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드라마에서 자주 흘러나오는 노래가 '돌리고 돌리고..." 하는 것인데, 요즘 자주 되뇌이는 말이 "밀리고 밀리고..."이다. 책읽기에 국한하더라고 읽을 책과 읽어야 할 책들이 연이어 밀리고 있다. 그래서 '밀리고 밀리고'인데, 이제 곧 '치이고 치이고' 국면으로 넘어갈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특별히 내세울 것 없는 스케줄 속에서 이 모양이라면 간혹 바쁘다는 연예인들이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가고 하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겠다. 하긴 먹는 건 다 챙겨먹으니까 나로선 이 정도 밀려서 쓰러지진 않겠다. 라면을 끓일 물을 올려놓고 막간에 몇 자 적는다. 그렇게 막간에 적기에는 제목이 좀 거창한다. 역사의 막간극이라...

 

 

 

 

다른 게 아니고 얼마전 <테오리아>란 책을 소개한 게 빌미가 되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을 다시 들춰보고 있다. '역사의 막간극'이란 표현은 그 서문에 나온다. 20세기의 가장 음울한 고전이라는 <계몽의 변증법>을 이번에 처음 손에 든 건 아니다. 사실. 내가 갖고 있는 국역본은 <계몽의 변증법>(문예출판사, 1995)이니까 최소한 10년은 됐다. 우리말로 이해가 잘 안 돼서 존 커밍의 영역본(1972)도 구했었지만 별로 도움이 되질 않았다. <부정의 변증법> 영역본이 악명이 높은데, 영역본 <계몽의 변증법>도 사정이 크게 나아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새로 읽을 계획을 하게 된 건 2001년에 국역본 개정판이 출간되고 2002년에는 스탠포드대학에서 새로운 영역본이 출간되었기 때문이다(1997년에 나온 Verso판은 개역본이 아니다). 이 새 영역본을 구한 게 작년 봄이었는데, 아마도 다른 일들에 치어 부득불 책읽기가 미루어졌던 듯하다. 그러다가 이번에 다시 생각이 난 것이다. '계몽의 개념'에 대해서는 러시어본도 확보해놓은지라 나름대로는 '중무장'을 하고 도전장을 내민 형국이다.    

그리고는 읽은 게 두 저자가 1969년 4월에 붙인 개정판 서문이다. <계몽의 변증법>의 초판이 나온 건 1947년 암스테르담에서인데(이미지는 속표지이다), 책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오랜동안 절판상태였다고. 그런 사정을 밝히고 있는 게 이 서문의 시작이다. "<계몽의 변증법> 초판은 1947년 암스테르담의 퀘리도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서서히 알려지게 되었는데, 현재는 상당 기간 동안 절판 상태에 있다. 20년이 지난 지금 재출판을 결심하게 된 것은 수많은 요청에 답하기 위해서뿐만이 아니라 이 책의 적지 않은 생각들이 오늘날도 유효하며 그후에 나온 우리의 이론적 노력에 이 책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믿음 때문이다."(문학과지성사판, 9쪽) 

참고로 말하자면, 국역본 문예출판사판과 문학과지성사판은 이 서문에 국한하자면 거의 동일하다. 처음 두 문장에서만 '쾌리도'가 퀘리도'로, '현재까지'가 '현재는'으로 '절판 상태에 있었다'가 '절판 상태에 있다'로 바뀐 게 전부이다. 반면에 영역판은 동일한 문장이 거의 없을 정도로 전면 개역판이다.

