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을 하루 앞두고 날이 풀렸다. 날씨도 수험생들을 배려하다니 기특하다. 어제 아는 집의 자제도 고3이어서 우리 가족이 '합격기원' 선물 배달을 갔었다(어디에 합격하나?). 중학교때 본 아이는 어느새 나보다도 키가 더 커 있었다. 그렇듯 자라나는 게 '도덕'이라고 믿는 나로선 아이의 '도덕성'이 또한 기특했다. 물론 성적은 도덕순이 아니므로 내일 애써 분전해야 하리라. 그의 건투를 빈다.

 

 

 

 

잠깐의 외출 뒤에 집에 돌아와 내가 잡은 책은 다시 손택의 <우울한 열정>(시울, 2005)이다. 거기서도 벤야민을 다루고 있는 "토성의 영향 아래". 이미 한번 읽은 걸 찬찬히 다시 읽고 있다. 손택의 벤야민론을 정리하는 건 지난번에 폴 굿맨과 롤랑 바르트 얘기를 정리하면서 미뤄둔 일인지라 마음 한구석에 숙제로 남아 있었는데, 마저 다 읽지 못한 상태이지만 쉬엄쉬엄 진도를 빼기로 한다.

손택의 벤야민론은, 사진에 관한 책도 낸바 있는 저자답게, 벤야민 사진 몇 장에 대한 얘기로부터 시작한다. 내가 갖고 있는 Picador판의 원서 "Under the Sign of Saturn"(2002)에도 그렇고, 우리 번역서에도 이 사진들을 싣고 있지 않다. 구글에서 이미지를 따다가 대략 설명과 맞추어본다.

첫번째 사진은 손택이 본 가장 오래된 사진인데, "1927년, 그가 서른 다설 살때의 사진이다." 이어지는 묘사는 이렇다: "넓은 이마 위에 짙은 색 곱슬머리, 두툼한 아랫입술까지 덮은 콧수염. 젊고, 잘생겼다고 할 수 있을 모습이다. 머리를 숙이고 있어 재킷 속의 어깨가 바로 귀 뒤에서 시작하는 것 같다. 엄지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고 나머지 손은, 둘째, 셋째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 입가를 가리고 있다. 안경을 통해 보이는 내리깐 시선, 근시안의 부드럽고 몽상가 같은 시선은 사진의 왼쪽 아랫부분으로 더가고 있는 듯이 보인다."(65쪽)

그리고 두번째 사진. "1930년대 후반에 찍은 사진은, 이마는 거의 벗겨지지 않았음에도 젊음이나 미모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얼굴이 커졌고 상체는 육중하고 건장해 보인다. 숱 많은 콧수염과 엄지손가락을 안으로 밀어 넣은 통통한 손이 입가를 덮었다. 시선은 불투명하다. 전보다 더 내면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생각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열심히 듣는 사람은 보지 않는다." 벤야민을 카프카에 대한 글에 이렇게 썼다). 등뒤에는 책이 꽂혀 있다."

세번째 사진은 "1938년 여름의 사진"으로 "1933년부터 덴마크에 망명하여 살고 있는 브레히트를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찍은 것이다." "브레히트의 집앞에 서 있는 벤야민은 46세의 노인으로 흰 셔츠와 타이, 양복바지에 회중시계를 달고 있다. 느슨하고 비만한 몸집으로 카메라를 도전적으로 응시하고 있다."(66쪽)

