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올게 : 바닷마을 다이어리 9 - 완결 바닷마을 다이어리 9
요시다 아키미 지음, 이정원 옮김 / 애니북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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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언

제 다음권이 나오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일이 이제 마침표를 찍는다.

하도 나오지 않아서 이렇게 끝이 난게 아닐까? 혹시 작가가 무슨 일이 생겼나?

별별 걱정을 다하고 짜증내고 기다리고 기다리다 첫권부터 다시 읽기를 몇번

이제 그런 애닮음은 끝!이 되었다.

마침내 모든 이야기는 마무리되고 그리고 그들인 여전히 그렇게 맘졸이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고 작은 읽에 다시 기분 좋아지며 하루하루 일상을 쌓아나갈 것이다.

어딘가 오래되어 익숙하고 편안한 곳에서

아는 얼굴들과 마주하며 혹은 모른 척 해가며...

 

처음 만화를 읽을 때 우리 아이들은 다 스즈 언니라고 했다.

그땐 중학생도 되지 않은 아이들이 이제 스즈보다 더 나이를 먹어서 스스가 여동생이 되어버렸다.

중학생 스즈가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시기까지

가마쿠라라는 새로운 곳에서 처음 보는 게다가 서로 서먹하고 껄끄러울 수도 있는 이복언니들과의 생활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꾹꾹 눌러 참았던 감정을 터뜨리고 욺음이 터지던 순간이 있었고

무심하고 까다로운 언니들의 태도가 그저 친 동생을 대하는 따뜻하고 자연스러운 행동이라는 걸 알아가면서 스즈는 점점 이곳 식구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기다리며 아이들은 자라서 중학교를 가고 고등학교를 가고 나도 나이를 먹고  아주 일상적이고 소소한 그들의 애페소드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바보도 무시하지 않고 함께 발걸음을 맞추고

어쩌면 불륜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사랑에 대해서도 덤덤하게 인정하고 지켜보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과 나를 향하지 않은 엇갈림을 호들갑스럽지 않게 어루만지는 위로

주위 사람 하나하나가 각자 작은 에피에서는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들

아직 해야할 이야기가 많이 남았음에도 어쩌면 지금이 마무리 하기 딱 좋은 시기라는 생각도 한다.

마지막 제목이 " 다녀올게" 라는 것도 많은 걸 시사한다.

이제 더나 이별하는 것이 아니고 언제든 다시 오고 싶을 때 올 수 있다는 안정감과 소속감

어딜 가든 돌아갈 곳이 있다는 따뜻함

이제  모두가 "우리"가 되었다는 마무리다.

 

 

이제 다음권을 기다리며 안달할 일이 없어 편안하다.

다시 매미소리 그칠 무렵부터 차근차근 읽어봐야겠다.

사치와 요시노와 치카와 스즈가 성장하는동안 나는 얼마나  많이 변했을까

 

마무리를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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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러브
시마모토 리오 지음, 김난주 옮김 / 해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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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미모의 아나운서 지망생 칸나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는 충격적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고, 1인칭 화자이자 임상 심리 전문가인 유키가 출판사로부터 사건의 논픽션 집필을 의뢰받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주인공은 피의자의 국선 변호인으로 시동생이자 오래전 친구 사이였던 가쇼가 선임됐음을 알게 되고,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기 위해 그와 함께 칸나의 과거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피의자 칸나는 시종일관 모호한 진술을 하며 사건의 전모를 미궁으로 빠뜨린다.

 

 

제목이 왜 퍼스트 러브였을까?

첫사랑이라는 말 그 말이 주는 낭만적인 정서는 내용에서 전혀 찾을 수 없다.

물론 칸나가 첫사랑이라고 믿었던 아니 믿고 싶고 믿어야 했던 사람이 있긴 하지만 그것 역시 상호 다른 것을 보고 다르게 기억하고다르게 그 때를 판단하고 있다.

첫 사랑은 어쩌면 내가 태어가 가장 먼저 사랑해주는 존재를 의미하는 거 같다.

태어나서 내가 아무것도 혼자 할 수 없고 누군가의 선한 의도로 주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도움 그래서 나 역시 전적으로 나를 맡기고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존재

그것이 퍼스트 러브. 첫사랑이다.

그건 부모일 경우가 가장 많지만 꼭 부모만은 아니다.

첫 양육자일 것이고 나를 무조건 지지하고 믿어주고 내 불편함을 덜어주는 사람 그렇게 시작된 신뢰로운 관계는 좋은 애착을 형성하고 이후 다른 타인과의 관계에서 기본이 된다.

누군가를 믿어보고 나를 빋어준 경험은 다른 이들에게 확장이 된다.

그 신뢰는 낯선 타인을 만날 때 든든한 자원이 되고 나를 존중하는 힘이 된다.

무엇 보다 중요한 건 내가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고 지지하는 자원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지식하고 편협한 사람은 아이의 모든 문제는 부모에서 시작된다고 하고 특히 주 양육자인 엄마가 아이의 행동에 성겨기나 인성에 모든 책임이 있다고 믿고 몰아 붙이기도 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주인공 칸나는 어릴 적 가정에서 정서적 성적인 학대를 받았다.

원하지 않은 모델을 서는 일부터 그로 인해 느껴지는 불쾌감을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고 부모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는 그들의 말을 잘 들어야 하고 거부하지 않아야 한다는 도식을 갖는다.

그렇게 형성된 정서와 감정은 이후 타인을 만날 때 기준이 된다.

사랑받기 위해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면 안된다. 거부해서는 안된다 좋은 척 해야한다. 그러나 그렇게 다 맞춰주면  쉽다고 하고 해프다고 하고 질린다고 하고 모두가 떠난다.

몸에 남긴 자해의 흔적만 자기를 지키는 힘이 되어주고 위험하고 불쾌한 일을 막아준다.

동시에 그 자해의 흔적이 인정받는 도구로 쓰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길들여지고 타인과의 관계를 배워온 칸나는 어디에도 기댈 데가 없다.

자기 마음을 자기 기분을 들여다 본 적이 없고 자기 기분을 자기 말로 표현한 적이 없다.

그래서 어딘가 불안하고 알 수 없고 신뢰할 수 없는 인물처럼 보인다.

 

어쩌면 정말 헤프고 쉽고 불안정한 여자가 아니었을까?

