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지는 페이퍼인데, 재작년 가을 '모스크바에서 페테르부르크까지'의 여행을 돌이켜보면서 정리하기로 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도보 여행이 아닌 기차 여행이었기에 내가 여정은 페테르부르크에서부터이다. 페테르부르크의 '모스크바역'에 떨어지자 역사에 상징처럼 서 있는 표트르 동상 앞에는 페테르에 있는 후배들이 마중나와 있었다(거의 동일한 역사 구조인데, 동상으로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 역사는 구별된다. 모스크바의 '레닌그라드'역에는 레닌동상이 서 있다). 아래는 '모스크바'역의 야경. 우리 일행이 도착했을 때의 풍경과 유사하다.

 

 

그때의 기록을 잠시 따라가본다: "며칠 전 소시지를 잘못 먹고 배탈이 났다는(그래서 못나온) 후배가 집에서 저녁을 준비해놓고 있다고 해서 우리는 바로 택시를 잡아탔다. 모스크바역은 넵스키(=네프스키) 거리와 바로 통한다. 넵스키의 밤거리는 보도블록 공사를 하느라 좀 어지러웠는데, 함께 간 후배가 '남대문 시장 같다'는 얘기는 하는 바람에 페테르의 문화시민들에게 핀잔을 들었다(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은 페테르를 보통 문화의 도시라고 지칭하며 장사꾼들의 도시인 모스크바를 보통 무시한다). 택시는 네바강을 건너서 바실리 섬으로 들어서서도 한참을 더 달렸다. 얘기를 들어보니 페테르의 거의 끝에서 끝까지 타고 온 셈이었다(나중에 버스를 타보니 종점에서 종점이었다)." 아래는 그 넵스키 거리의 이미지이다(이 거리를 소재로 한 가장 유명한 작품이 고골의 '넵스키 거리'이다. 이 거리명은 '네바'강에서 따온 것이다). 흑백 사진은 1906년의 넵스키 거리. 이하에서는 여행기를 간추린다.

 

 

다음날 아침 늦게서야 식사를 하고 우리는 투어에 나섰다. 페테르부르크 초행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첫번째 목적지는 겨울궁전 에르미타주 박물관이었다(참고로, 학생증을 소지하면 에르미타주를 포함한 대부분의 박물관이 무료이다). 소장 작품들을 전부 보려면, 5 7개월이 걸린다는 둥, 10년이 걸린다는 둥 하도 전설이 많은지라 우리는 겸손하고 소박하게 3시간만 돌기로 하고 후배의 가이드를 받으며 인상파의 그림들부터 둘러보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상파부터 둘러보기로 시작한 게 아니라, 둘러보기 시작했는데 인상파 그림들이 튀어나왔다. 19-20세기 프랑스 회화 방부터 돈 것이다(143-146번 방). 아래 사진이 대영박물관, 루브르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힌다는 에르미타주박물관이다.  

 

 