네번째 사진은 "1937년의 또 다른 사진"으로 "파리 국립도서관에 있는 벤야민의 모습이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두 남자가 벤야민 뒤쪽에 좀 떨어져 있는 테이블에 함께 앉아 있다. 벤야민은 오른쪽 전경에 위치하는데 아마도 10여 년 동안 집필 중인 보들레르와 19세기 파리에 대한 책을 위한 메모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테이블 위에 왼손으로 책을 펼쳐 잡고 있는 책을 보고 있다. 눈은 보이지 않지만, 사진의 오른쪽 아랫부분을 보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어서 손택이 인용하고 있는 숄렘의 증언은 <한 우정의 역사>(한길사, 2002)에 나오는 내용이기도 한데, 벤야민의 절친한 친구 게르숌 숄렘은 1913년 벤야민을 처음 보았을 때를 이렇게 묘사한다. "시오니스트 청년 단체와 스물 한 살의 벤야민이 회장을 맡고 있는 자유 독일 학생 협회의 유태인 회원들의 조인트 모임이었는데, 벤야민은 <청중을 한번도 쳐다보지 않고 천장 구석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즉흥 연설을 했다. 격정적으로 열변을 토했는데, 내가 기억하기론 바로 글로 활자화해도 될 그런 연설이었다.>"(66쪽) 

이제 본론이다. 먼저 제목 '토성의 영향 아래'에 대한 해명. "프랑스인들은 벤야민을 '슬픈 사람(un triste)'이라고 불렀다. 젊은 시절 벤야민의 모습은 '심오한 슬픔(a profound sadness)'이 그의 특징인 것처럼 보였다고 썼다. 벤야민은 스스로를 우울한 사람으로 생각했고 현대 심리학에서 붙이는 명칭을 경멸하여 전통적인 점성술적 개념을 끌어온다. <나는 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났다. 가장 느리게 공전하는 별, 우회와 지연의 행성...>"

 

 

 

 

점성술에 관한 책들이 국내에 몇 권 나와 있지만, 그런 것까지 참조할 형편은 못된다. 아마도 서양 점성술에서 토성(Saturn)은 우울증적 기질을 상징하는 듯하다. 하기야, 과거엔 토성이 태양계의 가장 마지막, 외곽의 행성이었을 테니까 그렇게 간주되었을 법하다(명왕성의 영향 아래 태어난 이들은 어떻게 되나?). 그래서 요일에서도 맨마지막에 자리하고('즐거운 토요일'의 이미지는 어쩌면 그런 우울증을 상쇄하기 위한 마스크일는지도 모르겠다). '토성의 영향 아래'라고 번역돼 있지만, 우리식으론 '토성의 기운 아래' 혹은 '토성의 기를 받아'라고 새기는 게 더 이해하기 편하겠다.

"벤야민의 주된 작업, 1928년에 출간된 독일 바로크 연극에 관한 책과 완성되지 못한 <파리, 19세기의 수도>는 이 책이 우울증 이론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면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67쪽) 역자는 이런 대목들에서 복수형을 대개 단수형으로 옮기고 있는데, 한국어답긴 해도 의미의 모호성을 유발한다('이 책이'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손택이 벤야민의 주된 작업(major projects)으로 들고 있는 것은 박사학위청구논문이었던 <독일 비극의 기원>(1928)과 '파리, 19세기의 수도'를 다룬 미완의 주저 <아케이드 프로젝트>이다. 알다시피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지난번에 절반이 출간됐고, 나머지 절반도 근간 예정인 걸로 안다. <독일 비극의 기원>은 번역이 진행중인 걸로 알지만, 언제 나오는 건지는 모르겠다. 일어로는 <독일 비애극의 근원>으로 옮겨져 있다. 'Traurspiel'(비극)은 문자 그대로 '비애극(sorrow-play)', '애도극'이란 뜻이다.

벤야민 비평의 두 가지 키워드는 알레고리와 멜랑콜리(우울증)이다. 따라서 우울증적 기질에 대한 손택의 강조는 당연하며 정당하다. "벤야민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기질을 모두 자신의 주요 연구과제에 투사했으며, 그의 기질이 그의 글쓰기의 주제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해서, 비평가로서 그가 다룬 대부분의 작가들에서 그가 본 것이 '우울함'이었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면서도 간과될 수 없는 부분이다. 하다못해 벤야민은 괴테에게서도 '토성적 기질'을 발견한다.