그냥 그런 저런 이유로 아버지를 죽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우리가 속고 있는 건 아닐까?

 

가정폭력은 물론 성폭력의 경우 가해자가 근친인 경우는 일이 참 복잡하다.

이건 사소한 가정내 문제라고 해야하는지 아니면 범죄라고 해야하는 것인지

집안일이라고 사소하게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피해자가 어리고 약할 수록 가해자에게 더 많이 감정이입하고 동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빈번하고  아이가 이상하다거나

그런 일이 있었는데 가해자를 (아버지 혹은 어른)을 따른다거나 아버지에게 하는 행동을 그대로 하는 분열된 상황을 의심한다.

도움을 청하기도 어렵고 도움을 주기도 난감하다. 모른 척 하는게 가장 좋은데 차라리 몰랐던 게 더 나았을 텐데....

그리고 가족이 얽힌 문제는  가해자와 피해자만 있을 수 없다. 옆에서 지켜보았거나 모른 척 했을 다른 가족도 있다.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이거나 방관자인 사람들

그들을 미워해야할지 동정해야할지도 몹시 헷갈린다.

이편에서 보면 당연한 방관자이고 공범자지만 저 편에서는 그 역시 피해자이기도 한 경우가 허다하다. 칸나의 경우처럼 그녀의 엄마는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였다. 딸의 자해 흔적을 철저하게 모른 척하고 징그럽다며 부정하지만 그 역시 그 흔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더라는 마지막 장면이 참 서글프다.

 

마지막 법정장면에서 칸나는 평소와 다르게 자기의 언어로 자기의 감정을 표현한다.

또박또박.. 그동안 아나운서 준비를 하던 훈련때문일까 아니면 자기를 믿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던 사람들이 있어서 용기를 냈기 때문일지.. 법정 구형을 받긴 했지만 당연하게 받아들일 줄도 알게 되었다.

그냥 무심하게 일본추리물이겠거니 하고 편안하게 읽었던 소설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다만 개인적으로 좀더 칸나의 문제에 집중하면 좋았을 텐데 이야기를 풍성하게 하기 위해 유키나 안노의 일도 함께 버무렸던 것이 조금 산만하기도 하고 오히려 칸나의 문제가 흐릿해지는 기분이다.

 

첫 단추를 잘못 꿰면 나머지 단추들도 제자리를 찾기 힘들다.

단추쯤은 다시 다 풀어서 제대로 꿰면 되지만

인간의 삶에서 잘못 꿰어진 단추는 어떻게 해야할까

심지어 잘 못 꿰어진 것을 모르게 계속 다음 단추들의 자리를 찾느라 헛된 애를 쓰거나 단추탓을 하거나 옷에 문제가 있다고 엉뚱한 데서 원인을 찾고 탓을 할 수도 있다.

인간의 시간을 되돌릴 수 없고 그때 그때 받아야 할 애정과 성장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다음 단계에서 더 많은 노력이 더 많은 관심과 집중이 필요하다.

되돌릴 수 없어 점점 다음 단게에서 과중될 뿐이라 점점 삶이 무거워질 뿐이다.

첫 사랑... 처음 받은 신뢰와 믿음

그것은 사람의 삶에 참 큰 힘이다. 나를 사랑하고 인정하는 바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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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미숙 창비만화도서관 2
정원 지음 / 창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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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하나하나를 꾹꾹 눌러가며 읽다가 책장을 덮고 읽어내려간 황정은의 추천사에서 툭 하고 터져버렸다

 

사람들이 쉽게 오해하는 것과 달리 가난의 모습은 훌쭉하지 않다. 가난의 주머니는 불룩하다 그 주머니엔 이럴테면 냄새와 흉처와 눈치와 질병과 자책같은 것들이 들어있다. "올해의 미숙"의 장미숙은 그것을 겪고도 좋은 것이 되고자 하는 어른으로 자란다. 나는 이책을 미숙아, 계란말이 뺏기지 말고 너 먹어 누가 빼앗아 먹으면 죽여,,,,,,,,, 이런 심정으로 읽으면서도 내 것이기도 하고 내게 익숙한 타인의 것이기도 한 미숙함들 때문에 서글프고 부끄러웠다....(중략)

 

 

그게 무엇이었을까?

미숙아 제발 제발... 하는 간절함으로 장면을 넘어갔던 거 같다

하나도 내가 선택한 것이 없고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데 그 곳에서 견뎌내는 것도 오롯이 내몫이라는 것이 억울하고 분할 수 있는 상황에서 충분히 그런 표출도 없이 덤덤한 미숙이가 짠했다.

나는 그저 이렇게 이야기 밖에서 짠해지는 것 말고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무기력하고 폭력적인 아버지

사랑받고 싶었는데 계속 밀려나는 경험치만 쌓이면서 삐뚤어지는 언니

그리고 외롭고 외로운 미숙이

미숙이에게 재이는 위험한 유혹이고 위험한 안식처였지만 미숙은 무사히 그 단계도 거쳤다.

그낭 모든 걸 포기하고 받아들이는 것

미숙은 그것밖에 하지 못했지만 많이 단단해지고 삐뚤어지지 않았고 그 누구도 아닌 미숙 스스로 꽤 괜찮은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되어서 알게된 사실이 하나 있다.

어른도 완벽하지 않고 철들지 않았고 모든 것을 알지 못하며 어른이라는 껍데기가 몹시도 버겁다는 사실이다

어떤 어른도 그런 말을 아이들에게 청소년들에게 하지 않는다.

어른이면 뭐든 다 안다고 믿게 만들고 다 하라 수 있다고   뼈겨대고  너희보다 낫다는 것을 우겨대며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어른은 개뿔이다.

어른이란 미숙이네 가족처럼 늘 등을 돌리고 뭔가 꽤나 가치있는 일을 하고 있는 척하며 허세를 떨거나 일상과 생계에 지쳐 무기력해져 있거나 내 상처에 빠져서 나보다 더 약한 존재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것들이다,

매년 아이들은 태어나고 자라고 꾸역꾸역 어른이 된다.

그냥 어른같은 어른이 되기도 하지만 간혹 미숙이처럶 제대로 자기가 되고자 하는 어른이 되기도 한다. 그건 잘 가르치고 이끈 기성 어른의 덕이 아니고 어쨌던 견디고 생각하고 내 상처를 내것만으로 생각하지 않은 많은 미숙이들 덕분이다.

