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일 확인을 위해 PC방에 왔다가 시간이 약간 남아서 진행중인 페이퍼를 조금 더 적어둔다. 들뢰즈의 '문학과 삶'에 대한 정리 말이다. 바흐친에 대해서, 에밀 시오랑에 대해서, 그리고 벤야민에 대해서 써야 할 페이퍼들이 모두 해를 넘기게 되었다. 이럴 땐 '음력' 설을 핑계 되는 수밖에 없겠다. 2006년이지만, 아직 새해 인사를 건네지는 않는 시간에 나머지 일들은 모두 해치울 작정이다(해서 세밑이지만, 새해 인사는 당분간 생략하도록 하겠다). 물론 '작정'으로 모든 일이 해결되었다면 (내가 아니라) 내 아내의 팔자가 많이 달라졌을 테지만!

<비평과 진단>의 17쪽 맨마지막 문장, 그리고 <세계의 문학>(2000년 겨울호) 248쪽 중간 대목부터이다. "언어는 여성, 동물, 분자라는 우회로에 반드시 도달해야 하며 모든 우회로는 죽음의 생성이다. 사물에도 언어에도 직선이란 없다. 통사법은 사물 속에 삶을 현시하기 위해 매번 창조된 필요한 우회로들의 총체이다." 이 대목에 있어서 두 국역본의 차이는 거의 없다. 영역은 이렇다: "Language must devote itself to reaching these feminine, animal, molecular detours, and every detour is a becoming-mortal. There are no straight lines, neither in things nor in language. Syntax is the set of necessary detours that are created in each case to reveal the life in things."(2쪽)

 

 

 

 

'죽음의 생성(a becoming-mortal)'은 불어로 'un devenir mortel'이며, '죽어가는 것-되기'란 뜻이겠다. 그러니까 이 '죽는 것-되기' 혹은 '죽어가는 것-되기'가 '여성-되기, 동물-되기, 분자-되기를 모두 포괄한다는 것. 그리고 흔히 도주선/탈주선이라고 옮겨지는 그러한 생성(되기)으로의 여정은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새로운 통사론을 만들어내는 것에 다름아니다. 우리말로는 흔히 '활로'가 불려지는 것인데, 들뢰즈의 관심은 말하자면 '통사론적 활로'에 집중되며 이후에 그 사례들이 언급될 것이다. 황지우의 시 '활로를 찾아서'가 문득 떠오르는군. 

 

 

 

 

