이 소설의 모티프를 모스크바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에서 얻었다. 스물일곱 살의 청년이 중년 여성 두 명을 도끼로 살해한 사건이었다. 이 소설이 발표되기 직전에는 한 대학생이 고리대금업자를 살해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사건을 보고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의 이야기가 현대성을 입증한다고 확신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 제정의 폐쇄적이고 폭력적인 현실, 자본주의로 인한 급속한 빈부격차, 소외되는 인간의 모습에서 우울한 징후를 예민하고 면밀하게 읽어냈다.


 

여기까지는 소설의 배경을 이해해보고자 역자 해설과 다른 책을 참고해서 정리했다. 인간이 사는 세상을 다층적으로 그려낸 이 소설을 읽고 이해할 만한 실마리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많은 작가들이 읽고 죄와 벌에 대해 글을 썼다. 당대의 사상과 문학 이론은 여러 훌륭한 평론가의 글을 참조하면 될 듯하다. 다만 개인적으로 이 소설을 읽으면서 줄곧 눈에 들어왔던 것은 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 개개인의 삶에서 드러나는 고독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이 소설을 두 번째 읽고도 곧바로 정리하지 못했던 이유는 내가 주목했던 부분이 소설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부분이 아닐 지엽적인 것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특히 소설의 제목과 관련한 철학적인 논의의 주제와 같은 것이 아니라 지엽적인 것은 아닐까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번 독서에서는 처음 소설을 읽을 때 보이지 않던 도시라는 공간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인간에게는 숨 쉴 수 있는 공간과 공기가 필요하다


 

우선 소설 속의 인물들에 주목하기 전에 이들이 머무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낫겠다. 소설의 주요 배경은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다. 발트해에 접한 항구도시로, 20세기에는 주로 레닌그라드로 알려졌던 곳이다. ‘페테르(Peter)’는 예수의 열 두 제자 중 한 명의 이름과 같은 베드로를 뜻하면서 동시에 , 바위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흔히 페테르부르크를 반석 위의 도시라는 표현을 쓰는데, 거대한 암반 구조 위에 세워진 도시이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알고 있다. 도스토옙스키가 살았던 19세기 중반에 이 도시는 러시아의 행정수도로서 유럽으로 나아가고 이곳으로 들어오는 관문으로서 큰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묘사되는 도시는 거대한 국가의 수도로서 화려하게 등장하지 않는다. 발트해를 바라본 북부의 도시라는 예상과 달리 찌는 듯한 7, 불길한 전염병이라도 돌 듯 한 날씨가 이어진다. 타지에서 막 도착한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로쟈와 만나 대화를 나누는 중에 그는 페테르부르크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 어떻게 이런 도시가 만들어졌을까요. (...) 관청직원들과 온갖 부류의 신학생들의 도시지요! (...) 지금은 오로지 해부학 하나에만 희망을 걸고 있지요, 정말이오!”(2, 16) 이 말에서 도시와 시대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당시에 유행하던 무신론적 분위기, 이를 테면 유물론과 니힐리즘 사상, 맬서스의 수학 공식에 따르는 인구 증가의 법칙, 다윈의 진화론과 여기에 얽힌 논쟁 등. 이성에 보다 큰 가치를 두는 사상 조류가 마치 끓는 가마솥처럼 부글대며 뒤섞여 있던 대도시를 연상케 한다.


 

소설의 막바지에 이르러 로쟈와 대화하는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또 이렇게 이야기 한다. “이곳은 미친 자들의 도시더군요. (...) 페테르부르크만큼 사람의 영혼에 음울하고 강렬하고 기괴한 영향을 미치는 곳도 드물 거요. 기후가 주는 영향 하나만 봐도 그렇지요! 무엇보다 이곳은 전() 러시아의 행정 중심지니, 그 성격이 모든 것에 반영될 수밖에요.”(2, 306) 숨 막히게 하는 더위 속에 바위 위에 세워진 도시이자 암울한 사건과 사람들의 우울한 영혼을 거머쥔 도시. 소설을 읽는 내게 도스토옙스키가 바라본 페테르부르크의 모습은 돌무지로 만든 고분 같은 공간으로 느껴졌다. 로쟈가 세들어 사는 골방은 천장도 낮고 매우 좁은 공간이었는데, 오죽하면 로쟈의 어머니 풀헤리야 라스콜니코바가 아들의 방을 처음 보고 네 방은 어쩜 이렇게 형편없니, 로쟈, 꼭 관 같구나.”(358)라고 하지 않았는가.


 

살인을 저지른 로쟈는 자존심이 매우 강한 반면, 사람들이 이 살인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으면 기절하거나, 앓을 정도로 소심하고 병약하다. 로쟈가 머무는 공간은 그의 기분을 옥죄듯, 인물의 심리를 압박하는 도구로도 활용된다. 소냐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집에 돌아온 로쟈는 마당에서 뭔가 두드리는 소리, 못 같은 것을 두들겨 박는 듯한 소리를 들으며 지독한 외로움을 느낀다. 마치 과 같은 자신의 방에 누워있던 로쟈는 누군가 관에 못을 받는 듯한 소리를 듣는 것이다. 살인을 저지른 자는 시시각각 갇힌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자각한다. 소설 전체에 걸쳐 로쟈는 1아르신의 공간에 대해 강박적으로 생각한다. 1아르신은 약 71 cm에 해당하는 길이로, 성인의 신체 너비에 해당하는 길이단위로 보인다. 여기에 약간의 상상력을 좀 더 발휘해보면, 1아르신의 공간이란 의 너비에 해당하는 길이라고 연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관과 같이 좁은 공간에 갇혀 간신히 몸을 누인 청년을 말이다. 이 숨 막히는 공간에서 누가 편안하게 숨을 쉴 수 있을까. 그럴만한 공기도 충분하지 않았을 테다. 살인 전에는 가난이라는 현실에, 살인 후에는 법과 규범이 그의 영혼을 압박해 들어오는 상황. 여기에 찌는 듯한 7월의 더위는 로쟈를 심리적으로 더욱 압박한다.


 

사람이 회피할 수 없는 궁지에 몰리게 되면, 그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삶을 포기하는 것. 다른 하나는 그 안의 모든 갈등 요소들을 억누르고 권리를 포기한 다음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당장 행동 혹은 결단을 요구하는 상황 앞에서 로쟈는 강물에 뛰어들 욕구를 물리치고 ‘1아르신의 공간에서 살기를 선택한다. 소냐에게 자신의 범행 사실을 고백하는 로쟈의 말을 엿들은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그에게 사람은 누구나 공기가 필요한 법이지요, 공기, 공기가... 그 무엇보다 말이요!”(2, 264)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로쟈의 친구 라주미힌의 친척형이자 예심판사인 포르피리는 로쟈의 범행 사실을 알고 그를 압박하는 동시에 자수를 권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맹세컨대 삶이 당신을 이끌어줄 겁니다. (...) 지금 당신에겐 오로지 공기가 필요할 뿐입니다, 공기, 공기가!”(2, 295) 그러니까 두 사람은 로쟈에게 ‘1아르신의 공간을 탈출하여 삶을 택하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쉬라고 권유하는 것이다.


