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역사 제1권 - 상 중국공산당역사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지음, 홍순도 외 옮김 / 서교출판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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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식은 실천에서 생겨나고 실천의 주체는 대중이다. 그래서 변증법적 유물주의 사상노선을 지지하는 것과, 대중에 의지하는 사업노선을 지지하는 것이 일치한 것이다. 마우쩌둥은 "공산당의 투쟁 책략은 결코 집안에 앉아서 소수의 사람들이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대중의 투쟁 과정을 통해서만 생성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실천 경험 중에서만 비로소 생성될 수 있는 것이다"고 지적했다. _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중국공산당역사 제1권 상>, p592/914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의 <중국공산당역사>는 청조 말 1840년과 1856년 2차례에 걸쳐 일어난 아편전쟁(鴉片戰爭) 이후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게 된 비참했던 근대 중국역사와  그 안에서 중국공산당의 역사적 사명이 잘 드러난 역사책이다. 


 <중국공산당역사 제1권 상>은 중국 공산당에 앞선 혁명과 배경으로부터 시작한다.  태평천국의 난(太平天國의 亂, 1850 ~ 1864)과 의화단운동(의화단 운동(義和團運動, 1899 ~ 1901)을 통해 농민의 중요성이 드러났고, 신해혁명(辛亥革命, 1911)을 통해 청나라가 멸망하는 등 이전 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인정하면서도, 한계점을 명확히 한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점을 넘어서는 것은 결국 공산당에 의해서만 가능했다는 것이 제1권 상의 소결론이라 할 수 있다.


 요약하건대,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후 점차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라와 민족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중국 인민들은 간고한 투쟁을 벌였다. 중국의 선각자들은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구국구민의 진리를 모색하며 중국 사회를 변혁하는 여러 가지 방안을 시도했다. 이러한 모색과 투쟁은 일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중국 역사의 진보를 어느 정도 이끌었다. 그렇지만 중국의 반식민지 반봉건의 사회 성격과 중국인민의 비참한 운명까지 바꾸지는 못했다. _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중국공산당역사 제1권 상>, p91/914


 <중국공산당역사 제1권 상>은 시대적으로 1936년 시안 사건(西安事變)을 통해 제2차 국공 합작이 이루어지는 시기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이 시기 동안 초기 소수 지식인 중심으로 형성된 중국공산당은 청나라 이후 주도권을 잡기에 미약했으므로, 국민당과의 협력(국공합작)을 통해 군벌세력들을 소탕하면서 점차 자신들의 세력을 키워가는 큰 흐름을 본문에서 확인하게 된다.


중국공산당은 중국의 정치, 경제 상황과 경한철도 노동자 대파업이 우페이푸의 탄압을 받았던 교훈에 근거하여, 제국주의와 봉건군벌의 통치를 무너뜨리려면 노동계급만을 의지하는 것은 역부족임을 인식했다. 따라서 쑨중산(쑨원)이 영도하는 국민당과 적극 연대하여 노동계급과 민주세력의 연합전선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을 한층 깊이 깨닫게 되었다. _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중국공산당역사 제1권 상>, p254/914


 <중국공산당역사 제1권 상>에서는 시대적 상황안에서 중국공산당의 혁명사상이 무엇의 영향으로 어떻게 변화되었는가가 잘 서술되어 있다. 그렇지만, 중국사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보다 중국공산당의 관점에서 해석된 역사이며, 당(黨)의 역사이기에 다소 지루한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중국공산당역사>에서 중국공산당이 바라보는 중국현대사는 무엇인가에 중점을 두고 읽으면서, '대중'을 바라보는 중국공산당의 시각이 이중적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반제국주의 혁명의 주체로서 대중을 긍정하면서도, 1920년대 대중의 현실은 계몽 이전의 무지한 상태로 공산당에 의한 깨우침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혁명이 될 수 없으며, 이들을 혁명 대열에 동참시키기 위해서 '토지개혁'이라는 유인을 사용하는 방식이 상호 충돌되는 듯하다. 물론, 경제적 유인이 강력한 참여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대중을 바라보는 공산당의 시선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적어도 그들 안에 있는 어떤 가능성을 긍정하기보다는 보편적인 욕망에 소구하는 접근법에서 일종의 엘리트 주의를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주장은 유물론(唯物論)에 의한 물질적인 동기만이 혁명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에 근거하는 것이겠지만, 결코 가능성을 긍정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만약 진정으로 대중을 혁명주체로 바라본다면 그들 안에 잠재된 역량을 긍정하고 중국공산당의 역할을 과거 소크라테스(Socrates, BCE 470 ~ BCE 399)가 그러했듯 자신들의 역할을 '산파'역할 정도로 한정시켜야 하지 않았을까. 대중을 혁명 주체로 보기에 <중국공산당역사> 속의 공산당의 역할은 너무도 크게 보여진다. 


