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먼저 보았다.

어두운 상영관을 나오면서 생각했다.

지금 2019년 은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내 삶도 반짝반짝 빛날 때가 있을까요?" 은희는 영지샘에게 물었다.

답은 없없지만 아마  영지샘이면 말없이 웃어주었을 것이다. 빛난다. 빛나지 않는다는 말로 단정지울 수 없는 것이 삶이므로 ,  우리의 삶은 별이 아니다.

아니 모든 별이 빛나지 않은 것이므로 별이어도 상관없다.

은희는 지금 빛나게 살고 있을까?

비관적이고 시니컬한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빛나고 있다고 믿더라도 그렇게 보지 않은 타인들이 존재할 것이고 그저 미미하게 여기며 혀를 차는 사람도 있을 테고 부러워하는 누군가도 있을 것이다.

그냥 내 삶은 이어질 뿐이다.

손가락을 움직이는 미세한 떨림만으로도 삶은 계속될 수 있다.

은희는 빛나든 아니든 어쨌든 손가락을 움직이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첫 장면에서 은희가 계속 대문을 두드리지만 아무런 기척이 없다.

심부름을 보내놓고 모두가 사라져버린 것이 아닌 이상 집에 아무도 없을 수가 없다.

적어도 급하게 대파를 사러 보낸 엄마라도 있어야 한다.

신경질적으로  문을 두드리고 짜증섞인 목소리로 엄마를 부른다.

아무런 기척이 없다.

두렵다. 그럴리가 절대 절대 없지만 가족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나 혼자 남겨졌을 수도 있다. 불가능한 상상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는 마음 그것이 불안이고 두려움이다.

그리고 은희는 다시 대문을 본다. 우리집이 아니다

여태 남의 집을 두드리고 화를 내고 애를 쓰고 있었다.

멋적고  창피하고 동시에 다행이다

한 층을  올라서 은희는 무사히 집으로 들어갔다.

 

 

아주 오랜 기억이 있다.

엄마 손을 잡고 동네 시장에 갔다.

엄마는 어린 남동생을 업고 있었고 장바구니를 들고 있었을 것이다.

시장은 늘 같은 곳이지만 늘 새롭다

구경하고 싶은 것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다.

그러나 젊고 바쁜 엄마는 등에 있는 아이가 무겁고 짐하나 들어줄 수 없는  어린 딸도 버겁고 점점 무거워지는 찬거리도 힘겹다. 돌아가봐야 일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그래도 그냥 어서 들어가서 등에 있는 아이라도 내려놓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에게 집은 굳이 어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어디 움직일 것도 아니고 늘 살고 있는 그 공간보다는 여기 시끌거리는 시장이 더 흥미롭다.

장을 보고 사람들이 둘러선 곳에 구경을 간다. 무얼 팔았을 것이고 그 전에 뭔가 공연같은 걸로 사람을 끌어모았을 것이다. 시시하고 유치한 무언가가 벌어지고 아이는 궁금하고 보고싶다.

엄마가 행여 먼저 가버릴까봐 아이는 포대기 끈을 꽉 쥐고 정신없이 사람들에게 빠져든다.

한번 뒤를 돌아보면 엄마는 그대로 서 있다. 다행이다.

다시 구경에 빠진다

재미있어서 너무  다음이 궁금하기도해서 정신없는 와중에도 포대기끈은 절대 놓지않는다

아니 놓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순간 돌아보니 엄마가 없다

내가 잡고 있는 끈은 어떤 할머니 치마끈이었다.

언제 바뀌었을까? 아이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할머니 손을 잡고 집으로 갔다.

그 할머니가 친할머니였거나 친척은 아니었던 거 같다 그냥 알고 있지만 모르는  사람

아이는 집에 돌아가 엄마에게 따지지 않았다

왜  혼자 두고 갔냐고 묻지 않았다

엄마도 왜 먼저 갔는지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냥 이제 다 보고 왔냐는 듯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었다고 어른이 된 아이는 기억한다.

