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의 추억
소파. 소파에서 시작해보자.
김애란의 <잊기 좋은 이름>에 등장한 소파 이야기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한 장소로 나를 소환했기 때문이다.
『언어학사』를 사기 며칠 전 나는 학교 휴게실에 앉아 있었다. 그곳에는 고동색 소파 하나가 놓여 있었다. 터진 구멍 사이로 스펀지가 삐져 나온 3인용 인조가죽 소파였다. 그 소파가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것이 개교 이래 한 번도 세탁하지 않은 소파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극작실이 속한 구본관 건물에는 휴게실이 하나밖에 없었다. 많은 이들이 거기 앉았다 떠나갔다. 내가 아는 사람 대부분이 한 번 이상 그 소파에 머물렀고 잠시 후 일어나 어디론가 사라졌다. - P59
내가 다닌 대학 동아리방에도 소파가 있었다. 한창 동아리가 잘 될 때에는, 그곳에 가면 늘 누군가 있었다. 여럿이 모이면 수다를 떨었고, 혼자서 있을 땐 거기 놓인 공용노트에 글을 적었다. 그럴 듯한 글도, 휘갈긴 낙서도 있었다. 넓은 캠퍼스 안에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한다는 건 방황하는 청춘에 큰 위안이 된다. 그곳에 가면 외롭지 않다. 적어도 거기 있는 동안만큼은 외로움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한순간 대학 동아리방에 발을 끊었다. 뻔한 이유다. 나는 동아리 C.C였고 내 이별의 방식은 칼같았다. 졸업반으로 열심히 공부하던 시기에, 배신은 나를 깊이 찔렀다.
그 시기 우연히 읽은 권여선 작가의 <사랑을 믿다>.
이 작품을 읽으며 나는 많이 울었다. 바닥을 치고 다시 올라왔다. 그리고 내가 바닥을 치고 다시 올라오는 동안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가족 덕분이었다.
10대 중반부터 시작된 사춘기를 거쳐오며 쌓인 부모님에 대한 불만과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아직 가득한 때였다. 그러나 이 이별의 시기에 가족이라는 보루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 그때 내게 캐묻지 않고 세끼 밥을 차려 준 엄마에게, 지금도 고맙다.
고독한 유년을 위로하는 마음
백희나 작가의 <알사탕>에도 소파가 등장한다.
주인공 동동이는 문방구에서 신기한 알사탕을 산다. 소파무늬와 비슷한 알사탕을 입에 넣자, 소파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빠한테 방귀 좀 그만 뀌시라고..." 전해 달라는 소파의 절박한 목소리가 재밌다.
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고 감동적인 장면은 아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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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오자마자 한바닥 잔소리를 쏟아낸 아빠의 속마음. 알사탕을 입에 넣자 들려오는 "사랑해"라는 속삭임.
이 장면을 뮤지컬 <알사탕>에서 기가 막히게 연출해 냈다. 잔소리 장면은 코믹하게, "사랑해" 장면은 아름답게. 많은 부모들이 아이 보여주려고 왔다가 이 장면에서 울었다고 했다.
<알사탕>의 프리퀄로 후에 출간된 <나는 개다>에서 동동이는 할머니, 아빠, 구슬이(강아지)와 함께 사는 유치원생이다. 엄마가 없는 사연은 알 수 없다. <알사탕>은 그로부터 8년이 흐른 뒤, 초등학생이 된 동동이를 보여준다. 할머니는 그 사이 돌아가셨고 아빠는 수척해졌으며 구슬이는 늙었다. 친구가 없는 동동이는 쓸쓸하다.
많은 동화책이 4인 가족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같은 4인 가족에게는 그 이야기가 자연스럽고 익숙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어떨까. 한부모가정, 조손가정, 다문화가정 등 실제로 존재하는 많은 가족의 모습은 동화책에 잘 구현되지 않는다. 백희나 작가는 <알사탕><나는 개다>에서도, <이상한 엄마><이상한 손님><장수탕 선녀님>에서도 4인 가족을 등장시키지 않는다. <이상한 엄마>에서 조퇴하는 아이는 돌보아줄 사람이 없다. <이상한 손님>에서는 아이 둘만 집을 지킨다. <장수탕 선녀님>에서는 엄마와 아이만 등장한다. 4인 가족이 아니라도 괜찮다고. 조금 쓸쓸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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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알사탕> 공연장 앞에 놓인 "백희나 작가가 직접 만든 '이상한 엄마'" 인형! 구름을 만들고 있다.
가족과 분리되는 아이들
팟캐스트 '듣똑라'에 김예원 변호사가 출연했다. 걸출한 입담과 정의를 향한 열정, 피해자를 대하는 세심한 마음씀씀이가 존경스러웠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는, 학대아동에 대한 기계적인 '분리조치'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많은 어른들이 관여하지만 정작 아이들의 의사는 묻지 않는다. 김예원 변호사는 말한다. "저런 가정에서 자랄 바에는 보육원 가는 게 낫지"라고 납작하게 볼 수 없다고. 분리조치가 "일시 정지" 버튼이 되면 상황을 바꿀 수 있는데, "영구 정지" 버튼이 되어버릴 때 아이들이 받는 충격이 고려되지 않고 있다고.
김예원 변호사의 신간을 이미 사두었기 때문에 관련 부분을 찾아 읽어봤다.