 

드디어 자수를 결정한 로쟈가 소냐를 다시 방문하자 그녀는 십자가를 로쟈의 목에 걸어준다. 로쟈는 곧바로 사람들로 북적이는 센나야 광장 한복판으로 나가 눈물을 흘리며 절을 하고 땅에 입을 맞춘다. 고통을 받아들이고 삶을 선택하기로 한 그는 경찰서에서 자백을 하고 시베리아의 감옥에 수감된다. 또다시 관과도 같은 좁은 공간에 갇히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감옥에 갇혀 자유로워진 지금”(2, 424) 자신의 모습을 찬찬히 되돌아보게 된다. 로쟈는 찌는 듯이 무덥고 답답한 페테르부르크의 과도 같은 공간에서 센나야 광장을 거쳐, 추운 겨울이 지배하는 시베리아의 감옥으로 이동한다. 여전히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지만, 1아르신의 공간을 탈출한 댓가로 로쟈는 삶을 얻는다. 이제 소설은 범죄를 저지른 한 청년이 새로운 삶을 얻게 되는 이야기, 점차 새로워지는 이야기로 나아간다.


(다음 글은 내년에 이어집니다^^)



[1] "7월 초 몹시 무더운 저녁 무렵, 한 청년이 S골목의 세입자에게 빌려 살고 있는 골방에서 거리로 나와 망설이듯 천천히 K다리로 향했다." (제1권, 9) - 첫 문장

[2] "‘아니면 삶을 완전히 포기하든가!‘ 갑자기 극도로 흥분하여 그가 소리쳤다. ‘운명을 있는 그대로 단번에 순순히 받아들이고, 행동하고 살고 사랑할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내 안의 모든 것을 억누르든가!‘" (제1권, 74)

[3] "수도원으로 가게 될 노파의 돈으로 도모하고 개선할 수 있는 좋은 일이나 사업이 백 개, 천개는 돼! 수백 수천의 존재가 자기 길을 찾게 되지. 수십 개의 가정이 극빈과 붕괴와 파멸과 타락과 성병진료소에서 구원될 수 있어. 이 모든 게 그 할멈 돈으로 가능하다고. 노파를 죽이고 돈을 취한 다음, 그 돈의 도움으로 온 인류와 공공을 위한 일에 봉사하면서 헌신하는 거야. (...) 하나의 작은 범죄가 수천 가지 선행으로 씻길 수는 없을까? 하나의 죽음과 백 개의 생명을 맞바꾸는 것, 이게 진짜 산술 아니겠어!" (제1권, 104) - 선술집에서 대학생이 하는 말

[4]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 죽기 한 시간 전 이렇게 말했던가 생각했던가 했지. (...) 1아르신의 공간에 서서 평생을, 천년을, 영원을 살도록 내버려진대도, 그렇게 사는 게 지금 죽는 것보다 낫다고! 살 수만 있다면, 살 수만, 살 수만 있다면 말이지! " (제1권, 246) - 술집에 들어간 로쟈의 독백. 빅토르 위고의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에 나오는 문장을 활용한 것.

[5] "신기루야 사라져라, 거짓된 공포도 사라져라, 환영이여 사라져라!... 삶이 있다! 나는 지금 살아 있지 않은가? 내 삶은 아직 늙은 노파와 함께 죽어버리지 않았다! 하늘의 왕국이 노파에게 임했으니 그걸로 되었다, 노파여, 이제 편히 쉬시라! 이제 이성과 빛의 왕국이, 그리고... 의지와 힘의 왕국이 도래하리니..." (제1권, 292)

[6] "그러니까 가령 고대로부터 시작해 리쿠르고스, 솔론, 마호메트, 나폴레옹 등으로 이어지는 인류의 입법자들과 법 제정자들은 모두 하나같이 범죄자였다, 왜냐면 새로운 법을 내놓음으로써 사회에서 신성하게 존중되고 조상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오래된 법을 파괴했기 때문이며, (...) 그러니까 뭔가 새로운 걸 말할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본성상 반드시 범죄자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제1권, 403) - 예심판사 포르피리에게 자신의 논문을 해명하는 로쟈

[7] "그 핵심은, 사람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대체로 두 가지 부류로 구분된다, 이겁니다. 열등한(평범한) 부류, 그러니까 말하자면 오직 자신과 유사한 종을 생산하는 데만 쓰이는, 재료가 되는 사람과,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새로운 말을 할 수 있는 재능이나 능력을 소유한 사람으로 말이죠." (제1권, 404)

[8] "노파는 한낱 질병 같은 거야. (...) 난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원칙을 죽였어! 원칙을 죽이고도 넘어서는 걸 넘어서지 못하고, 이쪽 편에 남았지..." (제1권, 426)

[9] "난 겁쟁이에...비열한 놈이야! (...) 실은 이랬던 거야! 그러니까 난 나폴레옹이 되고 싶었고, 그래서 죽였어..." (제2권, 223)

[10] "당신도 개집 같은 내 방에 와서 봤잖아...소냐, 낮은 천장과 비좁은 방이 마음과 생각을 억압한다는 걸 알 거야!" (제2권, 227)

[11] "권력이란 감히 몸을 숙여 그걸 주워올리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걸 말이야. 여기서 중요한 건 과감히 감행한다는 것 하나, 단 하나뿐이지! (...) 난 감행하고 싶었고, 그래서 죽였어... 난 단지 감행해보고 싶었을 뿐이야, 소냐, 그게 이유의 전부야!" (제2권, 228)

[12] "어머니를 돕기 위해서 죽인 게 아냐, 말도 안 되는 얘기지! 돈과 권력을 얻어 인류에게 선행을 베풀고 싶어서 죽인 것도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얘기야! 난 그냥 죽였어. 자신을 위해서, 나 하나만을 위해서 죽인 거야." (제2권 230)

[13] "왜냐면 나는 다른 모두와 똑같이 이에 불과하니까! (...) 그때 내가 노파에게 간 건, 단지 시험해보려 들른 것뿐이야 (...) 정말 내가 노파를 죽인 걸까? 난 나 자신을 죽인 거야, 노파가 아니라! (...) 그 노파는 악마가 죽였어, 내가 아니야..." (제2권, 231)

[14] "그래도 당신은 가망 없이 비열한 인간은 아니에요. (...) 우선 벌써 진작에 공기를 바꿔야 했어요. 어떻습니까, 고통 역시 좋은 것입니다. 고통을 받아들이세요. (...) 난 단지 당신에게 삶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걸 믿을 뿐입니다." (제2권, 295)
- 로쟈와 포르피리의 심리전. 로쟈의 경멸과 혐오에 응수하는 포르피리.

