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취약성, 그로부터 빚어지는 고통과 슬픔이 정치윤리적 가치로 생성되고 전환될 수 있다면, 강함과 약함, 능동성과 수동성, 긍정성과 부정성, 기쁨과 슬픔처럼, 마치 대립 관계에 있는 듯이 설정되어 있었던 논리의 축이 흔들리게 된다. 나아가 만약 정동의 역능이 다수적이고 이질적이고 변화적인 것들의 결합과 선택으로서 개진되는 긍정화로의 변환 과정이라면, 이 원리에 따라 취약성 역시 능동의 강도로 고양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버틀러와 아흐메드의 논의에서 취약성과 고통이 오히려 강건하며 공존적인 정치윤리로 전화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 29, 30쪽
<디지털 미디어와 페미니즘>의 첫번째 글, 김예란의 '행복을 향한 그녀들의 움직임: 디지털 페미니즘의 정동'에서는 버틀러와 사라 아메드(김예란은 '아흐메드'라고 표기했으나 알라딘에서는 아메드라고 쳐야 나오기 때문에 아메드로 표기함)의 정동이론을 가져와 미투운동의 의의를 해석한다. 위 인용문의 바로 앞에서 저자가 간단히 버틀러와 아메드의 논의를 요약해 놓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사실 이해가 어렵다.
존재는 취약하다 -> 그러나 그 취약성은 긍정화/능동성으로 고양될 수 있다 -> 이로써 공존을 위한 정치윤리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인데, 대체 이런 논리가 어떻게 나온 건지 <퀴어이론 산책하기>를 통해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정동이론이 무엇이고, 어떤 의미가 있는가?
'정동'의 의미에 대해서는 사유/느낌(감정)/정동을 모두 구별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고, 구별에 반대하는 견해(사라 아메드)도 있는 모양이다. 특히 느낌(감정)과 구별은 어려워 보이고, 다만 그런 느낌(감정)을 보다 (능)동적인 상태로 이해한다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으로 나는 이해하고 있다.
이 정동이라는 걸 왜 탐구해야 하는가, 퀴어이론의 저자가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예를 보자.
(...) 이성애적 연애 관계였다 할지라도 여성 혐오에 기초한 이별 폭력을 겪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뒤섞일 때, 내가 이별에서 겪는 감정은 처음부터 기존의 권력 체계 안에서 매우 구조적으로 직조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우리를 둘러싼 권력 위계가 감정을 조건짓고 그 감정의 지향이 사람과의 관계, 나아가 내가 이 세계와 맺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 481쪽
아메드는 '내게 이롭나 아니면 해롭나?'를 인지한다는 것엔 "사유와 가치평가"가 수반되고, 동시에 이러한 인지가 "몸에 의해 느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사유/감각(느낌)/감정이 별개로 나뉘어져 작동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느낌이 대상과의 '접촉'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라면, 이 '접촉'에는 접촉을 하는 사람(주체) 뿐 아니라 그 접촉을 인지하고 해석하는 데 바탕이 되는 '역사'가 수반된다. (...)
어떤 대상을 보고 무섭다고 느낄 때를 생각해보자. 한편으로, 무언가가 무섭다는 인상은 과거사에 영향받는다. (...) 그러나 다른 한편 이 역사가 항상 본인이 직접 겪은 역사는 아닐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개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나 개와 살아본 적이 없는 아이라도 주변 어른들과 사회가 '개는 무섭다, 개는 문다'는 메시지를 꾸준히 주입할 경우 개를 무서운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처음으로 개와 맞닥뜨렷을 때 '무섭다'는 느낌/감정이 올라오게 될 공산이 크다. (...) 다시 말해 우리가 직접 겪어 몸에 각인한 개인적 역사뿐 아니라, 그 개인의 탄생보다 오래 전부터 존재하여 개개인을 공기처럼 둘러싸고 있는 더 넓은 사회적 역사와 규범도 우리의 느낌과 감정을 조건 짓는 것이다. - 485~487쪽
따라서 감정은 주체나 대상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 관계적이고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것이다. - 489쪽
퀴어 정동 이론은 정동과 무관하다 생각되던 사안들에 정동이 미치는 영향력을 인정하며, 어떤 정동이 그리고 어떤 식의 정동 표현이 기존의 규범에 영햡하여 규범의 생산과 강화에 일조하는지, 정동에 대한 긍정/부정의 가치 위계가 어떻게 지배 체제의 재생산에 이용되는지를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또한 우리가 어떠한 인식틀을 통해 감정을 차별적으로 느끼는지, 달리 말해 어떠한 인식틀을 통해 감정이 차별적으로 생산되고 배치되는지를 탐구한다. - 489쪽
이 말인즉슨, 그저 사적인 것으로 보이는 나의 감정 역시 사회적 역사와 규범에 의해 조건 지어지는 것이므로,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의 가치 체계가 불평등할 경우 감정 역시 차별적으로 생산된다는 것이다.
