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11, 12권에 걸쳐 가장 마음 아팠던 것은 역시 봉순이의 말로다. 

오랜만에 등장한 주갑의 모습을 보며, 문득 주갑과 봉순이 몹시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은 명창의 자질을 타고났다. 봉순은 어릴 때부터 즐겨 노래를 부르고 사당패들의 공연을 따라하곤 했는데, 엄마 봉순네를 비롯한 어른들이 저러다 사당패 되거나 기생 될 거라며 걱정을 했더랬다. 땅속에 묻힌 봉순네가 가슴을 칠 일이지만, 그 말대로 봉순이는 기생이 되었다. 주갑 역시 어릴 적 명창이 되겠다는 말을 들었으나, 먹고 살 일이 바빠 그 길로 나설 수 없었던 아쉬움을 품고 있다. 

둘은 역마살을 타고났다. 봉순은 기생이 된 후 한곳에 자리잡지 못하고 계속 떠돈다. 남자들 시선을 빼앗도록 타고난 요염함, 거기에 명창의 자질까지 있어 많은 기회가 찾아오지만, 진득이 붙어있지 못하는 성미와 욕심 없는 마음 때문에 명기도 명창도 되지 못한 채 떠돌다가 기생으로서 너무 많은 나이가 되어 버린다(30대?). 주갑 역시 가정을 이루거나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떠돈다. 전라도 출신인 그는 간도에 와서 돌아다니다 용이를 만나 용정에 잠시 머물지만 우연히 만난 한의사를 따라 떠돌다가 독립운동을 하면서 또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주갑이 봉순이를 보고 반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하지만 그들이 간 길은 너무 달랐다. 

주갑은 떠돌며 기회가 닿을 때마다 명창의 소질을 살려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사람들은 주갑의 노래를 들으며 '어쩌면 저렇게 고귀한 것이 저 사람 안에 있을까'라거나, '한마리 학 같다'라며 감탄한다. 그는 창으로 돈을 벌지는 못했으나 이미 명창이고, 온 나라 발 닿는 땅이 그의 무대였다.

그러나 봉순이는 어떤가? 주갑이 냇가에서 멋드러지게 노래하는 모습을 봤을 때도 봉순이는 참여하지 않는다. 그녀는 길가에서, 주막에서, 아무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지 않는다. 기생은 돈을 받고 노래하는 사람이기 때문일까. 그보다는 여자가 아무데서나 노래하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던 게 아닐까 싶다. 


이들이 타고난 '기질'은 중요한 부분에서 이렇게 유사하다.

그러나 봉순이가 기질을 살릴 수 없었던 것은 성별 때문이었다. 여자는 결혼하지 않고 기생도 되지 않은 채 발 닿는 대로 떠돌면서 살 수 없었다. 그녀가 택할 수 있는 길에 주갑이가 간 길은 없었다. 그나마 타고난 소질을 살리기 위해 기생이 되기를 택했지만, 그녀는 늘 '관계'에 덜미를 잡혔다. 봉순이가 타고난 다정한 성정 탓도 있지만, '관계'가 주갑의 덜미를 잡지 않고 봉순이의 덜미만을 잡은 것은 그들의 성별 차 때문이다. 이 시대 남자들은 결혼하고도 마음대로 집을 떠나 돌아다닐 수 있었다. 홍이가 아버지 용이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만주로 갈까 말까 고민할 때, 가족을 두고 혼자 떠날까봐 전전긍긍하는 홍이의 아내 보현에게 오라비인 범석은 "가장이 한다면 하는 거지 바깥일에 간섭하는 거 아니다" 따위의 말을 한다. 그런 시대였다. 

봉순은 봉순네가 죽은 후 최참판댁을 떠날 수 있었다. 묶인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언제든 훌쩍 가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봉순이는 서희와의 관계 때문에 주저앉았다. 기생이 된 후 그녀는 어떤 못난 양반과 잠시 살다가, 서울에 가서 서의돈과 관계를 맺는데, 딱히 사랑할 만한 인물이 아님에도 그를 받아주고 위로해주는 봉순이. 이어 이상현의 방황하는 시기에도 따뜻한 위안이 되어 주는 봉순이.. 아.. 정말 안타까워 죽겠다. 결국 또 그 관계에서 생긴 아이가 봉순의 덜미를 잡는다. 기생답게 남자들 주머니에 관심을 갖지 못하고, 인간으로서 그들을 대했지만 결국 그들은 봉순이를 기생으로밖에 보지 않았다. 타고난 기질과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갈팡질팡 하다가 결국 파멸하는 봉순이가 만일 남자였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키츠가 자신의 소네트에서 시가 모든 곳, 즉 자연의 모든 것에 있듯이 자신에게도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건강함과 기쁨을 표현할 수 있었던 까닭은 적어도 자신이 창조의 주인이라는 남성적 확신 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모드/로세티는 자신을 연약하고 허영심만 가득한 여자로 보았고,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라 고통받은 하인으로 여겼다. - 939쪽 


<다락방의 미친 여자> 15, 16장에서 다루는 여성 시인과 남성 시인 사이의 분명한 태도 차이는 인상적이었다. 엘리자베스 배넛 브라우닝, 크리스티나 로세티, 에밀리 디킨슨처럼 자신의 재능을 분명히 인식한 사람들도 여성으로서의 한계, 모순, 분열에 부딪혀 예술 속에 왜곡된 자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왜 휘트먼처럼 당당하게 "나는 나를 찬양하고 나를 노래하노라"라고 외치지 못하는가.(근데 너무 밥맛이지 않나..) 봉순이는 관계에 얽매여있다가 관계가 끝나면(남자가 떠나면) 떠나고, 다시 관계에 얽매이는 걸 반복한다. 그런 그녀는 결코 명창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야망도 꿈도 없고 그저 자신을 내어주기만 해서는. 