그냥 물어서는 안되는 거라고 따져서는 안되는 거라고 생각했던 거 같다.

물어보거나 따지면서 발버둥을 치며 찡얼거린다면 엄마는 다시는 나를 데리고 나가지 않을 것이고 어쩌면 그렇게 나를 놓아버리고 멀리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던 거 같다.

오히려 엄마가 뭘 그리 오래 보고 왔냐고 꾸중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도리어 안심했던 쓸쓸한 기억이 있다.

이 기억은 어쩌면 조작일 수 있다

나는 찡얼거렸을 수도 있고 엄마에게 야단을 맞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전에 엄마가 나에게 먼저 간다고 말하고 갔을 수도 있고

가자고 등을 밀었는데  내가 고집을 피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무엇이건 내게 박힌 기억은 그냥 내가 묻어버렸다는 것이다.

무서워서 못따졌다는 것뿐이다.

나는 버려질까 두려웠던 걸까?

 

그리고  영화의 첫 장면에서 애타게 엄마를 부르는 은희를 보며 그 기억을 떠올렸다.

사실 돌아보면 별거 아닌데 그 순간 왈칵 두려움이 덮치는 순간  그게 뭔지 나는 안다.

아닐거라고 굳게 믿지만 만에 하나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

나중에 멋적고 싱겁고  그러면서도 왠지 슬퍼져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

나는 첫 장면에서 공황같은 감정을 느꼈었다.

 

은희는 늘 누군가와 닿고 싶어 했다.

가족과 닿고 친구와 닿고 누군가 다정한 단짝을 만들고 좋아하는 남자친구와 닿고 그리고 영지선생님을 존경하고 닿고 싶어했다.

아이가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님을 알게 되면서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는 슬픈 사실을 알게 되면서 세상에서 떨어져나갈것을 두려워한다.세상과 연결되는  방법은 타인과 관계를 맻는 것이다.

가족이 되고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누군가를 가지는  일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인정받는 일 

그게 살아가는 목표가 된다.

인정받기 위해 공부하고 착한 아이가 되려고 하고  무조건 튀려고 하고 센척 하고 자기의 약함을 숨기거나 노골적으로 드러내거나 그런다. 인정받고 싶어서 연결되고 싶어서

그러나 세상은 공평하게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

아이들은 그저 놀고 먹고 자고 단순하다고 믿는 어른들이  아이들이 뭘 알겠어하지만  아이들도 나름 치열하게 애써야 한다.  다만 어른들은 자기들도 그랬다는 걸 잊었거나 잊은 척 하거나 할 뿐이다

 

은희의 가족이 유달리 콩가루인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나름 단단하고 화목한 편이다. 아버지는 책임감이 강하고 어머니는 묵묵하게 제 역할을 견딘다. 강남에 살면서 학교를 떨어져서 강북으로 고등학교를 다니는 언니가  집안의 유일한 문제아인것은  그만큼 문제 없는 괜찮은 가족이라는 증명이기도 하다. 다만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  가족끼리의 폭력을 폭력이라고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아버지의 가부장적인  폭언들, 무시와 강압이 그냥 당연했고 손위 오빠가 여동생에게 손을 대는 건 그냥 아이들사이의 다툼의 한 가지일 뿐이다. 오빠 밥은 당연히 동생이 챙겨야 하고 아버지의 말은 법이다 어머니는 그냥 모른 척하고 견디고 외로울 뿐이라. 딸 아이들의 빈 마음을 다  마져주기에도 힘겹다. 굳이 가족끼리 대화하지 않아도 함께 밥상에 앉아 밥을 먹는 것만으로도 화목한 우리집을 그려낼 수 있다. 대화는 일방으로 흐로고 침묵은 긍정이고 착한 자녀의 표본이다.

 

학교에서선생님들의 무지한 폭언도그냥그냥 일반적이다

날나리가  되지않고 대학을 가야 당연한 학생이다.남자친구를 사귀고 노래방을 가는 것은 날나리가 하는 일이고 공개적으로 날라리를  적어내라는 폭력이 발생한다. 당연하게

어른들의 잣대대로 아이들은 생각하고 행동한다.