나갔다, 들어온다, 잠잔다, 일어난다.
변보고, 이빨닦고, 세수한다, 오늘도 또, 나가 본다.
오늘도 나는 제 5공화국에서 가장 낯선 사람으로,
걷는다. 나는 거리의 모든 것을.
읽는다. 안전 제일.
우리 자본. 우리 기술. 우리 지하철. 한신공영 제4공구간.
국제그룹사옥 신축 공사장. 부산뉴욕 제과점.
지하 주간 다방 야간 맥주홀. 1층 삼성전자대리점.
2층 영어 일어 회화 학원. 3층 이진우 피부비뇨기과의원.
4층 대한 예수교장로회 선민중앙교회.
5층 에어로빅 댄스 및 헬스 클럽. 옥상 조미료 광고탑.
그리고 전봇대에 붙은 임신. 치질. 성병 특효약까지.
틈이 안 보이는데. 들어가면.
또 틈이 잇는 벽보판까지.
그리고, 낯선 사람 살펴보고 수상하면 신고하자.
까지. 아 하루 종일 육교에.
빗과 손톱깎이와 혁대와 귓밥파기와 손수건과 동전 지갑을 놓고 앉아 있는.
노파의 일당 2천원내지 3천원의 現世를.
나는 건너왔다.
또합 2만원도 안 될 좌판을 들고.
단속반에 쫓기는. 아아 현세요. 아아아 육교여.
아아아아 현세의 척추가 휘청휘청하다.
아아아아앙 현세의 다리가 후둘후둘하다.
거리는 미래가 안 보이고.
미래가 빤히 보인다.
좃도 뭘 모르면서. 재잘거리고.
조잘거리고 소곤거리고 쌕쌕거리고 헉헉거리는.
거리는 여색이 가득하다. 썩기 전에.
잔뜩 달아오른 화농처럼. 부강한 근육이.
타워 크레인이. 철근 하나를 공중 100M 높이로 끌어올리고 있다.
아아아아아아 나는 모모성을 본다.
근면과 광기. 성실과 맹목. 나는 보고 또 보고.
굴착기는 맹렬하게 아스팔트를 뚫고. 자갈을 뚫고. 암반을 뚫고.
정신없이 퇴적층을 퍼올리는 포크레인이 그러나.
의외로 곱고 새하얀 그 순결한 흙을 퍼올리는
포크레인이 지하 20M에 있다는 것은.
열정도 신념도 아닌. 연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으로서 나는.
하지만 세상을 연민으로 바라보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으로서 나는. 그러나
아아아아아아아 가엾어라. TNT 사제 폭탄을 들고
은행엘 쳐들어간 청년은 자폭했고(중앙일보 9월2일자).
술집 호스티스는 정부에게 알몸으로 목졸려 죽었고(한국일보 6월 15일자).
방범대원은 한밤에 강도로 돌변하고(경향신문 12월 7일자).
아들은 술 취한 아버지를 망치로 내리쳐 죽이고(서울신문 4월 11일자).
노름판을 덮친 형사가 판돈 몽땅 꼬불치고(MBC라디오12시 뉴스 7월 26일자).
교사가 여학생을 추행하고(조선일보 11월 30일자).
신흥사 주지들 칼질 뭉둥이질(KBS제2라디오 8월 3일자).
디스코홀서 청소년들 집단적으로 불타 죽고(연합통신 4월 14일자).
前 중앙정보부차장이 억대 사기를 치고(동아일보 3월 6일자).
아 세월은 잘 간다.
눈 먼 세월. 잘 간다.
나는 손 한번 못 댄 세월. 잘 간다.
아직 오지 않은 사고와 사건과 사태와 우발과 자발과 불발의 세월. 속으로.
잘 간다.

"나는 양식을 파괴한다. 아니 파괴를 양식화한다"라고 선언했었던 황지우의 '파괴시학'은 그 나름으로 통사론적 활로의 모색이었으며, 그 활로는 이 시에서 "나갔다, 들어온다, 잠잔다, 일어난다"란 표현을 얻고 있다. "아 세월은 잘 간다./ 눈 먼 세월. 잘 간다./ 나는 손 한번 못 댄 세월. 잘 간다." 또한 비아냥의 통사적 (재)구축이다. 시는 그렇게 읽히며 그렇게 다시 읽힐 수 있다. 그리하여 다시 질문하게 되는 것. 문학이란 무엇인가, 글쓰기란 무엇인가?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추억, 자신의 여행, 자신의 사랑과 슬픔, 자신의 꿈과 환상 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성이나 상상력 과잉이라는 결함을 갖는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비평과 진단>에서 이 대목은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추억, 여행, 애상(哀傷), 꿈, 환상 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현실성이나 상상력 과잉으로 죄를 범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라고 돼 있는데, 모두 오역이다(이 오역이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면, 뒤에 나온 번역이 앞엣것을 베낀 게 된다). 'Ecrire n'est pas'(To write is not to-)로 시작하는 부정문이 어찌하여 (억지스럽게도) 긍정문으로 옮겨졌는지 모를 일이다. 글쓰기에 대한 역자들의 선입견이 반영된 것인지?

 

 

 

 

다시 정정해서 말하자면, "글은 쓴다는 것은 나 자신의 추억이나 여행담, 나 자신의 사랑과 슬픔, 나 자신의 꿈과 환상 따위들을 늘어놓는 게 아니다." 이어지는 번역문 "그것은 현실성이나 상상력 과잉이라는 결함을 갖는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나  "현실성이나 상상력 과잉으로 죄를 범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도 부정확한데, 일단  '그것은'이란 대명사는 가주어이기에 생략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문장은 앞의 문장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뒷문장과 연계되는 것이다. 나대로 옮기면, "상상력의 과잉이나 현실성의 과잉이나 마찬가지로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 두 경우 모두에서 현실 속에 투사되거나 상상계에 투입/내사(內射)되는 것은 아빠-엄마라는 영원한 오이디푸스 구조이다."