아무려나 그렇게 해서 출간된 게 물론 독어본 개정판이고, 이후에 판을 거듭해왔을 이 책은 오늘날에는 아주 번듯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계속해서 서문은 두 저자간의 지적 기질이 일으키는 긴장이  책의 '생동하는 요소'라고 자부하는 대목에 이어서 책의 의의를 밝혀준다: "책 속에서 말해진 모든 내용을 오늘날도 아무 수정 없이 붙들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태도는 진리를 역사적 운동에 대치되는 어떤 불변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역사성을 부여하는 이론에서는 있을 수 없다. 이 책은 나치 테러의 종말이 눈에 보이는 시점에서 씌어졌다. 사실 적지 않은 부분들이 오늘날의 현실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음을 느낀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는 그 당시도 '관리되는 사회'로의 전이를 그렇게 단순화시켜 평가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책이 씌어지던 40년대말 나치시대와 '관리사회'로의  이행이 전면화되어가는 것으로 보이는 60년대 말 사이에는  사회문화적으로 큰 변화가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이 저작에서 '관리되는 시회로의 전이' 양상에 대해 과소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현실적인 유효성을 갖는다는 지적이다. 게다가 세계사의 참혹한 양상은 아직 종결되지 않았다.

"세계가 거대한 세력 진영으로 나누어지고 이들이 필연적인 충돌을 향해 치닫는 시대에 참혹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3세계에서의 갈등과 새로이 커가는 전체주의는 <계몽의 변증법>에 따르면 그 시대에 파시즘이 그러했던 것처럼 역사의 단순한 막간극에 불과하다."(9-10쪽, 강조는 나의 것)

좀더 이어지는 문단을 여기에서 끊은 것은 뭔가 이상하기 때문이다. "'참혹함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와 "역사의 단순한 막간극에 불과하다"가 잘 호응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미심쩍어서 내가 갖고 있는 두 영역본과 대조해보았는데, 나로선 부정문이 긍정문으로 잘못 옮겨졌다고 밖에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설마 국역본과 영역본의 역자들이 각기 다른 독어본을 대본으로 사용했을 리는 없지 않은가?). 두 영역본에서의 번역문을 나란히 제시하면 이렇다(한번 날리고 다시 친다. 날리고 날리고).

"In a period of political division into immence power-blocks, set objectively upon collison, the sinister trend continues. The conflicts in the Third World and the renewed growth of totalitarianism are just as little mere historical episodes as, according to the Dialectic, was Fascism in its time."(1972판)

"In a period of political division into immence biokcs driven by ab objectlve tendency to collide, horror has been prolonged. The conflicts in the third world and the renewed growth of totalitarianism are not mere historical interludes any more than, according to the Dialectic, fascism was at that time."(2002판)

여러 번 대조해 읽어보았지만 아무래도 국역본은 오역인 듯싶다. 그리고 논리상으로도 국역본의 문장은 지지될 수 없다. <계몽의 변증법>이 과연 1930-40년대의 파시즘을 '역사의 단순한 막간극'으로 간주하는 것인지. 상식적으로 그 반대 아닌가? 파시즘을 계몽의 불가피한/필연적인 귀결로 간주하는 것이 <계몽의 변증법>이 제시한 통찰이고 두 저자의 음울한 결론 아닌가? 그러니까 근대적 이성의 필연적인 귀결이 아우슈비츠라는(최근에는 아감벤 또한 이런 식의 통찰에 합류하는 것이고).

해서 최소한 "제3세계에서의 갈등과 새로이 커가는 전체주의는 <계몽의 변증법>에 따르면 그 시대에 파시즘이 그러했던 것처럼 역사의 단순한 막간극이 결코 아니다." 정도로 옮겨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이 <계몽의 변증법>이 갖는 '현재성'과 결부되는 것임은 자명하다. 