공부를 못하고 잠이나 자고 남자를 만나는 친구는 당연히 날라리고 커서 파출부나 할 아이라고 어른처럼 믿으며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하는 공포감으로 나와 그 아이를 구분한다 그건 어른들이 바라는 교육의 방향이기도 하다

그런 중에도 은희는 엄마가 만들어주는 감자전을 먹을 수도 있고 언니와 은밀하게 교감도 나눈다. 오빠의 폭력은 얼른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견뎌야 하지만 그래도 견딜만한 것이 있다

학교에서는 왕따일지라도함께 트림벌린을 뛰고 학원을 가고 콜라텍을 갈 지숙이 있고 나름 자기를 예뻐하는 남자친구도 있다. 다만 모든 관계가 단단하지 않을 뿐이다

언니는 더 중요한 바깥 관계가 있고 어마는 늘 바쁘거나 힘들다.

순간의 두려움으로 친구가 나를 배신할 수도 있고 어른들의 편견으로  남자친구가 없어질 수도 있다 나를 좋아하던 누군가가 계절이 바뀌어서 마음이 바뀌어서 나를 멀리하는것도 일상일 수있다

화면속에서 은희는 지숙이나 남자친구 자기를 좋아하는 후배와 한 화면에 나오지만

은희가  가장 말갛고 편안한 자기 얼굴을 갖는 순간은 혼자 있는순간이다

혼자 병원을 가고 혼자 시술을 받고 혼자 입원을 하고 혼자 걷고 돌아오는 순간들 말이다

그 혼자일때도 누군가와 닿고 싶지만 의외로 편안하기도 하다

누구에게 맞출 필요없이  그냥 은희 그 자체의 얼굴이면  된다

은희는  혼자를 잘 해내기도 한다.

그러나 열다섯의 은희는 모를 것이다.

자기가 혼자 잘 해내고 있다는 걸 그게 나쁘지 않다는 걸 알게 되는 건 더 이상 어리지 않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고 여기는 건 슬프지만 괜찮기도 하다.

아직 어린 은희는 그걸 다행히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함께 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좋은 일이라고 믿을 것이다. 그게 영원할 수 없겠지만 오래 지속되기를

 

그리고 명지 선생님.

은희를 알아봐주고 말을 들어주고 눈을 맞춰주고 뭐라고 충고하지 않아도 은희가 듣고 싶었던 말을  해주었던 사람 그 사람이 있었다.

누구에게도 연결되지 못하거나 가늘고 위태롭게 이어져오던 은희가 단단하게 매듭을 묶고 머무르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내가 그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처럼 그는 내 이름을 정확하게 불러주고 내 말을 들어주었던 사람이다.

 

얼마전 아이에게 들었다.

인터넷에  개인주의자 검사를 하는 문항이 있는데 그걸 보니 자기는 지독한 개인주의자란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이해할 수 없고  남의 감정을 잘 알기 히들고 오래 관계가 지속되면 피곤해지고  혼자가 더 편하다는 것  통화보다는 톡이나 문자기 더 편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남의 감정에 쉽게 개입하지도 않고 내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   그게 개인주의자란다.

그런데 요즘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위 문항에 나도 다 해당이 된다

오히려 위 문항에 맞는 사람을 쿨하다고 멋지다고 하지 않나?

먼저 다가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그냥  다가 오지 말라 나도 다가가지않겠다며 자기 바운더리를 지키고 맞춰주는 것 그게 예의고 멋진 일이 된다.

한때는 우리 모두가은희였으나 이젠 적당히 멋지고 피곤한 개인주의자들이 된다.

외롭긴 해도 덜 위험하고 덜 해롭다.

은희가 자라 스무살이 되면 멋지지만 쓸쓸한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될까?

