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 경험론에 대한 걸 정리해놓겠다고 한 적이 있는데 벌써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특별히 '생산적인' 뭔가에 매달려 있는 것도 아닌데(이때 '생산'은 노동가치와 관련된다), 해야 할 일들이 계속 미뤄지는 건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다(이런 '일' 때문인가?). '들뢰즈와 경험론'에 관련한 읽을 거리들도 머리속에 몇 개 생각해둔 게 있었는데, 지금은 떠오르지 않는다(책들도 분산돼 있기 때문에 한번에 작업을 끝내지 못한다). 

그나마 남아있는 아이디어는 서동욱의 <들뢰즈의 철학>(민음사, 2002) 중 '보론'으로 포함돼 있는 글 '경험론과 철학 - 들뢰즈, 레비나스, 데리다'를 정리하면서 살을 붙인는 것이었다. 이 보론은 짧지만 생각할 거리들은 많이 제공해주는 유익한 글이다. 나는 막바로 3절부터 시작하겠다. '경험론에서 계사는 존재 동사가 아니라 접속사이다'란 소제목을 달고 있는데, 들뢰즈와 데리다를 레비나스를 사이에 두고 비교하는 내용이다(인용문의 강조는 나의 것이다).

"많은 면에서 서로 전혀 다른 종류의 철학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들뢰즈와 레비나스를 같은 종족으로 묶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그들은 사상적으로 그리스에서 온 자들이 아니라는 것, 로고스 없이 경험의 부스러기들만을 가진 자들이라는 점이다."(64쪽) 들뢰즈와 레비나스는 철학의 고향을 아테네가 아닌 다른 곳을 가정하므로 이러한 주장에 일리가 없지 않다. 대신에 레비나스가 '예루살렘'을 새로운 고향으로 지목하는 데 반해서, '노마드' 들뢰즈는 그러한 태생적 장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차이일까?

저자가 이어서 읽고자 하는 것은 <글쓰기와 차이>에 실린 데리다의 레비나스론의 한 구절인데, "경험론과 관련하여 데리다와 들뢰즈의 극명한 대립점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줄 이 구절은 물론 레비나스 비판을 위해 씌어진 것이다."(65쪽) 그렇다면, 레비나스의 주장은 무엇이었나?

"레비나스는 존재자를 존재자이게끔 하는 본질인 '존재'를 존재자의 모든 이기적 권력의 원천으로 본다. 이런 점에서 타인에 대한 폭력은 존재 사건 자체로부터 기인한다. 그러므로 참다운 윤리의 가능성은 '존재와 다르게'라는 부사구를 통해서 타인에게 접근하려고 할 때 비로소 희망해볼 수 있는 것이다."(이 '존재와 다르게'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저자의 <차이와 타자>, <일상의 모험>을 참조.)  그런데, 데리다에 따르면, 이 경우 "윤리적 언어는 '존재한다'라는 동사를 가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한데, 그런 언어는 불가능하다는 것. 즉, 레비나스여, 그게 가능합니까? 라고 젊은 철학자 데리다는 묻는다.

데리다 왈: "레비나스에 따르면 비폭력적인 언어는 동사 '존재하다'가 금지된 언어, 즉 어떤 술어적 기능도 없는 언어일 것이다. 술어적 기능은 최초의 폭력이다. 동사 '존재하다'와 술어적 활동은 모든 다른 동사와 모든 보통 명사 속에 함축되어 있다. 따라서 비폭력적인 언어는 궁극적으로... 모든 '동사'로부터 정화된 언어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언어가 여전히 언어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을까?... 로고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에게 가르쳐준 그리스인들은 그런 언어를 용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플라톤은 우리에게... 명사들과 동사들의 얽힘을 전제하지 않는 로고스는 없다고 말한다."(65-6쪽)

