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의 프리뷰'란 카테고리를 새로 만들었다(이로써 중복카테고리까지 포함 15개가 되었다). 그간에 주로 '로쟈의 인용'으로 분류해놓았던 신간 리뷰들을 따로 모아놓으려고 한다. 신간에 대한 나의 '선입견'들을 늘어놓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은 언론의 신간 리뷰를 옮겨놓고 정리하는 자리로 활용할 예정이다(즉, 이 카테고리 또한 일종의 스크랩북이 될 터인데, '최근에 나온 책들'을 소개하는 부담을 얼마간 덜 수도 있다는 계산도 없지는 않다). 당연한 말이지만, 쏟아지는 모든 책들을 읽을 수 없으며 때문에 필요한 것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들을 선별해주는 '리뷰'이다. 나는 이 리뷰들을 관심에 따라 선별해놓고자 한다(그래서 '프리뷰'라고 이름붙였다. 'preview'이면서 'freeview'인 '프리뷰'). 게으른 독자의 부지런떨기라고나 해야 할까?..

이 페이퍼에서 프리뷰의 대상으로 고른 것은 에드워드 사이드이다. 그와 관련한 책 두 권이 최근에 출간되었고 그 두 권을 함께 다루고 있는 언론의 리뷰 두 개를 옮려온다. 한겨레와 한국일보의 리뷰들이다(온라인에 떠 있는 한국일보의 리뷰 기사는 지면의 최종본이 아닌 초고본인 듯한데, 실제 지면 기사를 참고해서 보충했다).

 

 

 

 

한겨레(06. 06. 09) "보수세력 정체성은 미국 백인의 세계"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의 탈식민주의 문제설정을 한국 현실에 적용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제3세계 실천적 지성의 상징이었던 사이드를 통해 혼란에 빠진 한국 지성계에 새로운 싹을 틔우려는 시도다. <에드워드 사이드 다시 읽기>(책세상 펴냄)는 사이드에 관한 한 국내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연구자들이 함께 쓴 책이다. 사이드로부터 직접 배우고 그를 국내에 소개한 김성곤 서울대 교수를 비롯해 김상률 숙명여대 교수, 오길영 충남대 교수 등 영문학자 11명의 글을 모았다.

(*)'국내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이란 상투어는 좀 쑥쓰럽지 않을까? 사이드에 관한 국내 유일의 단행본 저작은 <박홍규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밖에 없는 데 말이다. 설혹 논문 한두 편을 쓴다 하더라도 그게 '국내 최고의 권위'를 가름하는 기준이 된다면 좀 부끄러운 일 아닌가?

 

 

 



-<오리엔탈리즘>으로 널리 알려진 사이드의 사유는 ‘타자에 대한 이해’로 집약할 수 있다. “다른 문명의 고유성을 억압하는 서구의 지배담론을 해체함으로써, 재현되지 못한 자들의 목소리를 복원”(김상률·오길영)하려는 이론적 작업이다. 그 뼈대는 ”서구가 그동안 어떻게 동양을 교화하고 문명화하고 지배해야할 ‘타자’로 취급”(김상곤)했는지를 폭로하는 것이다.

-한국은 21세기 오리엔탈리즘이 활개를 치는 땅이다. 애초 사이드는 유럽의 오리엔탈리즘에 주목했지만, 지금은 미국의 오리엔탈리즘이 문제다. 필자들은 “(한국) 지식층의 의식은 미국적 오리엔탈리즘에 적잖이 침탈당했고, 우리 삶 도처에서 덫처럼 도사린 구체적 현실이 됐다”(설준규)고 짚었다. “선/악, 문명/야만, 우수/열등 등의 이분법적 이야기에서 자신의 정체를 긍정적 세계인 백인의 세계와 동일시”(고부응)하는 태도가 대표적이다. 한국의 미국화를 지향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이 작동한 결과로 평가할 수도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새로운 신화들>(고즈윈 펴냄)은 이 대목에 각별히 주목한 결실이다. 언론학자이자 언론인으로 일했던 성일권 경제인문사회연구회 기획연구위원이 썼다. 사이드의 저작인 <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을 국내에 번역·소개했던 그는 이 책에서 한국 보수 지식인들의 담론 체계를 오리엔탈리즘의 틀을 빌려 비판했다.

-성 위원이 보기에 “‘악의 레짐’과 ‘선의 레짐’이라는 부시 미 대통령의 수사는 ‘문명과 야만’이라는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적 도식을 재현”한 것이다. “미국식 오리엔탈리즘의 궁극적 목적은 동양을 관리·지배·억압하기 위한 것”이다. “이들은 지옥과 같은 공산국가인 북한, 미국의 도움으로 아시아 자본주의의 총아가 된 남한이라는 신화를 깨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신화 속에 한반도가 갇혀 있길 바란다.”

