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달의 두툼한 책(은 아니군!) <미국 헌법과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04)에 대한 서평을 옮겨온다. 필자는 박찬표 교수이며 타이틀은 '훼손되는 ‘다수지배의 원리’. '21세기, 고전 읽기'로 다루어져 비교적 자세하다(그러니 유익하다).  

 

경향신문(06. 07. 22) 우리에게 헌법은 무엇인가. 대선을 앞둔 정치권의 권력구조 개편논쟁이 한국 민주주의에서 헌법이 가지는 의미의 전부인가. 문제가 간단치 않음은 약간의 역사적 비교를 통해 확인된다.

 

미국 국회의사당에 걸려 있는 하워드 챈들러 크리스티의 1940년 작품 ‘미합중국 헌법에 서명하는 장면’

-군부세력이 헌정질서를 유린했던 시절에 헌법은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다. 입헌주의는 민주주의의 기초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와 헌법의 관계는 복잡하게 변하고 있다. 예컨대 보수세력은 민주적으로 구성된 정부나 입법부가 개혁입법을 통해 헌법의 근간을 흔든다고 비판하면서 헌법재판소를 통해 이를 저지하려 한다. 행정수도 이전 위헌결정은 그 단적인 예이다.

-개혁진영에서는 ‘1987년 헌법이 민주주의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인식 아래 개헌을 통한 민주화의 진전을 주장한다. 보수세력에 있어서는 민주주의가 헌법 질서를 위협한다면, 개혁세력에 있어서는 현행 헌법이 민주주의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헌법을 둘러싼 이러한 상반된 인식은 장식물에 불과했던 헌법이 민주주의 작동의 실질적 변수로 등장했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헌법과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보다 진지한 고민을 요구하고 있다.

 

 

 



-2001년 출간된 이 책은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는 우리 시대의 고전이라 할 수 있다. ‘미국 헌법은 얼마나 민주적인가?’라는 원제에서 알 수 있듯이, 민주주의 관점에서 미국 헌법에 대해, 그리고 헌법과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 뛰어난 통찰력을 제시해준다. 로버트 달에 의하면 민주주의란 자신이 복종해야 하는 법률을 작성하거나 자신을 통치할 대표를 선출하는 데 있어 시민 대중이 발언하는 체제이다. 이는 현실적으로 다수에 의한 통치를 의미한다.

-미국 헌법은 이 기준에서 볼 때 많은 비민주적 요소를 안고 출범했다. 나아가 달은, 헌법이 미국 민주주의의 기초를 닦았다는 통념과 달리, 헌법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민주공화국으로 발전한 것은 제헌 이후의 ‘민주혁명’을 통해 새로운 민주제도와 관행을 창출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미국의 헌정체제는 여전히 많은 결함을 안고 있다. 그 중에서 특히 강조되는 것은 상원 및 대통령선거에서 나타나는 대표성의 결함이다. 의회가 통과시킨 법률에 대해 9명의 판사들이 위헌 여부를 결정하는 사법부의 법률심사권 역시 심각한 대표의 문제를 야기한다. 이러한 미국 헌법의 결함은, 헌법제정자들이 가졌던 다수 지배에 대한 두려움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민주주의의 기초인 정치적 평등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비판된다.

-달이 제기하는 보다 중요한 문제의식은 헌법에 대한 사고방식을 바꾸자는 것이다. 헌법의 정당성은 ‘헌법이 민주정부의 수단으로 유용한가’라는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하며 헌법이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단언한다. 갈등적 이해가 충돌하는 민주주의 정치과정을 초월하여 공동체의 이익을 표징하는 규범으로 헌법을 신성시하는, 헌법 신화에 대한 날카로운 공박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 점에서 주목할 것이 최장집 교수의 한국어판 서문이다. 최교수는 달의 문제의식을 보다 확장시켜 헌정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전면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그는 민주주의를 인민주권과 다수지배 및 평등한 정치참여의 원리에 기초하는 ‘민중적 민주주의’와 다수지배를 견제하려는 ‘메디슨적 민주주의’의 두 모델로 구분하고, 한국 헌법 역시 메디슨적 민주주의를 원리로 하는 것으로서,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가 본격화되면서 미국이 경험했던 모순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분할정부로 인한 정치교착과 정부마비, 사법적 정책결정 및 사법적 입법기능을 수행하는 제왕적 헌법재판소의 등장이 그것이다. 최교수는 특히 후자를 후견주의적 발상에 기초한, 다수지배의 민주주의 원리에 대한 중대한 제약으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최교수는 정치의 기능을 바로세우는 ‘민주화’의 경로와 헌법을 바로세우는 ‘헌법화’의 길 중 전자를 제시한다. 한국 민주주의의 한계를 헌법에 기대어 해결하려는 자세는 엘리트 역할의 강화를 가져올 뿐이라는 것이다. 헌정주의는 민주화 초기 민주주의의 기초로 작동했지만, 시민권이 사회경제적 영역으로 확대되고 정치적 민주화가 사회경제적 민주화로 심화되는 시점에서 민주주의와의 갈등적 관계에 직면하게 됨을 각국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이 촉구하는 민주주의와 헌정주의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 재인식은, 한국 민주주의의 현 단계에서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

06. 0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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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oli 2006-07-23 01:07   좋아요 0 | URL
예전에 읽었는데, 조금 더 급진적이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지만 우리 학계 수준에서는 이만해도 충분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 흔히들 헌재가 오히려 후퇴시키고 있다는 '뉘앙스'로 말을 하는데, 과연 헌재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헌재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써야 하나,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기인 2006-07-23 01:27   좋아요 0 | URL
퍼 갑니다. <미국 혁명의 이데올로기적 기원>을 꽤나 재미있게 읽었는데, 미국적 '예외성'(미국 애들이 항상 강조하는)의 기원이 어떻게 변화하면서 나아가서 오늘날에 이르렀는지 참 생각할 수록 재미있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