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적이고 원초적인, 비체적인 어머니.
<여성괴물>1부에서 다루는 이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내 출산 경험이 떠올랐다.
출산을 해 본 사람은 다들 알겠지만 임신/출산의 과정에서 겪는 수치스런 혹은 당황스런 일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관장'이다. 진통이 와서 병원에 갔는데 관장약을 먹고 3분 동안 참으라고 하더라. 아마도 출산 시 힘줄 때 불상사가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함이겠지? 관장은 처음이라.. 1분도 안 됐는데 흐미 이거 뭐야, 3분이 대체 가능하긴 한 거? 그렇게 당황스런 첫 관장의 경험.. (식사 중 보신 분들 죄송) 혹시 3분 참으신 분 있으면 손들어 주세요. 존경할게요..
출산 직후부터 이어지는 모유수유를 위한 각고의 노력들로 말하자면, 경험자들은 모여서 이 주제로만 한두시간은 떠들 수 있을 것이다. 모유수유를 하다보면 "내가 젖소인지 사람인지 모르겠다"는 반농담 반진담 푸념을 하게 되는데, 젖소까진 아니라도 아이의 도시락을 몸이 달고 다니는 기분이긴 하다. 그게 사실 편할 때도 있다. 애들 똥 치우다 똥이 옷이나 손에 묻거나, 기저귀 갈다가 쉬를 맞는 일(특히 남아의 경우 쉬를 얼굴에 맞기도..) 소파며 이불에 싼 쉬를 치우는 일 등 양육에는 참 원초적인 일들이 많이 수반된다. 아버지가 의미한다는 '상징계'가 인간의 이런 원초적 모습에서 벗어난 우아한 생활을 이야기하는 거라면, 양육에 참여하지 않는(놀아주기만 하는 건 진정한 의미의 양육참여가 아니다) 아버지들은 확실히 상징계에 있고, 원초적 어머니와 아이들은 기호계에서 똥묻히며 씨름하고 있고.. 갑자기 빡치는데.. 부모라면 아이가 어릴 때는 함께 기호계에서 뒹굽시다.
※ 거친 이해로 오류가 있을 수 있음 주의 ※
윌리암스의 논의를 제외하고 위에서 논의된 거의 대부분의 논문이 여성을 공포영화의 희생자로 다루고 있다. 그 주된 이유는 그들이 대부분 여성이 거세되었기 때문에 공포를 유발한다는 프로이트의 이론, 즉 이미 여성을 희생자로 구성해 놓은 이론을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은 여성은 원래부터 희생자라고 말하는 본질주의적 관점을 대변하고 또 지지하는 가부장적 정의를 강화할 뿐이다. 나는 공포영화에서의 여성 재현을 분석하고 여성이 다수의 공포영화에서 괴물로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단순히 여성괴물이 수동적이 아니라 적극적인 형태로 재현되었다고 해서 이것이 페미니스트적‘이라거나 해방된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대중적인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여성괴물은 여자의 욕망이나 여성 주체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보다는 남성의 공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재현은 확실히 남성 관객은 대체로 적극적이고 가학적인 위치에 있고 여성 관객은 언제나 수동적이고 피학적인 위치에 있다는 관점에 도전한다. 이런 특징에 대한 분석은 또한 프로이트 이론의 중심 내용을 재독해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특히 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거세 위기에 대한 이론은 재독해 되어야 한다. - <여성괴물> 31쪽
<여성과 광기>에서도 그렇고 이 책에서도 그렇고 프로이트의 여성에 대한 이론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측면이 있는데, 프로이트 이론에 대해서는 2부에서 다루고 있는 것 같으니 그걸 읽어봐야겠다. 애저녁에 사둔 <프로이트 컴플렉스>라는 책도 읽어보려고 꺼내두긴 했다..
최근 <스물다섯 스물하나> 드라마를 봤다. 김태리 너무 귀엽고, 남주혁 훈훈하고(너무 비현실적으로..), 전형적인 삼각관계 구도로 가지 않고, 여자펜싱이라는 소재 좋고, 나희도(김태리)와 고유림(보나)이 선의의 경쟁하는 거 좋고, 나희도 엄마의 프로정신 좋고.. 여러모로 거슬리는 점 없이 적당히 경쾌하고 적당히 진지하면서 '청춘은 역시 이래야지' 싶은 열정과 꿈을 보여주는 드라마라 보면서 즐거웠다.
