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빌라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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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6권에서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꿈속의 귀마동'이다. 

길상이 꾸는 꿈 이야기다. 길상은 길을 헤매다 허허벌판에 홀로 있는 집 한채를 발견한다. 거기에는 노인 한 사람이 살고 있다. 노인은 그곳이 말이 돌아오는 '귀마동'이라는 동네라고 소개한다. 말이 돌아온다는 것이 뭔 뜻인고, 물으니, 이런 사연이다.

귀마동에는 여, 남으로 이루어진 연인 한쌍이 찾아온다. 그들은 헤어지지 않고 영원히 함께 있고 싶어한다. 노인은 이들에게 말을 한 필씩 내어주며, 절대로 고삐를 놓치면 안 된다고 당부한다. 그들이 말을 타고 오랜 시간 걸어가 함께 어떤 강을 건너가면, 이제 다시 이별은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 한쌍도 그 강을 건너지 못했다. 말들은 결국 노인의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데, 이상하게도 한 마리의 말은 동쪽에서, 한 마리의 말은 서쪽에서 돌아온다. 말 위의 두 사람은 쪼글쪼글 주름진 노인이 되어 있고, 심지어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대체 그 연유가 무엇인고, 물으니, 노인은 대답한다.

먼 길을 가면서 계속 깨어있기란 힘드니 두 사람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할 테고, 말들은 멋대로 가다 점점 길이 어긋나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을 거라는 얘기다. 딱 한쌍, 돌아오지 않은 이들이 있으나 이들도 강을 건넌 건은 아니었다. 여자가 말에서 떨어져 죽어 말만 돌아왔고, 남자는 여자를 찾아 헤매느라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퀴즈: 이들은 누구일까요?) 


남편과 만난 이래 가장 심하게 싸운 후 관계 회복 중인데, 귀마동 이야기가 와닿는 바가 있다. 결혼 후에 이어지는 긴 시간에는 생활의 피로가 가득하다. 말고삐만 꼭 붙들면 된다고 생각하고 옆 사람 신경쓰지 못하면, 결국 꾸벅 조는 사이에 두 사람의 방향은 갈라져 버린다. 영원히 함께 하자는 사랑의 약속을 위해 강을 건너려던 두 사람이, 종래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고 마는- 결혼생활이란 노력의 연속, 그걸 잊으면 까딱 귀마동 꼴이 된다는 것. 



백수린 작가의 <여름의 빌라>는 작은 어긋남의 순간들을 세심하게 포착하고 있다. 


해외에서 만나 각별하게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된 두 여성이 다시는 서로 연락하지 않게 된 어긋남에 대하여('시간의 궤적'),

해외에서 알게 된 노부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만난 또다른 여행지에서, 상대의 입장과 깊은 속내까지 헤아리지 못하여 일어난 어긋남에 대하여('여름의 빌라'), 

소위 '몸테크'를 위해 달동네로 이사온 중산층 가정의 아이가 어렴풋이 느끼는 계층의 문제, 그리고 평생 한발짝 물러나 안전한 곳에서 부당함을 외면하게 되리라는 깨달음의 순간에 대하여('고요한 사건'), 

아빠와 이혼하여 미국으로 떠난 엄마를 만나러 갈 때마다 조금씩 어긋나는 마음에 대하여('폭설), 

아이를 낳으며 애써 눌러놨던 몸에 대한 인식을 깨닫게 된 아내와 이를 짐작조차 하지 못한 남편 사이의 어긋남에 대하여('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헌신적이었던 할머니의 짧은 연애를, 돌아가신 후 일기장을 통해 알게 된 손녀가 느끼는 이질감에 대하여('흑설탕 캔디'),

기분 좋았던 어느 여름밤, 노인을 돕다가 실수로 일어난 사건 때문에 삶의 어딘가가 살짝 어긋나버린 순간에 대하여('아주 잠깐 동안에'), 

다른 세계의 아이들이 결국 자기 세계로 복귀하기 전, 함께 경험한 짧고 강렬한 교차의 순간에 대하여('아카시아숲, 짧은 입맞춤').