사실, <앙띠-오이디푸스>란 대표적 저작의 제목이 상기시켜주는 바대로, 들뢰즈/가타리가 격렬하게 저항하는 것은 그 오이디푸스 구조이며(모든 내러티브의 오이디푸스적 종결/해석), 그 대표적인 이론가로 거명하고 있는 사람이 마르트 로베르이다: "문학에 대한 유아적인 인식 속에서, 꿈의 한가운데에서와 마찬가지로 여행의 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바로 아버지이다. 그의 아버지-엄마를 위해 글을 쓰는 것이다. 마르트 로베르는 사생아나 업둥이말고는 소설가에게 별다른 선택을 남기지 않으면서 문학의 이러한 유아화, 정신분석화를 끝까지 밀고 나갔다."(사진은 <정신분석혁명>의 저자이기도 한 마르트 로베르 여사. <카프카에게서 정체성의 문제>란 책을 내던 시절이라고.)

"문학에 대한 유아적인 인식 속에서, 꿈의 한가운데에서와 마찬가지로 여행의 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바로 아버지이다."란 문장은 <비평과 진단>에서 "꿈의 한가운데에서와 마찬가지로 여행의 끝에서 문학이라는 유치한 개념으로 찾게 될 것은 바로 아버지이다."로 옮겨져 있다. '문학에 대한 유아적인 인식'과 '문학이라는 유치한 개념' 간의 차이는 모든 것이 '아빠-엄마'로 종결되는, 문학에 대한 '유아기적 개념'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이러한 유아화, 혹은 '정신분석화'를 극단에까지 몰고 간 이론가가 마르트 로베르이며, 그녀의 대표적인 저서가 <기원의 소설, 소설의 기원>(문학과지성사, 1999)이다(로베르의 소설론에 대해서는 김현의 <마당 깊은 집>론에서 처음 언급된 걸 본 기억이 있다).  

책에 대한 소개를 참조해 보면, 이 이론서는 "프로이트의 <신경증 환자의 가족소설>을 이론적인 출발점으로 삼아 '소설이란 무엇인지'를 규명하고자 한 것으로, 독창적이며 설득력 있는 방법으로 높이 평가받는 문학이론의 고전이다. 마르트 로베르는 소설을 쓰는 방법을 두 가지로 나눈다. 그는 모든 작가들을 업둥이와 사생아, 다시 말하면 낭만주의적인 작가들과 사실주의적인 작가들이라는 두 범주로 나눈다. 낭만주의적인 작가는 오이디푸스 이전의 잃어버린 낙원으로 돌아가길 원하며 부모 양쪽을 모두 부정하는 업둥이다. 반면에 사실주의적인 작가는 오이디푸스의 투쟁과 현실을 수락하며 아버지를 부정하고 어머니를 인정하여 아버지와 맞서 싸우는 사생아이다."(강조는 나의 것) 즉, 아주 강력한 환원주의인데, 모든 작가는 '업동이거나 사생아'로 분류된다는 것.  

 

 

 

 