이제 더이상 똥을 먹지 않은 진도가 아닌 절미랑 더 이상 미숙아라고 불리지 않은 단단하게 자기가 선택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미숙이의 앞날을 축복한다.

 

 

무어라 말하지 말고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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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건축학 개론>은 누군가에게는 과거 아련한 추억과 낭만적인 시절을 되새김질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유를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불쾌하고 찝찝함을 남기기도 할 것이다

개봉하고 거의 초반에 딸아이들을 데리고 관람했던 영화는 풋풋한 수지와 어리숙한 이제훈이 만들어 내는 어리숙한 신입생의 분위기에 푹 빠졌다 왜 굳이 나이 먹어서 엄태웅과 한가인이 나왔을까 투덡거리기도 했다.

긴 시간이 지나 되돌아보면 아프고 힘든 기억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고 있지도 않았을 대학시절 낭만을  떠올리고 그땐 그랬었는데 저랬었는데 하는 몽실한 감상에 잠기거나 봐봐... 저러니 대학은 가고 봐야 하지 않겠니? 게다가 이왕 갈거면 좋은 대학을 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저거야.. 하는 속물적인 충고까지 잊지 않았다,

그떄 나는 세상이 보여주는 틀에 아무런 의심도 저항도 없이 그저 낭만적이고 순수한 첫사랑과 그 첫사랑의 배신과 아픔만 보였다,

그러나 듣고 읽고 말하고 바뀌어진 내 눈으로 보는 영화는 참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영화를 첨 봤을 떄도 유연석인 재수없는  명확한 나쁜 놈이었지만

유머와 재미를 담당하는 조정석의 대사들이 얼마나 일방적이고 편견에 가득차서 폭력을 조장하는 발언인지 알게 되고

순수하다고만 생각했던 이제훈 조차 그저 자기 감정과 자기 입장에서만 상대 여성을 바라보며 판단하고 평가하고 비난 한다

그리고 나이 먹어서도 여전히 변한 게 없고 그 상식이라는 것과 관습이라는 것이 단단하게 고착되어서 그저 자기상처만 불쌍하고 아픈 사람이었다

 

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 승민과 서연은 같은 수업을 듣고 같이 과제를 하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호감을 가진다. 영화속 승민은 순수하고 어리숙하고 서연은 수줍고 청초하지만 또 한편 도발적이기도 하다. 이것은 승민이 보는 서연의 모습이며 동시에 관객이 보는 서연의 모습이다. 서연의 진짜 모습이 아니고 내가 보고 판단하는 내 위치에서의 서연의 모습이다.

순진한 승민은 자기 어깨에 기대 잠든 서연에게 순간 뽀뽀를 해버리지만 친구 납득이는 그걸 납득할 수 없다. 잠든 여자를 그냥 내벼려두는 것은 범죄라는 대사가 여기서 나온다.

그냥 잠든 여자를 길거리에 내팽개치는게 범죄라는 게 아니라 내 옆에서 무방비로 잠든 여자에게 아무짓도 하지 않는것이 범죄라고 열변을 토한다.

아무런 의사표현을 하지 않았음에도 내 앞에서 쉽게 잠든다는 것은 어떤 여지를 준 것이고 그 기회를 놓쳐버린 승민은 남자답지 못한 찌질한 남자가 된다. 그냥 단순한 입맞춤이 아니라 혀가 드나들고 서로의 몸을 부비는 단계를 나가지 않았다는 것은 남자에게는 치욕이고 동시에 그렇게 쉽게 내 앞에서 잠든 여자는 어떻게든 해봐도 괜찮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선배 재욱의 여성편력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

일단 술을 먹여 술을 먹고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상대를 침대로 넘어뜨려 그러면 게임끝

이 유치하고 폭력적인 대사를 대단한 비법인 양 후배앞에서 늘어놓으며 자랑한다

그들에게 그런 말이나 행동들은 당연한 일이다.

남자라면 원하는 여자를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여자는 싫다고하지만 그래도 순순히 따라오는 존재라는 의미도 있고 그런 하룻밤의 동의되지 않은 관계는 그냥 하루의 일탈이고 쾌락이지 전혀 범죄라는 관념이 없다. 너도 하고 나도 하고 우리 선배들도 해 온 일인데 새삼 무슨 범죄냐고 되물을 것이다.

 

우리의 순진하고 순박한 승민은 서연을 좋아하지만 여전히 전전긍긍한다.

이제 제법 공인된 연인사이같기도 하고 아직 그저 그런 친구사이 같기도 하며 확신 할 수 없다.

남자들 사이의 확신이란 몸의 확신이다.

육체적관계로 내 것이라고 도장찍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불안하다.

연인이 물건도 아닐 진대 내것이되지 않으면 불안하고 초조한 그 소유욕은 유치하고 두렵다.

그리고 어느날 밤 술에 취한 서연이 선배 재욱의 부축을 받아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목격한다.

이미 유명한 바람둥이 선배앞에 술에 취한 서연이 있다.

술먹이고 침대에 눞히면 게임끝!  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어쩌면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 절대절명의 순간이다.

그러나 승민은 나서지 못한다.

이제훈이 연기한 승민은 우물쭈물하고 어쩔 줄 몰라하는 순신한 청년을 연기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위험한 남자와 함께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은 그저 방관이며 한편으로 동조이기도 하다.

결국 그 찌질한 승민이 하는 일은 두 남녀가 들어간 집 현관앞에서 귀를 세우고 안의 소리를 엿들고 있거나 우리의 납득이게 가서 질질 짜면서 서연을 욕하는 것이다. 쌍년이라고

오로지 그 순간 승민은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불쌍하고 안쓰럽다.

나를 이렇게 초라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든 서연은 당연히 쌍년이며 버려마땅하다.

재욱의 존재는 온데간데없다.

어떤 여자든 넘어뜨릴 수 있다고 믿는 그 선배는 그저 대단한 선배일 뿐이지만

선배에게 넘어간 서연만 나쁜 년이 된다.

그리고 이유를 말하지도 않고 헤어진다.

치사하게 짝이 없다.

아는 척 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따돌리는 것으로 끝내버린다.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나정도 되니까 아무말 하지 않고 이렇게 끝내주는 것이다. 너 상대 잘만난줄 알아라.