[15] "도망은 추악하고 고단한 일이지만, 당신에겐 무엇보다 삶과 일정한 지위, 그에 상응하는 공기가 필요합니다. 자, 그곳에 당신에게 맞는 공기가 있을까요? 도망쳐도 스스로 돌아올 겁니다." (제2권, 297)

[16] "바로 제가 그때 관리 미망인 노파와 그 동생 리자베타를 도끼로 살해하고 금품을 훔쳤습니다." (제2권, 406)
- 6부 마지막 문장

[17] "로쟈가 병이 난 것은 상처 입은 자존심 때문이었다. 여전히 자신의 죄를 인정할 수 없었다." (제2권 423)

[18] "이미 감옥에 갇혀 자유로워진 지금, 그는 자신의 예전 행동을 전부 새로 헤아리고 곱씹어보았고, 예전 그 운명적인 시간에 느꼈던 것처럼 그 행동들이 어리석거나 추악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제2권, 424)

[19] "내 양심은 평온하다. 물론 형사상의 범죄를 저질렀다. 물론 법조항을 위반했고 피를 흘렸다. (...) 하지만 그 사람들은 자신의 걸음을 견뎌냈고, 그래서 그들은 옳다, 하지만 난 견뎌내지 못했고, 그래서 그 걸음을 자신에게 허용할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가 인정한 유일한 자신의 죄였다. 첫걸음을 견뎌내지 못하고 자수했다는 것, 그뿐이었다. (제2권, 425)

[20] "그들은 기다리며 참기로 했다. 그들에겐 아직 칠 년이 남았다. 그때까지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얼마나 많을 것이며, 무한한 행복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하지만 그는 부활했고, 그 사실을 알았고, 새로워진 자신의 온 존재로 그걸 느꼈으며, 그녀는, 그녀야말로 오로지 그의 삶 하나만으로 살지 않았던가!" (제2권, 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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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2-31 18: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죄와 벌> 너무 멋진 작품이죠~!! 전 이책을 읽고 살인도 안해본 도선생님이 저렇게 묘사하는게 신기하더라구요. 도선생님 작품은 작품속에 너무 많은 의미들이 내포되어 있어서 리뷰를 쓰기가 어렵더라구요 😅 초란공님은 공간에 초점을 맞추셔서 너무 잘 쓰셨네요. 다음 글도 기대됩니다~!! 저도 내년에는 <죄와 벌 > 재독을 꼭 해야겠어요~!!

초란공 2021-12-31 19:41   좋아요 3 | URL
저도 한달 간 지켜보고 있다가 부랴부랴 써보게 되었습니다. 쓰기가 어렵네요^^;; 이 책도 한 권으로 묶여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새파랑님 올해 좋은 책 많이 소개해주셔서 김사했습니다~! 내년에 새파랑님의 <죄와 벌> 도 기대할게요. 전 <어둠의 심연> 꺼내 놓고 결국 해를 넘기게 되었네요~! ㅋㅋ

프레이야 2021-12-31 23: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 님 좋은 리뷰 고맙습니다.
내년에도 기대할게요.
대문글이 인상적이에요. 천천히 꼼꼼히 꾸준히, 그런 게 느껴집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초란공 2021-12-31 23:09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프레이야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조금 있다가... 내년에 또 뵙지요^^

그레이스 2022-01-01 07: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초란공 2022-01-01 08:55   좋아요 2 | URL
그레이스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요~ 지난 한 해 밝은 눈으로 저를 책의 길로 인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ㅋㅋ

그레이스 2022-01-01 09:44   좋아요 2 | URL
초란공님 말씀 감사합니다.
코로나 시절^^ 알라딘 서재에서 만난 분들 덕분에 견딜만 했습니다~~♡

stella.K 2022-01-01 18: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리뷰가 아니라 거의 논문 수준인데요?^^
저도 작년에 동서문화사판으로 사 놓고 한 장도 못 읽고 해를 넘겼네요.
한 20년전쯤에 처음 읽긴 했죠. 채수동 번역의 첫 문장을 옮겨 볼게요.
˝찌는 듯한 무더운 7월 초순 어느 해질 무렵, S 골목 전셋집에 방한 칸을
빌려 하숙하고 있는 한 청년이 자기 방에서 거리로 나와 좀 망설이는 듯한
느린 걸음으로 K다리 쪽을 향해 걸었다.˝
‘망설이듯 천천히‘ 요 문장이 좀 다르네요.
문학동네판이 좀 깔끔한 것 같기도 하고. 채수동님 건 오래 전에 번역이라...
잘 보고 갑니다.^^

초란공 2022-01-01 19:26   좋아요 3 | URL
사실은 요새 제가 소설을 과학책 읽듯이 있는다는 걸 알았어요. 제 컴플렉스이기도 합니다^^;; 시도 그렇지만 소설을 어떻게읽으면 좋을까가 항상 제 고민이자 관심사항입니다. 제 생각보다는 작품에 대한 설명 등에 의지하게 되기도 하구요. ㅜㅜ 동서문화사판 첫 문장 중에 ‘느린 걸음으로‘라는 표현이 마음에 듭니다. ‘천천히‘도 좋지만 ‘느린 걸음‘이 눈에 보이는 듯 해서요~ ^^

stella.K 2022-01-01 19:39   좋아요 3 | URL
어머 왜요? 좋은데. 저는 결코 이렇게 못 써요.
리뷰 쓰는 게 뭐 컴플렉스 느끼고 말게 있나요?
생각나는대로 쓰는 거죠. 오히려 도움이 많이될 것 같습니다.

첫 문장은 느끼기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네요.^^

페크pek0501 2022-01-02 21: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자랑스럽게도? 제가 죄와 벌을 읽었다는 거죠. 서재 님들과 겹치는 책이 없어서
이렇게 겹치는 책이 나오면 막~ 반갑습니다. 이 세상에 책이 너무 많아요. ㅋㅋ
재독해도 좋을, 감명 깊게 읽은 작품이에요. 작가가 천재라고 생각했죠. ^^

초란공 2022-01-02 21:34   좋아요 3 | URL
이 책이 멋진 서재에서 우아하게 쓴 소설이 아니라 빚과 생활고로 생존을 위해 서둘러 쓴 글이라고는 믿기 어려웠습니다. 정말 천재인 분!!

mini74 2022-01-02 22: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분명히 읽은 것 같은데 초란공님 리뷰 보니 안 읽은것 같습니다 ㅎㅎ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초란공 2022-01-02 22:10   좋아요 2 | URL
신정과 구정 사이... 아직 복은 많이 남아 있으리라 믿습니다^^ mini74님도 복 많이 받으세요!
 

뿌리 Roots

알렉스 헤일리(Alex Haley) 지음 |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우리 모두는 현재의 역사를 미래에 전하는 그리오다

 



인종 차별에 대항하여 흑인 인권 운동에 헌신했던 맬컴X가 자신의 자서전을 공동 집필하자고 제안했던 이가 있었다. 이 남자는 1950년대 말까지 20년 동안 군 생활을 하며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글을 기고하곤 했던 군인 겸 아마추어 작가 알렉스 헤일리였다. 37세에 전역 한 다음 흑인 작가가 드물던 시절에 글 쓰는 일을 전업으로 새 출발을 했다. 헤일리가 맬컴X 자서전 집필에 참여하면서 더욱 알려지게 되었지만, 그에게 전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안겨준 계기는 이 작업을 마무리한 후 10년이 지나서 찾아왔다. 바로 오늘 소개할 장편소설 뿌리 Roots. 이 작품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저자의 외가 7대에 걸친 가문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인물들의 행동과 대화는 상상력에 의존했지만, 인물들의 기본적인 행적은 모두 면밀한 자료 조사에 바탕을 두었다. 이 책을 꿰뚫는 현실은 인종차별의 역사다. 보다 구체적으로 흑인 노예제라는 속박 속에서 살아남아 자유를 찾고자 했던 흑인 가족의 묵직한 역사를 이야기한다.