그런데 예전부터 드라마를 보며 느끼는 약간의 불편한 감정. 뚱뚱하거나 통통하거나 그저 '마르지 않을 뿐'인 보통 체격의 사람, 특히 여성은 주인공이 될 수 없고 가끔 엑스트라 캐릭터로 소모되기만 한다는 점. 나도 드라마에 예쁜 사람들이 나오면 보면서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많은 이들이 그걸 기대하고 드라마를 보니까, 아니면 다큐를 보지 왜 드라마를 보냐 할 지도 모르지만. 아직 어린 아이들이 드라마를 보면서, 저렇게 예쁘고 마르지 않으면 저렇게 아름다운 사랑도 할 수 없고 남들 보기에 멋진 삶도 살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그래도 얼굴에 대해서는 '개성적인 미인' 어쩌고 하면서 다소 폭을 넓게 인정해 준다 쳐도, '살찐' 여자는 아직까지 용납되지 않는 거 아닌가. 건너 건너지만 겨우 초등학생이 거식증으로 식사를 거부하면서 살찔 바에는 굶어죽는 게 낫다는 말까지 한다는 얘기가 들려오는데, 아이들을 이렇게 몰아가는 건 누구인가..
아이들에게 디즈니 초기작들(백설공주, 신데렐라, 밤비, 덤보 등)을 가끔 보여주는데, 동물이 주인공인 건 괜찮지만 역시 공주 이야기는 거슬릴 때가 있다. 그나마 디즈니가 만든 이야기에서는 원래 이야기보다는 공주에게 능동성을 부여하긴 하지만. 아름다움이 모든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은 변함 없다.
디즈니에서 만든 '실리 심포니'라는 10분 안쪽의 짧은 만화도 재미있어서 보여주는데- <아기늑대들과 돼지 삼형제>였나? 이걸 애들 보여주기 전에 미리 살펴보다가, 돼지 두마리가 늑대들에게 붙잡힌 상태에서 한 아기늑대에게 트럼펫을 불게 하려고 자극하면서 하는 얘기가 "여자처럼 부네"인 걸 보고 애들 보여줄 거에서 뺐다. 이런 갑툭튀 여성혐오 어쩌지. 차라리 최근 영화들에는 그런 게 없을텐데 <주토피아> 나 <씽> 같은 거 보여주고 싶어도 이건 아직 둘째에겐 너무 길다.
알베르토 망겔은 <끝내주는 괴물들> 중 '잠자는 숲속의 미녀' 편에서 우리가 이 이야기에 느끼는 불편함을 재미있게 지적했다.
공주의 잠. 그것 때문에 왕자가 그녀에게 매료되는 것일까? 미동 없이 조용히 눈을 감고 누운 채, 저항하지도, 반응하지도 못하는 처지라서? 파블로 네루다가 젊은 시절에 쓴 연시戀詩 스무 편 중 하나에는 이 오래된 남성적 판타지가 단순한 시구로 표현되어 있다.
나는 그대가 조용할 때가 좋아, 마치 그 자리에 없는 듯해서
그대는 멀리서 귀를 기울이고 내 목소리는 닿지 않네,
그대 눈이 날아가서 이제 내 곁에 없는 듯이
그대 입이 키스의 감각으로 가로막힌 듯이
에드거 앨런 포는 이렇게까지 돌려 말하지도 않았다. 글쓰기의 철학 The Philosophy of Composition에서 그는 아름다운 죽은 여자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시적인 주제임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썼다. 죽음보다 더 조용한 상태는 없으니 말이다.
- <끝내주는 괴물들> P107, 108
왕에게 초대받지 못했던 요정의 저주는 사실 바로 이런 의미였는지도 모른다. 공주가 우아하게 늙어가지도, 지식과 경험을 천천히 쌓아가지도, 계절의 변화를 누리지도 못하게 하는 것. 그녀가 잠들었을 때 왕자가 보았던 미녀의 모습을 유지하고 싶다면 성형수술과 보톡스와 유방 확대술과 원숭이 분비선 혈청 주사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공주에게는 다른 선택지도 있다. 저주도, 축복도 거부하고, 잠든 궁정 대신들도, 부모님이 저지른 결례도 거부하고, 끝없이 찾아오는 왕자마저도 거부하는 것. 그리고 입센의 노라나 카르멘 라포레의 안드레아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현대판 후예들이라고 할 수 있다)처럼, 마법의 성문을 열어젖히고 크게 뜬 두 눈으로 세상을 맞닥뜨리는 것 말이다.
- <끝내주는 괴물들> P110
눈을 크게 떠야 한다. 세상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 위해..
그런데 이 와중에 김태리 배우, 그녀가 추천했던 책 목록을 보니 이렇다.
뭔가 책 좀 읽은 느낌 나지 않나요? 세권 다 내가 꽤 좋아하는 책이라서 그런 건 아니고..꼭 아닌 건 아니고..?
암튼 김태리 배우가 좋아서, 담에는 미스터선샤인을 보고 싶은데, 이건 좀 맘 먹고 쭉 봐야 하는 것 같아 섣불리 시작을 못 하겠다.
출산경험으로 시작해서 갑자기 김태리 배우에 대한 팬심 고백으로 끝나는 페이퍼 어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