이별살인이 자꾸만 일어나는 걸 지켜보면서, 스토킹이 구애로 포장되는 행태를 지켜보면서, 디지털성착취가 끊이지 않는 사회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감정은 어떻게 형성될까? 여자아이들이 온라인으로 알게 된 사람에게 몸사진을 찍어 보내는 행위 밑에는, '어른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여자는 성적 존재로서만 쓸모가 있다', '여자는 성적으로 순종적이어야 한다'는 이 사회의 메시지가 깔려 있지 않은가?
이제 버틀러와 사라 아흐메드가 이 정동이론을 어떻게 펼쳐가는지 살펴보자. 퀴어이론 책에는 상당히 자세하게 나오지만, 나는 김예란의 글과 관련되어 보이는 부분 위주로 러프하게 요약했다.
[버틀러]
먼저 버틀러는 근대적 주체 개념을 해체한다. 왜냐하면, 근대적 주체는 책임을 자율성-독립성-행위성-선택의 연쇄로 묶어놓고, '자기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결론을 내는데, 이런 논리에 의해 "모든 맥락과 권력 위계들을 무시한 채 남자랑 단둘이 술 마시고 모텔 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만한 나이의 여자가 따라갔으니 성폭력 아니고 화간이라는 식의 결론으로 빠지는 식으로 바로 그 은폐된 권력 위계를 강화하는 데 기여해왔"(527쪽)기 때문이다.
버틀러는 보다 근본적 차원에서 주체를 타자와의 관계 그 자체로 정의하며, 취약성을 이러한 주체의 실존적 조건으로 이론화한다(521쪽).
이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윤리적 폭력 비판』의 영문판 제목은Giving an Account of Oneself, 즉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하기‘다. 자율성과 일관성이 근대적 주체에게 요구되는 기본 특성이라고 한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하기‘는 이 주체가 갖는 역량의 핵심으로 간주된다.
보통 우리가 ‘행위성‘을 발현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은 내 의지로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즉 방금 일어난 내 행동이 무슨 의도였고 어떤 의미인지를 내가 주저 없이 설명할 수 있을 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버틀러는 이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하기가 결코 완벽히 성공할 수 없으며 주체는 항상 박탈dispossession의 경험을 겪는다고 주장한다. 내가 나에 대해 완벽한 설명을 할 수 없는 이유, 즉 나 자신을 완벽히 통제할 수 없는 이유는 한편으로는 나를 초과하고 항상 이미 나보다 앞서 존재하며 내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 큰 틀로 작용하는 사회적 규범과의 관계 때문이다. - 523쪽
그리고 버틀러가 주체가 조건지어지고 근본적으로 주변에 의존할 수 밖에 없음을 논증한 것은, 이를 근거로 '책임감'과 '윤리'를 내세우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근본적인 우리의 취약성을 인정함으로써 나는 약해~ 암것도 못해~어쩔 수 없어~라는 결론으로 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서로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으므로 더욱 연대해야 하고, 주체의 조건으로 설정되어 있는 구조를 인식함으로써 누군가가 받는 고통이 나와 관계 없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윤리의식을 갖자는 결론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나름대로 이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틀러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는 질문은 이것이다. 내가 처음부터 타자들에게 양도되어 있고 노출되어 있다는 이 취약성을 상대에게 선제공격을 날리고 보복 테러를 돌려줄 정당성의 근거로 이용하는 대신에 "윤리에 없어서는 안 되는 출처로 사유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모든 인간이 서로에게 상처 입힐 수 있다는 "불가피한 상호의존성"을 "전지구적 정치공동체의 토대로 삼는다면 우리는 어떤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 529쪽
[사라 아메드]
여자만 보면 분노 조절을 못 해서 욕설과 폭력을 내지른다는 남자들이 왜 마동석 앞에선 얌전한강아지가 될까?
(...)