 

인류의 부조리한 역사 가운데 흑인 노예제에 관한 역사는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따라서 서아프리카 감비아 강가에 살던 무슬림 부족의 한 흑인에서 시작하는 이 이야기에서, 인종차별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보다는 작품의 배경에 주목해보려고 한다. 이 소설은 자신의 선조가 어떤 부족이었는지 밝혀내고 싶었던 전기 작가의 결심에서 비롯되었다. 이를 위한 단서는 저자가 어린 시절, 여러 가족들로부터 들었던 아프리카 단어 몇 가지가 전부였다. 그는 이 단어들의 음성학적 특성을 알아내기 위해 여러 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또 미국·유럽·아프리카의 3개 대륙에 산재해 있던 57군데의 문서 보관소를 12년 간 찾아다니며 자료를 읽었다. 한 가문의 도도한 역사가 담긴 뿌리는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알렉스 헤일리는 자료를 수집하며 세대를 거슬러 추적하는 동안 미국의 역사를 온전히 관통한다. 이 작품의 첫 주인공 쿤타 킨테’(저자의 7대 조상)1750년 봄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쿤타는 부족의 문화를 배우고 성인이 되는 과정을 거친 후 17세가 된 어느 날, 숲 속에서 투봅(백인 노예 사냥꾼)에게 공격을 받아 납치되었다. 그가 139명의 다른 흑인들과 노예선에 감금된 체 아프리카를 떠난 해는 미국이 독립선언을 하기도전인 1767년 이었다. 그는 좁고 어두운 노예선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80여 일 간 자신이 머문 자리에 그대로 대소변을 누면서 대서양을 건너야 했다. 불결함과 악취, 백인들의 폭행을 견디다 못한 흑인 42명은 바다를 건너는 도중에 사망하여 바다에 버려졌다. 자신의 대소변으로 범벅이 된 98명의 흑인들은 마침내 살아남아 미국의 메릴랜드 주 애나폴리스에 도착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쿤타 킨테는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았다. 저자가 조각 모음 하듯 여러 문서 보관소에서 조상의 흔적을 찾아내었을 때, 얼마나 큰 흥분을 느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보다 더한 충격은 저자가 서아프리카의 벽지에서 그리오(Griot)’를 만났을 때 찾아왔다. 그리오는 서아프리카 지역의 구비 전승자, 역사 구송자를 가리킨다. 이들은 오로지 입과 귀를 통해서 왕국과 부족의 과거를 기억하고 사람들에게 전달하던 이들이었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만난 이 노인의 입에서 저자의 조상 쿤타 킨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 책을 읽는 나에게도 이 장면은 엄청난 전율로 다가왔다.


 

그리오가 헤일리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쿤타 킨테의 집안이 아프리카 세네갈 지역의 감비아에서 오래되고 잘 알려진 집안이었으며, 200년 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리오의 입을 통해 7대 조상 중 한 개인의 역사가 아프리카 벽지에서 기억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수많은 책 속에 인류의 역사가 기록되고 저장되고 있지만, 정작 내가 속한 집안의 역사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거의 없다는 사실. 기껏해야 조부모에 대해 들었던 몇 가지 사실이 고작이다. 헤일리가 이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집안에서 내려온 이야기들이었고, 무엇보다 7대 조 할아버지 쿤타 킨테가 자녀에게 들려주었던 아프리카 단어 몇 개 때문이었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몇 가지 단서가 200년의 세월 속에서 살아남았다. 부모의 입에서 자녀에게 전해지고 다시 그 자녀가 부모가 되어 후손에게 기억되었고, 역사가 이어졌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곧 공동체의 기억이자 역사라는 사실을 이 책보다 더 실감나게 보여주는 소설이 있을까 싶다.


 

뿌리를 읽는 동안 내내 숨이 막힐 듯한 노예제의 속박 아래서 위태롭게 살아왔지만 존엄을 잃지 않았던 인간의 역사를 접했다. 이 책에는 흑인 가족들이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 휘청거리면서도 가족을 이루며, 고난 속에서도 자유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견뎌온 이들의 서사가 보존되어 있다. 처음 읽을 때 한동안 조금 지루한 느낌을 줄 수도 있겠지만, 마지막까지 읽는 이들에게는 그만큼의 감동과 전율로 충분히 보상을 해주는 작품이다.


 

나 자신의 조상들에 관한 책이라면, 자동적으로 모든 아프리카 후손들의 상징적인 일대기가 될 터였으니 - 그들은 모두가 예외 없이, 아프리카의 어느 흑인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을 어떤 사람, 납치를 당해서 쇠사슬에 묶인 채 어느 노예선에 실려 갔을 바다를 건너 항해했으며, 몇몇 농장을 전전하고, 그 때부터 자유를 위한 투쟁을 계속했을 쿤타와 같은 어떤 사람의 씨앗들이기 때문이었다.”(813)


 

본문에 나오는 작가의 말이다. 한 개인의 가족에 관한 역사는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끊임없이 되풀이되어 이야기되고 이것이 각자의 기억 속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것이 작은 공동체가 공감할 수 있는 집단의 기억이 되었다. 저자가 복원한 역사는 소수였지만 권력을 차지한 승자의 시각에서 쓰였던 역사가 아니었다. 그가 바로잡은 역사는 패자의 위치에 있었지만 자유를 얻고자 분투했던 한 가문의 역사였다. 이들의 이야기는 흑인들의 보편적인 역사가 되었다. 헤일리는 청년 시절 글을 써보기로 하면서 자신의 첫 글이 팔리기 까지 8년이 걸렸다고 언급했다. 잡지사와 출판사로부터 수백 통의 거절 통지서를 받으면서도 끈질기게 버티도록 해준 힘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저자 가족들이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가족의 역사를 들려주던 이야기의 힘이라고 믿는다. 잠재되어 있던 무의식과 같은 충동, 선조의 역사가 기억되고 이야기되어야만 한다는 사명감이 저자에게 버팀목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지점에서 이야기를 전하는 역사 전달자, 그리오의 역할에 다시 주목해본다. 헤일리의 선조는 자녀가 태어날 때마다 쿤타 킨테가 어디서 왔고,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특정 사물이 만딩카어로 무엇이라고 하는지 등을 되풀이하여 이야기해주었다. 그런 이유로 저자는 친척들 모두 각자가 가문의 역사를 기억하고 끊임없이 이야기해온 사람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각자가 나름대로의 그리오였던 것이다. 공동체의 기억은 이 그리오들을 통해서 미래로 전해질 수 있었다. 나는 조부모님과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가족의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내겐 항상 아쉬운 부분이었는데, 뿌리를 읽으면서 그 아쉬움을 더욱 느꼈다. 부모님과 조부모님들로부터 당신에 대한 이야기와 앞 세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는 특히 세대 간의 대화가 단절되고, 개개인이 고립되어가는 요즈음 더욱 절실한 가족의 양식이 아닐까한다, 나의 뿌리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가족과 타인에 대한 공감과 공동체의 유대감을 다시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인가 아프리카 속담 혹은 격언이라며 노인이 사망하면 한 채의 도서관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라고 하는 표현을 본 기억이 있다. 그런데 최근에 집에서 뿌리 의 원서를 발견(?)하여 여기에 실린 감사의 글에서 이런 표현을 만났다. “When a griot dies, it is as if a library has burned to the ground.부족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한 명의 그리오가 세상을 떠나면 마치 도서관과도 같은 거대한 앎의 원천, 지혜의 보고가 사라지게 된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 아프리카 속담의 노인은 무엇보다도 집단의 역사와 지혜를 지닌 그리오를 가리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리아드오디세이아의 저자로 알려진 호메로스는 고대 그리스의 그리오였던 셈이다. 또한 호메로스가 맹인으로 알려져 있는 것처럼, 그는 입과 귀로 당대 세계의 진실을 기억하고 전달했던 그리오, 당대 역사의 목격자로 볼 수도 있겠다.