여행안내 책자인 'Lonely Planet'을 참조하면(여행안내서로서 훌륭하다. 에르미타주의 경우 각 방별로 소개돼 있다), 고호, 고갱을 비롯하여 이 방에 있는 모네, 드가, 르느와르, 세잔, 피카스, 등의 그림 74점은 2차 대전 때 독일에서 훔쳐온 것이다(물론 원래 독일 것이 아니고, 독일은 프랑스에서 훔쳐왔다). 이 그림들을 러시아에서는 50년 동안 입다물고 보존하고 있다가 종전 50년이 되는 1995년에 숨겨진 보물들의 전시회를 개최했다(그러니까 이 그림들이 에르미타주에서 전시되기 시작한 건 10년이 채 안된다). 물론 '가진 자가 임자'라고 그 시점부터 소유권은 러시아로 넘어와 있다(프랑스도 훔쳐온 것들이 많기 때문에, 이런 걸 가지고 소유권 분쟁을 일으켜서 이득이 될 게 없다). 하여간에 이 그림들을 포함해서 대표적인 전시물들은 에르미타주 인터넷 사이트에서 모두 관람하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3시간의 관람에서 이런저런 그림과 조각 작품들을 구경했지만(그리고는 <포켓용 에르미타주>란 책을 샀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푸슈킨과 동시대인이었던 프랑스 화가 폴 들라로슈(Paul Delaroche, 1797-1856)가 그린 한 젊은 여인의 초상화이다('Portrait of Henrietta Sontag', 1831). 다음날 이곳의 전문가이드를 하고 있는 친구에게 얘기를 꺼내니까 그림이 걸려 있는 방번호와 위치까지도 정확히 기억해내고 있었다(내심 자기도 좋아하는 그림이라고). 하여간에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내가 정확하게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대학 1학년 때인가 방에 걸어놓았던 듯하다(내 방에는 선물로 받았던 시슬레의 풍경화와 함께 이 여인의 초상화가 붙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고도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하니 그녀는 잊혀진 여인이다. 그런데, 17년이 지나서, 먼 객지에서 재회하게 된 것이다(그것도 오리지널로). 물기를 약간 머금은 검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이 여인을, 나는 앞으론 오래도록 잊지 못할/않을 것이다(그래서 여기에 다시 옮겨놓았다!). 우리가 걸작들보다 더 오래 기억하는 것은 이런 사소한 인연의 그림들이다.

 

여정을 조금 건너뛰어서 푸슈킨시로 향한다. 푸슈킨시는 원래 차르스코예 셀로(황제의 마을이란 뜻)라고 불렸으며 예카테리나 여제의 궁전(=여름궁전)이 위치하고 있다(이 궁전은 소설 <대위의 딸>의 결말 부분에도 등장한다). 그리고 그 궁전과 연결되어,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세운 특수학교, 리체이가 위치하고 있는바, 푸슈킨은 그 학교의 제1회 입학생으로서 6년간의 요람기를 보내게 된다(입학 동기생은 30). 그걸 기념하여 이 차르스코예 셀로는 1937, 시인 사망 100주년을 맞아 푸슈킨시로 개명된다. 일정상 여름정원과 푸슈킨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는데, 우리 일행은 푸슈킨을 골랐다.  

이 리체이 건물 역시 지금은 푸슈킨 박물관이 되어 있는데, 4층짜리 건물에는 학생시절 푸슈킨의 스케치 그림들과 함께 성적표 등이 보존돼 있고(4층에 있는 그의 기숙사방은 내 방보다 작았다), 박물관 가이드들은 푸슈킨이 앉았던 책상을 가리키면서 그에게 얽힌 각종 일화들을 유머와 감동을 섞어가며 설명해준다. 하지만, 기대만큼 잘 꾸며진 박물관은 아니었는데, 푸슈킨이 1815 1월 상급반 시험장에서 당대 최고 시인이었던 제르자빈(1743-1816)을 앞에 두고 전해의 가을에 쓴 시 <차르스코예 셀로의 회상>을 낭송함으로써 일약 2의 제르자빈으로 호명된 문학사적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들을 수 없었다는 점도 이러한 인상을 더욱 굳게 했다. 문화적 신화는 러시아의 국민화가 일리야 레핀(I. Repin, 1844-1930)의 그림 <차르스코예 셀로의 알렉산드르 푸슈킨>(1911) 속에서도 전승되고 있는데, 소위 러시아 국민문학이 탄생하는 장면이다(아래 그림).

 

 

푸슈킨시는 페테르부르크 남쪽으로 25킬로쯤 떨어져 있으며 시내로부터 가는 데는 40-50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교외로 빠져나가서 20분쯤 차를 달리다 보면 오른편에 푸슈킨 동상과 함께 <푸슈킨>이란 표지판이 등장하는 데(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푸슈킨 동상으로 유명한 것은 러시아박물관 앞에 서 있는 동상이다), 우회전해서 소로를 따라 들어가면 그림 같은 도시가 등장한다. 이 푸슈킨시의 리체이 박물관은 기대에 못 미쳤지만, 궁정 앞의 정원은 기대 이상이었다(돈도 없고 시간도 없어서 궁전 안은 둘러보지 않았다). 약간 쌀쌀한 날씨였지만, 가을의 차르스코예 셀로는 각종의 조각상들과 어우러져 우아하고 품위있는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물오리떼들이 뛰놀고 있는 호수의 정경이 눈길을 끌었는데, 푸슈킨이 <예브게니 오네긴>(1831)에서 자신의 시들을 물오리떼들에게 읽어주었다는 바로 그 호수였다. 여제(女帝)의 궁전이 서 있을 만한 곳이었다

