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 손택의 신간 <강조해야 할 것>(시울, 2006)을 어제 받아들었다. '최근에 나온 책들'이라고 매번 소개하지만, 정작 내가 구입하는 책들은 40% 이내이다. 그러니까 5권을 언급하면 2권 이내의 책을 사는 것이며 그 정도만 돼도 3할은 넘는 '타율'이 아닌가라며 자위하는 편이다. '손택의 모든 책'이라고 할 만하지만, 두툼한 데다가 가격도 만만찮은 책을 바로 주문을 넣은 데에는 호워드 호지킨(Howard Hodgkin, 1932- )의 그림 '인도의 하늘(Indian Sky)'을 두르고 있는 표지도 한몫했다. 원서의 표지이기도 한데,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장정이 가장 화려하며 때문에 눈길을 끌지 않을 수 없다. '강조' 하나는 제대로 하고 있는 표지이다.

국역본이 배달되자 마자 나는 도서관에서 며칠전에 확인해둔 원서 'Where the stress falls'(2001)를 대출했다. 서가의 제자리에 꽂혀 있지 않아서 직원에게 찾아봐줄 것을 부탁까지 했었는데, 다행히도 퇴근시간 전에 연락이 왔고 나는 그 책의 첫 대출자가 되었다(대출시스템이 전산화 돼 있기 때문에 최종대출일이 기록으로 남는다). 말하자면, '새책'이란 얘기이고, 이런 책을 대출할 때는 마치 직접 새책을 구입한 것 같은 부듯함을 느끼게 된다. 아래 사진은 2001년 한 서점에서 자신의 신간을 소개하고 있는 수잔 손택.

그리고 오늘, 읽어야 할 책들의 산더미 속에서도(나는 한번에 대략 10여권 이상의 책들을 건드린다) 마수걸이로 에세이 한편 정도는 읽기로 하고 편 것이 2부 '내가 읽은 것들'의 첫번째 에세이 '시인이 쓴 산문'이다. 처음엔 1부의 첫번째 에세이 '영화의 한 세기'를 읽으려고 했으나, 원서와 대조해본 결과 국역본의 차례는 1부와 2부가 바뀌어져 있었다. 즉 원서에는 '내가 본 것들(Seeing)'보다 먼저 나오는 것이 '내가 읽은 것들(Reading)'이고, 그래서 나 또한 그에 따라 2부를 먼저 읽기로 한 것(아마도 출판사로선 시작부터 '시인의 쓴 산문'을 읽어낼 독자가 많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을 법하다).

흥미롭게도 '시인이 쓴 산문'은 러시아 작가들, 특히 여성시인 마리나 츠베타에바(1892-1941)에 관한 에세이였다. 그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출전에 따르면 이 에세이는 원래 츠베타예바의 산문집 <사로잡힌 영혼(Captive Spirit: Selected Prose)>(1983)의 서문으로 씌어진 것이기 때문이다(손택은 러시아문학에 정통하다). '즐거운 책읽기'까지 적어놓으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그 때문이다. 더불어 몇 가지 번역상의 오류도 눈에 띄기에 교정해두고자 한다.

"19세기의 러시아가 없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1958년에 카뮈가 파스테르나크에게 경의를 표하는 어느 편지에서 이렇게 단언했다는 걸로 에세이는 시작하는데(그러니 러시아문학에 대한 참조 없이 카뮈를 읽는 일도 속없는 일이다), 그해에 스웨덴 한림원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했었다. "실제로 지난 25년 동안 뛰어난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이 번역되어 재발견되고 복권되었다."라는 건 지난 1983년 시점에서 영어권의 사정을 말한다. 20년이 더 지난 시점에서의 한국의 사정은 아직 턱도 없는 형편이다(단적으로 츠베타예바의 '시인이 쓴 산문'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전공자들의 반성이 요구된다(어떠한 핑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영혼을 바꿔놓은 19세기의 러시아는 산문작가들이 이뤄낸 업적이었다. 반면 20세기의 러시아는 주로 시인들의 업적이다. 물론 시를 통해서만 이루어진 업적은 아니다. 시인들은 산문을 통해서도 격정적인 의견을 쏟아냈다. 하지만 진지함이라는 이상은 필연적으로 비난을 불러일으킨다."(193쪽)

처음 두 문장은 타당한 주장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두 문장은 좀 의문스럽다. 원문은 "About their prose the poets espoused the most passionate opinions: any ideal of seriousness inevitably seethes with dispraise."(3쪽)이다. 'about their prose'가 '산문을 통해서도'란 뜻이 되는 건지 일단 의문이고(상식적으로 왜 '산문에 관해서'가 아닐까? 손택의 어법인가?), '하지만'은 왜 들어갔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이어지는 내용이 자전적 산문에 대한 파스테르나크의 폄하이기 때문에 맥락상으로도 두 문장의 의미는 와닿지 않는다.