-미국식 오리엔탈리즘은 우리 사회 깊숙이 스며들었다. “한국 보수세력이 갖고 있는 ‘대한민국의 모습’은 독재정권의 분단논리, 강대국의 냉전논리, 일본의 식민지배논리가 만들어낸 허구들의 조합이다. 그 담론 체계는 당연히 실제 현실과는 무관하다.” 성 위원은 ‘신우익’(뉴라이트)을 그 대표주자로 꼽았다.

 

 

 



-신우익은 “미국식 오리엔탈리즘을 내재화하고 이상화한 ‘복제 오리엔탈리즘’”을 구현하고 있다. 이들의 목표는 “악의 축 북한과 남한의 친북정권을 무너뜨려 한반도를 명실상부한 팍스 아메리카나 제국의 일원이 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성 위원은 지적했다. “우리 사회의 오리엔탈리스트들은 자신들만이 친북, 좌파, 반미라는 악의 세력으로부터 한국 사회를 구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성 위원은 류근일·김대중·조갑제·이영훈·유석춘·제성호·정진홍 등을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을 구현하는 미디어 지식인의 대표적 사례로 꼽고, 이들에 대한 비판도 시도했다.

-아직 거친 구석이 있긴 하지만, 오리엔탈리즘의 틀을 빌려 한국 지식사회를 분석하려는 노력은 참신하다. <에드워드 사이드 다시 읽기>에서 정정호 중앙대 교수는 “(사이드의) 포스트식민이론이 해체이론·다문화주의론 등과 같이 또다른 ‘무장해제이론’으로 오용되어 아무런 실천적 역할을 해내지 못하다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며 “새로운 형태로 계속 변장하는 신식민주의와 신제국주의에 저항하는 포스트식민론을 실천의 대항담론으로 전화시키자”고 제안했다.(안수찬 기자)



에드워드 사이드 → 제3세계 실천적 지성…차이를 우열로 왜곡시키는 제국주의 비판
-에드워드 사이드는 1935년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 이집트에서 공부하고 미국에서 학위를 마친 ‘영원한 방랑인’이었다. 프린스턴대·하버드대에서 공부하고 컬럼비아대에서 가르쳤다. 명저 <오리엔탈리즘>을 비롯한 여러 저술을 통해 차이를 우열로 왜곡시키는 서구의 제국주의적 관점을 비판했다. 아랍인이면서 기독교도였으며 동시에 이슬람을 옹호했다. 팔레스타인 망명 국회 의원을 지냈지만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을 비판하기도 했다.

 

 

 

 

-아랍어·영어·독일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스페인어 등 여러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했고, 수준급의 실력으로 피아노 연주회까지 열었던 천재였다. 미국 유대계 지식인들의 비난에 둘러싸여 테러 위협까지 당했지만, 백혈병과 싸웠던 말년에는 유대계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비판적·실천적 지성인을 대표했지만, 마르크스주의 대신 좌파 지식인으로 남기를 원했다. 그는 생전에 “어디를 가나 자신의 조국처럼 느끼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어디를 가든지 낯선 나라처럼 느끼는 이야말로 완성된 사람이다”라는 12세기 독일 수도승 후고의 말을 즐겨 인용했다. 갈수록 이 사회가 ’낯설어지는’ 한국인들은 또 다른 의미에서 사이드의 후예다.(안수찬 기자)

한국일보(06. 06. 10) "차이는 우열이 아니다" 끝나지 않은 외침

-평화와 공존이라는 인류의 소망을 조롱하듯, 21세기에 들어서도 증오와 폭력은 계속되고 있다. 이럴 때마다 세계는 한 지식인을 떠올린다. 서구의 일방주의를 비판하고 동서양의 교류와 소통을 강조한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 <에드워드 사이드 다시 읽기>는 한국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이드의 삶과 학문 세계이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사이드로부터 배운 김성곤 서울대 교수 등 영문학 교수 11명이 저자다. 평전의 성격도 지니고 있어 생애와 철학을 함께 읽을 수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예루살렘에서 태어났지만 아랍인과 유대인의 전쟁으로 이집트 카이로로 쫓겨났다. 그곳에서 명문가 자제만 들어가는 학교에 다녔고 나중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대학,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했다. 그 사이 가족은 카이로에서 레바논으로 이주했고 최종적으로 미국에 정착했다.(*아래는 누이와 어린시절의 사이드.)



