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역에서 에치고유자와행 신칸센에 탑승했다. 곧 출발. 도쿄역사는 서울역보다 훨씬 복잡해서 출발시간보다 조금 일찍 플랫홈에서 대기했다. 22번 플랫홈. 신칸센은 이층버스처럼 중층구조인데 좌석은 3인석, 2인석이 한 열이다(2층은 양쪽이 3인석이라 한다). 차체도 KTX보다 더 큰 것. 유자와까지는 한시간 반 가량이 소요될 예정이다.

가방에 넣어온 책은 고운기의 <도쿄의 밤은 빨리 찾아온다>(난다). ‘도쿄 여행기‘라고 전에 적었지만 서두는 설국 기행이다. 설국기행을 아홉 번이나 다녀온 ‘전문가‘의 안내를 따라고보려 한다. 나는 초행임에도 안내자 역을 해야 한다. 물론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설국>에 대해서만.

일본철도에서 제공하는 와이파이 서비스에 등록해서 이 글을 적고 있다. 오늘은 오며가며 페이퍼를 몇개 적게 될지도. 사진은 어제 미타카 시로 이동중에 본 후지산의 모습이다. 연간 40여일밖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데 어제는 쾌청했던 모양이다. 눈으로 보면서도 후지산은 비현실적이었지만 거꾸로 일본에 왔다는 실감을 갖게 했다...

(...)

그러고는 와이파이가 끊겼다. 에치고 유자와역에는 채 10시가 되기 전에 도착했고 설국관과 다카한 료칸을 둘러보는 일정을 모두 마쳤다. 점심을 먹고 온천욕(노천욕 포함)까지 끝마침으로써 설국기행을 일단락. 이제 한시간여 후에 다시 신칸센을 타고 도쿄로 복귀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설국에 대해서 나중에 따로 적기로 하고 유자와 온천의 설경만 올려놓는다. 후지산 아래 사진이 지금 시각 유자와 온천의 설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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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도의 미타카 시는 현재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브리미술관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지만 한편으로 다자이 오사무와도 깊은 연고를 가진 곳이다. 본래 아오모리 현의 쓰가루(기타쓰가루 군 가나기 마을)가 고향이고 그곳에 다자이 오사무 문학관(사양관)이 있는 걸로 알지만 1939년 결혼한 이후 정착해서 살던 미타카 시에도 다자이 기념관이 있다. 그가 자주 다니던 술집 건물의 1층으로 ‘다자이 오사무 문학살롱‘이라고 불리는 조촐한 장소다.

오전에 그곳을 찾았을 때 나이 지긋한 자원봉사자가 기념관의 내력과 미타카 시절의 다자이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태평양전쟁 말에 폭격을 피해 떠나 있던 시절을 제외하면 다자이는 만년의 시간 대부분을 미타카에서 보냈다. 그의 창작활동 중기를 연구자들은 ‘미타카 시대‘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그가 남긴 전체 150여 편의 작품 가운데 2/3 가량에 해당하는 90여 편이 미타카의 작업실에 쓰였다고 하니까 다자이 문학의 가장 중요한 창작공간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그런 연고를 고려하면 현재의 문학살롱은 규모가 너무 소략하다는 인상을 준다. 새 기념관이 건설될 예정이라고 하니까 몇년 후에는 사정이 좋아질지도. 다자이 문학살롱과 관련한 사진을 옮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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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소세키 산방에 들렀다가 방문한 곳이 조시가야 묘지의 소세키의 묘소였고 오늘도 미타카 시의 다자이 문학살롱을 찾은 다음에 들른 곳이 다자이 오사무의 묘소다. 일본작가의 묘소를 한국의 독자들이 찾아가보는 게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조시가야 묘지는 소세키의 <마음>에서 친구의 무덤을 찾아 ‘선생님‘이 매달 찾는 곳이어서 이번 문학기행 일정에 포함시켰고 다자이의 묘소는 옵션이었다.

묘지로 향하기 전에 다자이가 1948년 6월에 투신한 다마 강(다마가와조스이)가를 1킬로미터 가량 산책할 수 있어서 좋았다(날씨가 약간 차긴 했지만 산책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다마강은 일본의 강들이 대개 그렇듯이 우리식으로는 ‘천‘에 가까웠다. 다자이는 6월 13일밤에 야마자키 도미에라는 여성과 투신하였고 시신은 일주일이 지난 19일에서야 발견되어 21일에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향년 39세의 나이였다.

아래는 1948년 시신 발견 당시의 사진과 오늘 산책길에 찍은 다마강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의 무덤. 오늘 알게 된 사실인데 그의 묘소 바로 맞은 편에 소세키와 함께 일본 근대문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모리 오가이(1862-1922)의 묘소도 위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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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 관련 일정은 두 가지가 더 있었다. 소세키 기념관을 출발해 소세키의 묘가 있는 조시가야 묘지에 들렀다가 점심을 먹고 도쿄대 안에 있는 산시로 연못을 찾았지만, 여기서는 산시로 연못을 먼저 언급한다. 연못이 배경으로 등장하는 <산시로>(1908)가 조시가야 묘지가 나오는 <마음>(1914)보다 먼저 발표되었기에. 소세키 자신이 조시가야 묘지에 안장되는 것은 1916년의 일이다.

