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중앙선데이에 실은 '로쟈의 문학을 낳은 문학'을 옮겨놓는다. 연재의 마지막 회로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과 나보코프의 <절망>을 다뤘다.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나보코프의 평가는 <나보코프의 러시아문학 강의>(을유문화사, 2012)에서 읽어볼 수 있다.

 

 

 

중앙선데이(14. 08. 24) 철석같이 믿었던 ‘분신’에게 배척 당하는 ‘진짜’

 

『롤리타』를 쓴 나보코프는 망명 작가였지만 러시아 문학의 적통임을 자임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영어 소설을 러시아어로 직접 옮기는 노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반대로 나보코프가 러시아어로 쓴 소설을 처음 영어로 옮긴 소설은 베를린 시절에 쓴 『절망』이다. 그런데 이 번역본은 판매도 부진한 데다가 재고는 전쟁 중 독일군의 폭격으로 유실돼 희귀본이 되었다. 『롤리타』의 성공으로 막대한 인세 수입이 생기자 미국 생활을 접고 스위스로 이주한 나보코프는 『절망』을 다시 손봐서 영문 개정판을 낸다.

두 번역본, 즉 ‘젊은 나보코프’와 ‘늙은 나보코프’ 사이에는 30년의 시차가 있다. 『절망』을 아예 다시 썼다는 늙은 나보코프는 개정판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그는 젊은 날의 서투른 신예 작가에게 짜증이 나서 얼굴을 찌푸릴 뿐이다.” 젊은 날의 자신에게조차 짜증을 낼 정도로 엄격한 예술관의 소유자가 바로 나보코프였다.

흥미로운 건 그의 여러 작품들에서 이러한 주제, 곧 작가를 참칭하는 얼치기들이 등장하고 이들이 진정한 작가(나보코프)로부터 응징당하는 이야기가 다뤄진다는 점이다. 젊은 나보코프가 러시아어로 쓴 『절망』에서 주인공 게르만은 자화자찬으로 서두를 뗀다. “나는 뛰어난 역량을 갖춘 작가다. 더없이 우아하고 생생하게 표현해 내는 능력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서른 중반의 게르만은 베를린에 온 지 10년째인 초콜릿 사업가. 가정부를 거느리고 아내와 함께 좋은 아파트에 살면서 주말이면 카페에 가는 중산층이다. 사업차 프라하에 갔다가 교외 풀밭에 누워 자고 있던 펠릭스와 우연히 마주치고는 펠릭스가 자신과 똑 닮았다고 생각한다. 펠릭스가 부인함에도 그의 믿음은 철석같다. “내가 본 그는 나의 분신, 즉 육체적으로 나와 동일한 존재였다.”

완벽한 분신의 발견은 게르만을 완전 범죄에 대한 구상으로 이끈다. 파산 직전에서 탈출구가 필요했던 게르만은 펠릭스를 자신으로 위장해 살해하고, 보험금을 타낸 아내와 재결합해 새 인생을 시작하려고 계획을 꾸민다. 그리고 이 범행 과정을 한 편의 소설로 쓰고자 한다. 완전범죄는 곧 그에게 완벽한 예술 작품에 대한 인증과도 같다.

하지만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던 그의 계획은 치명적인 실수 때문에 얼크러진다. 펠릭스를 자신의 분신으로 생각한 것 자체가 완전한 착각이었다는 게 밝혀진다. 그렇게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게르만은 곧 살인범으로 지목돼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완전범죄가 실패한 것처럼, 완벽한 예술 작품을 목표로 했던 그의 소설은 막판에 가서 ‘가장 저급한 문학 형식’인 일기로 전락한다. 결국 게르만은 자신의 실패작에 ‘절망’이란 제목을 붙일 수밖에 없다. ‘뛰어난 역량을 갖춘 작가’라는 자기 선언과는 정반대로 말이다.

게르만의 실패 원인은 무엇일까? 작중 인물로 게르만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하는 화가 아르달리온은 게르만을 ‘음울한 도스토옙스키적 성향’을 지닌 인물이라고 일컫는데, 이것은 작가 나보코프의 의중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나보코프에게 도스토옙스키는 터무니없이 과대평가된 작가이며 너절한 감상주의와 쓸데없는 장광설만 늘어놓는 이류 작가의 대명사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그렇게 인색한 평가를 내놓은 나보코프조차 예외적으로 높이 평가한 작품이 있었으니, 바로 『분신』(1846)이다.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열광적인 환영에 고무된 젊은 도스토옙스키가 야심작으로 내놓았지만 혹평에 시달린 작품이었다. 예기치 않은 반응에 낙심하지만 그는 작품에 대한 애착 때문에 20년 후 개정판을 발표한다. 『분신』 역시 하급관리 골랴드킨이 자신과 꼭 닮은 분신과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골랴드킨은 자신의 은인 올수피 이바노비치의 딸 클라라의 생일파티에 찾아가지만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 문전박대 당한다. 자신도 남들 못잖은 인간이라는 자부심으로 뒷문을 통해 들어가 보지만, 결국 무참한 모멸감만 확인한 채 길거리에 내던져진다. “골랴드킨 씨는 지금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절망하고 있는 골랴드킨에게 그의 분신이 나타난다. 외모는 물론 이름까지 똑같은 ‘젊은 골랴드킨’으로 ‘늙은 골랴드킨’과는 누가 진짜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다. 처음엔 우호적인 관계였지만 ‘가짜’는 차츰 ‘진짜’를 무시하고 배척한다. 결국 피해망상증에 사로잡힌 골랴드킨이 정신병원에 이송된다.

분신이 등장한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절망』과 『분신』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하지만 나보코프가 『분신』을 일컬어 “도스토옙스키의 최고작이자 완벽한 예술 작품”이라고 평한 사실은 『절망』을 읽을 때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주인공 게르만은 완벽한 소설을 쓰는 데 실패하지만, 그 실패를 조롱하면서 작가 나보코프는 ‘완벽한 예술 작품’에 도달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뭇 달라 보이는 외양임에도 『분신』과 『절망』은 서로를 꼭 닮은 ‘분신’이다.

 

14. 08. 24.

 

 

P.S. 최근에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을 번안한 영화가 새로 만들어졌다. 리처드 아이오아디(Richard Ayoade) 감독의 <더블>(2013). 블랙코미디로 분류되는 영국 영화다. 몇몇 장면들을 보건대, 비교적 잘 만들어진 영화다. 나보코프의 <절망>을 원작으로 한 영화로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절망>(1978)으로 파스빈더가 자신의 '베스트10'에 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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