사람은 저마다 다르고, 어느 찰나에 잠시 서로의 마음이 교차하더라도 결국에는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마련이라고. 그 어긋남에 대해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예를 들어 '시간의 궤적'에서 언니의 지난 연애에 대한 미련을 비난한 것이나. '여름의 빌라'에서 한스에게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한 채 백인의 좁은 생각으로 치부하여 비난을 퍼부은 것) 사람을 질책하기보다 그건 인간들 사이에 내재하는 근본적인 한계이니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 다시 교차하는 이해의 순간이 찾아오기도 하니 너무 절망할 일도 아니라고, 조곤조곤 말해주는 것 같다. 


한편 한편이 다 조금씩 감정을 건드리는 데가 있었지만, 특히 좋았던 건 '흑설탕 캔디'였다. 결말에서 할머니가 손에 꼭 쥔 무언가(흑설탕 캔디)를 아끼는 손녀가 조르는데도 내어주지 않으면서, "이건 내 거란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기억에 오래 남을 듯 하다. 

알라디너TV 이번 주제가 '여름'하면 떠오르는 책이라고 해서- 내가 찍을 건 아니지만 - 뭐가 있을까 떠올려보다가, 아직 읽지 않고 찜해두기만 했던 이 책이 떠올랐다. 떠오르니 갑자기 너무 읽고 싶어 빌려왔는데, 이 여름이 가기 전에 읽기를 잘했다. 별 네개를 찍었지만 '북적북적' 어플에서는 4.5개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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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22 17: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22 18: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ni74 2022-08-22 18:0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제목도 표지도 여름이 확 느껴집니다 ~

독서괭 2022-08-22 18:11   좋아요 3 | URL
미니님, 여름이 가기 전에 읽어보시지요~^^

공쟝쟝 2022-08-22 18: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이 책 있어요. 표지가 예뻐서 샀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런데 너무 책장 안쪽에 있나봐요. 안보임. 이 여름이 가기 전에 읽을 수가 없겠군요. 헤헤. 작은 어긋남들 때문에 감정이 건드려지고 싶을 때 읽도록 하겠숩니당!

독서괭 2022-08-22 19:18   좋아요 4 | URL
안 그래도 쟝쟝님 페이퍼 봤어요 ㅋㅋㅋ 이 사람 사놓고 안 읽었구나 했지요 ㅋㅋㅋ 책장 한번 뒤집어야 찾으시겠네요. 내년 여름을 기약해보아요!!

페넬로페 2022-08-22 20: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늘 만난 지인분이 토지 16권에서 포기했다고 했는데 독서괭님은 토지로부터 그 지평을 넖혀 가시네요. 여름의 빌라, 저도 읽고 싶었는데 여전히 아직입니다^^

독서괭 2022-08-24 12:19   좋아요 2 | URL
16권에서 포기하셨다고요..!! 거의 다 왔는데.. 제가 다 아쉽네요;;
페넬로페님, 올여름 놓치셔도 내년 여름이 있습니다!^^

청아 2022-08-22 20: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괭님의 문해력이 돋보이는 리뷰네요^^* 귀마동의 의미가 절묘하게 와닿습니다. 개인적 바람으로는 알라디너 TV를 이웃 분들이 더 많이 하셨으면 좋겠어요. 거기선 또 얼마나 많은 매력들을 보여주실지 기대되거든요. 여름의 빌라 담아갑니다.ㅎㅎ

독서괭 2022-08-24 12:20   좋아요 1 | URL
문해력이라니! ㅎㅎ 감사합니다, 미미님. <여름의 빌라>는 아주 사소하고 미묘하게 어긋나는 관계들을 잘 그려낸 것 같아 좋았어요. 미미님도 좋아하실 듯요. 알라디너TV는 제가 할 능력이 안 되어 ㅎㅎ 미미님은 계속 해주세요^^