 

 

 

그날 저녁은 네바강변의 일식집에서 보드카를 양껏 마셨다. 같이 술을 마신 사람들이 네바강에 한번 빠져봐야 한다고 손님을 독려했지만, 물에 빠지기엔 너무 추운 날씨였다(여름이었다면 도전해봤겠지만). 그리고 다음날 나는 저녁 기차표를 예매한 다음에, 오후 시간을 친구와 함께 도스토프예프스키의 행적을 찾아 다니며 보냈다. 먼저, 지난번에 얘기한 쿠즈네츠느이 5번가의 박물관을 찾아가서 1시간 동안 안내 테이프를 들어가며 작품세계를 소개하는 방과 그가 생활했던 방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내게 인상적이었던 건 물론 새삼스러운 그의 작품세계가 아니라 그의 생활이었다(아래 세번째 이미지가 도스토예프스키 가족이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 현재는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

 

 

속기사였던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와 두번째로 결혼한 이후 둘 사이에는 4명의 자녀가 태어나는데(1870, 그러니까 그의 나이 50을 전후해서이다), 불행하게도 첫아이와 막내 아이는 일찍 죽는다(1868 2월에 태어난 첫딸 소피야는 그해 5월에 죽고, 1875년에 8월에 태어난 막내아들 알료샤는 78 5월에 죽는다). 특히 알료샤의 죽음은 작가에게 커다란 슬픔을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안나의 회고에 의하면, 남편은 곧 죽을 것을 예감이라도 한 것처럼 아들을 병적일 정도로 사랑했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는 아이를 잃은 아버지의 슬픔을 묘사하는 절절한 장면이 나온다). 성격이 괴팍할 것 같은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이지만, 자녀들에게는 더없이 자상한 아빠여서 그는 언제나 저녁식사 후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 때에는 머리맡에서 책을 읽어주었다고 한다. 아이들 때문에 당연히 낮에는 집필에 몰입할 수 없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전형적인 저녁형 인간이었는데, 11-12시부터 서재로 들어가서 아침시간까지 소설을 집필했다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다.

 

 

 

 

 

 

 

 

 

그의 서재에는 그가 가장 좋아했다는 그림인 라파엘의 성모상이 벽에 걸려 있었는데(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가 선물한 것이라 한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그림이다. 해서 느낀 건데, 아이에 대한 사랑을 모른다면 도스토예프스키를 이해할 수 없다(<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이반의 형이상학적 반항의 모태가 되는 것도 무고한 어린아이들의 고통이었다. 그걸 관념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러니 형이상학적 고뇌만을 흉내낸다고 해서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소설이 되는 건 아니다. 거기에 덧붙여져야 하는 것은 다음 세대에 대한 사랑과 염려이다. 그의 소설이 형이상학적이면서도 리얼한 소설이 되는 것은 그런 때문이다.

 

작가의 성실한 아내, 안나의 책상에는 남편의 작업량과 원고료 등이 빼곡하게 적힌 가계부가 놓여 있었다(안나는 작가 톨스토이도 부러워한 작가의 아내였는데, 사실 톨스토이의 아내 또한 객관적으로 말해서 조강지처였다. 하다못해 그녀는 아이를 열셋이나 낳았다! 하여간에, 악처를 요구하는 철학자와는 달리 작가에게는 처복이 좀 있어야 한다). 작가의 사후에 쓴 그녀의 회고록은(우리말로도 번역돼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가족의 삶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귀중한 자료이다. 더불어 최근에 안 것이지만, 그의 딸 역시 아버지에 대한 회고록을 쓴바 있다(좀 얇은 책이다). 아마도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을 그녀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을 나오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페테르부르크란 큰 지도와 함께 같은 제목의 팜플렛을 샀다. 팜플렛의 말미에는 그가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기술학교에 다니기 위해 형 미하일과 함께 지방에서 올라온 1837(그의 어머니가 죽은 해이기도 하다)부터 1881년 사망할 때까지의 주소지들이 적혀 있는데, 모두 22곳이다. 1867 2월 안나와 결혼한 이후에도 14년의 결혼생활 중 8차례 주소지가 바뀐다(그러니까 7번 이사했다).

