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날짜 한국일보에서 미국 작가 레이몬드 챈들러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장르소설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혹은 그럴 만한 여유를 못내는) 처지이지만 '챈들러 컬렉션'에 대한 욕심을 부추기는 기사였다. 여기에 옮겨놓는 걸로 당분간은 그 욕심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필자는 최윤필 기자이며, 타이틀은 "추리소설 대표주자 레이먼드 챈들러: "썩은 도시 LA, 검은 속 보여주지""이다.

-“‘필립 말로’ 시리즈는 정직한 한 인간이 부패한 사회에서 고귀하게 살아가려는 분투를 담고 있습니다. 그 분투에서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는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는 빈털터리가 되거나 시니컬해지거나 삶에 관한 경구를 내뱉거나 간혹 정사를 즐기게 될 지도 모릅니다. 혹은 그는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자처럼 사악해지고 남의 비위나 맞추며 무례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말로 또래의 젊은 남자가 고상하게 부를 누릴 수 있을까요. 부정하지 않고서야 성공할 수 없는 냉혹하고도 분명한 현실을 받아들여 스스로를 타락시키지 않고 말입니다.”- 챈들러가 존 하우스만(영화제작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추리문학계의 거물 스티븐 킹은 ‘창작론’이라는 부제를 단 저서 <유혹하는 글쓰기>(김영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직유는 1940년대와 1950년대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나 한심한 싸구려 소설에서 찾아낸 것들이다”고 썼다. 그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과 ‘한심한 싸구려 소설’을 구분했지만, 40~50년대 당시의 미국 문단에서 그 둘의 구분은 무의미했다. 그 ‘한심한 싸구려’ 하드보일드 작가들은 하지만, 당대의 근엄한 주류들을 비웃듯 40년대 할리우드의 ‘필름 느와르’라는 흐름을 선도했고, 사후 하드보일드 리얼리즘의 고전으로 영미권 문학의 진지한 논문 주제 가운데 하나가 됐다.

-이들이 바로, 대시엘 해멧, 로스 맥도널드, 그리고 여기 소개하는 레이먼드 챈들러(1888~1959)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기나긴 이별>은 12번을 읽었다. 그는 나의 영웅이었다”고 말했고, 폴 오스터가 “그는 미국을 이야기하는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냈고, 이후 미국을 예전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던 바로 ‘그’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기자생활을 하며 시와 수필을 썼고, 여러 직업을 전전한 끝에 석유회사 부사장으로 출세하지만, 음주와 장기 결근으로 쫓겨난 이력의 작가다. 펄프 매거진에 범죄단편을 기고하며 문학 인생을 시작한 그는 첫 장편 <빅 슬립>(39년)부터 후기 걸작 <기나긴 이별>(54년)까지 6권의 장편 추리소설(박현주 옮김, 북하우스)을 썼다.

 

 

 

 

-오스터의 말처럼, 그의 문학은 현대 미국을 읽는 효율적인 코드 가운데 하나다. 인종의 용광로라는 미국에서도 가장 비등점이 높은 도시 LA를, 군수산업을 필두로 한 산업문명의 어지러운 성장과 사회ㆍ사상ㆍ가치의 부패와 혼란으로 뒤숭숭했던 30년대 말~ 50년대를 그의 소설은 말 그대로 하드보일드하게 관류한다. 그의 ‘페르소나’라 해도 좋을, 사립 탐정 ‘필립 말로’ 와 함께(*아래는 말로 역의 험프리 보가트).

-183㎝의 키에 85㎏의 당당한 체구, 경찰직에서 해고당한 33살 독신의 낭만적 냉소주의자 ‘말로’. 그는 고전적 의미에서의 정의의 투사도, 영웅도 아니다. 자신의 일에 때로는 목숨도 걸지만 사명감 따위는 없다. 한 마디로 그는 세상과 삶 자체를 냉소하는 ‘삐딱한 프로’다. 경찰 일에 협조하지 않았다고 경찰은 그를 욱대기고 그는 경찰을 이죽거리는 장면이다. “베이시티에서는 그 이유만으로 당신을 죽여버릴 수 있었어.”(경찰) “베이시티에서는 파란 넥타이를 매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날 죽일 수 있었겠지.”(말로) “그 이유만으로 당신을 영업정지시킬 수 있었어.”(경찰) “고려해보시지. 난 이 직업을 좋아한 적이 없었거든.”(말로) -<리틀 시스터>에서

-챈들러 문장의 매력은, 인물의 내면까지 공간에 투영시키며 치밀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끌고 가는 묘사의 힘, 그리고 ‘~듯이’ ‘~처럼’으로 이어지는 그 특유의 비유에서 찾을 수 있다. 가령 이런 문장. “장군은 다시 천천히, 일자리를 얻지 못한 쇼걸이 마지막 남은 고급스타킹을 사용하듯 조심스럽게 힘을 사용해서 말했다.” -‘빅슬립’에서

-챈들러는, 그리고 ‘말로’는 당대의 타락과 위선을 혐오하고 배척하는 대신, 냉소와 조롱, 연민과 익살로 포용한다. 고독한 감성과 치밀한 추리의 세계로 품는다. <빅슬립>의 33살 청년 탐정 말로는 <하이 윈도> <안녕 내사랑> <호수의 여인> <리틀 시스터> <기나긴 이별>까지 편을 이어가며 자신만의 아름다운 염세주의 미학을 구축해간다.

-냉혹하고 현실적인 팜므 파탈형 여성들을 주로 그렸던 소설에서와 달리, 18살 연상의 아내를 생애를 두고 열렬히 사랑했다는 챈들러는 <기나긴 이별> 발표 직후 아내가 숨지자 실의에 빠져 알코올 중독자로 살다 세상을 떠난다.

-그의 첫 장편 <빅 슬립>은 지난 해 말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의 100대 영어소설에 들었고, 그의 팬 대다수가 최고로 꼽는 <기나긴 이별>은 ‘히치콕 매거진’선정 세계 10대 추리소설에 꼽혔다. 올 여름, 그와의 연애에 빠져보자(*내가 올여름에 챈들러에 빠질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지만, 그렇다고 이 페이퍼가 'long goodbye'가  되기를 바라진 않는다. 암만!).

06. 07.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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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7-09 15:43   좋아요 0 | URL
저는 그 탐정의 표준전 모델이 된 필립 말로가 싫어요 ㅠ.ㅠ 그래도 퍼갑니다^^

로쟈 2006-07-09 15:49   좋아요 0 | URL
추리소설 애호가께서 안티-말로시라니까 다소 의외이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