데리다의 견해로는 레비나스적/윤리적 언어가 술어적 기능을 갖는 '존재' 사를 금지할 경우 그것은 그리스적 의미에서 '언어'란 이름에 값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레비나스의 윤리는 언어적 표현을 가질 수 없다는 것. 그와는 반대로, "타자들을 그들의 진리 속에 '내맡겨져' 있게끔 하는 유일한 것"이 존재이며(보가 구체적으로는 '존재(est/is)'라는 계사(copula)이며), "존재의 이 근본성 때문에 데리다는 동사 '존재하다'는 모든 다른 동사와 모든 보통 명사 속에 이미 함축되어 있다고 말"한다. 가령, '책상'이란 말에는 '책상(이 있다)'가 함축돼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관건은 경험론이 '존재하다'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가이며, "진정한 경험론은 존재 개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숙명 때문에 멸망하기는커녕, 바로 데리다가 레비나스를 비판하기 위해 옹호하는 그 존재동사 'est'를 극복해야 할 표적으로 삼는 데서 비로소 경험론으로서 존립한다. 데리다와 정반대로, 경험론은 모든 동사들과 명사들을 존재 동사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한다."(66쪽)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들뢰즈이다. 그가 <디알로그>에서 말하고 있는 경험론의 핵심은 이렇다: "철학, 철학사는 존재의 문제 때문에, 이다EST 때문에 방해받는다. 사람들은 속사(속성)의 판별(하늘은 푸르다le ciel est bleu)과 현존의 판별(신은 있다Dieu est)을 논의한다... 그것은 항상 '존재etre' 동사와 원리에 관한 물음이다. 오로지 영국인들과 미국인들만이 접속사들을 해방시켰고, (주어와 속사 사이를 맺는) 관계들에 대해 반성해왔다." 문단이 길기 때문에 잠시 쉰다. 여기서도 '앵글로-색슨' 들뢰즈의 면모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모든 문법, 모든 삼단논법은, 존재 동사에 대한 접속사들의 종속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더 멀리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꿰뚫고 변조시키며, 존재를 손상시키고 무너뜨리는 관계들과 만나야 한다. EST를 ET로 대체해야 한다(A 'et' B). ET는 심지어 특정한 관계나 접속사도 아니다. 그것은 모든 관계들의 기초를 이루는 것, 모든 관계들을 열어주는 길이다. 그것은 관계들이... 존재, 일자, 전체 바깥에서 짜이도록 만든다. ET는 특별한 존재extra-etre이고 사이의 존재inter-etre이다... EST를 사유하는 대신에, EST를 '위해' 사유하는 대신에, ET와 '더불어' 사유하는 것, 경험론에 이것 말고 다른 비밀은 없다."(66-7쪽)

경험론의 유일무이한 비밀을 누설하고 있는 만큼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는데, 국역본 <디알로그>(동문선, 2005)에서 한번 더 인용하기로 한다. 2장 '영미문학의 탁월함에 대하여'에 나오는 대목이다.

"철학, 철학사가 존재의 문제, 즉 -이다/있다(EST)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는 만큼 이러한 관계들의 지리학은 그만큼 더욱더 중요합니다. 그들은 다른 것을 전제하는, 귀속판단(하늘은 파랗다)과 존재판단(신은 있다)에 대해 논하죠.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존재' 동사이고 원리의 문제입니다. 오로지 영미인들만이 접속사들을 자유롭게 하고 관계들에 대해 성찰했습니다. 이는 영미인들이 논리학에 대해 아주 특별한 태도를 지녔기 때문입니다."(109쪽)

서동욱의 인용에서 생략된 부분을 마저 인용하면 이렇다: "다시 말해 그들은 논리학을 제1원리들을 은닉하는 본래적 형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이렇게 말하죠. '당신들은 논리학을 포기하도록 강요받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중 하나를 발명하게 되겠지요!' 논리학은 정확히 대로(大路) 같은 것으로, 처음에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을 갖는 것도 아닙니다. (이 안에서) 우리는 멈출 수 없습니다."

"정확히 말해 관계들의 논리학을 만드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관계판단의 권리들을 존재판단 및 귀속판단과 별개인 자율적 영역으로 재인식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접속사들(가령 '그런데' '그리하여' 등등)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관계들이 존재동사에 종속된 채로 남지 못하게 해주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요."(110쪽) 요는 관계판단 또한 존재 동사에 종속되는 것을 면치 못한다는 것.

즉, "모든 문법, 모든 삼단논법은 접속사들이 존재동사에 계속해서 종속되도록 하는 수단입니다. 접속사들의 존재동사의 둘레를 돌게끔 만드는 수단이죠. (따라서) 더 멀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관계들과의 마주침이 모든 것을 꿰뚫고 망가뜨리도록, 존재를 침식시키도록 만들어야 하고, 존재가 동요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이다/있다(EST)를 그리고(ET)로 대체해야 하는 것입니다. A 그리고 B."

"그리고(ET)는 특별한 관계도, 특별한 접속사도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관계들, 모든 관계들의 길을 연결하는 것이죠. 관계들이 그 항들의 바깥, 그 항들 집합의 바깥, 존재나 일자나 전체로 결정될 수 있을 모든 것의 바깥에서 질주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불어에서 EST와 ET는 발음이 동일하다. 이게 영어로는 IS와 AND이다. 우리말로는 좀 번거루운데, '-이다/있다'와 '과(와)'가 거기에 해당할 것이다.