내가 보기엔, 산문에 대해서 시인들이 격정적인 의견을 쏟아낸 것이고, (산문에서의) 어떠한 진지한 목적(이념)도 불가불 (시인들의) 비난을 사기 마련이다, 라는 정도의 뜻이 아닌가 싶다(손택의 어떤 문장들을 상상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읽기가 편하지 않다). 그럼 이어지는 내용은 무엇인가?

 

 

 

 

"파스테르나크는 죽기 전까지 몇십 년 동안 자신이 청년기에 썼던 뛰어나고 섬세한 자전적 산문(예를 들면 <안전통행증>)을 지나치게 자의식적이고 모더니즘적이라며 폄하했다. 반면 당시 집필하고 있던 작품 <닥터 지바고>는 자신이 쓴 글 중에서 가장 진실하고 완벽한 작품이 될 것이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비교가 불가능한 자신의 시 작품을 제외하고 말이다." 

번역문에는 오역이 포함돼 있기에 원문을 제시한다: "Pasternak in the last decades of his life dismissed as horribly modernist and self-conscious the splendid, subtle memoiristic prose of his youth (like Safe Conduct), while proclaming the novel he was then working on, Doctor Zhivago, to be the most authentic and complete of all his writings, beside which his poetry was nothing in comparison."

원제인 'A Poet's Prose'를 '시인이 쓴 산문'으로 옮긴 데에서 전문번역자로서 역자의 솜씨를 짐작할 수 있지만(대부분은 그냥 '시인의 산문'이나 '한 시인의 산문'이라고 옮길 것이다), 인용한 대목에서만큼은 실수가 도드라진다. 전체가 한 문장인 원문을 역자는 세 문장으로 분할했는데, 방점은 파스테르나크가 산문을 폄하했다는 데 놓여 있으므로 순서상으론 번역문의 첫번째 문장이 맨마지막으로 처리되어야 한다.

더불어, "beside which(=Doctor Zhivago) his poetry was nothing in comparison."을 "비교가 불가능한 자신의 시 작품을 제외하고 말이다"라고 옮긴 건 이해가 불가능한 오역이다. "<닥터 지바고>에 비한다면 그의 시들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뜻 아닌가?(참고로, <안전통행증>은 <어느 시인의 죽음>(까치, 1977)로 번역돼 있으며, 말년의 파스테르나크와의 인터뷰는 <11인의 위대한 작가들>(책세상, 1997)을 참조할 수 있다. 원래는 <나의 삶, 나의 문학>(책세상, 1989)로 소개됐던 책이다. 언론인 김성우의 러시아문학기행 <백화나무 숲으로>(제3문학사, 1991)의 파스테르나크 편도 유용하다. 아들 예브게니와의 인터뷰도 실려 있다.) 아래 사진은 파스테르나크가 숨은 거둔 모스크바 근교의 페레젤키노의 별장(다차). 가보진 못했는데, 지금은 파스테르나크 박물관이라고.  

해서 전체 문장을 다시 옮기면, "자신이 쓰고 있던 소설 <닥터 지바고>가 가장 진실하고 완벽한 작품이 될 것이며, 거기에 비한다면 그가 쓴 젊은 날의 시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공언하면서도 말년의 이십여 년간 파스테르나크는 (<안전통행증)> 같은) 자신의 젊은 시절에 대한 섬세하고 빼어난 자전적 산문을 지나치게 자의식적이고 모더니즘적이라고 격하시켰다." 아래 사진은 1934년 작가동맹회의에서의 파스테르나크.

파스테르나크와 마찬가지로 러시아 모더니즘 최대 시인 중 한 사람인 오시프 만델슈탐(1891-1938)은 산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산문의 핵심은 가르치는 것이다. 따라서 산문자가나 수필가에 의미있는 것이 ㅣ시인에게는 (전적으로) 헛소리에 불과하다." 손택의 보충설명: "산문작가는 동시대인이라는 구체적인 청중에게 말을 건네야 하는 반면, 일반적으로 시는 시간적으로 먼 미지의 수신인을 향한다고 그녀는 말한다."