흥미로운 건 본래 독문학자인 마르트 로베르 또한 손꼽히는 카프카 전문가라는 사실. 국내엔 그녀의 <프란츠 카프카의 고독>(동문선, 2003)만이 소개돼 있는데, 들뢰즈/가타리의 <카프카>(동문선, 2001)와는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는 셈이겠다(이 '빅 매치'에 대한 관전평을 가까이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게 유감이다). 참고로, 이 '빅 매치'를 관전할 요량이 있는 독자라면 카프카의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국내에는 2종의 번역본이 나와 있다)를 먼저 일독하는 게 순서일 것이다('아버지 전상서'로 씌어졌지만, 카프카 생전에는 발송되지 않았던 소위 '오프 더 레코드' 편지이며, 카프카 문학의 많은 수수께끼를 풀어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안티-오이디푸스'로서의 들뢰즈는 그런 식의 오이디푸스적 환원에 비판적이다. 심지어는 '나의 고양이, 나의 개'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조차 경계한다: "동물로의 생성(동물-되기)조차도 오이디푸스적 환원을, '나의 고양이, 나의 개' 같은 오이디푸스적 환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 사례로 들뢰즈는 로렌스를 인용한다. "내가 기린이고, 나에 대해 글을 쓰는 보통의 영국인들이 잘 키운 얌전한 개들이라면, 모든 진실이 여기 있으니 동물들은 서로 다르다... 당신은 나라는 동물을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이 대목에 대한 <비평과 진단>의 번역은 내가 기린이라면, 잘 키운 얌전한 개들을 갖고 있는 나에 관해서 글을 쓰는 보통의 영국인들이 모두 거기 있다면, 동물들이 서로 다르다면 당신은 나라는 동물을 본능적으로 싫어한다.”인데, 예전에 모스크바통신에서도 한번 지적한 바 있지만, 말도 안되는 오역이다. 당시에 러시아어본에서 내가 다시 옮긴 바는 이랬다: 내가 만일 기린이라면, 그리고 나에 대해 글을 쓰는 보통의 영국인들이 애교있고 잘 길들여진 강아지들이라면, 이걸로 모든 게 설명이 된다. 동물들이란 서로 닮은 구석이 없는 법이니까 당신은 본능적으로 나 같은 동물을 싫어하는 것이다. 로렌스가 자신을 비판하는 여론에 대해 한 편지에서 일갈하고 있는 대목.

이제 정리 모드. "일반적으로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환상은 부정관사를 인칭사 혹은 소유사의 가면으로만 취급한다. '한 아이가 매를 맞았다'는 금세 '내 아버지가 나를 때렸다'로 바뀐다. 하지만 문학은 정반대의 길을 따라가며, 겉으로 드러난 인칭들 밑에서 결코 보편성이라고 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극도에 달한 개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비인칭 - 남성, 여성, 짐승, 복부, 어린이... - 의 힘을 발견했을 경우에만 존재한다." 마지막 문장을 <비평과 진단>은 "하지만 문학은 반대의 길을 따라가다가, 보편성이 전혀 아닌 최상의 특수성인 어떤 비인칭의 힘을 명백한 인격체의 모습으로 발견하면서 비로소 멈춰선다."라고 옮기는데, 역시나 요령부득이다(특히 '겉으로 드러난 인칭들 밑에서(sous les apparentes personnes)'를 '명백한 인격체의 모습으로'라고 옮긴 대목).

다시, 문학은 언제 존재하는가? "겉으로 드러난 인칭들 밑에서 결코 보편성이라고 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극도에 달한 개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비인칭의 힘을 발견했을 경우에만 존재한다."(Literature ... exists only when it discovers beneath apparent persons the power of an impersonal - which is not a generality but a singularity at the highest point: a man, a woman, a beast, a stomach, a child...) 인용한 번역문은 여기서 '극도에 달한 개체성'의 사례를 '남성, 여성, 짐승, 복부, 어린이...'라고 옮겼는데, '보편성'이 아닌 '비인칭적 개체성'의 사례이므로, ''한(=어떤) 남자, 한 여자, 한 마리 짐승, 하나의 복부, 한 아이...' 등으로 옮겨지는 게 타당할 것이다. 문제는 '내 아버지가 나를 때렸다'를 거슬로 올라가 '한 아이가 매를 맞았다(a child is being beaten)'라는 익명적, 비인칭적 사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요컨대, "문학적 발화행위의 조건으로 기능하는 것은 처음의 두 인칭들, 즉 일인칭과 이인칭이 아니다. 문학은 우리에게서 를 말할 수 있는 힘을 앗아가는 삼인칭(블랑쇼가 말하는 '중성')이 우리 내부에서 태어날 때 시작된다." <비평과 진단>의 번역으론 "문학적 발화의 조건 구실을 하는 것은 두 1인칭이 아니다. 나(블랑쇼의 표현을 빌면 '중성')를 말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서 앗아가는 3인칭이 우리 내우베서 태어날 때만 문학은 시작된다." '두 1인칭'이란 표현은 오류이며, 블랑쇼의 '중성'을 1인칭과 동일시하는 것도 오류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문학은 '나'와 무관하다. 그리고 '너'와도 무관하다. 앞에서 "글은 쓴다는 것은 나 자신의 추억이나 여행담, 나 자신의 사랑과 슬픔, 나 자신의 꿈과 환상 따위들을 늘어놓는 게 아니다."라고 단언한 것은 그 때문이다. 대신에 그것은 어떤 비인칭의 공간을 펼쳐놓는 것이다. '어떤 개인 날' 의 '어떤 미소'처럼 말이다(사강의 <어떤 미소>는 고등학교 때 읽은 듯하다. 20년도 더 전의 일이다!). '너'에 대한 모든 기억을 이젠 지우고 떠나는 자의 발걸음 처럼 말이다... 