 

 

내가 박물관에 이어서 찾아간 곳은 결혼 바로 직전에 그러니까 1864년부터 67년까지 <지하생활자의 수기> <죄와 벌>을 쓴 집인데, 이전 지명은 메샨스카야 거리의 알론킨의 집이었지만 현재의 주소는 카즈나체이스카야 거리 7번지이다. 이 건물의 벽면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두상 부조와 함께 <죄와 벌>의 씌어진 곳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물론 박물관이 아니기 때문에 집에 들어가거나 할 수는 없었고, 그때부터는 <죄와 벌>에 등장하는 몇몇 지명을 찾아 나섰는데, 정확한 주소를 안 가지고 있어서 약간 애를 먹었다. 사실, S. 벨로프의 <도스토예프스키의 페테르부르크>(2002)란 책에 주소들이 다 나오는데, 나는 방심하고서 그 책을 안 갖고 갔던 것. 팜플렛에서 대략적인 주소와 판화 그림만을 찾아가지고 몇 군데를 돌아다녔는데, 소냐의 집과 라스콜리니코프의 집은 카즈나체이스카야에서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그리고, 라스콜리니코프의 집에서 730걸음 떨어져 있는 전당포 노파, 알료나 이바노브나의 집을 찾아나섰는데, 걸어서 간 게 아니라 자가용을 타고 가는 거라서 오히려 더 찾기가 힘들었다. 친구와 합의를 봐서 어느 집이겠거니 하고 찍었지만 맞는지는 확인해볼 수 없었다. 참고로, <죄와 벌>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현재의 주소를 벨로프의 책을 참조하여 밝히면 이렇다.

 

<라스콜리니코프 그라주단스까야 거리 19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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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당포노파 그리보예도바 운하 104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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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냐 그리보예도바 운하 73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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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피리의 경찰서 발샤야() 포쟈체스카야 거리 26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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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그런 것이 나의 공식적인 여행 일정이었다. 투어 첫날 카잔성당과 이삭성당 등을 둘러보고, 제카브리스트 봉기가 있었던 원로원광장(지금은 제카브리스트 광장)을 거쳐서 네바 강변의 청동기마상(푸슈킨의 <청동기마상>을 모른다면, 이 동상을 구경하는 일도 별 의미가 없다)을 구경한 다음에 넵스키 거리를 종주한 일 등은 따로 기록하지 않겠다. 아래 이미지가 프랑스의 조각가 팔코네의 1782년작 '청동기마상'. 오른쪽은 알렉산드르 브누아(Alexandre Benois)가 그린 <청동기마상>의 삽화(1904). 에르미타주와 함께 페테르부르크의 대표적인 상징물인 '청동기마상'에 대해서는 따로 그에 걸맞는 분량을 할애해야 한다.

 

 

여정을 마무리하자. 페테르부르크의 모스크바역에서 내가 탄 모스크바행은 밤 9 55분발 열차였다. 플랫홈까지 친구가 배웅을 나왔고, 우리는 악수를 하고서 헤어졌다. 열차는 정시에 또 아무런 안내방송도 없이 스르르 플랫홈을 출발했다. 밤기차라 침대차였는데, 내가 끊은 건 좀 싼 6인용이었다(역시 13,000원 가량). 그보다 비싼 건 꾸페라고 해서 4명이 한 객실에서 타고 가는 식이다. 6인용이라고 한 건 통로쪽으로 2층짜리 잠자리가 더 달려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를 따름이고 이건 객차 전체가 그냥 다 개방돼 있다. 침대보 등의 침구는 30루블(1,200)을 주고 객차 승무원에게 사와서 잠자리는 각자가 만들어야 한다. 나는 자리가 위층이었는데, 대략 옆에서 하는 걸 보고 나름대로 처음은 아닌 듯이 행세하며 잠자리를 만들고는 누웠다. 8시간쯤 앉아서 가면 어떠랴 싶었는데, 눕고 보니까 역시 누운 게 편했다. 게다가 조명도 끄기 때문에 책을 읽을 형편도 아닌지라 나는 일찌감치 눈을 감았다.