"열외-존재, 사이-존재로서의 그리고(ET). 관계들은 여전히 그 항들 사이에서 혹은 두 집합들 사이에서,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성립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고는 관계들에 다른 방향을 부여하고, 항들과 집합들이 능동적으로 창조하는 도주선 위로 차례차례 도주하도록 만듭니다. -이다/있다(EST)를 사유하거나 -이다/있다를 위해 사유하는 대신에 그리고(ET)와 함께 더불어 사유하기 - 경험론에는 이것 외에 다른 비밀이 결코 있어본 적이 없습니다."(110-1쪽)

대동소이한 두 번역에 대해서 따로 이견을 달지 않겠다. 다만, "ET는 특별한 존재(extra-etre)이고 사이의 존재(inter-etre)이다"와 "열외-존재, 사이-존재로서의 그리고(ET)"란 번역에서 '특별한 존재'라는 건 약간 부절적하며, 두 경우 모두 '-존재'라고 풀어주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 생각에 ET/AND는 무슨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존재-바깥'이며 '존재-사이'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존재론으로 포섭되거나 환원되지 않는.

요컨대, 철학은 'EST철학'(IS철학)과 'ET철학'(AND철학)으로 대별될 수 있다(편의상 'IS철학'과 'AND철학'이라 부르겠다). 'IS철학'이 전통적인 형이상학으로서의 존재론을 집약하는 별칭이라면, 'AND철학'은 들뢰즈적인 접속론의 다른 이름이다. 들뢰즈의 용어를 더 갖다 쓰자면, 'IS철학'은 '나무-철학'이며, 'AND철학'은 '리좀-철학'이다.

이 두 철학은 세계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기술/분절한다. 가령, "들뢰즈 IS 철학자"와 "들뢰즈 AND 철학자"로. 이 'AND철학', 혹은 들뢰즈적인 경험론은 IS(계사)라는 매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명사들끼리(혹은 머리들끼리) 막바로 헤딩하게 한다.  

 

 

 

   

여기서 콜브룩의 안내를 잠시 따라가본다(이 책은 순서상 '초월적 경험론' 장부터 읽는 게 타당하다). "들뢰즈에게 경험론은 철학적 이론이나 특별한 사상학파에 대한 인정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윤리학이자 정치학이다."(<질 들뢰즈>, 135쪽). 여기서 '인정(commitment)'은 '관련' 정도의 뜻이다. 그리고, 이 경험론이 갖는 함축: "들뢰즈는 매개에 반대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관념들에 의해 매개되거나 질서 잡히는 삶이나 존재가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삶은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의 관념들이 우리이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세계 자체가, 그것에 대해 우리가 결과로서 드러나는, 그런 관념들이나 이미지들을 생산한다."(136-7쪽) 그리하여 "오히려 관념들은 경험의 결과이다."

너무 오래 끌고 있어서 '남은 비밀'은 다음에 누설하기로 한다...  

06. 04. 25 - 0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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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6-04-28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글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있었는데..다시 시작하셨군요...^^
팍팍 진행되길 바랍니다..

저는 들뢰즈의 계사존재론과 지젝이나 라캉의 주체론을 비교해서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는데..로쟈님은 이건 어떻게 보시는지...


로쟈 2006-04-28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팍팍'은 안되네요(--;). 일단 한두 권도 아닌 책들이 분산돼 있어서 한꺼번에 작업을 진행시키지 못하고 있고, 또 견적이 견적인지라... '재미있는 이야기'는 yoonta님이 해주시면 안될까요? 저는 브리핑하기에도 벅찹니다.^^

yoonta 2006-04-28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이야기를 자세히 풀어낼정도로 구체화시키질 못해서요..지젝이나 라캉의 매개없는 주체..공백으로서의 주체와 들뢰즈의 계사존재론과는 다른 듯 하면서도 비슷한 데가 있다고 보거든요..로쟈님이 들뢰즈뿐만 아니라 지젝에 관심이 많으신분이라 한번 여쭤봤습니다.

로쟈 2006-04-28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뢰즈의 '계사존재론'은 아니죠.^^ '접속사론'이고, 이게 (지향하는 건) '존재론-바깥'이니까.

yoonta 2006-04-28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참 아이러니인거 같아요..계사"존재"론이 아니라는 님의 말도 맞지만 여전히 로고스적 언어(존재론적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의 접속사론도 서양의 형이상학적 존재론의 전통속에 있다고 보거든요..그런점에서 계사'존재'론이라는 표현도 여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로쟈 2006-04-28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뢰즈가 말하는 건 적어도 AND존재론인데, AND가 '계사'는 아니지 않나요? 물론 "ET는 심지어 특정한 관계나 접속사도 아니다"라고 했으니까 '접속사존재론'이란 말도 어폐가 있긴 하지만, 뭐라고 부르기는 해야 하니까... 더불어, 들뢰즈가 여전히 '로고스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죽은 철학자가 좀 유감스러워할 거 같습니다. 그는 적어도 '비틀거리는 언어'로 쓰고 있는 거 아닌가요?(그래서들 읽기 어렵다고 하는 거지만)...

yoonta 2006-04-28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글고보니 제가 말을 잘못했네요..^^;; is가 계사고 and가 접속사죠..들뢰즈는 접속사존재론이라고 해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