 

 

 

나의 마음속에 항상 들려오는 그대와 같이 걷던 그 길가에 빗소리
하늘은 맑아 있고 햇살은 따스한데 담배연기는 한숨 되어

하루를 너의 생각하면서 걷다가 바라본 하늘엔
흰 구름 말이 없이 흐르고 푸르름 변함이 없건만

이대로 떠나야만 하는가 너는 무슨 말을 했던가
어떤 의미도 어떤 미소도 세월이 흩어가는걸...

05. 12. 31- 06. 01. 02.

 

 

 

 

P.S. 아마도 가장 강력한 비인칭적 공간은 '세월'이 펼쳐지는 공간일 것이다. 어제로써 새해가 밝았고, 나는 전년에 못다한 일들과 올해 해야 할 일들 사이에서 망연하다. 거듭 인용하자면, "아 세월은 잘 간다./ 눈 먼 세월. 잘 간다./ 나는 손 한번 못 댄 세월. 잘 간다." 하지만, 한번쯤 손봐줄 때가 올 수도 있지 않을까(부지런히 칼을 갈아야겠다). '문학'을, 그리고 삶'을 이대로 흘려보내기엔 아무래도 좀 멋쩍은 일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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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1-01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니브리티 2006-01-03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이란 무엇인가?>와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는 그 용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요...
마르트 로베르가 여자였군요... <기원의 소설, 소설의 기원>의 서장이던가.. 아직 정의되지 않은 문학에 대한 시론은 아주 감명깊게 읽었는데, 그 뒤부터 업둥이 어쩌고 하는데에서는 그의 서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인상을 받았었습니다...
요즘 쓰고 있는 글의 요지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어떻게 문단에 문학적 알리바이와 윤리적 면죄부로 기능하는가에 대한 건데요... 완성되면 한번 봐주세요...^^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로쟈 2006-01-03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쓰기가 문학을 포괄하는 더 넓은 개념이라면, 글쓰기의 조건은 문학의 조건이기도 하지 않을까요? 요즘 쓰시는 글이 혹 '소설'이신지요?^^ 니브리티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시길...

니브리티 2006-01-03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소설은 아니고, 소설집 뒤에 들어갈 작가후기 겸 저의 소설론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실제로 작가나 시인들이 자신의 문학관을 피력할 수 있는 기회는 매우 한정되어 있습니다. 시인들의 경우는 짧은 '서시'(문지 시인선의 경우 책 뒤에 원고지2~3매 분량 정도)가 전부이고, 소설가들의 경우 10매 남짓의 작가후기가 전부죠. 그나마 주어진 분량을 누구누구에게 감사의 말씀...으로 채우고 보면, 정말 없다고 봐야하겠죠. 비록 비평을 하지는 않지만, 전 이 기회에 좀 길지만(60매 정도) 작가후기를 충실하게 쓸 생각입니다...반 정도 썼는데...

음...작가란 종류의 인간들은 좀 뉘앙스에 민감하니 로쟈님이 비록 의도하지 않으셨다고 해도 사실 로쟈님의 말이 가시가 되어 저를 폭폭 찌르기도 합니다....^^ 그치만 로쟈님의 편집증을 사실 저도 즐기고 있다고 말해도 그닥 틀리지는 않는 거 같아요.... 새해에는 돈 버는 글도 좀 쓰시기를...^^;;;

로쟈 2006-01-04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버는 글'의 노하우를 좀 전수해주시길!..

니브리티 2006-01-05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걸 알면 제가 이렇게 버벅 거리겠어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