<산시로>의 초반부에서 도쿄대 신입생인 시골뜨기 산시로는 동향의 선배 노노미야의 지하 연구실을 방문하고 나오는 길에 연못가로 가서 쭈그리고 앉는다. 잠시 생각에 잠겨 연못을 응시하던 산시로는 문득 눈을 들어 언덕 쪽의 두 여자를 보게 되는데 흰옷을 입은 여자와 부채를 든 여자다. ˝부채를 든 여자는 조금 앞으로 나와 있다. 흰옷을 입은 여자는 둑 끝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다. 산시로의 눈에는 두 사람이 비스듬히 마주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여자가 언덕을 내려와 대화를 나누며 산시로의 앞을 지나간다. 산시로는 뭔가 움찔함을 느낀다. ˝두 여자가 산시로 앞을 지나갔다. 젊은 여자는 지금까지 향기를 맡고 있던 하얀 꽃을 산시로 앞에 떨어뜨리고 갔다. 산시로는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멍해진 산시로는 그저 ‘모순이다‘라고 중얼거리는데 대체 무엇이 모순인지는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고 소세키는 적는다. ˝시골 출신 청년에게는 이 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저 왠지 모순된 것만 같았다.˝

하얀 꽃을 떨어뜨리고 간 여자가 여주인공인 미네코다. 미네코는 신여성이면서 근대성의 미스터리를 상징한다. 어수룩한 청년(일본의 근대) 산시로는 미네코의 수수께끼 같은 매력에 이끌리지만 그게 어떤 감정인지 스스로도 감을 잡지 못하는 위인이다. 산시로는 작품 서두에서 일찌감치 ‘배짱이 없는 남자‘로 낙인이 찍힌 바 있다. 그런 처지에 미네코를 상대한다는 건 역부족이다. 결과적으로 산시로와 미네코의 연애는 연애도 아닌 연애 정도에서 일단락되고 미네코는 산시로도 노노미야도 아닌 제3의 남자와 결혼한다. 산시로는 ‘스트레이 십‘(길 잃은 양)을 되풀이해 중얼거렸다는 게 결미.

‘연애실패소설‘이라고 부를 만한 이 소설에서 소세키는 일본 근대의 상황과 문제, 그리고 그 전망에 관한 개요를 작성한다. 아니, 내게는 그렇게 읽힌다. 소세키는 근대로의 이행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지만 일본의 근대화가 서구의 근대화와 견줄 만한 것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결코 기대하지 않았다.

<산시로>의 초반부에서 러일전쟁 이후 일본도 날로 발전해나가지 않겠느냐고 산시로가 말하자 낯선 사내(나중에 히로타 선생으로 밝혀진다)는 ˝망하겠지˝라고 대꾸한다. 일본 근대에 대한 두 가지 전망이지만 소세키의 판단은 좀더 비관적인 쪽에 기우는 것으로 보인다. 어수룩한 산시로보다는 식견 높은 히로타 선생의 견해가 소세키의 생각을 대변하는 걸로 보아야겠기에.

아무튼 <산시로>의 의의는 그렇다고 해두자. 요는 그 산시로 연못에 가보았다는 것. 일본도 수십년 만의 한파라는 걸(고작 영하 4도였으니 우리로선 믿기지 않지만) 웅변하듯이 연못에는 살얼음이 깔려 있었다. 겨울평균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도쿄인지라 얼음이 깔린 산시로 연못을 보는 건 아주 드문 일일 듯싶었다. 소세키 소설의 배경이 아니라면 특별히 찾을 일도 없었을 연못이지만 오늘은 얼음까지 깔린 모습이 더욱 인상 깊었다. 내가 기억할 산시로 연못은 다시 찾기 전까지는 오늘의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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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의 핵심 일정은 소세키 기념관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막연하게 소세키문학관이 있겠거니 했는데 공식명칭으로 ‘신주쿠 구립 소세키 산방 기념관‘이 개관한 것은 불과 지난해 9월의 일이다. 이제 넉달밖에 되지 않으니 한국인 단체 관람객도 우리가 처음이지 않을까 싶었다(정말 내장재 냄새도 다 가시지 않은 새건물이다).

기념관이 세워진 곳은 소세키가 만년의 9년을 살면서 <갱부> 이후 <명암>까지 만년의 모든 작품을 집필한 집이다. ‘산방‘은 ‘서재‘를 가리키며, 소세키 가족의 집이자 소세키의 집필실이 위치한 집이다. 당초 1945년 5월의 공습으로 전소되었지만 고증을 통해 복원되었다. 그의 장서는 사전에 다른 곳으로 옮겨져 보관되었다고 한다.

오사카에 있는 시바 료타로 기념관에 견줄 만큼 공들이 기념관이 늦게라도(지난해가 소세키 탄생 150주년이었다) 세워진 건 다행스러운 일이고 덕분에 이번 일본문학기행도 뭔가 내실을 기할 수 있게 되었다. 소세키 기념관 앞에 세워진 동상과 함께 건물 전경 사진을 옮겨놓는다. 기념관 내부는 촬영이 금지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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