 

여기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항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헤일리의 뿌리에서 또 다른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우선 호메로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오디세우스 고향과 헤일리의 고향이 이타카라는 점이었다. 오디세우스의 고향은 그리스 서부에 위치한 이타카라는 섬이다. 반면 헤일리의 고향은 미국 뉴욕 주의 이타카라는 곳(아버지가 다녔던 코넬 대학과 어머니가 다녔던 이타카 음악대학이 있는 곳)이었다. 또 호메로스의 작품이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을 위해 집을 떠난 후 20년 만에 집으로 돌아와 가족을 되찾은 이야기로도 볼 수 있다면, 헤일리의 뿌리가 세상에 나오는 과정 역시 오디세우스의 모험에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헤일리는 2차 대전 당시 해안경비대로 입대하여 화물 및 탄약 운반선을 탔다. 그는 근무 외 시간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는 책에서 군복무 중에 뿌리에 대한 착상을 처음 했다고 기록한다. 이 책은 저자가 55세이던 1976년에 출간되었으므로, 착상부터 고려하면 30년이 넘은 셈이다. 그는 자료 수집을 위해 오디세우스 못지않게 집을 떠나 미국, 유럽, 아프리카를 오갔다. 본격적인 자료 조사만 해도 12년이 걸린 대장정이었다. 작업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알 수 없는 모험을 한 뒤에야 저자는 본인의 가족에 관한 역사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은 여러 공통점이 있다.


 

나는 뿌리가 현대인의 모습과 진실을 비추어준 20세기 그리오 알렉스 헤일리의 오디세이아라고 부르겠다. 저자는 그와 동시대인이 살았던 시대의 목격자였으며,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진실을 후대에 전해준 증인이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의 이야기를 미래에도 전할 수 있게 남겨놓았다. 이 소설은 우리 시대의 구성원들 사이의 유대감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인간의 역사를 관통하며 세대를 이어주고 서로를 묶어줄 수 있게 해준다. 저자의 작품은 우리의 삶이 끊임없이 이야기되고 기억되기 위해, 우리도 모두 그리오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내게 말해주는 듯하다. 2021년이 일주일이 채 남지 않았다. 올해는 알렉스 헤일리의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올해 안에 뿌리 Roots를 읽고 무언가를 남겨보고 싶다는 생각에 독후 기록을 급하게 몇 자 적게 되었다.





[덧붙임]


이 책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열린책들]에서 나온 버전과 [문학사상사]에서 나온 버전을 선택할 수 있다특이하게도 두 출판사에서 모두 동일한 역자(안정효)가 작업한 도서를 판매중이다열린책들의 경우만듬새는 마음에 들지만 행간이 좁아서 독자에 따라서는 읽기에 부담을 느낄 수도 있겠다그런 분들에게는 문학사상사 버전이 눈의 피로도를 좀 더 줄이면서 읽을 수 있는 대안이라 생각한다.


 

번역 결과물의 경우한 가지 아쉬운 부분은 영어 원문의 콤마까지 그대로 가져온 것 같은 정확한’ 번역이다(이 책이 철학서적은 아니지 않은가). 역자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을 처음 번역했을 때가 1977년이다이 멋진 책을 요즘 독자들이 접근하기 좋게 문장을 조금 다듬었으면 좋겠다헤일리의 글에는 가끔 10줄에 가까운 긴 문장도 보이는데흐름을 유지하는 선에서 적절히 나눌 수는 없었을까하는 생각도 해본다다만 안정효 번역가의 작업에서 감탄한 부분은 과거에 교육받지 못했던 흑인들 특유의 구어 표현들을 우리말로 멋지게 옮겨놓은 작업이다.


 

책에 관한 개인적인 바람을 좀 더 적어본다면문장을 새로 다듬고난 뒤 행간을 넓혀 편집하고(매우 중요함), 한 권으로 된 양장본으로 만나보고 싶다모비딕과 같은 작품도 마찬가지지만뿌리》 역시 이 책이 담고 있는 한 가문의 묵직한 역사와 주제의식의 무게감을 한 권의 양장본으로 만나보았으면 하는 것이다이 책은 시간이 지나도 되풀이해서 읽고 그 때마다 감동을 느낄만한 책이니까 말이다뿌리를 읽을 때마다 독자는 타인들의 고통에 대해 돌아보는 기회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올해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을 맞아 다양하고 화려한 기념판이 출간되었다나는 탄생 100주년을 맞은 알렉스 헤일리의 기념비적인 작업뿌리》 역시 주목을 받고 새로운 판본으로 작가 탄생 100주년 기념판이 나옴직하다고 생각한다.  



 




























 






[1] "아버지, 노예가 뭐예요?"
"노예와 노에가 아닌 사람들을 구별하기는 항상 쉬운 일은 아니란다." (68) - 쿤타 킨테와 아버지 오모로와의 가상의 대화

[2] "수백 장마철 전에 말리 땅에서 킨테 남자들은 대장장이였고, 여자들은 항아리를 굽고 옷감을 짰습니다." (105)
- 성인교육을 받은 쿤타가 과정을 마치면서 받은 질문에 대한 대답

[3] "소년은 어른이 되어, 아들을 낳아 그 얘기를 전할 날이 오겠으며, 그러면 먼 옛날의 사건들은 영원히 살게 되리라." (124)

[4] "투봅의 땅에서 ‘노래를 부르며‘ 시간을 보내다니, 그들은 도대체 어떤 흑인일까, 그는 생각했다. 자기들이 과거에 누구였고, 무엇이었는지 관심조차 없어 하는 듯한 이런 이상한 흑인들이 투봅의 땅에 얼마나 많을까, 그는 궁금했다." (246)

"이곳 흑인들은 투봅 주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그들의 동족을 위해서 햇볕을 받으며 흘리는 땀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했다." (256)


[5] "이곳 흑인들은 지난번 투봅 농장의 사람들보다 잘 살기는 해도, 다른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로 역시 버림을 받았으며, 그들 자신에 대한 존경심과 자부심은 모두 철저하게 뿌리가 뽑혔기 때문에, 그들의 이런 생활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인식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의 관심은 매를 안 맞고, 먹을거리가 충분하고, 잘 곳이 마련되었느냐 하는 문제가 고작이었다." (290)

[6] "네가 주먹을 움켜 쥐면, 아무도 네 손에 무엇을 쥐여줄 수도 없거니와, 자신도 손으로 아무것도 집을 수가 없는 법이란다." (295)
- 아버지 오모로의 가르침을 회상하는 쿤타 킨테

[7] "나는 왜 백인들이 그토록 비열하고 잔인한 행동을 자행했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793)
- 소설 속에서 저자가 직접 독자에게 말하는 대목.