<제인 에어>를 절반 정도 읽었다. 번역 오류나 비문은 그 뒤로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오타는 하나 있었던 듯.

다시 읽는 제인 에어는 새로운 느낌이다. 제인 에어가 타고난 기질 - 호기심에 차 있고, 부당한 것에 굴복하지 않고, 따져 물으려 하는-  에 대해 게이츠헤드는 감금으로 벌한다. 감금 상태를 벗어나 로우드 기숙학교에 들어간 제인 에어에게 보다 부드럽고 완곡한 방식의 구슬림으로 그녀를 '정숙한 숙녀'를 키워내려는 시도가 시작된다. 그러나 존경하는 마음으로 따랐던 템플 선생님이 결혼하여 떠나자, 감춰온 그녀의 기질은 다시 고개를 든다.



그때 내가 다른 사람으로 변해 버렸음을 깨달았다. 생각에 잠긴 사이 내 정신은 템플 선생님께 빌려 온 것을 모조리 버렸다. 아니, 오히려 템플 선생님이 떠나면서 그녀 옆에서 느꼈던 차분한 분위기까지 사라졌다는 게 맞는 말이다. 이제 나는 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예전의 감정이 꿈틀대는 느낌이었다. (...) 몇 년 동안 로우드가 내 세계였고, 그곳의 규율과 체제가 내 경험의 전부였다. 이제 나는 진짜 세상은 넓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희망과 공포에 찬, 감정과 흥분으로 들끓는 다채로운 삶의 현장이 그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위험 속에서 진정한 삶의 지식을 찾아낼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기억해 냈다.  - 121쪽 


그렇게 안정되고 편안한 로우드에서의 선생으로서의 생활(학생이었다가 후에 선생이 됨)을 등지고, 홀로 결단을 내려 광고를 내고 가정교사 일을 찾아 손필드 저택으로 가는 제인 에어의 모습을 보며, (그리고 아직 읽지 않았지만 알고 있듯이 변화를 일으키는 그녀의 선택들을 생각하면) <가치 있는 삶>에서 마리 루티가 말하는 삶의 모습을 실현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진다. 



 자아란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결정한 실천적 선택들이 모여서 창조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새롭고 무한한 실존적 가능성을 성취해 낼 수 있는 기회가 우리 앞에 펼쳐진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방향대로 삶을 이끌 수 있는 능력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게 된다. (결국, 구성되어 있던 것이 재구성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이상에 부합하는 선택을 반복적으로 내리다 보면,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느껴지는 삶을 이룰 가능성이 커진다. - P236


 우리는 불안이 삶에 침투하도록 내버려 두면 큰일이 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삶에서 "균형"을 추구할수록 우리는 더욱 사회와 동떨어지고, 삶은 더욱 단조롭고 지루해진다. 실존적 균형이라는 이상을 추구할수록 우리의 기질은 더욱 억제된다. - P249


 결과적으로 실존적 투쟁에 어떤 "요점"이 있다면, 사회가 제공하는 명쾌한 해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 해답은 우리를 기만할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삶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그 의미는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의미 있는 삶의 모습에 도달하기 위한 우리의 끊임없는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다. - P253



한편, 손필드에서 드디어 등장한 로체스터. 그의 어린 가정교사 꼬시기가 시작되는데... 하... 아직은 탄탄한 중년 사내, 부유하고 지위 높고 경험 많은 남자가 젊음 빼고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미모조차) 경험도 없으며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아는 여자를 유혹하기가 얼마나 쉬운가. 은근슬쩍 자신의 젊은 날 잘못을 고백하면서 연민을 자극하고 그러면서도 진짜 중요한 잘못은 숨기는 교활함이라니. 



"(...) 내가 좀 더 굳건했으면 좋았을 것을. 내가 그랬기를 신이 얼마나 바라는지 알고 있소! 에어 양, 유혹에 빠져 잘못을 저지르면 끔찍한 후회가 밀려든다오. 후회는 인생의 독이오."

"참회가 인생의 치유제라고들 하는데요."

"치유제는 아니오. 아마 개심은 치유제가 될 거요. 그리고 개심할 수도 있고. 아직은 개심할 힘도 있소. 하지만 나처럼 방해물이 있고 부담을 져야 하고 저주받은 사람이 개심을 생각해 봐야 무슨 소용 있겠소? 더욱이 내게는 절대로 행복이 주어지지 않을 테니, 인생의 쾌락을 누릴 권리가 있는 거요.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든 쾌락을 추구하겠소."   -  197쪽 


제인 에어는 모르는 척 순진하고 선을 넘지 않는 대답으로 벽을 치지만 마음은 순식간에 그에게 넘어간다. 