감정의 이러한 차별적 할당과 편파적인 인식/인정은 이성과 감성을 가르는 이분법적 위계가 결코 중립적인 진실이 아님을 보여줄 뿐 아니라, 감정이 어떻게 기존의 권력 구도를 따라 생산되고 표출되는지, 나아가 어떻게 기존의 권력 구도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 공고히 하는 동시에 그럼으로써 권력 구도 자체를 은폐하는 효과적인 장치로 기능하는지를 보여준다. 아메드는 사회를 바꾸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건 이처럼 권력 관계에 감정이 얽혀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 542, 543쪽
맞다, 정말. 나는 분노를 쉽게 표출하는 사람들에 대해 사람들이 '다혈질이지만 뒤끝은 없다'는 식으로 포장해주는 걸 싫어하고, 소위 말하는 다혈질 성격의 사람도 안 좋아하는데, '화가 나는 것'과 '화를 표출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화가 난다고 그걸 곧바로 표출할 수 있다는 것은 권력 구도에서 위쪽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물론 드물게 누가 봐도 갑인 사람에게도 막 화를 내는 사람도 있으나 그쯤 되면 정말로 분노조절장애라 할 법하고. 대체로 그 분노는 여성과 약자를 향한다. 권력 구도에서 위쪽을 차지할수록 화를 표출할 수 있는 대상의 범위도 넓어진다. 다혈질이라는 말을 여성에게는 잘 쓰지 않는데, (나만 그런가? 여성에게 다혈질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남성에게 붙이는 것에 비해 많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여성이라고 화가 안 날까. 오히려 전형적인 여성 폄하 관념 중에 '여자는 감정적이다'가 있으니, 화도 더 벌컥벌컥 내야 하는 게 논리적으로 일관적인 거 아닌가? 여성의 화를 히스테리, 신경질이라고 깎아내리는 부분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여성은 화를 표출할 수 있는 대상이 적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남자에게 화냈다가 어쩌려고, 살해당하면 어쩌려고? 결국 여성이 맘 놓고 화를 표출할 수 있는 상대는 아이들이다..(플러스 경제적으로 의존적인 을들). 내가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이 때문인데, 화표출을 잘 안 하는 편인 내가 아이들에게 화를 내는 것은 결국 얘네들은 이렇게 해도 나를 떠날 수 없고,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서다. (하지만 출근시간 다가오는데 유치원 안 가겠다고 소리지르며 누워 있으면 화 내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유.. ?;;)
결국 의식의 흐름은 육아 하소연으로 흐르나. 그만 멈추고, 아메드 이론을 더 살펴보자.
『행복의 약속』에서는 ‘행복‘에 초점을 맞춰 이러한 정동의 경제를 다시 설명한다. 이 책에서 아메드는 사회가 무엇을 ‘행복‘으로 규정하는지, 어떻게 ‘행복‘이 사회 규범을 정당화하고 재생산하며 불평등·억압· 차별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지를 탐구한다. 영어 단어 happy에는 ‘행복한'이란 뜻만 있는 게 아니라 (말, 생각, 행동 등이) 적절한 유의어(suitable)이란 뜻도 있다. 이 두 가지 의미를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행복이란 개념이 도덕적 위계와 범위를 결정하는 가치 개념으로 기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절해야만 행복하리라는 어떤 가이드라인 같은 것이 깔려 있는 셈이다. - 559 쪽
이런 의미에서, "불행할 자유는 부적절한 방식으로 행복할 자유를 포함할 것이다." 그러므로 정동 이방인들은 불행/행복 중 어느 한쪽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그 이분법적 분리 자체를 문제시하고 갈아엎는 사람들이고, 그 틈새에서 대안적인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이다. 아메드는 행복을 우리가 반드시 쟁취해야 할 궁극의 목표로 여기지 말고 그저 우리가 삶에서 마주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로 보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불행은 단순한 상태가 아니라 자신에게 부과되고 강제되는 것들을 판단하여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을 정서적으로 피력하는 의사표시로 보자고 제안한다. "괴로워한다는 건, 좋다고 판단되어왔던 것들에 당신은 동의하지 않는다고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고통은 "행동할 역량을 고양시킬 수 있는 감수성이 될 수 있다. - 562쪽
"부적절한 방식으로 행복할 자유" 이 표현 참 마음에 든다. 부적절하다는 것은 사회가 인정하는 가치 규범에서 벗어난 것을 말할 테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사회가 원하는 피해자상에 맞지 않게 행동하며 나름대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같은 맥락 아닐까? 아메드의 아래 글을 보면, 아메드는 고통을 쉽게 자기 것으로 차용한다거나, 고통조차 '적절한 가이드라인' 안에 있을 것을 요구하면서 고통의 진정성을 경쟁하는 걸 경계해야 하며(이 부분에 대해서도 <퀴어이론 산책하기>에 자세히 적혀 있다).