[8] "타자기에 백지 한 장을 돌려 끼우고는 거기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읽어 줄 무언가를 써낸다는 생각은 나에게서 (지금도 역시 그렇지만) 도전과, 호기심과 환희를 자극했다. 다른 무엇이 나로 하여금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밤 글을 쓰도록 충동을 일으켰는지, 그리고 내 첫 글이 팔릴 때까지 8년 동안이나 내 노력의 결실이 담긴 원고를 수없이 잡지사에 보내고는 그야말로 수백 통의 거절 통지서를 받으면서도 끈질기게 버티도록 해준 힘이 무엇인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797)


[9] "만일 어느 검은 아메리카 인이 나처럼 축복을 받아서, 겨우 몇 가지나마 조상이 물려준 수수께끼의 실마리를 알았더라면 - 그리고 그 남자나 여자가 아버지쪽이거나 어머니쪽의 아프리카 조상(들)이 누구였는지, 도대체 어디쯤에서 그 조상들이 살았고 잡혀갔는지, 그리고 그들이 결국 언제 끌려갔는지를 알아내었더라면 - 그랬다면 어쩌면 조상들이 살았던 바로 그 마을로 찾아가게 만든 힘은 바로 그 몇 가닥 안되는 단서였다." (812)

[10] "이 무렵에 이르러 나는 할머니와, 리즈 아줌마와, 플러스 아줌마, 그리고 조지아 대고모 역시 그들 나름대로의 그리오였음을 깨달았다." (817)

[11] "그리하여 아버지는 저 위에서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에게로 갔다. 나는 그들이 정말로 나를 지켜보고 이끌어 준다고 믿으며, 우리 집안의 역사가 담긴 이 이야기가, 역사란 승자들 쪽으로 심하게 치우친 시각에서 쓰였다는 과거의 유산을 보완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내 소망에 그들도 공감하리라고 생각한다." (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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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2-28 00: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뿌리를 드라마로 봤던 기억이 납니다 쿤타킨테란 낯선 이름과 처참한 모습들, 그의 여정을 오디세이와 연결한 부분이 참 좋네요 초란공님. 말콤엑스 자서전을 읽었었는데 뿌리 작가랑 공공집필이군요. 몰랐어요 ㅠㅠ 흑인들은 화물로 분류되어 유실되면 보험금을 받을 수 있어서 병든 자는 일부러 바다에 버린 사건을 그린 터너의 노예선도 떠오르는 글이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초란공님 *^^*

초란공 2021-12-28 00:31   좋아요 2 | URL
드라마를 보셨다는 분이 꽤 많네요^^ 저도 드라마를 언젠간 보고 싶습니다. 허먼 멜빌이 터너의 노예선 그림을 보고 <모비 딕>에 이용하지 않았을까 생각만 해본 적이 있어요. 그 그림이 영국에서 전시되었을 시기에, 멜빌이 20세 정도로 상선의 선원이었고, 영국 리버풀을 다녀갔다고 하더라고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페크pek0501 2022-01-02 21: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뿌리, 저도 티브이로 봤어요. 정말 무게감이 느껴지는 작품이에요. ^^

초란공 2022-01-02 21:31   좋아요 2 | URL
저는 TV가 없어서 인터넷이나 DVD를 찾아서 보고 싶네요! 많은 분들이 보셨다고 해서 정말 궁금합니다^^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체 게바라 선집 2
체 게바라 지음, 홍민표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 세상을 바꾸기 전에 먼저 자기를 바꾼 한 남자의 특별한 여행기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 지음 | 홍민표 옮김 | [생애]

 



누군가의 여행이 때론 혁명을 부른다

 


인간의 여행은 언제부터 시작했을까. 전 세계에 퍼진 바이러스로 여행이 더욱 낯설게 다가온다. 교통수단이 이렇게 발달한 시대임에도 말이다. 인류의 조상이 여행을 시작한 것은 두 발로 설 수 있었을 때부터일까. 여행이라는 행위의 본질은 미지의 세계로 나아감이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 혹은 뜻밖의 위험이 기다리는 일. 반면 새로운 세계에 대한 앎과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겠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에게 여행이란 무엇이었을까? 그가 의대생이던 23세살에 떠난 두 번째 여행의 기록인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읽으면서, 여행에 타고난 사람이란 이런 사람을 두고 말하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북아메리카에 가보면 어떨까?”

북아메리카에? 어떻게?”

포데로사를 타고!”


 

혁명가의 무모한여행은 이렇게 비롯되었다. 바로 돈키호테 같은 게바라와 알베르토 두 명의 젊은이가 나눈 대화에서. ‘힘센 녀석이라는 의미와는 반대로, 폐차 직전의 부실한 오토바이 하나에 초록색 다이어리와 필기구, 오토바이 수리 도구와 부품, 권총과 칼, 먹을 것을 조금 넣은 뒤 무작정 떠난 여행(195110)이었다. 불과 1년 전에 이 의대생은 자신의 조국 아르헨티나 북부 지역 4500 km를 여행하고 돌아온 적이 있으니 어느 정도의 자신감에 차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번엔 동행인과 오토바이가 있지 않은가. 하지만 여행에는 불확실성이 함께하기 마련이다. 새로운 만남뿐만 아니라 위태로운 순간도 기다리는 법. 두 의사 몽상가들은 아르헨티나를 떠나 태평양을 마주하는 칠레, 페루, 콜롬비아,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까지 처음에는 오토바이로, 나중에는 도보로 히치하이킹을 하며 나아갔다.


어느 날은 부실한 오토바이 때문에 하루에 9번이나 사고를 당하면서도 두 사람은 오토바이를 고치고 노숙을 하며, 폭풍우를 만나 고생을 하기도 한다. 마치 돈키호테가 늙은 말을 타고 가다가 이리 저리 굴러 떨어지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앞에 끊임없이 문제가 발생하고, 사고를 당해 땅바닥으로 구르면서도 여전히 시들지 않은 즐거운 기분으로 여행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게바라는 나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을 보면서 나의 운명이 여행임을 알았다.”(42)라고 다이어리에 적었다. 심지어 이스터 섬으로 가고 싶어 몰래 밀항한 배 안에서 우리의 진정한 소명이 영원히 세계 곳곳을 방랑하는 것임을 깨달았다.”(95)라고, 여행이 자신의 소명임을 발견한다. ‘진정한 소명이라니! 내 방에서 혼자 노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이번 생애에 이런 생각이 들 것 같지는 않다. 나에겐 혁명가의 기질이 없다는 것이 다행(?)이다.