또한 기계적인 분리 과정에서 아동의 심리가 무시될 가능성이 높다. 많은 학대 피해 아동이 갑작스러운 분리로 불안과 공포를 호소한다. 욕설이 난무하는 집이지만 자기만의 작은 공간에서 애착 물건을 통해 위안을 얻던 한 아이는 슬리퍼에 잠옷 차림으로 갑자기 낯선 곳에 분리되자 공황장애를 겪었다. "가해자가 나가야지 왜 피해자인 내가 집에서 쫓겨 나와야 하느냐?"라고 화를 내는 아이도 있다. "위험한 집에서 구출해주었으면 고마워해야지 왜 아동이 분리를 싫어하느냐?" 라는 높은 분들과 이야기해보았지만, 정작 그들은 ‘분리‘라는 큰 사건을 겪어내는 아동이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 125, 126쪽
무엇보다 아동 분리 행정처분에는 기한이 없다. 그래서 한번 분리된 아동은 언제까지 자신이 시설에서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 이 시설에서 저 시설로 옮겨질 때도 아동의 의사를 묻지 않는다. - 127쪽
아이의 입장. 우리는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가.
최근 읽은 <당신의 손길이 닿기 전에>도 떠올랐다.
이 책의 저자 리사 윈게이트는, "빈곤층 자녀"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얼마나 편견에 차 있는지 보여준다. 조지아 탠이 저지른 이 끔찍한 아동강제입양 사건에서, 조지아 탠은 스스로 "자식을 제대로 기를 수 없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운 부모에게서 아이들을 데려와 '상류층' 집에 살게 해준 일이 선행이라며 자화자찬"(661쪽/669쪽) 했다 하고, 그의 범죄를 도와준 판사도 있다고 하니, 비슷하게 생각한 대중들도 많았으리라 짐작된다.
리사 윈게이트는 이 실화를 다루면서 이를 재현할 방식을 깊이 고민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가 택한 방식은 '1950년에 끝난 사건'(물론 피해자들과 그 가족에게는 끝나지 않은 사건이지만)을 현재에 끌고 올 충분한 의미가 있다는 점을 잘 강변한다. 강을 떠돌며 사는 극빈곤층인 포스 가족은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했다. "대체 강에서 살면서 어떻게 아이들을 키워?"라는 시선으로 본다면 조지아 탠이 이들을 상류층에 입양보내 잘 자라게 했으니 결과적으로는 옳은 게 아니겠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는 흩어진 포스 가족, 특히 자매들이 서로를 그리워하고 강을, 아카디아(거주지였던 배의 이름)에 강한 향수를 느끼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누구도 이 아이들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누구와 함께 살고 싶냐고.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우리는
가족은 -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함께 살고 보살펴주는 의미로서 - 모두에게 필요하다. 울타리로서의 역할, 적어도 그 안에서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신뢰.
하지만 울타리가 오히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위험을 회피할 수 없게 만드는 장벽이 된다면? '분리 조치'가 필요하다고 시행한다 한들, 분리된 아이에게 사회가 새로운 울타리를 제공해 줄 수 있는가? 가족에 문제가 있군, 분리해. 그 뒤는 몰라.
그러고선 그 아이가 범죄를 저지르기라도 하면, 역시 결손가정은... 아이를 제대로 보호할 가족이 없군, 소년원으로 보내. 소년원에서 나온 뒤에는? 몰라 알아서 해.
나는 소년범죄가 터질 때마다 성인과 같은 수준의 강한 처벌을 요구하는 말들이 걱정스럽다. "미성년이라도 알 거 다 안다. 어리다고 자꾸 봐 주니 계속한다."는 주장이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잘못을 저지르는 데 대한 책임은 어른들이, 사회가 함께 져야 한다. 부모가 있으면 그 부모에게만 책임이 간다고? 아니다. 폭력을 조장하는 문화, TV프로그램과 인터넷방송의 선정성, 인성을 파괴하는 수준의 과도한 입시경쟁 등등.
17세 민우는 책에 대한 어떤 기억도 없다. 자신을 위해서 책을 읽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7년 동안 재미있는 책도, 재미없는 책도, 누가 읽어주었던 책도, 친구와 함께 읽었던 책도 없다. 17년의 삶에 단 한 권의 책 제목도 기억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놀랐다. 믿겨지지 않았다. 민우가 학교를 다녔더라면 고등학교 2학년일 것이다. 요즘 아이들에게 책은 흔하디흔하다. 어려서, 어른이 옆에 앉혀놓고 책을 읽어준 기억이 전혀 없는 아이는 흔하지 않다. - 153쪽
<소년을 읽다>에 등장하는 민우의 이야기에 울컥했다. 이 책을 읽은지 몇달이 지난 지금도 가끔 떠올라 마음이 아프다. 아이를 무릎에 앉혀놓거나 옆에 앉아 어깨를 맞대고 책을 읽어주는 건 내게 너무나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이다. 책을 읽어주지 않았다고 해서 가족이 아이에게 관심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과연 민우의 가족들(일하느라 바쁜 부모님과 그 대신 민우를 돌보아준 조부모님)에게 아이와 눈맞추고 이야기를 들어줄 여유가 있었을까? 어떤 이유로 이들이 아이에게 책 한권 읽어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렸는지, 결국 그 아이가 소년원에 오기까지 어떤 쓸쓸함을 겪었을지, 생각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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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이야기에서 시작해 멀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