 

그냘 그 현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그냥 아무 일 없었을 수도 있고

무시무시한 트라우마를 남길 범죄가 있었을 수도 있고

한 순간의 찰라의 동의왕 즐거움이 있었을 수도 있다.

어떤 선택이건 그걸 겪고 견뎌야 할 사람은 서연인데 승민은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자기가 무슨 대단한 비극의 주인공이라 믿으며 사랑의 막을 내린다.

 

영화는 누군가에게는 추억이었다.

맞다. 나도 그때 사랑하는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여학생이 얼마나 원망스럽던지.. 지금은 어떻게 지낼까 어떻게 지내든 나보다 잘 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어쩌면 아직도 나를 기억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러나 나는 철저하게 잊었고 보란듯이 무시할거라는 유치한 다짐들이 영화를 보는 내내 오갈 수도 있다.

그렇게 오간 생각들은 지난 추억이며 낭만이라고 생각되지 그것이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건 생각지도 못한다.

좋아하면 육체적으로 내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

내가 경험한 여자가 많을 수록 좋다는 생각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여자에 대해 함부로 떠들어대고 평가하고 욕하는 것

이별의 이유를 직접 말하지 않고 무시하고 정서적으로 아프게 하는 것

알지도 못하면서 욕하고 판단하고 쌍년으로 몰아붙여버리는 것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원인은 처음도 서연이고 끝도 서연이다.

술을 마셔서

몸도 가누지 못하게 취해버려서

남자 앞에서 쉽게 잠들어 버려서

혼자 산다는 것을 흘리고 다녀서

모든게 서연의 잘못이고 서연의 문제이고 서연의 행실이 문제였다.

그래서 내 첫사랑은 깨어졌고 얼룩졌고 지나갔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경우에 따라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사회의 민족의 비극으로 확대되기도 한다.위안부 할머니들의 문제는 그들 개개인의 고통이며 동시에 우리 사회의 비극이고 결코 그 문제의 해결을 개인에게 떠넘기고 모른 척 할 수 없다. 그러나 때로 개인의 문제가 확대 해석되어 이미 폭력을 당하고 살해당한 당사자는 아무런 입장 표명을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의 죽음이 전시되고 더 큰 정의의 문제로 이용되는 경우도 있다. 개인의 비극을 그가 당하는 차별과 무시 억압에서가 아니라 민족의 문제로 보면서 그의 아픔에 내가 동조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내 것 우리의 것이 유린당한 데 대한 분노가 될 수도 있다. 우리 나라 여성은 여성 그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재산이고 소유인데 그걸 타인이 침범했다는 데 대한 분노가 모든 것을 뒤덮을때 그 개인은 이미 없어졌다. 원치않았을 노출과 재해석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생각해 볼 문제였다.

조직에서의 성폭력은 문제 제기자체가 어렵다. 다들 가만 있는데 왜 하필 너는?

예민하고 까칠하고 받아들이질 못하니?
조직을 이렇게 망칠 셈이냐?  혹시 무슨 음모가 있는 건 아니냐? 대의를 망칠 생각이냐

이제 와서 세삼스럼게 그 때 일을 들추는 이유는 무었이냐?

너의 행실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냐?

너도 좋아서 한 행동이 아니냐?

 

가정폭력 아내 폭력은 그저 사소한 개인적인 일이다.

부부간에 강간이 성립할 수 있는가

그럴 지경이라면 진작에 도망치거나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느냐

아이들을 봐서라도 참아야 하는 거 아니었느냐

그렇게 가정을 깨야 겠느냐

그래도 아이들 아버지 아니냐...

가정폭력 데이트 폭력등 친말한 관계에서의 폭력은 문제가 생기기전 예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일어 날지도 모를 불안을 해결하기위해 경찰이나 상담소 어디에 손을 내밀어도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서  해줄 일은 아무것도 없다.

아직 아무짓도 하지 않은 가장을 잡아 갈 수도 없고 가족을 도피시필 권리도 없다.

그저 기다렸다가 문제가 생기면 잽싸게 연락하고 신고하라는 말밖에 할 수 없을 때 참 이게 뭐하는짓인가 자괴감이 들었었다.

누군가의 사적인 영상을 공유하고 퍼나르고  낄낄거리고 한두마디 보태는 일은 그저 일상의 작은 일탈이고 누구나 하는 일이다. 그것으로 누군가 아프고 힘들고 죽을 수도 잇다는 건 아예 개념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누구나 하는 일이고 이정도가 무슨 범죄냐

그렇다면 애당초 이런 것을 찍지를 말든지

이런 짓을 하는 그 여자의 행실이 문제지 보라고 만든 거 보는게 무슨 대수냐

불볍 촬영을 하고 인터넷에 올리고 유통하는 사람을 철저하게 뒤지고 탈탈 털어서 사대문안에 매달았다가 능지처참을 해버리면 그때는 좀 잠잠해질까?

 

왜 가족은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3인 이상의 가족만이 정상일까

미혼모의 자식이라는 꼬리표보다는 낳진 않아도 멀쩡한 양부모가 키우는게 아이에게 더 낫지 않느냐는 말...

나도 쉽게 생각하고 내뱉았을 말.. 그 말이 누군가에게 절망이고 차별이고 폭력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한다.

 

 

여성폭력은 차별의 한 영역이며 인권침해다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공 국가의 책임 영역으로 확대 돌 수 있는 문제이다.

성별 불평등으로 인한 차별, 권력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이다,

성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권력의 문제이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성별이 여자라 하더라도 그 여자가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쉽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자기가 보기에 만만하고 대처능력이 없으며 쉽게 순응하고 저항할 수 없는 상대를 기가 막히게 찾아내며 폭력을 행사한다.

친밀한 관계에서 아는 상태에서 사소한 친절을 통해

결국 성폭력은 남녀 불평등의 문제이며 위계와도 연관되어 있다.

남성들에게 여성이란 약자이다. 약자는 나와 동등한 대상이 아니다.

보호하고  살펴야할 대상이지 나와 입장을 나란히 하고 같은 권리를 가지고 같은 말을 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보호받아야 할 대상은 순종적이고 공손해야한다.

그리고 내가 베푸는 시혜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면 된다

사회통념이라는 것 상식이라는 것은 나에게 편하고 익숙한 것이다

보호받아 마땅한 열악하고 낮은 존재는 쉽게 다루어지는 존재와 같은 말이다.