우리가 흔히 보던 나쁜 남자 캐릭터가 이미 이때 있었구나. 난 착한 놈이야, 하는 놈 치고 믿을 놈 없다지만 난 나쁜 놈이야, 하며 되려 자기가 상처받은 척하는 놈은 더욱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상현에게 넘어간 봉순이가 다시 생각난다... ㅠㅠ 봉순이... 크흐흥..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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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3-01-31 14: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주갑과 봉순을 비교해볼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독서괭님 글 보니 성별이 그 차이구나 싶네요.
이상현이 서희에게 상처를 받고... 그렇기도 하지만 또 원래 좀 나약한 캐릭터라서 전 맘에 안 들더라고요.

어쨌든.. 로체스터의 여자 꼬시기 정말... <제인 에어>를 여학생 필독서로 지정하고 싶어요.

독서괭 2023-01-31 18:09   좋아요 0 | URL
아 이상현 저는 너무 싫더라구요. 서희랑의 이야기를 ‘여자한테 당했다‘는 식으로 -주변인들이 그렇게 말하는데 부정 안 하고 씁쓸한 표정 짓기- 생각하는 거 되게 짜증나요. 그럼 지가 유부남이면서 서희랑 어쩌려고 했던 건지 어휴. 이혼도 못할 거면서 가족은 생전 안 챙기고 혼자 자기연민에 빠져서 여기저기.. 너무 싫습니다. 그 시대 룸펜들이 이랬을까 싶긴 한데요.
<제인 에어>를 읽고 페미니즘 해설을 덧붙이면 너무 좋겠습니다!^^

다락방 2023-01-31 16: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쩐지 눈물콧물 흘리면서 봉순이의 이름을 외치고 싶네요. 서희랑 나이 차이 몇 살 나지도 않는데 꼬박꼬박 시중드는 삶인것도 참 마음이 안좋았어요. 아. 여성과 계급이란 무엇일까요 ㅠㅠ

독서괭 2023-01-31 18:10   좋아요 0 | URL
아 증말 봉순이 너무 안타까워요 ㅠㅠ 서희보다 나이도 위인데 서희 승질 받아주면서.. 그게 후에는 남자들 받아주는 걸로 ㅠㅠ

잠자냥 2023-01-31 17: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엮어쓰기의 달인 괭!

독서괭 2023-01-31 18:10   좋아요 2 | URL
달인까지?? 달인을 목표로 계속 엮어보겠습니다 ㅋㅋ

단발머리 2023-01-31 1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슷한 기질, 비슷한 재능의 주갑과 봉순이 성별 때문에 다른 길을 가게 된 것을 설명해주신 부분을 읽노라니, 마치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의 셰익스피어의 여동생이 떠오르네요. 저는 아주 예~~~~~ 전에 읽어서 사실 주갑이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이제 봉순이랑 엮어서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거 같아요. 이런 좋은 글을 무료로 읽네요!!!

제가 로체스터를 좀 아쉬워하는 마음이 있기는 합니다만, 독서괭님 페이퍼에서는 처참히 부서지네요.
지켜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로체스터 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3-02-01 12:10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주디스 셰익스피어 이야기 참 인상적이었어요. 다락방의미친여자에도 언급되어 반가웠고요. 저는 주갑이 등장부터 강렬해서 ㅋㅋ 좋아하는 캐릭터예요. 유일하게 전라도 사람이라 사투리가 달라서 더 그런지.
저도 예전엔 로체스터에 대해 좀 낭만적인 감정이 있었는데, 이번에 읽으면서는 막 째려보게 되더라고요 ㅋㅋㅋ 다미여 영향 ㅋㅋㅋ

공쟝쟝 2023-01-31 2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봉순아 ㅠㅠㅠㅠㅠ (1권 듣다가 동생이 해지해서 못들었지만 봉순이는 뉜지 아오…)

독서괭 2023-02-01 12:11   좋아요 1 | URL
아니 동생 왜 해지했대요 ㅋㅋㅋㅋ 결국 쟝쟝님의 토지완독은 이렇게 물거품이 되는가.

공쟝쟝 2023-02-01 12:39   좋아요 0 | URL
또 하겟죠ㅋㅋㅋ ㅋㅋㅋㅋ 아니면 제가 하든가용?!?

독서괭 2023-02-01 12:48   좋아요 0 | URL
나중에 정기적으로 출퇴근 할일 생기면 도전하셔도 될 듯요 ㅎㅎㅎ

유부만두 2023-02-01 07: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쵸 로체스터 능구렁이 징그런 사십대. 이런걸 제인이 좋아해서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몰라요.

독서괭 2023-02-01 12:11   좋아요 0 | URL
능구렁이 징그런 사십대!! ㅋㅋㅋㅋㅋ 정말 맞습니다. 나이차가 스무살 넘게 나는데 아휴 ㅠㅠ 나쁜 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