영지 선생님처럼 쓸쓸하지만 따뜻한 이웃이 될까

어쩌면 이 둘은 같은 타인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인트 (반양장) - 제12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89
이희영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장 좋은 부모는? 
남의 부모다.
가장 좋은 자식은?
남의 자식이다.
말장난같지만 항상 남의 떡이 더 커보이는 법이니까

한국의 어느 미래 사회.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아이를 낳아 기르려고 하지 않는다. 출산율은 줄어들고 미래가 어둡다. 국가는 정책을 결정한다.
이제 아이는 나라에서 책임지고 키우겠다.
아이를 낳은 성인들이 아이의 부모가 되어 키우고 싶다면 키워도 좋다.
아이를 낳았으나 키우고 싶지 않다면 국가가 관리하고 양육한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13세가 되어 누군가 부모가 되고 싶어하는 커풀이 있다면 면접을 보고 부모가 될 수 있다. 다만 선택은 아이에게 있다.
국가에서 관리되고 양육된 아이들은 13세부터 부모를 찾고 가정으로 들어가 일반 아이들처럼 자랄 수 있다. 만약 19세가 되도록 부모를 찾지 못한다면 국가양육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그 미래에도 나와 다른 타인은 차별받고 별종으로 몰린다. 
어쩌면 왠만한 가정에서보다 더 과학적으로 확실하게 케어받았던 아이들이 다만 부모가 없다는 이유로 세상에 나오는 순간 다른 타인이 된다.
그러므로 그 전에 모든 아이들은 부모를 찾아야 한다.
부모를 면접하는 것을 페인트라고 한다. 
부모가 되를 원하는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나누고 부모로 결정하는 것은 가디의 조언을 받은 아이들이 결정한다.

이제 18세가 된 제뉴301은 더 늦기 전에 부모를 만나야 하지만 부모를 결정하는 일에 늘 시큰둥하고 시니컬하다. 부모가 되기 위해 잘 보이려는 커플의 그 속속이 너무 잘 보이고 어떤 부모도 만족스럽지 않다.
그리고 책을 읽는 나는 좋은 부모란 어떤 부모일까? 그리고 부모 자식간의 관계는 좋은 부모만으로 될 수 있을까 생각한다.
보통의 부모는 자식을 선택할 수 없고 자식도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흔히 자식은 부모를 선택할 수 없고 태어나 보니 저 사람이 내 부모인 것은 내 책임이 아니라고 말한다. 미숙한 존재로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기간이 긴 사람에게 부모는 한때 절대적인 존재다. 나의 생명을 책임지고 정서적 물리적 만족감을 채워 성장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해주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어리고 약한 아이들은 거부할 수 없고 순종해야 하는 기간동안 부모는 절대적이다. 따뜻한 사랑과 관계를 배우기도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거나 불안과 공포를 줄 수도 있다. 어리고 약한 아이의 입장에서 선택할 수 없어 받아들이게 되는 부모의 존재는 대단하다. 
그러나 입장을 바꾸어 보면 부모도 자식을 선택할 수 없다.
내 아이가 나의 유전자를 닮아 나와 비슷한 성정과 외모를 가지고 태어나겠지만 나랑 닮았을 뿐이지 나는 아니다. 어떤 아이가 나올지는 부모도 알 수 없다. 태어나면서 처음 만나고 키우면서 알아갈 뿐이다. 
서로가 처처음 알아간다는 것은 미숙하고 실수를 하고 상처를 줄 수 밖에 없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도 다시 돌아보고 다시 안아죽주고 이해햐려는 과정의 반복들이다.
한없이 미워질 수도 있고 너 없으면 이제 못살 거 같은 끈끈함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그렇게 미움움도 사랑도 켜켜이 쌓이면서 관계는 단단해진다.
다만 그 과정을 무탈하게 겪을 수도 있고 돌이킬 수 없이 엉망일 수도 있다