, 우리는 '동류의식의 불가능성', '화해의 불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아메드의 글 재인용: 고통은 심지어 우리의 가장 절친한 타자들조차 느낄 수 없는 것으로 환기된다. 동류의식의 불가능성이 그 자체로 상처의 확증이다. 그러한 고통을 공감을 통해 공유할 수 없는 고통으로 불러내는 것은 단지 주의 깊게 경청해달라는 요청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거주inhabitance를 요청하는 것이다. 이는 행동하자는 요청이자, 집단적 정치에 대한 요구이다. 이때 요구되는 집단정치는 우리가 화해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근거한 정치가 아니라 화해의 불가능성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는 것에 기초한 정치, 혹은 우리가 서로와 더불어 살고 서로의 곁에 살아가지만 우리가 결코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배우는 정치이다. - P574
* <퀴어이론 산책하기> 중 정동이론 부분에 대한 밑줄 긋기 페이퍼: https://blog.aladin.co.kr/703039174/13326306
다시 디지털 페미니즘으로 돌아가보자.
'정동의 역능'이라는 측면에 미투운동은 잘 들어맞는 것 같다. 취약성을 능동성으로 전환하고, 지지와 연대를 구성하는 것! 이것은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에서 포스트잍으로 추모의 마음을 전하는 연대활동에서도, 최근 아마니 사망 사건에 분노해 일어난 시위(관련기사: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092010130005969?did=NA)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정동이론 자체가 그렇고, 김예란은 정동이론으로 최근의 미투운동을 분석하는 방식으로, 이런 지지와 연대활동을 독려하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는 자신에게 취약성을 부당하게 부여한 사회에 대해 저항하는 능동적 요소를 동시에 함축하게 된다. 왜냐하면 단지 그 취약하고 비참한 몸의 "드러남" 자체가 사회적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노출 혹은 고발의 효과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취약성이 규범에 대한 저항을 발현시키는 정치적 전환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취약한 몸들이 서로 뭉쳐 지지와 연대를 구성함으로써, 그 자체가 사회적 모순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정치적 저항력을 구성하고 발휘할 수 있기에 그러하다(Athanasiou, 2016: Butler, 2016). - 32쪽
(...) 그러나 누군가의 고통과 슬픔은 결코 완료될 수 없으며, 그녀의 말은 열린 상처를 안고 행복을 향해 새롭게 움직이려는 의지의 발현으로서 존중되고 지지되어야 마땅하다. 비참으로부터 행복으로의 정동적 전환은 고통 아래에서 처절했던 자의 급전이기에 그 의미가 더욱 크며 그 결론이 미정의 것으로 열려 있기에 더욱 자유롭다. - 38쪽
<디지털 미디어와 페미니즘>에서 두 꼭지를 먼저 골라 읽었는데, 썩 감흥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많이들 말씀하시는 이 첫 꼭지는 좋았는데, 특히나 정동이론? 이거 나 아는건데(이름만 아는 수준이지만)? 하는 마음이 있어 더 그랬다 ㅋㅋ
다시 보다보니 버틀러와 아메드의 책도 궁금하긴 한데.. 검색해보니 버틀러 올해 책 한권이 나왔네? 개정판으로 번역을 많이 손봤다고 하는데, 어떨지. 그래도 왠지 <혐오 발언>이라니, <윤리적 폭력 비판>보다는 훨씬 쉬워보이지 않나? 음......
사라 아메드 책은 <행복의 약속>와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두 권이 나와 있는데, 후자는 이론서는 아닌 것 같아서 읽기 수월하지 않을까 싶다... <정동이론>이란 책에도 사라 아메드가 들어가 있다. 저런 본격 이론서까지 읽을 생각은 차마 ㅋㅋ
자다 깨는 바람에 이 밤에 갑자기 글을.. 낼 너무 피곤하고 그럼 후회하겠지만 ㅠㅠ
어느 정도는 쟝쟝님의 지적 냄새 풀풀 나는 글에 책임이 있다. 잠깐 북플 들어갔다 그 글을 보고 잠이 깨버림 ㅋ 아직 댓글을 못 달았는데 지금은 자야겠다. 이글이 정동이론 이해에 조금 도움이 되길 바라며.. 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