 

 

 

 

벤야민의 괴테론은 <친화력>에 관한 에세이가 유명한데, 종종 번역서들에서는 <선택적 친화성> 등으로 (잘못)옮겨지고 <우울한 열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영어의 'Elective Affinities'의 번역이긴 하지만, (이전에 자주 언급한 대로) 고유명사의 번역은 주의를 요하며 기존의 관행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하여간에 우리의 우울증적 벤야민은 그가 읽어내는 모든 걸 블루로 채색한다. "벤야민은 프루스트의 '세상을 그 혼란상 속으로 끌어당기는 고독'을 묘사하고, 카프카도 파울 클레처럼 '본질적으로 외로웠다'고 설명하며, 로버트 발저의 '인생에서의 성공에 대한 공포'를 인용한다." 가히, 구제 불능이라 하겠다. 손택에 따르면, "삶을 이용해서 작품을 해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작품을 이용해서 삶을 해석할 수는 있다."(One cannot use the life to interpret the work. But one can use the work to interpret the life.) 바로 벤야민의 경우가 그렇다...

05. 11. 22.

P.S. 다른 볼일들 때문에 일단은 여기에서 끊는다. 필요 때문에 도서관에서 가서 사르트르에 관한 자료들을 좀 뒤적거려야 한다. 어젯밤에도 사르트르를 좀 뒤적이다가 고유명사 표기에 관해서 좀 어리둥절한 일이 있었는데, 가령 사르트르의 희곡 'Huis clos'(1945)에 대해서도 <유폐의 방>, <닫힌 방>, <닫힌 문>, <출구는 없다>, <출구 없는 사회> 등등으로 표기돼 있었다(영역은 'No Exit'). <유폐의 방>과 <출구 없는 사회>가 같은 작품을 지칭하는 거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 과연 이 책 저 책을 뒤적거려야만 하는 건지 의문이다. 

그러다 보면, 웃지 못할 해프닝도 생기는 건 당연한 일. 사르트르의 장편 <자유의 길>의 1권은 'L'age de raison'이고 '철들 무렵' 혹은 '철들 나이' 등으로 번역돼 있다. 한데, 래빈 여사의 <소크라테스에서 사르트르까지>(동녁, 1993, <방송강의 철학사>로 다시 나왔다)에서는 영역본 제목('The age of reason' )을 옮기느라 거창하게도 '이성의 시대'라고 번역해놓았다. 이해할 만한 오역이지만, 피할 수 있는 오역이란 것도 분명하다(작품을 읽지 않았더라도 확인해볼 수는 있는 노릇이다). 참고로, 래빈 연사의 강의 철학사는 권장할 만한 책이다.  

 

 

 

 

P.S. 주말에 장진 감독의 <박수칠 때 떠나라>를 DVD로 대여해 봤는데(이 작품의 진리는 간명하다. '대한민국 검찰은 쇼'라는 것, 나머지 드라마는 그걸 떠받치기 위한 구색 맞추기일 텐데 내겐 별로 흥미롭지 않았다), 네번째 에피소드인가의 제목이 '전설(傳設)'로 돼 있었다. '전설(傳說)'이 아니라. 이건 또 무슨 장진식인가, 하며 보았지만, '전설(傳設)'과 관련된 내용은 따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냥 오타였던 것(타이틀 목차에는 '전설(傳說)'로 돼 있었다). 이런 해프닝들이 '옥의 티'로 즐거움을 주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아니다. 나는 어수룩한 '쇼'를 좋아하지 않는다(보여주는 것 없는 국내판 '쇼걸'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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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11-22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 베호벤 감독
에로틱과 피의 감독이죠. 요즘은 뭘 한대요?

로쟈 2005-11-23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한테까지 소식이 오는 건 아니지만 저보다 바쁜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계속 영화들을 찍고 있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