 그런 면에서 중국공산혁명에서 진정한 혁명의 주체를 중국공산당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무지한 대중을 계몽하여 새로운 공산주의 유토피아로 이끈다는 중국공산당의 이론 안에서 대중의 구원은 공산당의 사상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공산주의자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기독교의 메시아 사상과 공통점을 발견한다면 그것을 무리라고 할 수 있을까. 기독교를 배척하지만, 기독교 사상과 닮아 있는 공산주의 사상 속에서 유물론을 말하지만, 종교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일종의 모순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태평천국과 의화단의 역사적 비극은 반식민지 반봉건의 중국에서 농민들이 반제 반봉건의 강대한 주력군임을 증명했다. 하지만 선진 계급의 지도 없이 반제 반봉건의 역사적 임무를 완수하기 어렵다는 것 또한 크게 증명했다. 근대 중국에는 두 개의 새로운 계급인 자산계급과 무산계급이 나타났다. _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중국공산당역사 제1권 상>, p48/914


 대다수의 대중은 무지했고, 봉건적인 가정 조직과 미신 풍속이 매우 보편적이었다. 일부 지역에는 산림 속에 패거리로 모여 살며 방랑 도적 사상과 유민 습성을 지닌 녹림무장이 존재했다. 이와 같은 특수한 지리 환경과 사회 조건은 혁명세력의 존재와 발전에 유리했지만 극복하기 힘든 문제들도 많았다. _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중국공산당역사 제1권 상>, p563/914


 중국의 실정에 맞는 토지혁명의 노선과 정책은 토지제도 변혁을 실천하는 도중 형성되어 발전했다. 당의 8.7회의는 혁명 투쟁 시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가 토지혁명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토지혁명의 방법과 실행에 관해서는 확실한 대책을 갖고 있지 않았다(p570)... 농민문제는 주로 토지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한 중국 사회 각 계급 및 그 정치대표들의 태도와 해결 방법은 서로 달랐다. _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중국공산당역사 제1권 상>, p576/914


  이와 함께 <중국공산당역사>는 하나의 물음을 우리에게 제기한다. 중국공산당은 중국공산혁명을 세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건설하려는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의 과정으로 보았을까, 아니면 그 자체를 완성으로 보았을까.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유명한 말처럼, 중소 분쟁(中蘇 紛爭)이후 쓰여진 <중국공산당역사> 안에서 당시의 중국공산주의자들의 생각을 읽어내기는 쉽지 않다.


 국제공산당은 국제관계가 자본주의 세계와 사회주의 세계의 대립이라는 공식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여, 제국주의 국가들이 소련과 중국 혁명을 일제히 반대하는 것에 대한 일치성을 지나치게 강조했다. 반면 중일 민족간의 갈등, 제국주의 국가 간의 갈등이 심화된 것은 소홀히 했다. 그러므로 일본이 중국 둥베이를 침략해 점령한 것은 중국의 근로대중과 중국 혁명을 반대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반러전쟁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중국공산당에 일본 제국주의를 포함한 모든 제국주의를 반대할 것을 요구했다. _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중국공산당역사 제1권 상>, p681/914