-팔레스타인계 미국인인 그는, 에드워드라는 영국식 이름과, 사이드라는 아랍식 성의 조합이 상징하듯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했다. 사이드는 “미국인과 함께 있어도, 아랍인과 함께 있어도 언제나 불완전함을 느꼈다”면서 망명객을 자처했다. 이런 자의식은 그를 특권의 바깥, 안락한 삶의 외부로 끌어내 소외되고 박탈당한 이웃을 옹호하고 동양인과 식민지인, 소수 인종과 제3세계인에게 관심을 갖도록 했다.



-탈식민 연구라는 새로운 영역을 연 영문학 교수, 아시아의 대표 지성, 행동하는 지식인 사이드가 세계 지성사에 충격을 준 명저 <오리엔탈리즘>(1978)에서 꾸짖은 것은 서구의 편견이었다. 서구는 식민지인을 자신과 다른 ‘타자’(他者ㆍthe other)로 취급했고, ‘차이’(difference)를 우열로 보았다. 그 바탕에는 서구인은 우월한 문명인인 반면 비서구인은 열등하고 미개하다는 편견이 자리잡고 있다.

-서구는 비서구를 교화하고, 문명화하고, 지배해야 할 타자로 여겼다. 야만적이고 열등한 비서구의 계몽과 교화가 서구의 사명이고, 따라서 서구제국주의는 식민지를 착취ㆍ억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근대화, 문명화하는 과정으로 간주했다. 서구인은 자기 암시를 통해 그것을 사실로 믿었고, 제국주의의 실천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사이드는 이 같은 적대적이고 차별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동등한 위치에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새로운 상호 관계를 이루자고 주장한다. 특히 문명과 문화가 겹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이해와 화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미국에 정착한 그가 아랍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한 것은 67년 중동전에서 아랍이 패하면서부터이다. 그는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대변인이자 시인인 사촌 카말 나시르가 이스라엘의 테러로 살해되자 팔레스타인 민족운동에 참여한다. 그러면서도 팔레스타인의 테러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테러에는 반대했다. 말년에 백혈병으로 고생하면서도, 9ㆍ11 사태 이후 이슬람 근본주의자의 테러와 그것에 대응하는 미국의 국가 테러를 동시에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이드는 고향을 잃었다는 자각 때문에 죽을 때까지 한 평의 땅도 갖지 않았다. 돌아갈 고향이 없는 자신에게 집이란 의미 없는 공간이며, 만일 자신이 자기만의 집을 가진다면 그것은 곧 누군가를 노숙자로 만드는 일라고 생각했다.

-<오리엔탈리즘의 새로운 신화들>은 사이드의 이론을 차용, 오리엔탈리즘의 덫에 걸린 우리 사회를 겨냥한다. 저자는 파리8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파리외교전략연구원과 런던정경대에서 연구원을 지냈다. 서구제국주의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오리엔탈리즘이 유럽, 미국, 일본을 지나 우리 사회에도 깊숙이 스며들었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미국과 한국의 오리엔탈리스트는 자신만이 인권과 자유를 말할 자격이 있는 이성의 소유자이며, 다른 목소리를 내는 자는 배제해야 할 이단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꼬집는다.

 

 

 

 

-책이 규정하는 오리엔탈리스트는 미국의 네오콘, 일본의 신우익, 우리나라의 극우 지식인이다. 극우 성향의 교수, 어론인, '386 전향자', 종교인 등에 대해서는 실명을 거론하며 비판한다. 그리고 사이드가 그랬던 것처럼, 차이를 인정하자고 제안하면서 프란츠 파농의 글을 인용한다. "타자를 만지고, 타자를 느끼며, 동시에 그 타자를 내 자신에게 설명하려는 노력을 왜 그대는 하지 않는가."(박광희 기자) (*)마지막 제안/인용은 좀 안이하게도 느껴진다. 어딜 만지고, 무얼 느끼라는 것일까? Killing the others softly?..

 

06. 0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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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06-12 09:16   좋아요 0 | URL
포스터 ㅎㅎㅎ 네가 저항할 수 없는 것에서 어떻게 도망갈 것인가?...내재화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압축문구네요.포스터를 고르신 로쟈님의 센스가 ㅎㅎ <오리엔탈리즘의 새로운 신화들> 최근에 나온 책이네요.읽어야겠어요.

로쟈 2006-06-12 00:16   좋아요 0 | URL
책을 많이 보시는군요. 파농의 책은 아직 읽지 않았지만, 인용문구는 너무 '심심한' 편인지라 좀 '죽이는' 걸로 바꿔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