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또한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철저히 물질적인 세상에서 몸을 일으켜 뭔가 초월적인 것을 성취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계속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이 갈망에 공감했으며, 지금도 이런 생각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현실의 무차별적인 공격으로부터 스스로 보호할 수 없는 순간, 아니 보호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왔다. 나는 마르크스주의가 지적인 면, 철학적인 면, 윤리적인 면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요소들이 있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그것은 모두 과거의 일이었다. 그 영웅적인 시대의 일부가 아직 남아 있는지는 몰라도,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미래로 우리를 이끌어줄 안내인이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 말이다. 게다가 총체적인 해결책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는 인명 피해로 이어졌는데도, 사람들은 역시 그 개념을 내세워 핑계나 만들어내고 있었다. 종교의 합리적인 대안을 찾으려 했던 사람들은 종교와 비슷하게 독단적인 종착지에 도착했다. 침팬지의 가까운 친척들이 만들어낸 이론인데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무오류성? -226쪽
친애하는 독자 여러분. 이 책을 여기까지 읽고서 (바라건대) 여러분 자신의 믿음도 흔들리고 있다면, 여러분이 지금 무슨 일을 겪고 있을지 내가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기꺼이 말할 수 있다. 나도 가끔은 확신이 있던 과거가 그립다. 마치 내 몸에서 잘려간 다리를 그리워하는 것 같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지금이 더 낫다. 덜 급진적이기도 하다. 여러분도 이론가들의 주장을 버리고, 아무런 속박도 받지 않는 여러분 자신의 머리로 스스로 생각한다면, 예전보다 이 편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227쪽
(소감)
기독교 대중화 육십년짜리 사회에서 기독교 본토의 이정도 독설을 이렇게서야 수입해오는 것 자체가 한국 사회와 한국 기독교/개신교의 경직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공적인 자리와 공적인 식사 자리에서 '다같이 하나님께 기도드리자' 고 요구하는 반공화국 분자들을 국가보안법으로 잡아넣어야 한다는 농담 아닌 농담을 한 적 있다. 60년짜리 민주공화국 시민으로서, 그리고 그 헌법의 정신이 지켜져야 한다고 믿는 자로서, 결코 농담만은 아니다.
히친스씨는 대처 시절 전후로 미국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 룸펜좌파이다. '브리티쉬 액센트를 쓰는 삐딱한 유럽 지식인 캐릭터' 를 '미국' 에서 어떻게 팔아야 하는지, 그리고 미디어와 그 미디어를 보는 계층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똑똑한 사람. 이라크전의 인권해방 측면을 강조했던 히씨의 지금 의견이 궁금할 따름이다.
밑줄로 옮긴 두 대목은 가장 공감이 되는 곳이다. 신념이 없다고 고백하는 용기와 정직성엔, 언제든 박수를 보낸다. -000쪽
친애하는 독자 여러분. 이 책을 여기까지 읽고서 (바라건대) 여러분 자신의 믿음도 흔들리고 있다면, 여러분이 지금 무슨 일을 겪고 있을지 내가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기꺼이 말할 수 있다. 나도 가끔은 확신이 있던 과거가 그립다. 마치 내 몸에서 잘려간 다리를 그리워하는 것 같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지금이 더 낫다. 덜 급진적이기도 하다. 여러분도 이론가들의 주장을 버리고, 아무런 속박도 받지 않는 여러분 자신의 머리로 스스로 생각한다면, 예전보다 이 편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2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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