 중화민족의 생사존망이 갈릴지도 모르는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공산당과 중국 인민이 당면한 가장 긴박한 과제는, 바로 민족을 위기에서 구해 내며 가급적 많은 세력과 연합하여 항일민족전쟁을 개시하는 것이었다. 중국공산당은 시대의 요구에 순응하여 제때에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할 것을 주장했다. 이 주장은 국제공산당의 전략 전술 전환점과 직결된다. _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중국공산당역사 제1권 상>, p803/914


 그렇지만, 1930년대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이름으로 만주와 내몽골 일대에서 일본과 치열하게 싸우던 다른 민족의 공산주의자들 모두가 <중국공산당역사>에 강조되는 민족주의적인 관점에 동의할 것인가. 어느 정도의 민족주의자들, 또 다른 정도의 세계공산주의자들이 당시 공산당이라는 집단 안에 공존하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이들 모두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같은 시대 안에서 같은 행동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 정확한 실태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역사 제1권 상>의 역사 서술은 후대의 승자인 마오쩌둥(毛澤東, 1893 ~ 1976)의 사상 중심으로 기술되는 결정론적인 역사 흐름을 보인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이러한 부분은 한계점이라 생각한다.


 조선의 공산주의자 김일성(金日成), 최용건(崔庸建), 김책(金策) 등은 '9.18'사변이 일어난 후 중국의 일부 지역에서 항일구국투쟁에 참가했다. 그들 중 수많은 사람들이 중국동지들과 함께 항일무장을 조직하고 영도했으며 중국의 둥베이와 조선 경내에서 처절한 투쟁을 했다. 그들은 중국의 동지들과 일치단결하여 같이 싸우면서 중국 인민과 조선 인민의 해방을 위해 중차대한 기여를 했다. _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중국공산당역사 제1권 상>, p843/914


 아직 <중국공산당역사>를 다 읽은 것은 아니지만, 제1권 상을 통해 중국공산당이 바라보는 관점을 짐작하게 된다. 후대의 결과로부터 이전의 원인에 필연성을 부여하는 역사관에 대해 다소 불편함을 갖게 되지만, 이러한 불편함 안에서 오늘날 중국의 중화주의의 기원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도 함께 갖게 된다.. 제1권 하로 넘어가기 전에 <실천론>과 <모순론>은 미리 점검하고 넘어가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듯하다...

<실천론>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에 치중하여 당내에 장기간 존재해 온 주관주의, 특히 교조주의를 철저히 비판했다. 더불어 중국 혁명사업에 끼친 해악을 폭로했다. <실천론>은 인류의 생산 실천, 계급투쟁 실천, 특히 중국 혁명투쟁의 구체적 실천에 근거한다. 그리하여 사회적 실천에 대한 인식의 의존관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은 "실천을 첫 자리에 놓았다"고 지적했다. _ p882/914

<모순론>은 유물 변증법의 가장 근본적 법칙인 대립통일의 법칙을 전면적으로 논술했다. 마오쩌둥은 자연계와 인류사회의 모든 사물이 운동 발전하는 내재적 법칙에 근거를 두었다. 그리고 북벌전쟁과 토지혁명 전쟁에서의 두 차례의 승리, 두 차례의 실패 경험과 교훈을 결부시켰다. 그리하여 모순의 보편성과 특수성, 주요한 모순과 모순의 주요한 측면, 모순의 여러 측면의 동일성과 투쟁성, 모순에서 저항이 차지하는 지위 등 문제들을 일일이 논술했다._ p883/914

<실천론>과 <모순론> , 이 두 편의 저작은 변증법적 인식론과 유물 변증법의 핵심으로 하는 대립통일법칙에 대해 체계적이고 철저한 탐구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무산계급의 세계관, 인식론과 방법론을 괗가적으로 논술한 것이다. 이 두 편의 저작은 더없이 험난한 중국 혁명투쟁의 실천 경험에 대한 철학적인 개괄이다._ p883/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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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의 일구통상 정책은 해안의 통제와 무역 이익의 획득이라는 두 가지 욕구를 하나도 포기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전자가 후자를 압도해 가는 분기점을 보여 준다. 균형을 잃어버린 치우침 현상은 1784년까지 더욱 강화되었다.