원치 않은 보호와 친밀감은 폭력이다.

 

성이란 즐거워야 하고 안전해야한다.

생물학적 보건 위생학적인 성이 아니라 즐거울 수도 있는 것이다.

즐기는 성에서 중요한 것은 그 즐거움이 서로가 즐거워야하고 서로가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나만 즐겁고 나만 안전한 것은 성생활이 아니다.

나의 쾌락과 욕망은 타고난 것이고 유지해야 하는 것이고 풀어주어야 하는 것이며

타인의 괘락은 수치스럽고 더러운  것이고 감추어야 한다면 그것은 성생활이 아니다.

서로의 존중과 동의가 성생활에 필요하다.

 

사회가 원할가게 굴러가기 위해서는 약속이 필요다. 법과 제도 개념의 정의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제도를 틀을 만들때 누군가가 소외되거나 누군가 일부의 이익을 위주로 그들만이 주체가 되어 만들옂ㅆ다면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모든 제도는 절대적이지 않다 사회는 유기적이며 유연성이 필요하다

 

언어는 시대의 속성을 가진다.

언어가 개념을 규정하고 제한한다.

생각의 방향을 잡고 규정하는 것이 언어이다.

생각은 언어에 종속되기도 한다.

새로운 언어 새로운 개념이 필요할 때가 있다.

 

가부장제란 사적으로는 가족의 가장이 아버지가 된다는 부계혈통을 의미하지만

공적으로는 남성이 지배를 가지고 있는 세상을 규정한다. 남성 중심의 가치관 제도 일반화된 상식들 사회질서를 의미한다. 남성은 남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지배받지 않는다.

다만 다른 기준으로 차별 받을 수 있다. 권력 돈 명예 인종 장애 등이 차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차별받는 남성은 자신의 차별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지 못하도 자기보다 자유로운 여성에게서 찾고 분노한다.

 

신뢰의 함정이란 오래 알고 익숙하여 잘 아는 사람의 말을 더 신뢰하게 된다. 그 존재를 더 잘 안다고 믿는다. 폭력에서 가해자의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 결과와 피해자의 감정이 중요하다.

그럴 리가 없는 사람. 오래 알아 잘 아는 사람,  뭔가 이유가 있을거라고 생각되는 사람도

내가 아는 그것이 전부는 아닐 수 있다.

 

나도 피해자가 될 수도 있고 가해자가 될 수 있다

방관하고 함부로 판단하고 말해버리는  사람도 충분히 가해자의 자격이 있다.

 

sexsuality는 인식의 문제이다. 욕구 쾌락  지향은 인식에서 오는 것이다 본능만이 아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절제가 가능하다.

욕구를 느끼는 것과 직접 행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남성은 욕구를 참을 수 없는 존재이고 여성은 욕구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욕구는 두 다리 사이가 아니라 두 귀 사이에서 조절된다.

 

객관적이고 이성적이고 가치중립적인 것

존재하기 힘들다.

어떤 말이나 명제에도 누군가의 생각이 들어가고 어떤 의도된 방향성이 있다,

그걸 인식하든 하지 못하든...

과학적이라는 것도 뒤집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떤 언어나 현상은 항상 그 이면을 뒤집어 보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유리한 가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실험의 방향성을 조작할 수도 있고 해석을 달리 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늘 당연하다는 것을 믿고 싶어 한다.

 

 

책속의 100인회 시건이나 정미씨의 아내폭력문제  비디오 사건들...

어쩌면 지금 이순간 사건들과 이리도 겹쳐보일까

세상은 바뀌기도 하지만 계속 제자리를 맴돌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그때와 달리 다른 생각을 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조금은 더 많아졌다고 생각한다.

 

그런 전제가 없는 성은 역시 폭력이다

여성폭력은 언제나 피해여성 개인의 고통보다 그 여성이 속한 집단의 명예와 관련되어 논의되어왔다. 특히 유교 전통과 성의 이중규범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한국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은 범죄나 인권 침해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에 관한 문제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여성에 대한 푝력을 명예나 도덕과 관련한 문제로 인식하게 되면 여성은 피해 사실에 분노하기 보다 수치심을 느끼게 되고 피해여성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명예를 ‘더럽힌‘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자신이 당한 폭력을 거론하는 여성은 공동체 내부의 치부를 폭로한‘배신자‘로 간주된다 성폭력 피해를 문제화하려는 여성이 가장 흔히 듣는 말은 ‘남자 앞길을 망친 여자‘라는 비난이다, 폭력 피해여성들도 자신의 고통이나 피해를 중심으로 생각하기보다 가족이나 직장 조직 학교등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명예를 더 먼저 걱정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으로 피해여성의 고통보다 가해남성의 명예가 더 중요하다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 P34

"모든 인간은 폭력 당하지 않을 권리를 포함하여 인간으로서 권리를 가진다"는 인권 개념은 성차별 사회에서는 모순적인 명제가 되어버린다. 인간은 누구나 맞지 않을 권리가 있지만 여성폭력에 대한 우리 사회의 남성 중심적 담론은 인간으로서 맞지 않을 ‘권리‘보다 여성으로서 참아야 할 ‘도리‘를 더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의는 성역할로 정당화 정상화된다. 여성의 성역할과 인권은 양립할 수 없다. - P35

여성에 대한 폭력은 가부장제의 역사와 같다, 여성 폭력은 수천년간 시대와 지역 계급과 인종을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행해져왔다 그러나 여성이 당하는 폭력이 사회적잉ㄴ 문제로 제기되고 법의 규제를 받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며 서구의 경우에도 불과 30여 년밖에 도지 안핬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폭력은 오랫동안 개인적인 일로 자연스런 일상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가부장제 사회의 성문화의 특징 중 하나는 남성 성기 중심성으로 성폭력 개념 역시 남성 성기 중심적으로 정의된다 그래서 현재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성폭력 개념은 강간등 성적인 폭력에 한정되어 있다 때문에 여성의 입장에서 성폭력 사건을 문제화 할 때 는 성폭력 개념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동반될 수 밖에 없게 된다 ‘강간이냐 화간이냐‘의 논란은 이 문제의 가장 흔한 예이다. 여성의 경험 현행법 규정 여성주의 이론 대중의 통념에서의ㅣ 성폭력 개념이 모두 다르다. - P28