이제 제뉴처럼 커버린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어릴적 서운했던 경험을 이야기 할 때가 있다. 그때 엄마가 동생만 원하는 걸 들어줘서 너무 소외감을 느끼고 외로웠다는 이야기
사실 나는 공주 드레스가 갖고 싶었는데 엄마는 내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마술사 망또를 사줬다는 이야기 
엄마가 좋아하는 보라색 꽃이 그려진  그 원피스가 정말 진저리치게 싫었다는 이야기 
그때는 어려서 몰라서 말하지 못했던 서운함과 외로움 두려움을 들을 때면 당혹스럽다.
나는 잘 해주려고 했었는데
나름 너무 여성적으로 키우고 싶지 않아서 중성적인 캐릭터를 심어주고 싶었고 
비싸고 고급스러운 스타일을 골라주고 싶었던 것 뿐인데 
아이는 그런 내 선택을 너무 싫어했었다고 한다. 10년도 훨씬 지나서
그 때 아이 의사를 물어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옳다고 믿은 나름의 양육태도도 있었을테고 뭔가 정칮치적으로 옳음을 실천한다는 뿌듯함이나 합리적인 결정이라고 여겨 아이의 의사를 쉽게 잊었던 것들이 있었겠지만 나로서는 사소한 부분이었는데
아이에게는 그게 외롭고 쓸쓸하고 인정받받지 못하는 기분으로 남아있다.
그게 아닌데
의도와 다다르게 닿는 이런 정서적인 부분도 비일비재한 게 부모와 자식이다.
좋은 것 바른 것만 주고 싶은 마음이 간섭이 되고 강요가 되고 일방적인 지시가 된다.
그리고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는데 상처를 주고 받는다.
제뉴의 이야기  그리고 하나와 해오름의 이야기 가디인 박의 이야기를 읽으며 부모란 어떤 존재여야 할까 생각한다. 생각할 수록 그건 쉬운일이 아니라고 자꾸 도망가고 싶다.
아이를 키우면서 뿌듯함 만큼 늘어가는 건 미안한 마음이다.
잘 해줘도 미안하고 무심해도 미안하고  아이가 의젓하면 너무 빨리 눈치를 보게 만드나 싶어 미안하고 아이이답게 이기적이고  무심하면 내가 잘못된 모델이 된 게 아닐까 또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은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고 서운하다는 말만 자꾸 꽃혀서 미안하고 돌아보 스스로 한심하고 짜증나서 다시 그 부정적인 감정을 전해버린다.
부모도 참 힘든데

책이 아쉬운 것은 다들 너무 생각이 많고 착하다는 것
누구하나 삐뚤어지거나 순간이라도 악한 마음을 품은 인물이 없고 다들 순하고 생각이 많고 반듯하다. 그래서 읽다보면 재미가 없고 지루하다.
부모를 면접하고 선택하는 시스템이라는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왜 이렇게 공공드라마같은 분위기로 풀어버렸을까? 작가가 좋은 부모란 무엇인가에 대해 너무 고민이 많았던게 아닐까 


아이를 키우다 보면 5세 전에 아이가 주는 즐거움이  나중에 미운 7살을 지나 사춘기가 와서 지랄지랄을 할때의 증오를 다 상쇄해준다는데 그리고 내 경우도 그러한데
그런 이쁜 기간동안 잘 모아놓은 기쁨도 없이 그리고 함께 미운 기간동안 애증을 쏟아붓는 처절함도 없이 이제 어느정도 대화가 되고 적당히 가리고 적당히 맞추주는 능글맞은 17세의 자식이 생긴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건 정말 하나와 제뉴의 말대로 부모 자식의관계라기보다는 그냥 친구같은 게 아닐까 싶다. 
미워서 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골백번 들더라도 잠들었을 때, 아기때 그 무방비의 천진함이 여전히 남은 얼굴을 보면서 모든 걸 싹 지워버리는 그런 기분 
뭐 이 얼굴 하나면 되지 않나 싶은 마음
이전의 모든 악전고투를 다 잊어버리는 그 망각같은 것들
그게 그래도 부족한 내가 20년동안 부모노릇을 하게 만드는 힘이었는데 
힘든 건 쉽게 잊고 좋은 건 오래오래 나 편하게 편집해서 기억하게 되는 마법
그것이 부모를 부모로 계속 살아가게 만드는 묘약이다
그런 것 없이 어느 순간 각성해서 부모와 자식이 되는 일.. 그건 
참  생각햅해볼 문제다.