대운하 시대의 동남 연해에 대한 상품 교역과 관련한 해양 정책은 사실상 국가 안보와 이를 뒷받침해 주는 물적 기반에 대한 고려 속에서 변화되는 변경 정책의 일환이었다. 피터 퍼듀(Peter Perdue)는 청조가 준가르 제국 정복을 통해 서북 변경에서 거둔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서북 변경의 정책 기조를 그대로 동남의 해양 변경 정책에 적용했다고 해석했다.

압도적인 경제력을 기반으로 한 강남의 문화적인 힘은 건륭제에게 경계심도 불러일으켰으나 결국은 여섯 번이나 강남으로 향하는 구심력으로 작용했다. 성공의 사다리인 과거에서 강남인들이 보여 주었던 힘은 대단했고, 점차 권력의 상층부는 강남 출신 인사들로 채워졌다.

대운하 시대에 최적화된 국가 운영의 패러다임이 해양을 포괄하는 방향으로 전향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한, 인도양과 태평양을 통해 압박해 들어오는 해상 세계의 위협과 요구 속에서 중화 질서가 와해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따라서 19세기 중엽의 아편전쟁과 19세기 후반의 청일전쟁에서 당한 잇단 패배는 한때의 강점이 약점의 근원으로 급속히 전환되었던 18세기 후반의 역설적인 상황에서 기인한 것이다.

대운하 시대와 그 이후에도 중국의 해안 지역에서는 돈을 벌기 위해 해양으로 진출하려는 욕구와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졌던 것이다. 대운하로 물자 조달에 문제를 못 느끼던 북경의 집권자들만이 해양으로의 진출 의욕이 결여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해적들이 투항하면서 청조의 관리들이 19세기 초엽에도 해양 방어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잘못된 안전 의식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대운하 시대에 통제할 수 없는 해양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작동함으로써 조량 해운을 억제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더 나아가 조공이라는 외피로 통제 가능한 범주에서 제한된 항구를 개방하거나 밀무역을 묵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화의 원정에서 보여 주었던 해상에 대한 힘과 능력이 있었는데도 북경 조정은 안보를 최우선시했기에 그 힘을 최대한 억제하거나 통제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이 대운하 시대 중국의 바다 공포증에 대한 역사학자로서의 예의 바른 해석이다.

장구한 역사를 가진 중국의 대운하 물류 시스템은 사실상 19세기 후반기에 막을 내렸다. 마침 19세기는 기선(汽船)과 철도와 같은 근대적인 운송수단이 도입되는 시기였으므로 점차 이용률이 감소했던 대운하는 마치 전근대적인 운송로의 대표적인 퇴물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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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라는 걸출한 인물이 없었다면 네르친스크 조약의 ‘선진성’을 설명하기 곤란하다. 1689년에 대륙에서 체결된 대등한 조약은 5년 전에 바다로 향하는 네 곳의 해관을 열어 주었던 강희제의 자신감 및 유연성과 연결되어 있다.

"서양인의 목적은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중국을 변화시키고, 중국이 서양의 가치를 공유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1716년(강희 55년)에 강희제가 해양 방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오랜 세월 뒤에 중국은 해외의 서양 국가들로 인해 곤혹스러워질지도 모른다. 이는 짐이 예견하는 말이다."라고 했던 직감적인 예언은 놀랍도록 정확한 것이었다.

동시에 옹정제의 강력한 포교 금지령은 중국과 가톨릭 사이에서 발생한 전례(典禮) 논쟁(Chinese Rites Controversy)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물론 내부적으로는 ‘적응주의(accommodation)’ 선교 방침을 취하며 북경 조정과 밀착했던 예수회와 그들의 전략에 반발했던 스페인계 탁발 수도회(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아우구스티노회) 사이의 노선 갈등도 무시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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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는 북경의 물자 대동맥인 대운하에 대한 통제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고, 대운하에 결정적인 위험 요인으로 작용했던 황하에 대한 치수와 대운하에 대한 시찰을 겸한 남순을 반복적으로 거행한 것이다.