그러므로 인삭자의 사회적 위치와 이를 둘러싼 정치적 조건에 따라 각기 다르게 정의되는 성폭력 개념중에 누구의 경험이 객관적인 성폭력 개념으로 선택되는가와 이러한 선택의 원리에 개입된 권력 관계는 정치적인 문제일 수 밖에 없다. - P28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이건은 대다수의 성폭력 피해자들이 문제를 제기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맞닥뜨리게 되는 질문이다 질문이 제기되는 방식이 ‘정말 성폭력이 없었을까"가 아니라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의 가해자 중심성을 보여준다. 가해자는 끝까지 부인하는 것만으로 처벌을 피할 수 있지만 피해자는 끄까지 피해사실을 말해도 결코 피해를 인정받을 수도 가해자를 처벌할 수도 없다 성폭력 사건을 공론화 한 피해자와 지원자들이 "왜 가해자 본인이게 확인하지 않고 사건을 공개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대다수의 가해자가 성폭력 가해 사실을 적극적으로 부인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에서 "가해자에게 확인"애햐 성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가해자가 인정하는 것만 피해로 인정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가해자외 피해자의 진술이 상반될 때 피해 여성의 경험을 해석할 수 있는 권리는 피해자자신에게 있지 않은 것이다. - P70

성폭력 피해를 사건화해서 사회 문제화하는 것과 구체적인 피해자들의 인권 회복과 개인적인 치유는 서로 다른 차원과 방식의 운동과 사유를 필요로 한다. 기해자 중심의 사회에서 피해자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언어와 제현 체계 자치가 존재하지 않을 경우 성폭력 사건의 공론화는 어쩔 수 없이 기존의 담론 체계안에서 수용되는 방식으로 문제화되기 때문이다.
성폭력 피해는 흔히 사건 발생시점 또는 사건을 문제화한 시점에 정박해 있다고 여겨지고 다루어 지지만 사실 그 여파는 장기적으로 지속되며 삶 속에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 P77

아내 폭력은 숨겨진 범죄라 불릴 만크 폭력 피해가 은폐되기 때문에 폭력 피해자들은 조사와 재판 고자ㅓㅇ에서 그동안 은폐되어왔던 가해자의 폭력 행위를 낱낯이 드러냄으로써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 그러나 폭력 피해자들의 방어는 오히려 사회의 비난을 사게 되고 방어 행위가 아닌 공격 행위였다는 의심을 받게 된다. 폭력 피해자들이 아프다고 소리쳐야만 사회는 관심을 갖지만 막상 소리를 지르면 조용히 소리질러야 하는 데 이웃이 알도록 소리질렀다며 피해자를 비난하는 것이다. 폭력이 아니라 폭력에 대한 저항이 범죄화된다. 여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동정을 호소한느 불쌍하고 의존적인 존재일때만 자신에게 가해진 불법 부당함에 대해 저항하기 보다 스스로 부서져갈 때 가부장제 사회는 비로소 그녀에게 정상 참작의 은혜를 내려준다. - P116

정담 방위가 인권을 주장하는 것이라면 정상 참작과 선처를 호소하는 것은 동정을 받는 것이다, 끝내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은 사법부의 판결은 애초부터 정당방위할 인권을 가진 적 없는 아내폭력 피해자들의 현신을 증명한다. - P117

모든 언어는 정치적, 무의식적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 의미를 발생시키는 것은 맥락이며 가치 중립적으로 보이는 언어는 그 언어를 가치중립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사회적 맥락의 정치적 효과다. 이들 비디오의 내용은 ‘성행위‘지만 그것이 대중에게 보여지는 것은 폭력이다
특정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명명은 명명의주체와 명명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행위이다. - P124

대개 형사사건에서는 가해자 또는 범죄자의 이름이 사건 이름이 된다. 이에 반해 성폭력 사건의 경우 피해자의 이름이 그 사건의 이름이 되어왔던 것은 우리 사회가 ‘누가 왜 성폭력을 행사했는가‘보다 ‘누가 왜 성폭력을 당했는지‘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반영한다. 성폭력 피해를 가시화하고자 하는 여성운동의 노력 역시 이중적 성규범과 성폭력 가해를 정상적 비범죄화하는 사회적 조건에서 자융로울 수 없다.
남성이 인간의 기준이 되고 남성의 경험 인식이 세계를 정의하는 사회에서 남성 관점에서 이루어진 명명은 중립적인 것처럼 보인다. - P125

‘폭력을 행할 수 있따‘는 것은 권력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발생한 후 피해자는 가해자가 행사한 폭력의 의미를 묻고 고통 받는다. ‘그가 왜 그렇게 하였는지‘를 피해자가 끊임없이 의문을 갖는 것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 발생한 일에 대한 해석의 권력이 남성에게 있기 때문이다 폭력은 ‘왜‘라는 동기 이유 원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폭력 그자체가 문제이다. 가해남성이 ‘왜‘를 문제삼은 것은 폭력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시도지만 피해자가 ‘왜‘를 묻는 것은 그런 일이‘발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스스로에게 설명하여 이유없는 폭력을 이해햐려는 노력이다.그러나 ‘왜‘라는 질문은 폭력의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치원하는 효과를 낳는다. 폭력 가해자에게 흔히 붙여지는 또라이 미친놈이라는 낙인이나 가해/피해 심리를 설명하는 무수한 연구들은 여성에 대한 폭력의 구조적 문제를 은폐하는데 기여해 왔다, - P156

한국사회에서 성폭력 개념과 성폭력 사건의 객관성은 법의 영역에서나 일상 생활에서나 모두 여성의 입장이 아니라 남성의 경험과 이해에 의해 구성된다. 때문에 남녀 모두에게 여성의 주장은 지나치게 예민하고 과격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남성의 주장은 자연스럽고 객관적인 것으로 수용된다. 5000년이 넘는 성별 권력 관계의 이러한 역사성을 무시한 채 피해ㅕ성의 인권과 가해남성의 권력이 경합하는 상황에서 남성의 특권을 인권의 이름으로 옹호한느 것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인권이 어떠한 방식으로 삭제되는지를 보여준다. 뿌난 아니라 성폭력 사건의 진실을 둘러싼 논쟁에서 가해 남성과 가부장제 사회가 실질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성폭력 가해자의 인권이라기 보다는 남성 생물학의 자연스러운 결과로서 성폭력 의 불가피성이라는데 있다.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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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4-12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그 유명한 [건축학개론]을 보지 않았던 저는 푸른희망 님의 이 글을 통해 비로소 그 내용을 알게 되었네요. 와... 세상 쓰레기같은 남자가 나오는군요. 그런 남자가 비단 영화에서만 나오는 건 아니지만요.