한데, 웬 그녀? 원문의 '만델슈탐'을 다시 받기가 그랬는지 역자는 인칭대명사로 바꿔주는데, 그렇다고 성(性)까지 바꿀 필요가 있었을까? 만델슈탐의 아내 '나제쥬다 만델슈탐'이 걸출한 회고록의 저자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이는 '나제쥬다'가 아니라 '오시프'이므로 '그'라고 해야겠다. 사진은 1930년대 체포된 만델슈탐의 프로필 사진. 그는 1938년에 숙청됐다.  

이러한 배경설명하에 등장하는 이가 츠베타예바이다. 그녀 또한 시가 문학의 정점이라고 생각했는바, 어느 정도였느냐면 푸슈킨의 소설 <대위의 딸>에 대해서 "푸슈킨은 시인이었다. '고전적' 산문이라 할 수 있는 <대위의 딸>만큼 시적 호소력을 보여주는 작품은 없다"라고 했다. 즉, 푸슈킨이 소설을 시로 간주하는 것. 왜? 위대하니까? 만약 어떤 산문/소설이 위대하다면 그건 '시'이다. 시만이 위대하니까.

이러한 '편견'은 이 시기 러시아 시인들에게 널리 공유된 믿음이어서 손택은 망명시인 브로드스키(1940-1996)의 예를 덧붙인다(번역서에서 '이오시프 브로드스키'란 러시아식 이름을 '조지프 브로드스키'라고 영어식으로 읽어준 건 유감스럽다. 성경의 인물을 따라 '요셉 브로드스키'라고 타협할 수도 있을 텐대, '조지프'는 아무래도 낯설며 떨떠름하다). 그에 따르면 위대한 산문이란 "다른 표현수단을 통해 씌어지고 있는 시"이다.

"시를 이렇게 정의내리는 것은 실상 동어반복이나 마찬가지이다. 마치 산문을 '산문적인 것'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산문적인'이라는 말을 '지루하고 평범하며 단조로운'이라는 폄하적 의미로 생각하는 것은 정확하게 말해 낭만주의 시대의 사고이다." 손택의 논평이다. 어쨌거나 "문자의 공화국은 실상 귀족사회"이고 "이곳에서 귀족의 작위는 바로 '시인'이다." 여기서 '문자의 공화국'은 'the republic of letters'인데, 복수형의 'letters'는 '문학'을 뜻하므로 '문학의 공화국'이라고 하는 게 더 나을 듯하다.

요컨대, "러시아 문학은 시인에 대한 낭만주의적 사고를 계승하고 있다. 현대 러시아 시인들에게 '시'는 비참하고 속된 현재와 사회주의 체제의 지리멸렬함에 맞서는 자유이자 개인성이며 체계에 순응하지 않는 정신이다(진정한 산문은 결국 국가라는 듯 말이다). 따라서 그들이 시의 절대성을 단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물론 시의 근원적 우월성을 주장했던 건 러시아 시인들만이 아니며 손택은 발레리와 거트루드 스타인 등의 사례를 더 예시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인들이 산문을 썼다는 것. 손택의 서평 대상이 되고 있는 츠베타의 경우를 포함해서 말이다. 이에 대한 애기는 좀더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 때 마저 다루도록 하겠다...

 

06. 04. 29 - 05.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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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5-03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은 본문에 적은 대로입니다(필요한 문장도 다 적었습니다). 'nothing in comparison'이 '견줄 수 없이 뛰어난'이란 뜻을 갖고 있나요? 'beside which'도 '-는 차치하고'의 뜻인가요? 저로선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더불어, 파스테르나크가 시라는 장르를 높이 평가했지만, 한편으로 자신의 초기시는 높이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닥터 지바고>에 대해선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실상 <닥터 지바고> 자체가 '소설로 쓴 시'입니다... 제가 너무 성급했군요.^^

bluegoby 2006-05-03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실수한 걸 깨닫고 고치려고 들어와 보니 로쟈님이 벌써 답글을 달으셨네요.
먼젓글은 무시해 주세요.

털세곰 2008-01-10 0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소개해주신 영역본 쯔볘따예바 산문집(Captive Spirit)의 링크를 따라가면 위키의 그녀 사진이 나옵니당^^ 그리고 이제는 영어책 못 읽겠어요. 하도 멀리하다보니 로쟈님 번역문의 오류 등을 원본과 대조해 지적해주시는 것들은, 정말 제게는 어디가 번역이 틀렸지 할 정도입니다 ㅠ.ㅠ

로쟈 2008-01-10 09:49   좋아요 0 | URL
링크가 그쪽으로 바뀌었군요. 러시아어나 영어나 읽는 만큼이죠. 한데, 중요한 건 한국어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