강희제가 삼번을 폐지하려고 하자 오삼계 등은 반란을 일으켰고, 여기에 대만의 정씨(鄭氏) 세력도 합세하면서 청조는 입관 이래 최대의 위기에 직면했다. 삼번의 난과 함께 극성에 달했던 정씨 해상 세력의 반청 운동은 청에 대한 복수설치(復?雪恥)와 명조 회복(‘복명(復明)’)을 바라는 조선인의 기대감을 한껏 고무시켰다.

그 와중에 천계령의 여파로 일본과 중국 사이에 조선의 중개무역이 활성화되었는데, 일본이 비단 등의 중국 제품을 수입할 때 바닷길을 이용하지 못하자 조선을 통한 중개무역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건륭제가 염려했던 것은 서양인들이 내지인들과 결탁하는 문제였다. 마카오는 이전부터 예수회 선교사들의 내지 진입로이자 유럽 선박의 정착지였기에 중국인과 유럽인들 사이의 관계 형성이 용이했다.

18세기로 접어든 강희제의 치세 후반기부터 동남 연해 지역에는 지역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외래인들과 접촉하는 일이 증가했고, 이것이 지속적으로 북경의 조정을 민감하게 자극하여 결국 일구통상이라는 폐쇄적인 국면으로 전환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이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보유한 측량술을 비롯한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해 가능해진 측면도 있으나, 뒤에 가려진 정치적인 동기도 간과할 수 없다. 여기서 ‘정치’란 바로 새로 확장된 변강(邊疆)에 대한 통치자의 통치 의지였고, ‘과학’이란 이를 뒷받침해 주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기술적 지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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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자면 정신의학 분야에서는 대부분의 정신질환이 정상적인 인간의 경험과 연속성을 가지며, 질환들 사이에 중첩되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합의가 점차 이뤄지고 있다. 정신질환은 유전자와 환경, 인간과 사회가 복잡하게 상호작용한 산물이다.

질병의 개념은 모호할 수 있지만 형태학적으로 관찰 가능한 극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과정으로 이해할 때 역사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 가장 큰 타당성을 가진다. 암, 흑사병, 그리고 다양한 경화증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슬픔, 불안, 과도한 음주 또는 일부러 이틀 동안 음식을 입에도 대지 않는 행위를 꼭 병으로 볼 필요는 없다. 감정은 진공 상태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감정은 세상에 대한 판단이며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세상과 교류하는 방식이다. 이는 그런 감정들이 불편하지 않다거나 특정 행동이 불편한 감정을 일으키므로 바뀌어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하지는 않는다.

좋든 싫든 의학과 정신의학 연구의 대부분은 제약회사로부터 지원을 받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정신의학이 세상을 보는 관점과 치료 대상을 선택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준다. 1960년대에는 대부분의 대규모 임상실험은 미국 국립정신보건원NIMH: National Institute of Mental Health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 연구의 70퍼센트가 기업이 주도하는 약물 치료 연구다.

과학자는 특정 치료법의 효능을 평가할 때 기대효과를 제거하도록 훈련받는다. 과학자는 대조군 연구에서 특정 치료의 결과가 위약 집단보다 유의미하게 높을 경우에만 해당 치료가 우울증에 효과가 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우울증 치료의 진실은 어떤 치료법이든 간에 기대감과 믿음이 치료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는 점이다.

비판적 사상가인 제임스는 자신의 비관주의가 자신을 파괴할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를 통해 제임스는 ‘믿음’에 대해 상당히 실용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그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믿을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게 없다고 주장했지만(예를 들어 2+2=5라고 믿을 수는 없다), 우리가 믿음을 선택할 수 있는 경험의 영역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 제임스는 "사실에 기반을 둔 믿음은 사실을 창조할 수 있다."라는 점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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