저도 밑줄을 아주 잔뜩 그어가며 읽었던 책인데 제가 읽은 게 구판이라, 개정판으로 새로 사서 다시 한 번 읽어야겠어요. 또 밑줄을 잔뜩 긋게 되겠죠.

잘 읽었습니다, 푸른희망 님.

푸른희망 2019-04-12 17:46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덤덤하다는 것은  힘든 적은 없었다.

세상은 감정을 드러내고 살기엔 너무 빠르고 험한 곳이었다.

감정은 나의 가장 약한 속살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단단하게 무장하고 누구에게도 무시당하지 않고 크게 눈이 띄지 않고 살아가기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덤덤하게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머리로 계산하며 살아가는 일이다

쉽게 상처받을 일도 없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없이 딱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그저 바라보고 눈길을 돌리면 그뿐인 정도의 관계망이 가장 편하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운다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었다.

운다고 해결될 일은 하나도 없다는 걸 몸으로 먼저 익혔다.

울어서 곶감하나를 얻었던 기억이 없지야 않겠지만 그렇게 얻어 먹은 곶감이 썩 달지만은 않았다. 떨떠름하고 뭔가 개운하지 안은 뒷내가 오래오래 남았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신세지는 일은 편하지 않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혼자 끙끙거리고 해결해버리는 일이 차라리 편했다.

다만 누군가 먼저 내미는 손을 거절하기도 힘들었다. 그것이 내게 필요한 것인지 그저 거절이 어려워 아무거나 받아두는 일인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누군가 쉽게 거절하고 아무렇지 않아 하는 일이 작은 충격이었던 기억이 있다.

저렇게 아니라고 말해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구나

 

먼저 요구하지않았지만 먼저 거절하지도 않았다.

그냥 편하고 착하고 만만하기도 한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속으로 얼마나 욕을 잘 하는지 얼마나 미워하는 사람이 많은지 얼마나 싫은 상황을 많이 꼽을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아니 알지만 모른 척 했을 것이고 설마 그럴리가 하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어린 시절부터 기억을 더듬어 보면 운 기억이 별로 없다.

전혀 울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울고 나서 개운했던 기억은 없다.

늘 찝찝하고 울지 말아야 했다는 기억이 있다.

울음을 참으며 웃으려고 했던 기억이 있고 그냥 꾸역꾸역 참았던 기억이 있다.

혼이 나도 우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고 이런 일로 울고 짜는 일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고

이런일로 우는 거 아니야. 징징거리는 거 아니야 힘들다고 하는 거 아니야 라는 말을 늘 내가 먼저 나에게 했다.

 

그래서였을까

가장 힘든 일이 누군가 병문안을 가는 일이었구 누군가 슬픈일이 있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위로 하는 일이었다. 타인의 슬픔과 아픔을 공감하는 일이 어려웠다.

그 감정을 전혀 이해할 수 없어 어려운게 아니었다.

어쩌면 너무 훅 하고 그 감정이 내 속으로 들어와 내것인 것마냥 자리를 잡아 버려서 당황스러웠다.

이건 내문제가 아니야

이건 내일이 아닌데 이러는 건 너무 오바하는 일이야

도데체 이런 감정이 뭐지? 이런 걸 내 보이면 안될 거 같아

그런 억누름이 먼저 생겼고 늘 감정을 숨겼다.

함께 우는 일 함께 분노하는 일은 어려웠고 내 아픔이나 플슴이나 분노도 누군가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늘 내 아픔은 내 슬픔은 타인의 것보다 작았고 하찮아 보였다.

늘 내가 먼저 내 문제를 뒤로 미루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아픔에는 경중이 없고 선후가 없다.누구의 어떤 아픔이나 슬픔은 똑같은 질량과 무게를 가진다. 자기에게는 자기의 아픔이 자기의 슬픔이 가장 무겁고 깊다.

 

남의 상가집이나 남의 병실에서 울지 않는 것은 큰 문제는 아니었다.

문제는 내가 상주가 되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내려가는 내내 내가 생각한 것은 슬픔이나 황망함이 아니라 울지 못하면 어쩌하 하는 걱정이었다.

명색이 자식이고 어찌 보면 느닷없는 죽음이었기에 슬프고 아파야 하는 것은 당연하게 내게 그런 감정은 당연하게 있는데 그걸 표현하는 것이 너무 도드라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아니 걱정이 더 깊었다.

늘 울지 않았던 그래서 독하다는 말도 들었던 내가 이번에도 울지 못하면 어쩌나 남들이 어떻게 볼까

울고 있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경험만 있던 내가 처음으로 울지 않은 모습을 남들이 보고 뭐라고 하지 않을까 걱정하게 되었다.

걱정은 기우였다.

엄청나게 통곡하지 않아도 눈물은 나왔다.

어쩌면 우리 가족이나 친척들이 성정이 지나치게 감정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들 그만한 선에서 충분히 슬퍼하고 충분히 애도하고 충분히 감정을 드러냈었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장례를 치뤄봤다면 알 수 있겠지만 3일 장 그 시간은  결코 순수한 애도의 시간은 될 수 없었다.

사람이 죽어서도 여러가지 치뤄내야 할 절차가 있고 형식이 있고 보여지는 관습이 있다. 계약하고 싸인하고 인사하고 주고 받고 다시 주문하고 클레임을 걸고 손님을 받고 인사하고 때로는 과거 추억을 이야기하다가 어울리지 않게 꺄르르 웃어야 하는 경우도 있고 무상가란 어쪄면 슬픔과 고통속에 나름의 희노애락이 모두 뒤섞여 있기도 했다.

터져야 할 울음은 오래 속에서 삭혀지지만 전혀 휘발되지 않았다. 그렇게 곰삭고 진해지며 이걸 밖으로 배출하지 않으면 내가 살기 힘들겠다 싶은 순간이 있었다.