 

View along a River (still Sparrow Hill)

 

기차는 5 55분에 모스크바에 있는 레닌그라드역에 도착할 예정이었는데, 한 시간 전에 조명이 환하게 밝혀지고 승무원들이 침구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즉 자기 잠자리를 정리해서 다시 반납해야 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종착역에 이르렀지만, 역시나 아무런 방송도 없었고 승객들은 알아서들 내렸다. 밖은 아직 어두웠다. 새벽 지하철을 타고 슬레두유샤야 스딴찌야-(다음역은-입니다)란 낯익은 안내방송을 들으면서 비로소 모스크바에 안착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몇 달 정이 붙은 지라 모스크바가 내겐 더 편한 느낌을 준다(사진은 모스크바국립대학이 있는 '참새언덕'에서 바라본 모스크바 시내의 전경.하절기에는 유람선이 왕래한다. 본래 더 장쾌한 이미지를 축소할 수밖에 없어서 아쉽다). 남성명사인 페테르부르크와 달리 모스크바는 여성명사이다. 여자들은 화려한 도시 페테르부르크를 더 좋아할 만하지만, 남자인 나로선 수더분한 모스크바가 더 맘에 든다. 모스크바(=여자)는 페테르부르크(=남자)의 미래이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06. 01. 28-29.

 

P.S. 연휴가 지나면 작년 이맘때 모스크바에서 귀국한 지 딱 1년이 된다. 푸슈킨과 도스토예프스키의 기일을 계기로 하여, 러시아에서의 추억을 잠시 돌이켜보았다. '현재'가 아닌 '추억'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것 정도이다. 나이 먹는 일에 대해서 내가 별반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것처럼.주변의 눈총 속에서 그나마 일을 마무리지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2006년의 오프닝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고 이제 '메인이벤트'로 넘어가야겠다. 아시겠지만,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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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6-01-30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반의 형이상학적 반항의 모태가 되는 것도 무고한 어린아이들의 고통이었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어린이를 학살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오싹할 정도로' 사실적이었던 것 같아요. 아이를 던져올리고 칼을 받친다든지, 아이와 얼굴을 한참 맞대다가 해맑게 웃기 시작하면 방아쇠를 당긴다든가 하는 일은 죽어도 잊지 못할 장면인 것 같군요. 즐거운 설 선물이 되었습니다^^

로쟈 2006-01-30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로소지음'이라고 하는데, 동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쟈 2006-01-31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자들의 호응이 기대에 못 미쳤던 것도 문제이지만, 채산성을 앞세워 절판시키는 것도 유감스러운 일이네요. 그렇다고 제가 '무슨 힘'을 쓰겠습니까? 유유상종하는 수밖에요...

털세곰 2008-01-06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위의 뻬쩨르부르그 도-끼와 "죄와 벌" 주변의 파노라마 사진들, 어디서 좀 더 크고 "장쾌한" 버전으로 구할 수 있나요...? 예전에 뒤져보다 저도 어디선가 보았는데 지금은 아무리 다시 찾으려 해도 찾을수가 없네요. 러시아쪽 인터넷이 그 열악한 인터넷 사정에 비춘다면 컨텐츠는 정말 우리보다 풍부하고 압도적인데 이상하게 사진 등의 이미지는 확실히 약하더군요. 혹시 원본 옮겨오시면서 줄이고 하셨으면 원본 어디서 구할수 있는지 좀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