좋은 소재였고 아이디어였는데
캐릭터들이 이렇게 재미가 없다니. 
그냥 부모교육지침서로 흘러가버린 게 많이 아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 현재의 이야기이기도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퍼펙트 마더
에이미 몰로이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단 한번의 외출이었다

사실 내키지 않았다 태어난지 8주밖에 되지 않은 아기를 집에 남겨두고 엄마라는 사람들이 모여 술을 마신다는 건 썩 내키지 않는다. 죄책감도 들고 이런 건 아니지 않은가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쪽, 엄마는 사람이 아닌가? 임신과 출산을 겪는동안 그리고 8주간의 육아동안 내가 나 답게 살아본 적이 있던가? 아니 나 답게는 고사하고 사람처럼 살아본 적은 있던가?

늘 잠은 모자랐고 모유를 짜느라 가슴은 쥐어뜯어질것처럼 고통스럽고 내 아기만 발달과정에서 뒤쳐지는게 아닌가 싶고 분유를 먹여야 한다는 건 죄스러운 마음만 갖게 한다 아이에게 눈을 떼어서도 안되지만 동시에 임신기간에 쪘던 살도 빼야 하고 매력적인 여성으로도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출산 이전의 자기 커리어로 돌아와야 할 의무가 있다. 나만 바라보는 어리고 여리고 애틋한 생명체를 떼어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비인간적인가 싶으면서도 이렇게 육아에 발목잡혀 내 인생이 그냥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지는 꼴을 겪고 싶지도 않다.

아이를 열달을 품으며 조심하고 또 조심하고 출산의 고통을 겪고 양육을 하면서  무얼하든 죄스럽고 미안하고 짠한 감정만 남는다.아기때문에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지만 오롯이  그 정서를 누리기 위해서는 내가 좀 더 힘들고 애쓰고 참아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것이 양육이었다.

 

뉴욕 브로클린에 사는 엄마들도 다르지 않았다.

결혼 전에는 마놀라블라닉을 신고 스타벅스 커피를 들고 또각또각 걸어다니던 시절이 있었더라도 엄마가 되는 순간  늘어지고  젖냄새를 풍기는 셔츠를 입고 고무질 바지를  허리 근처에 고정시키고  이것저것 쓸어담은 기저귀 가방을 한 쪽에 매고 아기를 안고 혹은 유모차를 밀며 조심스럽게 다녀야 한다. 그건 어디나 똑같다.

5월맘들도 그렇게 8주를 보냈고 애썼고 그리고 딱 한 번 일탈을 하려고 했을 뿐이다.그냥  엄마가 아니라  아니 엄마이지만 그냥 아이를 데리고 있지 않은 엄마로 밤에 외출을 하고 술을 한 잔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날 밤  싱글맘 위니의 아기가 유괴되고 엄마들의 비밀이 밝혀지고 삶이 뒤죽박죽이 된다 그러나 결국 엄마들은 강하다고 ... (이 말은 정말 싫지만) 하고 싶었던지 무능력한 경찰대신 엄마들이 사건을 파헤친다. 아기를 잃었다는 고통을 그들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아기를 누가 데려갔는지 그유괴가 어떻게 된건지보다 사건을 따라가는 세 엄마의 이야기가 더 매력적이다.콜레트와 넬과 프랜시의 집착과 광기까지 보이는사건에 대한 관심과 노력 그리고 흔하지않은  남성 가정주부 토큰의 스토리까지

남의 일 같지 않은 비보에 함께 머리를 맞대고 아기를 찾기 위해  고전분투 하고 또 제각각 자기 삶을 살아야 한다. 겨우 9주 지난 아기들은 아직도 엄마를 필요로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도 있고 같은 부모인 아빠가 있지만 아빠에게 아기를 맡긴다는 것은 옳은 일 같지 않다. 그냥 도와주는 것 이상 믿을 수도 없고 책임을 나눌 수도 없다. 오롯이 육아는 엄마가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