모든 번역에 필연적으로 오역이 끼여들기 마련이지만 부주의로 말미암은 듯한 이런 류의 오역은 불가피한 오역이 아니다. "진보 앞에서조차 멈추지 않는 비판적 사유"라면 미심쩍은 대목들을 한번 더 확인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첫 페이지에서부터 이런 오역과 맞부닥치게 되면 이후의 여정이 빡빡하리란 예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저 '오역의 막간극' 정도이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이어지는 문단: "이 책에서 인식된 '총체적 통합'으로의 발전은 완전히 분쇄된 것은 아니지만 잠시 중단되고 있다. 그러한 총체적 통합은 독재와 전쟁을 거쳐 자신을 실현시키고 위협을 가한다. 이와 결부된 것으로서 계몽이 실증주의, 즉 실제 '일어난 사실의 신화'로 넘어가고, 마지막에는 지성이 정신의 적대자와 같아지는 현상을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역사관은 역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꿈꾸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실증주의적으로 정보를 약탈하러 다니지도 않는다. 철학에 대한 비판으로서 그러한 역사관은 철학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두 영역본의 참조할 때 첫 문장 또한 "이 책에서 인식된 '총제적 통합'으로의 발전은 잠시 중단되었지만 완전히 분쇄된/종결된 것은 아니다."가 의미에 더 적합하지 않나 싶다. 방점이 어디에 놓이느냐의 문제이다. 더불어, '총체성'이나 '전체성'에 대한 두 사람의 뿌리깊은 불신을 이런 대목에서는 떠올려보는 게 좋겠다. '전체는 비진리이다'라는 게 아도르노의 맥심이다. 그러니까 '총체적 통합으로의 발전'이라는 양상은 두 사람에게서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러한 전체주의 비판과 맞물리는 것이 실증주의 비판이다. 실증주의란 '실제 일어난 사실' 그 자체의 존립과 인식이 가능하다고 믿는 입장이다(이 경우 철학은 불필요하다). 저자들은 그것을 '신화'로 치부한다. 두 사람의 입장을 정리하자면, 그들의 역사주의적 태도는 철학의 거부나 부정이 아니라 '철학 비판'이다(이 '철학 비판'이 곧 '비판이론'인 것인가?).

서문의 말미는 헌사와 바람으로 채워져 있다. 먼저, 책을 프리드리히 폴록(1894-1970)에게 헌정한다는 내용. 이건 1947년본에서나 1969년본에서나 마찬가지이다. 호르크하이머의 절친한 친구였던 폴록은 프랑크푸르트대학의 사회연구소 창립멤버였다. 이어지는 바람. 초판에 비해서 별로 수정된 사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두 저자는 이 책이 '일차적인 자료' 이상의 것이 되기를 희망한다. 물론 그러한 의미를 발견하고 확장시켜나가는 것은 이제 독자의 몫이 되었다...

06.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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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6-10-29 12:00   좋아요 0 | URL
확실히 72년 영역본이 2002년 영역본보다 문장이 어려운것 같네요.2002년판 문장에서.. "NOT~~~~ any more than~~~fascism"부분은 직역하면 "제3세계에서의 갈등과 새로이 커가는 전체주의는 계몽의 변증법에 따르면 파씨즘 이상은 아니다." 정도인것 같은데 로쟈님 말씀대로...그만큼의 전체주의적 문제점들을 전후세계도 가진다는 이야기가 맞군요..상대적으로 72년 영역본의 문장은...지금봐도 너무 난삽하게 영역한것 같네요...-_-

biocs는 blocks의 오자같네요..^^

로쟈 2006-10-29 12:06   좋아요 0 | URL
오타는 수정했구요, 제가 읽는 문장은 생략문입니다. "The conflicts in the third world and the renewed growth of totalitarianism are not mere historical interludes any more than, according to the Dialectic, fascism was (not mere historical interludes) at that time." A가 B가 아닌 것은 C가 D(=B)가 아니었던 것과 같다. 독어본의 문장도 비슷한 것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yoonta 2006-10-29 12:48   좋아요 0 | URL
그러니깐 "제3세계에서의 갈등과 새로이 커가는 전체주의는 과거의 파시즘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단순한 역사의 막간극이 아니다.".라는 말씀 ^^ 사전을 뒤적여보니..not ~any more than구문은 no more ~ than 구문과 같은 뜻으로.."~이 아닌것은 ~이 아닌것과 같다"라고 되어있네요.. 독해연습 하나하고 갑니다..^^

로쟈 2006-10-29 13:03   좋아요 0 | URL
저는 아도르노를 술술 읽는 사람들이 경탄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