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그림

: Over to You!

존 버거(John Berger) & 이브 버거(Yves Berger) 지음 | 신해경 옮김 | [열화당]

 



그림과 화가의 생애를 매개로 부자 간 이어지는 속 깊은 편지

 



작년에 어떤 그림을 급하게 읽고 새해 다시 천천히 읽고 있다. 편지로 이어지는 아버지와 아들의 속 깊은 대화라니! 그림과 화가를 매개로 장황한 설명을 하지 않고도 그림을 그리고 사진과 미술에 대한 평론을 썼던 존 버거와 화가인 아들 이브 버거. 이들 각자의 추상적인 언어가 이렇게 장황한 설명 없이도 소통되는 관계일 수 있다니 놀랍고 또 부럽다. 연인이나 여성들만의 세계처럼 느껴졌던 이런 공감 충만한 대화, 이심전심의 소통이 부자 사이에서도 가능했었던 거구나... 신선했고 놀라웠다. 한편으로는 두 사람이 그만큼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대화를 나누었으리라 생각한다.

 


오늘 읽은 대목 중 인상적인 부분.

아들 이브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다.


 

"이십 년 넘게 그림을 그려 온 지금, 제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은 이전과는 달라요. 이제는 하나의 구성이나 이미지로 작용하는, 통일성 있는 그림에 도달하는 문제가 아니에요. 꽤 애를 먹긴 했지만, 거기에 도달하는 법은 알아낸 것 같아요.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라 간직할 가치가 있는 그림은 어떤 그림인가 하는 문제예요. 제 그림 대부분이 굳이 남에게 보이는 채로 있어야 할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지요. 그래서 저는 계속 작업을 해요. 다시 또 다시, 한 장 또 한 장. 일종의 끝없는 복구 과정이에요. 하지만 늘 이번에는 좋은 그림이 나올 거라는 희망에 이끌리지요.


 

가끔 절망이 자라 희망을 누를 때, 제 의지가 눈앞의 현실을 직면하고 굴복할 때, 모든 야심이 깨지고 남은 하나는 완전히 바보 같을 때, 너무나 드물지만 이 모든 조건이 만났을 때, 그 때 비로소 간직할 가치가 있는 그림이 깨어나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마법 같은 거예요." (81)


 

이 인용문에서 '그림'이란 단어를 ''로 바꾸어도 어색하지 않다. 자신의 그림()'남에게 보이는 채로 있어야 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계속 작업을 방해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간직할 만한 가치가 있는 그림이 드물다고 느끼듯, 자신의 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렇게 '다음에는 좋은 그림()이 나올 것이라는 희망'에 이끌리고, 마법에 유혹당하는 일이 하루를 충만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올해는 그렇게 차근차근 천천히, 그리고 꾸역꾸역 체하지 않게 읽고 쓰고 싶다.

 

 

아직 내가 존과 아들 이브의 글을 많이 접해보진 못했지만, 두 사람은 자신이 써내려가는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이 단어를 쓰고 있는지를 명료하게 알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두 사람의 문장은 가뿐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고, 나를 오래 머무르게 붙든다.


 

나는 유치원 이후로 그림을 제대로 배운 적은 없다. 하지만 존 버거의 스케치가 마음에 들어 나도 뭔가 그려볼 수 있을까 궁금했다. 작년 말에 볼펜으로 뭔가를 그려보기 시작했다. 복잡한 꽃이나 음영 표현은 아직 못하지만 내가 아끼는 물건의 윤곽만을 처음 그려보기 시작했다. 내 시계, 그리고 카메라와 같은 사물들. 아래는 펜으로 나와 많은 시간을 보냈던 클래식 필름 카메라를 그려보았다. 오랜 시간 그리다보면 존과 이브의 대화에서 그들이 대화를 나눈 각자의 고민거리와 이야기를 좀 더 이해해볼 수 있을까.



(c) 초란공, 내 카메라, 2021






"이십 년 넘게 그림을 그려 온 지금, 제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은 이전과는 달라요. 이제는 하나의 구성이나 이미지로 작용하는, 통일성 있는 그림에 도달하는 문제가 아니에요. 꽤 애를 먹긴 했지만, 거기에 도달하는 법은 알아낸 것 같아요.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라 간직할 가치가 있는 그림은 어떤 그림인가 하는 문제예요. 제 그림 대부분이 굳이 남에게 보이는 채로 있어야 할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지요. 그래서 저는 계속 작업을 해요. 다시 또 다시, 한 장 또 한 장. 일종의 끝없는 복구 과정이에요. 하지만 늘 이번에는 좋은 그림이 나올 거라는 희망에 이끌리지요.



가끔 절망이 자라 희망을 누를 때, 제 의지가 눈앞의 현실을 직면하고 굴복할 때, 모든 야심이 깨지고 남은 하나는 완전히 바보 같을 때, 너무나 드물지만 이 모든 조건이 만났을 때, 그 때 비로소 간직할 가치가 있는 그림이 깨어나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마법 같은 거예요."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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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공 2022-01-03 01: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존 버거 책 손에 들고 있었네요. 라이카 카메라 넘 잘 그리셨는데요?^^ 글자와 숫자까지 세심하게~ 앞으로도 계속해서 초란공님 스케치 그리신거 올려주시리라~ 생각하겠습니다^^

초란공 2022-01-03 11:40   좋아요 2 | URL
존 버거 옹이 새해부터 귀가 근질근질 하실듯 합니다^^ 반갑네요~ 쓰던 카메라를 다 꺼내서 그려볼까 하고 있습니다. ^^;; 주말 오후가 그림 하나 그리는데 훌쩍 가버리더라구요. ^^;;

mini74 2022-01-03 18: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그림 넘 좋은데요.~ 느낌있어요 *^^* 존 버거 궁금해지네요 ~

초란공 2022-01-03 22:19   좋아요 2 | URL
학창시절에 그림그리던 친구들을 보고 따분하겠단 생각을 했는데, 그려보니까 나름 재미가 있네요. 노안이라 힘들긴 하지만요^^;; 존 버거의 책은 그림이 참 맘에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