눈아래 다크 서클과  수면부족으로 인한  피부 처짐이나 곤두서는 신경을 누르고 일터로 돌아가지만 믿을 만한 주부가 없는 여자들은 일터에서는 아이가 눈에 밟히고 집에서는 마무리 하지 못한 일이 자꾸 걸린다. 아무것에도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 미안하고 두렵고 힘들지만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 수 없다

엄마들은 그렇게 점점 어깨에 진 짐의 무게를 늘려갈 뿐이다.

 

 

이야기는 잘 마무리되고 모두가 행복하게 다시 자리로 돌아가고 5월맘 모임도 잘 되어가고 있다고 책은 끝이 나지만 정말 그럴까?

그녀들의 아이는 이제 겨우 1살이 되었을 뿐인데.

그냥 한숨돌리고 조금 육아에 익숙해진 것 뿐 아직도 삶은 길고 지루하고 두렵게 남아있을테니까

 

늘 궁금하다.

내가 경험했고 경험하고 있는 중임에도 늘 의문이다

왜 엄마들은 아이들 옆에서 종종거리고  모든 것을 해주고 싶어 하면서도 모멸감과 죄책감을 벗어날 수 없고 아빠들은 어느 한 순간 내 기분이 좋을 때 한번 선심쓰듯 베푸는 육아에 모두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감탄하고 찬사를 보내기만 할까?

그러지말아야지 하면서도 무심코 저절로 드는 그 감정은 어디서 오는걸까

 

이야기는  끝이 나지만 현실의 이야기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퍼펙트 마더라는말...

어느 경지에  이른다면 완벽하다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을까?

완벽함을 찬양하는 동시에 완벽할 수 없는 대다수의 엄마들을 절망하게 만드는 단어 이며 정의인 이 말이 왜 father에게는 쓰이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콤한 노래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방미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리엄은 두 아이를 키우며 육아에 지쳐있었고 우연처럼 기적처럼 새로운 일을 제안받는다. 육아가 아닌 일로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은 마음은 미리엄을 일을 하기로 하고 보모를 구한다. 처음 누군가 타인을 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내 생활을 드러내야 하고 타인을 내 생활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때 나타난 루이즈는 완벽한 존재였다.

희미한 그녀의 이미지는 절대 미리엄의 완성된 삶에 도드라지지 않았고 그의 육아는 완벽했으며 육아뿐 아니라 살림까지 반짝하게 빛을 낸다.

일은 성취감을 주고 삶에 여유를 주고 남편 폴과의 관계도 원만하게 다시 충족된다.

모두가 루이즈 덕이다.

완벽한 일과 완벽한 가정 모두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루이즈 덕이며 동시에 이 모든 것이 나의 성공이고 나의 능력이라고 착각한다.

그리고 그 완벽한 성취감앞에서 루이즈는 정말 소중한 존재이고 사랑스럽다.

 

그리스 휴가를 함께 다녀오고 난 뒤였을까

루이즈는 슬슬 완벽한 가정에서 이물감을 남긴다.

완벽한 화장과 옷차림. 티끌 하나 없는 살림살이. 부모보다 보모를 더 따르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어쩌면 미리엄과 폴은 완벽한 삶을 위해 이제 루이즈를 덜어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어서 루이즈가 없는 상황이 생생하게 상상된다. 쉽게 떼어낼 수도 없고 받아들이기도 껄끄러운 것 그게 루이즈가 되어버린다.

 

아무것도 자기것을 가진 적도 없고 누군가와 친밀한 교류도 없이 딱딱한 자기 껍질에서 쉽게 나올 수 없었던 루이즈.

그녀에게 미리엄과 폴의 가족은 다정하고 완벽한 공간이고 관계였다.

그 관계속에 그 공간속에 내 자리를 갖고 싶다는 마음

어떤 것도 욕심내지 못했던 루이즈에게 그 가족은 가지고 싶고 속박되고 싶은 대상이다.