내가 이렇게 그를 사랑했고 존경하고 필요했던가 스스로가 놀랄만큼 누군가의 부재가 주는 무게는 대단했다. 어쩌면 긴 형식적인 절차가 모두 지나고 이제 정말 그 존재가 부재함을 실감하는 순간 애도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혼자 누가 보지 않은 곳에서 엉뚱하게 울음이 터졌고 그의 일을 그에 대한 나의 생각들을 기록하며 보낸 시간이 아마 나에게는 애도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의외로 그에게 많이 의지했고 많은 것을 받았고 많은 부분이 닮았음을 인정할 수 있었고

내가 그렇게 미워하고 혐오했던 부분이 그의 가장 약한 부분이 아니었을까

그는 자기의 가장 약한 부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렇게 애썼는데 그게 나에게는 힘들고 어려웠고 미움마저 들게 하는 것이었구나 알게 되었다.

늘 화해와 깨달음은 뒤는게 온다.

그게 적절한 순간에 온다면 성인이지 일개 개인일 수는 없을 테니까

 

친한 친구의 병문안도 쉬운 일은 아니니었다.

간단한 시술이 아니고 어쩌면 생과 사를 넘나들지도 모를 병을 앓는 친구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잘 견디라고 밥도 잘 먹고 쉬기도 잘하고 치료도 잘 받고 부디 잘 견디어 예전으로 돌아오길 기다린다는 말이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어떤 말도 입에 발린 말같고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을 것 만 같고 그저 타인의 형식적인 말처럼 들릴 것 같았다.막상 병문안 가서 본 모습이 충격적이었지만 아닌 척 모르는 척 괜찮은 척 하며 그래도  좋아보여 다행이야. 넌 잘 해낼거야. 원래 씩씩하고 똑독했으니까 이만큼일거야 라는 말... 그게 얼마나 전해졌을지 알 수 없지만 그 이상은 힘들었다.

 

내 감정은 소금밭에 뒹구는 것처럼 쓰라리고 고통스럽더라도 일상은 평화롭게 지나간다. 배가 고프고 졸립고 피곤하고 해야할 일은 시간시간  이어진다. 무심하게 아무일 도 없다는 듯한 그 풍경이 아프다. 어쩌면 나의 감정이 아니라 나의 감정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무심하게 지나는 모든 것들이 더 아프고 고통스럽다.

내가 아프다는 것은 타인에게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또 누군가가 아프다는 것도 내개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삶이란 그런 거였다. 원래

그래서 괜찮기도 했고 외롭기도 했다.

 

별 거 아닌 문장들에 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건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별 거 아니어서 무심해서 더 북받치는 것 그런게 있다.

                                                                                   

무언가 특별하고 대단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최근에 한다.

아이는 특별하고 무언가 뛰어난 누군가가 되고 싶어했다.

평범하고 무탈한 것이 얼마나 행복인지 아직 알 수 없는 나이다.

다른 누구와 다르지 않고 같다는 것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것은 죽음과 다를 바 없다고 아이는 생각한다.

하긴 나도 그랬다. 삶은  길고 나는 영원히 살것처럼 굴었다.

누구와도 차별되지 않는다면  독특할 수 없다면 그냥 살지 않은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냥 이어지고 흐르는 삶

어디를 뒤바꾸어  놓아도 별 이상할 것 없는 모습이 얼마나 귀한지는 나이 먹어야 아는 일이다.

굳이 많이 아프거나 고통스럽지 않더라고 내일과 같은 오늘이 축복이라고 생각될 순간이 온다.                  

아니다. 떠쩌면 특별하고 단 하나밖에 없는 가치라는 것이 얼마나  높고 외롭고 쓸쓸한지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누구나 개개인은 스스로 세상에 하나뿐인 귀한 존재이다.

그래서 이롭고 그래서 쓸쓸하다.

그걸 아는 나이가 되면 누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독특하고 하나밖에 없는 내가 다른  누구와 함께 어울리고 도드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입원일이다. 아침 베란다에서 커피를 마시고 담배 한 대를 몰래 피운다. 맛있다. 풍경은 흐리다. 전철 역으로 사람들이 바쁘게 걸어간다. 세상의 일상은 무사하다. 그 무사함에 팩트들이 들어있다. 팩트는 엄혹한 칼이다. 정확하고 용서가 없다. 이 칼의 무심함에 나는 기록으로 맞선다. 기록은 사랑이다. 사랑은 희망이다. 뭄ㄴ득 파란 버스가 풍경안으로 들어와서 정류장에 선다. 그리고 떠난다. 카프카의 마지막 일기가 맞았따. "모든 것은 오고 가고 또 온다‘ - P60

때아니게 툭툭 마음이 꺽인다.
가을날 마른 나무처럼. - P18

분노와 절망은 거꾸로 잡은 칼날이다.
그것은 나를 상처낼 뿐이다. - P23

삶은 향연이다.
너는 초대받은 손님이다.
귀한 손님답게 우아하게 살아라. - P119

삶은 힘들이다.
몸은 힘으로 살아간다.
정신은 힘으로 사유한다.
마음은 힘으로 노래한다.
생의 기쁨과 희망과 사랑을 - P122

대학병원 카페테라스에서 창경궁 대문을 본다 추녀 마루의 부드러운 곡선, 혼자가 아니라 둘로 층이 나눠어서 더 중후한 힘의 안정성, 하늘을 바라보는 지붕들의 겸손한 낮음-내가 자주 삶의 격조라고 부르기 좋아했떤 어떤 자세 - P128

나는 나를 꼭 안아준다.
괜찮아 괜찮아........... - P145

돌아보면 살아온 일들이 꿈만 같아서 모두가 고맙다. 나는 평생 누군가의 덕분으로 살았지 나 자신의 능력과 수고로 살지 않았다는 걸 스스로 너무 잘 안다 갚아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내가 가진 것들이 있다면 그건 모두 내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이다. 이별의 행복 그건 빈손의 행복이 아닌가 - P178

요즈음 별로 불편한 것이 없네요라고 내가 말한다. 그게 문제죠. 라고 의사는 말한다. 암 자체는 불편하게 만들지 안하요. 다만 점점 자라날 뿐이죠. 그러다 종양이 혈관을 막고 장기를 누르게 되면 뭄이 불편해지는 거죠. 몸이 편하다고 마음을 놓을 수는 없죠. 오히려 몸이 편할수록 암의 상태를 의심해봐야죠. - P185

우리는 모두 특별한 것들이다
그래서 빛난다.
그래서 가엾다.
그래서 귀하고 귀하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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