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구내서점에서 본 두툼함 책 하나는 '학문 주체화의 새로운 모색'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우리 안의 보편성>(한울, 2006)이었다. 한동안 '학문의 주체성' 내지는 '우리 학문'이란 말이 학술계의 화두로 유행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신간은 그간의 성과를 집약하고 있는 책인지, 아니면 주기적인 레퍼토리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걸 직접 따져볼 만한 형편은 아니었는데, 얼마간 궁금증을 풀어주는 리뷰가 있길래 옮겨온다. 문화일보 최영창 기자가 쓴 "탈식민적 인식서 나아가 현실에 대한 보편적 독해"란 제하의 리뷰가 그것이다. 참고로, '우리 안의'란 표현은 <우리 안의 파시즘>(삼인, 2000) 이후 최근에 출간된 <우리 안의 과거>(휴머니스트, 2006)에 이르기까지 출판계에 유행하고 있는 하나의 트랜드이다.

 

 

 

 

문화일보(06. 06. 30) 1990년대 중반 미국 서부 남가주대(USC)에 교환교수로 가 있던 조희연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는 세계체제론의 권위자인 지오반니 아기리의 강의를 듣다가 “독재정부가 아닌 민주정부 아래에서 투쟁하는 한국을 포함한 제3세계 신흥공업국의 노동운동의 과제와 방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아기리는 “그것은 나에게 물어야 할 것이 아니라 당신이나 한국의 운동가들이 스스로 대답해야 할 문제이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신흥공업국 노동운동의 선봉에 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한국 노동운동의 향방이 세계 노동운동에 중요한 전범을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국내 인문사회과학자 12명이 서구 학문으로부터의 종속에서 벗어나 우리 학문의 주체적 정립을 모색한 책에서 조희연 교수는 당시 경험을 예로 들며 일생일대의 ‘지적 수치심’을 느꼈던 때라고 밝혔다. 당혹감에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 그는 강의가 끝난 뒤 벤치에 한 시간쯤 앉아 국내 학계와 지성계가 우리 현실을 어떻게 대면하고 있는지 수치스러운 마음으로 되돌아보았다고 한다.

-우리 근대학문의 서구 종속성 문제는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그러나 상지대·성공회대·한신대 3개 대학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민주사회정책연구원에서 기획한 책은 우리의 경험과 현실, 역사와 사회에 대한 ‘탈식민적 인식’의 순준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우리 현실에 대한 ‘주체적이고 보편적인 독해’를 통한 실천적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이 돋보인다. 여기서 ‘보편적 독해’란 정신대 문제나 박정희 신드롬, 광주항쟁 같이 우리 사회의 ‘특수성’으로 간주되는 현상들 속에서 세계사적 보편성을 읽어내려는 노력을 말한다.


 

 

 


-한국 학계 전반의 식민성을 점검한 서장에서 조희연 교수는 “지적·학문적 식민주의는 미국적 근대화를 추구했던 주류 우파 학자들뿐 아니라 이에 저항했던 좌파 학자들도 피해갈 수 없었다”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과잉보편화’된 서구적 보편의 특수화와 함께 그동안 주변적인 것으로 인식되면서 ‘과잉특수화’된 한국적·비서구적 특수의 보편화가 요구된다”고 강조한다.

-다만 우리 안의 보편성 발견 노력은 ‘우리 안의 파시즘’을 인식하는 과정과 동시에 진행돼야 ‘국가주의’나 파시즘으로 빠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다고 조 교수는 덧붙였다. 화교나 외국인 노동자, 정주외국인에 대한 배타적 태도에서 볼 수 있는 무수한 ‘우리 안의 파시즘’적 잠재력을 성찰하고 극복하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우리 자신이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질 때 현재의 ‘한류’가 문화적 패권주의가 아니라 아시아 동반주의의 새로운 문화적 차원을 열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은 서장에 이어 독일과 일본, 중국, 남아프리카 등 해외에서 이뤄진 학문 주체화 사례들을 다룬 논문과 내재적발전론·민족경제론, 분단시대론, 민중 등 광복 후 국내 학계에서 학문 주체화를 시도한 대표적 사례들을 살펴본 글, 이병천 강원대 경제무역학부 교수의 ‘개발자본주의론’ 처럼 한국사회의 주요 측면들에 대해 최근 새롭게 개념화·이론화에 들어간 작업들을 해당 연구자가 직접 소개하는 논문 등으로 구성돼 있다.

-서구의 근대학문과 우리의 관계에 초점을 맞췄지만, 사실 우리 학문의 대외 종속성은 근대나 서구와의 관계로만 한정되지 않고 훨씬 더 뿌리가 올라가고 복잡한 문제다. 따라서 필진으로 참여한 12명의 노력이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낯설게 비쳐보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가진 의미는 인정받을 가치가 충분하다(*이를 계기로 '우리 학문의 (불)가능성에 대한 보다 진전된 논의가 이어지기를 기대해본다).

06. 07. 03.

P.S. 러시아 사이트에서 '한국'에 대한 이미지들을 찾아보다가 발견한 한반도 지도 한 장을 옮겨놓는다. 동아시아사에 대한 내용 중 7세기 삼국시대의 한반도 모습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와 함께 양편으로 황해와 동해가 러시아어로 표기돼 있다. 암튼, 이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 우리 안의 보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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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퇴전문 2006-07-04 04:37   좋아요 0 | URL
당면한 현실과 문제들을 스스로의 머리로 고민하지 않는 한국적인 무언가를 식민과 냉전-분단 체제 탓으로 결론 짓는 것도 차츰 망설여집니다. 지적인 전통과 토양이란 것에 대해 알면 알아갈수록 답답한 심사도 함께 느네요. 가령 거대 제국이 공급해주는 담론들을 끽 소리 않고 받아들여서 오히려 더 교조적으로 울궈먹는 모습도 조선조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전통인가 싶고, 대전제는 결코 건드리지 않는 안전한 개설서를 주로 내놓는 모습도 당시 유생들이나 지금 교수들이나 뭐가 다를까 싶죠. 때론 한국이 뒷방 구석의 작은 냉장고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유통 기한이 지난 수입 식품들을 오롯히 저장해두는.

공부가, 평생 남이 퍼질러 놓은 대변이나 분석하다 끝나는 것이 아닌가.. 그게 나 하나 잘 하고 열심히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곧 죽어도 능력 없다곤 인정 안 하죠;), 가끔씩 서늘해지는 거겠죠. 초면 불구하고 몇자 남깁니다.

로쟈 2006-07-04 07:39   좋아요 0 | URL
'뒷방 구석의 작은 냉장고'란 비유가 절묘하네요.^^ 이게 한 개인의 역량과 무관한 듯싶은 문제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떼로 돌파할 수 있는 문제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게 됩니다. 누군가 좀 뚫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