여행을 마치고 자신의 다이어리에 쓴 글을 다듬고 정리하면서 게바라는 분명히 다른 사람이 되어갔음을 스스로 인정한다. “아르헨티나 땅에 발을 디뎠던 그 순간, 이 글을 쓴 사람은 사라지고 없는 셈이다. 이 글을 다시 구성하며 다듬는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다. ‘우리의 위대한 아메리카 대륙을 방랑하는 동안 나는 생각보다 더 많이 변했다.”(20) 여행이 이렇게 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니. 몸을 움직이기 싫어하는 나도 이런 여행을 해볼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해본다. 낯선 곳에서 새롭고 맛있는 음식을 맛보는 일을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여행에서 돌아와도 항상 허기를 느꼈다. 아마도 지금까지 내가 다녀온 여행은 몸(뱃살)만 변했지, 나의 정신이 변화할만한 여행을 한 적이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도 않고, 트럭을 타거나 혹은 걸어서 5000 m 넘는 안데스 산맥의 산들을 넘는 이들 일행을 상상해본다. 요즘처럼 이동전화가 있거나 응급환자 이송 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았던 시기였다. 야생의 환경에 그대로 노출된 두 젊은이는 호기심과 두려움을 모두 끌어안고 세상에 나섰다. 그러고 보니 내 아버지의 젊은 시절이 떠오른다. 아마도 60년대 말 혹은 70년대 초일 것이다. 오토바이 하나에 몸을 싣고 전국을 다니셨다는 아버지였다. 어느 날 아버지는 어머니와 부부싸움을 한 뒤 오토바이를 타고 남쪽 끝에 있는 누나 집으로 떠나셨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 아마도 당시에는 포장이 안 된 국도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여행자에게 도움이 될 지도 역시 없었을 테다. 말하자면 내 아버지는 70년대 초에 전국을 누비던 폭주족이었던 셈이다. 아버지는 길을 떠나면서 두렵지 않으셨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게바라는 다이어리에 두려움이야말로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몇 안 되는 경험 중 하나’(241)라고 썼다.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미지의 세계로 나아감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용기를 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주는 호기심과 상상력이 작동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 세대는 이제 이런 여행을 더 이상 하기 힘들 듯하다. 길을 잃고, 시행착오를 할 여지를 첨단 도구들이 대체해버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부모 세대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상실해버린 세대인지도 모른다. 게바라 역시 두려움을 마주하고 세상으로 나아가 만나는 삶의 모든 양태를 그대로 관찰하고 흡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여행하면서 정치인 및 여러 지식인들, 경찰 및 병원의 직원들, 나환자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나환자들을 만나 대화하고 함께 축구를 하기도 했다. 심지어 구걸하는 이들을 비롯한 극빈자들과도 만나 대화를 하며 가난의 모습을 실감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과 직접 부대끼며 교과서 밖의 세계를 배워나간 셈이다.



라틴아메리카의 현실과 범아메리카주의, 그리고 혁명의 씨앗


대항해시대가 시작되면서 유럽의 백인들은 괴물들이 살고 있다는 세상 밖을 상상했다. 특히 중세 시대에 지중해의 서쪽 끝에 있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바라본 대서양은 그저 막막한 바다였다. 수평선 너머 세계의 밖에는 무엇이 있을까? 일부 몽상가들은 분명 궁금했을 것이다.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시작한 탐험으로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 이후 발생한 인류사의 비극들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예가 서인도 제도와 아메리카 대륙으로 유입된 노예와 노예제도의 문제들, 현재의 페루 지역에 있는 잉카 제국의 멸망, 멕시코 고원의 아즈텍 제국의 멸망이다. 게바라는 다이어리에 스페인 정복자들이 잉카제국의 태양신 잉티 사원을 완전히 파괴하고 그 토대와 벽돌을 이용하여 성당(산토 도밍고 성당)을 지었던 일을 기록해두었다. 물론 서구 문명의 야만과 폭력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게바라가 고국 아르헨티나에서 북쪽의 베네수엘라까지 여행하면서 깨달은 것은 서구 문명의 식민주의적 침탈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이었다.


게바라의 기록에 따르면 1950년대 당시, 칠레는 이미 전 세계 구리 생산의 20%를 담당했고, 그 밖에 철, 석탄, 주석, , , 망간, 질산염 등 풍부한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강력한 공업국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뿐만 아니라 전 인구를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는 가축과 곡물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절망적이었다. 칠레 광산의 채굴권은 독일인들이 먼저 획득했는데, 아마도 나치 시대에 남미 지역에 많이 진출했을 것이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치 독일이 패전국이 되면서, 영국이 재빠르게 남미의 광산과 공장의 소유권을 가져가버렸다. 칠레와 접하고 있던 페루는 어땠을까? 게바라가 여행했던 50년대에 페루 광산의 소유권은 이미 미국에 있었다. 서구 백인들의 제국주의 국가는 20세기에도 여전히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의 자원을 깡그리 흡수하고 있었다. 오늘날 서양사회에서 남과 북으로 언급되곤 하는 빈부의 격차는 결국 서양의 문명이 야기한 문제였다.