이제 떼어버리고 싶은 미리엄과 이제 들어가고 싶은 루이즈는 서로 타인이다

그리고 비극이 생긴다.

루이즈는 미리엄과 폴을 잘 알지 못했고 폴과 미리엄도 루이즈를 몰랐다.

가족처럼 격의없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건 찰라였고 여전히 타인이었다.

책을 다 읽고도 루이즈는 잡히지 않는다.

책 속에서 툭툭 던져놓듯이 순간을 빠르게 포착한 크로키처럼 묘사되는 루이즈는 조각조각 숨어있다. 그 조각들을 맞추어도 정말 중요한 단서들이 빠진 그래서 그 인물 전체를 볼 수 없는 상황, 사건을 앞에 둔 나나 경감처럼 여전히 그녀는 안개속에 있다.

 

나는 그녀를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알고 싶지 않다.

우리는 서로 관계가 없을 때 가장 편안하고 안전하다.

나는, 그에게 타인이다.

그는, 나에게 타인이다.

그냥 아는 사이일 수는 있지만 알지 못한다.

어디에 살고 누구와 친하고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고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알고싶지만 동시에 알고 싶지 않다.

그가 내 영역에 침범하지 않기를 바라듯 나도 그의 영역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

타인을 알기가 어려운 것은 우리가 사실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모르는 것이 안전하니까

미리엄과 폴은 루이즈가 필요하다.

그들 삶에 쉼표가 필요하고 계속 원할한 지냉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더 할 나위없이 소중하고 필요한 루이즈지만 그녀는 나의 가족이 아니다.

그냥 딱 그만큼의 거리에서 딱 필요한 만큼의 관계를 원할 뿐이다.

루이즈도 자기를 모두 보여주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스스로 연기하고 있다.

만나고 걷고 생활하는 루이즈는 누구에게 자기를 보여주지도 않고 드러내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모르는 것같기도 하다.

그냥 혼자 견디는 것이 가장 쉬웠고 그냥 눈감는 것밖에 아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책을 다 읽고 우리는 폴과 미리엄을 알게 되지만 루이즈는 끝내 알 수 없다. 그녀가 스스로 말을 해줄지 아닐지조차 미지수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그녀를 모른다. 아무도 그녀를 모른다.

그리고 그녀가 궁금하지만 동시에 그녀를 알게 되는 것이 두렵다.

 

누군가를 알게 되는 것

그에 대한 무언가를 알게 되는 것이 나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고 내 정서를 건드릴 수 있다는 것은 두렵다.

모두 외롭게 때문이다.

누군가 나를 알아주길 바라면서 동시에 알지 못하길 바란다.

같은 마음으로 그를 알고 싶지만 아는 것이 두렵다.

가끔 나도 루이즈처럼 나를 증명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

이렇게 점점 희미해져서 사라지면 좋겠다 라는 마음과 그러면 어쩌나 하는 두려운 마음이 동시에 내 속에 있다.

 

타인을 알고 싶어하지 않은 마음이 상대에게 닿아 상처가 된다.

상대에게 닿아 그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마음 역시 상대를 불편하게 한다.

누구도 폭력을 의도하지 않았으나 폭력이 일어날 수도 있다.

불안하고 두려운 개인들

다른 누구를 알고 받아들이는 것이 버거운 개인들이 자꾸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받는다.

미리엄의 불편과 이질잠이 루이즈에게

루이즈의 지나친 친절과 완벽함은 미리엄에게 깊이 숨겨진 불안이 건드려진다.

엄마의 위치를 침범당하고 있다는 두려움 불안과 다정한 가족의 일원이 되고 싶은 소망

그 두가지 욕망이 충돌되면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서로에게 주지도 않았던 상처를 받는다.

 

타인을 안다는 건 어떤 것일까?

나의 바운더리를 안전하게 지키는 동시에 타인을 수용하는 일은 불가능할까

무심히 읽은 책인데 불안하고 두려워서 생각이 많아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