그레이스 2022-08-22 20: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았던 책입니다.^^

독서괭 2022-08-24 12:25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리뷰 읽고 왔어요! 넘 좋네요!^^

그레이스 2022-08-24 12:3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책읽는나무 2022-08-23 00: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관계는 훌륭하게 회복 중이신 거죠??^^
여름이라서....그러신 거죠??
그리고 귀마동의 퀴즈는 정답이??? 궁금합니다.
백수린 작가의 <여름의 빌라>는 제가 좋아하는 작가의 가장 좋아하는 단편집이에요.
괭님 열거해 주신 단편들 제목과 내용들이 새록 새록 기억이 떠오르네요? 다른 책들은 시간이 지나면 거의 다 기억이 안나던데...ㅋㅋㅋ
단편들 대부분 좋았었는데 저도 <흑설탕 캔디> 저도 가장 좋아합니다. 저는 할머니 주제의 단편집에서 이 소설을 접하고 백수린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좋았어요.
좋다고 떠벌리다가 북플친님 몇 달 전 이 책 읽고 좋다고 하셨는데...좋죠? 하다가...내가 떠벌린 줄 기억도 못해 좀 부끄러웠던 적 있었네요^^;;;;
괭님의 리뷰 읽고 제가 다 흐뭇함을 안고 갑니다. 그것도 여름 가기 전에 말입니다ㅋㅋㅋ

독서괭 2022-08-24 12:29   좋아요 3 | URL
훌륭하게..는 모르겠지만 회복 중인 것 같고, 일단 제가 꺠달은 게 있어서 마음이 좀 편해졌습니다^^
여름은 여러모로 힘드네요. 더위 많이 타는 첫째가 짜증도 많이 내고.. 밤에 뒤척일 때도 많고..
백수린 작가님 저는 처음 읽어봤는데, 책나무님이 가장 좋아하는 단편집이었군요! 제가 잘 찾아 읽은 것이었습니다 ㅎㅎ
<흑설탕 캔디>를 가장 좋아하신다니 더 반갑습니다. 하이파이브!
책나무님이 이 책 많이 홍보하셨군요. 저는 책읽아웃에서 김하나작가가 추천했던 걸 기억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읽었네요. 올여름 큰일 하나 했습니다^^

난티나무 2022-08-23 06: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읽었습니다! ㅎㅎㅎ 몇개월 뒤에 다시 읽어봐야지 싶네요, 글 보니까요.^^

독서괭 2022-08-24 12:31   좋아요 1 | URL
난티나무님 읽으셨군요! 페이퍼 쓰신 건 봤습니다. 재독하시면 꼭 리뷰를~^^

단발머리 2022-08-23 21: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독서괭님 이 리뷰 너무 좋고 또 이 책도 좋을 거란거 알지만 읽고 나면 제 맘이 너무 말캉말캉해질 거 같아서 못 읽을 거 같아요 ㅠㅠㅠ 차라리 비현실적 사랑을 긍정하는 나의 이 허약함을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ㅠㅠㅠ

독서괭 2022-08-24 12:39   좋아요 2 | URL
말캉말캉?? 왜요, 단발님, 마음이 말캉말캉해지면 안 되는 거예요?ㅜㅜ 그래서 the love hyphothesis를 다시 읽으신 것인가요 ㅎㅎ 이 책은 막 감성을 엄청 자극하고 그렇지는 않고, 관계에 대해 새삼 생각해보게 하는 것 같아요. 화자의 덤덤한 서술 때문인지. 그래서 더 좋은 듯요?

새파랑 2022-08-26 16: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었는데 아쉬우면서도 여름 느낌이 나서 좋았습니다 ㅋ 역시 책의 핵심은 제목과 표지인거 같아요~!! 관계회복이 잘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독서괭 2022-09-04 16:47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에게는 너무 슴슴한 맛이 아니었을지!^^ 제목과 표지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ㅎㅎ 그게 편집자의 능력이겠죠? 관계회복 잘 하고 있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