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프로이트의 범성욕주의(pansexualism)라고 말해지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떤 말을 하든 간에 우리는 궁극적으로 항상 그것에관해서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의미의 궁극적인 지평은 성행위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진짜 눈물의 공포>, 304쪽) 이러한 일반적인 견해를 반박하기 위해서 지젝이 (각주에서) 도입하고 있는 것은 한술 더 떠서 그러한 범성욕주의적 관점으로 근대철학사를 재기술하는 것이다: "성관계에 대한 이러한 개념을 궁극적인 준거점으로 받아들이면 근대철학사 전체를 그런 용어들로 다시 쓰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지젝의 각주16)은 국역본 319-320쪽, 원서 204-5쪽에 나온다). 

이럴 경우 만우절 행사를 겸하여 지젝의 '진지한' 농담을 옮겨놓고 잠시 음미하고픈 유혹을 나는 느끼게 된다. 번역은 필요할 경우 약간씩 수정하기로 한다(국역본에서 점잖게 '성교'라고 옮겨진 'fuck'를 나는 비속어에 걸맞게 '빠구리'라고 옮기려다가 체면을 생각해 참아두었다. 읽으시는 분들이 알아서 요령껏 읽으시길 바란다).

  

-데카르트: "나는 성교한다, 고로 존재한다." 즉, 강렬한 성행위 속에서만 내 존재의 충만함을 경험한다는 말씀이며, 이것을 라캉식으로 탈중심화하면,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성교하며, 내가 성교하는 곳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될 것이다. 즉, 성교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그것이 성교한다'는 것.

-스피노자: 성교로서의 절대자(coitus sive natura) 안에서 우리는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과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 간의 구별에 따라, 능동적으로 성교하는 삽입과 성교를 당하고 있는 대상을 구별해야만 한다. 세상에는 성교를 하는 자와 성교를 당하는 자가 있다.

-의 경험론적 회의: 우리는 하나의 관계로서 성교가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오직 그 움직임들이 서로 잘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대상들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회의주의적 위기에 대한 칸트의 대답: "성교의 가능조건이란 동시에 성교 대상의 가능조건이다." 

-피히테는 이러한 칸트의 혁명을 급진화한다: 성교는 스스로를 성교하는 자와 성교를 당하는 대상으로 나누는 자기-정립적인 무조건적 행위이다. 그 대상, 즉 성교를 당하는 자를 정립시키는 것은 바로 성교하기 그 자체이다.

-헤겔: 성교를 단지 실체(우리를 압도하는 실체론적인 충동)로서만이 아니라 주체(정신적 의미의 맥락에 포함돼 있는 반성행위)로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르크스: 관념론의 자위행위적 철학하기에 맞서 우리는 진짜 성교행위로 회귀해야만 한다. <독일 이데올로기>에 쓴 것처럼, 진짜 실제 삶이 철학에 대해 갖는 관계는 진짜 성교가 자위행위에 대해 갖는 관계와 같다.

-니체: 의지란 그 가장 근본에 있어서 성교에의 의지(Will to Fuck)로, 그것은 '나는 좀더 원한다'라는, 즉 영원히 계속되는 성교라는 영원회귀에서 정점에 달한다.

-하이데거: 기술의 본질이 결코 '기술적인' 것이 아닌 것처럼 성교의 본질은 단순히 존재적 행위로서의 성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성교의 본질은 본질 그 자체의 성교이다.' 즉, 우리의 존재이해를 성교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만이 아니다. 본질 그 자체가 이미 교접하고 있다.(*'fuck'에는 망가뜨리다란 뜻도 있으며 국역본은 그렇게 옮겼다.)

-끝으로, 본질 자체가 어떻게 이미 교접하고 있는가에 대한 이러한 통찰은 라캉의 "성관계 같은 것은 없다"라는 주장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진부한 이해에 반대하여, 프로이트적인 혁명은 바로 그와는 정반대의 제스처에 놓여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전체 우주를 '성화'하여 우주의 기본구조를 남성적인 원리와 여성적 원리, 곧 음과 양간의 긴장으로 보고, 그러한 긴장이 심지어 다른 더 높은 수준(빛과 어둠, 하늘과 땅)에서 반복되기 때문에 현실 자체가 이러한 두 원리의 우주적 성교의 결과로 등장한다고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전-근대적인 이데올로기적 세계에서이기 때문이다"(304쪽)

-"프로이트가 이룩한 것은 바로 세계의 근본적인 탈성화(desexualization)이다. 정신분석학은 세계의 근대적인 '탈주술화'로부터 궁극적인 결론을 끌어내는데, 그 결론이란 이 세계는 의미없고 우연적인 다수(the universe as a meaningless, contingent multitude)라는 관념을 말한다... 문제는 우리가 다른 일상적인 일들을 하고있을 때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하고 있을 때' 무엇을 생각하는가이다."

-"'성관계는 없다'는 라캉의 개념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하고' 있는 동안, 즉 우리가 성행위에 참여하는 동안 어떤 환상적 보충을 필요로 하며 다른 무엇인가에 관해 생각해야(환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305쪽) 다르게 말하면, 두 사람이 성교할 때 각자의 환상적 보충물까지 거기에 끼여들기 때문에 언제나 넷(적어도 셋)이 성교하는 게 된다. 그게 '성관계는 없다'의 의미이다! 

만약에 그런 환상적 보충물이 결여된다면, 차이밍량의 <흔들리는 구름>에서와 같은 '삭막한' 성교, 곧 'fucking as the real'이 될 것이다. 영화를 곧 보기는 해야 할 텐데...

06. 04.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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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4-02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