게바라와 알베르토 두 사람은 오토바이로 여행을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히치하이킹으로 차를 얻어 타거나 도보로 다녔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서구 문명이 판을 짜놓은 세상의 모습을 더욱 면밀히 들여다볼 수 있지 않았을까. 광산의 주인은 영국과 미국인들인데, 광산 노동자들은 몰락한 잉카 제국의 후손들이었던 현실. 하지만 게바라는 광산의 소유주와 노동자가 서로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는 부조리한 구조를 간파했다. 그는 냉혹한 효율과 무기력한 분노가, 증오심에도 불구하고 함께 손을 잡고 그 거대한 광산을 움직이고 있었다. 한쪽 편은 생존 때문에, 다른 한쪽 편은 이윤을 위해...”(101)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누더기 담요 한 장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과 함께 추위에 떨면서 밤을 보내기도 했다. 거리의 사람들로부터 가학적인 가난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세상이 빚어낸 극빈의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오늘날 민족과 국가의 우월함이라는 허구를 걷어내고 바라본다면, 개개인에게 모멸감을 안겨주고 인간의 존엄성을 앗아가는 극빈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을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게바라가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국제 정세의 현실을 더욱 실감했을 것이다. 특히 치안과 정치적 불안이 극심했던 콜롬비아의 경우도 기록되어 있다. 이 모습은 콜롬비아에 대한 미국의 개입과 입김 때문이었다. 칠레 공산당이 불법화된 시기(1948-1958) 역시, 미국의 매카시즘이 북아메리카를 몰아치던 시기와 오버랩된다. 여기에 한국전쟁(1950-1953)으로 불거진 냉전시대를 떠올린다면, 미국이 전 지구를 하나의 체스판처럼 만들어 세계를 주무르던 제국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다. 오늘날 베네수엘라에 두 명의 대통령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도 마찬가지다. 현재 베네수엘라는 국민의 지지를 받고 군대를 장악하고 있는 대통령과,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는 두 번째 대통령이 대립중이다. 게바라를 사살했던 볼리비아 군이 미국의 지휘를 받았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현재 베네수엘라의 정세가 불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당연한 결과다. 미국이 베네수엘라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 이 아름다운 나라의 분열과 희생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게바라가 70여 년 전에 바라보았던 현실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알베르토와 게바라 일행이 여러 나라의 지식인들을 만나면서 눈을 뜨게 된 것 중 하나는 바로 연대의 가능성이 아닐까 싶다. 페루에 있는 나환자 병원에서 머물 때 만난 정신분석학 교수 발렌사 박사는 청년 게바라에게 범아메리카주의를 이야기했다. “북아메리카가 고층빌딩이나 자동차들, 엄청난 부를 가졌다고 해서 성숙했다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성장기를 지났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닐세. 그 차이는 표면적일 뿐, 근본적인 것이 아닐세. 이 점에서는 북아메리카든, 남아메리카든 모든 아메리카는 자매지.”(195) 나환자 병원에서 머무는 동안 두 사람은 환자들과 함께 이들을 마치 건강한 사람들을 대하듯 악수를 하고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축구도 했다. 이들이 떠날 때 환자들은 두 사람을 위해 진심어린 환송파티를 열어준다. 게바라는 발렌사 박사의 범아메리카주의에 감화를 받았던 것일까. 병원의 의사가 축배를 제안에 화답한 게바라는 범아메리카주의를 역설한다. “우리는 멕시코에서 저 멀리 마젤란해협에 이르기까지 두드러진 민족적 유사성을 가진 하나의 메스티조 민족입니다. 나 자신에게서 편협한 지역주의의 굴레를 벗어버려는 뜻으로, 페루를 위하여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연대를 기원하며 축배를 제안합니다.”(217)


무작정 떠난 길 위에서 게바라는 이렇게 서구 문명의 침탈을 여전히 겪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발견했다. 사람들의 삶 속에 들어가서 극빈의 냄새를 맡았으며, 가난에 처한 인간의 위기를 목격했다. 책이 아닌 사람과 세상을 통해 범아메리카주의를 몸소 깨달았다. 그는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만일 위대한 영혼이 인류를 두 개의 적대적인 진영으로 나눈다면, 나는 민중과 함께 할 것임을.”(244)이라고 적었다. 다이어리에 좋아하던 시인들의 시를 적고 중얼거리며 추위를 견디며 걸었던 몽상가 청년은 여행 후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이 책에서는 일개 의대생이 혁명가가 되기 전, 현실에 눈을 뜨는 과정을 발견할 수 있다. 게바라는 1800년대 말에 라틴아메리카 해방투쟁의 지도자 볼리바르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역자가 언급한 것처럼, 게바라는 미국 식민주의에 대항하며 쿠바의 독립을 위해 싸운 민족 영웅 호세 마르티 역시 알지 않았을까. 그에게 여행은 인식의 지평을 확장한 것뿐만 아니라, 현실에 새롭게 눈을 뜨게 하고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던 경험이었다. 이처럼 여행은 누군가를 혁명가로 만들고 혁명을 불러오기도 하는 것이다. 진정한 여행은 이처럼 위험할 수도 있다



[1] "아르헨티나 땅에 발을 디뎠던 그 순간, 이 글을 쓴 사람은 사라지고 없는 셈이다. 이 글을 다시 구성하며 다듬는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다. ‘우리의 위대한 아메리카 대륙’을 방랑하는 동안 나는 생각보다 더 많이 변했다." (20)

[2] "나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을 보면서 나의 운명이 여행임을 알았다." (42)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소명이 영원히 세계 곳곳을 방랑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95)

[3] "칠레에서 만남이란 곧 환대를 의미했고 우리 두 사람 중 누구도 이 뜻밖의 행운을 거절할 처지가 아니었다." (83)

[4] "계급제도라는 부조리한 이념에 기반한 현재의 질서가 얼마나 더 지속될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제는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치적을 선전하는 데 낭비하는 시간을 줄이고 사회적으로 유용한 일들에 더 많은 돈을 써야할 때가 왔다." (86)

[5] "냉혹한 효율과 무기력한 분노가, 증오심에도 불구하고 함께 손을 잡고 그 거대한 광산을 움직이고 있었다. 한쪽 편은 생존 때문에, 다른 한쪽 편은 이윤을 위해..." (101)

[6] "발디비아의 행로는 신대륙의 정복자들이 실제로 통과한 지역들을 살펴볼 때, 스페인의 식민사업에서 가장 두드러진 정복 활동의 하나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 발디비아의 행위는 절대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지역을 장악하고 싶은 지칠 줄 모르는 인간의 욕망을 상징한다." (110)

[7] "무엇보다 중요하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우리가 여기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강력했던 토착 민족의 순수한 자기표현을 보았다는 것이다. 아직 정복자들의 문명과 접촉하지 않았고, 생명을 가지지 못한 지루함 때문에 죽어버린 벽들 사이에 있는 충만한 보물들을 말이다." (152)
- 몰락한 잉카 제국의 흔적을 보면서 기록한 말.

[8] "북아메리카가 고층빌딩이나 자동차들, 엄청난 부를 가졌다고 해서 성숙했다고 할 수 있을까? (...) 북아메리카든, 남아메리카든 모든 아메리카는 자매지. 칸틴플라스를 보고서, 나는 범아메리카주의를 이해하게 되었다네!" (195)
- 여행 중 만난 정신분석학 교수 발렌사 박사의 범아메리카주의

[9] "만약 우리 자신을 나병 치료에 진정으로 헌신하게 만들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은 환자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애정일 것이다." (197)

"그들(나환자들)이 이렇게 고마워하는 것은 저희가 가운도 입지 않고 장갑도 끼지 않은 채 마치 건강한 사람들을 대하듯이 자신들과 악수를 하고 곁에서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함께 축구도 했기 때문입니다. (..) 평소 마치 동물처럼 취급받아 왔던 이 불쌍한 사람들에게는 단지 정상인들처럼 대우받았다는 사실이 주는 심리적 고양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나큰 것입니다." (211)
- 여행 중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10] "우리는 멕시코에서 저 멀리 마젤란해협에 이르기까지 두드러진 민족적 유사성을 가진 하나의 메스티조 민족입니다. 나 자신에게서 편협한 지역주의의 굴레를 벗어버리려는 뜻으로, 페루를 위하여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연대를 기원하며 축배를 제안합니다." (217)
- 나환자들이 마련해준 파티에서 한 게바라의 화답

[11]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만일 위대한 영혼이 인류를 두 개의 적대적인 진영으로 나눈다면, 나는 민중과 함께 할 것임을."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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