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에 세명 저널리즘스쿨대학원에서 '교양이란 무엇인가'와 '서평이란 무엇인가'란 주제로 속강을 한 적이 있다. 이중 '교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강의내용이 먼저 기사화돼 올라왔기에 옮겨놓는다(http://www.danb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561).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에 실린 '교양이란 무엇인가'의 내용을 풀어주는 형식의 강의였다.

 

 

단비뉴스(11. 12. 10) 당신이 몰랐던 ‘교양’의 비밀

 

모든 질문이 누구에게나 중요한 건 아니다

“어우, 저 사람 교양 없어.” “나, 교양 있는 여자에요.” 우리는 누군가와 개인적인 친분을 맺을 때 ‘교양’의 유무를 중요한 잣대로 사용한다. ‘교양’은 한 사람의 지적 취향을 평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욕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처럼 익숙하게 사용하는 개념인 ‘교양’이란 과연 무엇일까? ‘로쟈’라는 인터넷 서평꾼으로 유명한 이현우 한림대 연구교수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인문교양특강’에서 ‘교양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 자체에 의문을 던지며 강의를 시작했다.

 

“모든 질문이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건 아닙니다. 보통은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넘어가기 쉬운데, 질문 자체에 머물러서 숙고하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교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언제, 어느 자리에서나 혹은 누구에게나 중요한 질문은 아닙니다. 어떤 물음에는 그것이 던져지는 맥락이 있고, 장소성이 있기 때문이죠.”

 

‘교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명료한 답변을 구하려는 심리를 꼬집는 말이었다. 특히 인문학이 일종의 ‘교양’으로 자리잡고 있는 최근 한국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 교수는 불편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장소와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모든 질문에 보편성이 있다고 여기는 학자들의 버릇 혹은 관례를 지적하는 말이다.

 

“가령 칸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이를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질문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는 왜 여기에 관심 없어’라고 이야기하죠. 하지만 모두에게 절실한 물음은 아닙니다.”

    
그는 아예 ‘What is X?(무엇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형식 자체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했다. 희랍어적 기원을 갖고 있는 이러한 질문형식은 어느 문화권에서나 사용된 것은 아니라고 했다. <플라톤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가 이러한 형식의 질문을 빈번하게 던지지만, 이는 어떤 개별 사안에 대한 판단을 ‘일반화’하려는 시도다. 하지만 여기에는 비약이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나’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는 중요한 질문이지만, ‘사람들’이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물론 몇몇 철학자는 일반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졌겠지만.”

 

 

"책 안 읽고 살아도 문제없지만……"

강의는 ‘책의 속임수’를 들춰내는 쪽으로 이어졌다. 서평을 전문으로 하는 그가 “책 안 읽고 살아도 문제없다”는 말을 할 때는 의아하기도 했다. 정말 그럴까?

    
“책은 읽은 사람은 소수지만, 쓴 사람은 더 소수지요. 책에는 책 읽은 사람 사이에 전수되어온 고정된 편견 같은 게 있습니다. 의미 없는 삶, 성찰 없는 삶에 대해서는 격하하고, 직접적인 삶에 대해 거리를 두는 ‘theoria’ (‘이론’의 어원)를 더 높이 치는 것이지요. 이런 관점에서 ‘너는 어떻게 생각 없이 인생을 사냐’ 같은 질문이 나오지만, 솔직히 안 될 건 없어요. 책 안 읽고 살아도 문제없습니다.”

 

이 말은 책을 읽고 교양을 쌓는 일이 누구에게나 중요한 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대학에 개설된 수많은 ‘교양과목’들은 다 무엇인가? 그는 이 문제를 교양과목 교수들의 이해관계, 그리고 시대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교양이란 게 정말 보편적이고 중요하다면 변화하지 않아야 하는데, 왜 달라질까요? 담당교수들의 이해관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세력판도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힘 있는 학과의 교양과목, 예를 들면 중국이 잘 나가면 중국 관련 교양과목이 늘어나는 거죠. 이런 면에서 ‘보편성’이란 허울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니체 책을 필수도서로 여기는 ‘교양주의’

그렇다면 한국에 ‘교양’이란 개념이 들어온 것은 언제일까? 저자는 그 시작을 일본의 '다이쇼오 교양주의'에서 찾는다. 다이쇼오 시대(1912~1926년)에 등장한 ‘교양주의'는, 일본 동경제국대학이나 제1고교 등 최고 엘리트 학생들이 공유했던 일련의 ‘서양 고전’ 리스트를 중심으로 성장했다.

 
이런 엘리트 중심적 뿌리가 한국에 전해져 지금까지도 우리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필수 도서로 여긴다. 하지만 이 책은 니체의 저작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책으로, 이는 ‘교양’이라기보다 ‘교양주의’가 만들어낸 거품이라 볼 수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동경제대 학생들은 엄청난 사회적 프리미엄과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 근거가 ‘우리는 이런 교양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교양주의가 만들어낸 기능이지요.”

 

이것이 교양이 가진 두 가지 기능 중 국가 엘리트에 대한 차별적 보상을 정당화하는 기능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교양은 부르주아의 사회적 부와 지위를 정당화하는 기능도 갖는다. 이러한 기능은 경제불황에도 미술품 시장이 초호황을 누리는 경향에서 발견할 수 있다. 최근 등장한 ‘초고가 서가’ 또한 같은 맥락에 속한다.

 

“최고급 서가 컬렉션을 짜주는 전문 플래너가 있다고 합니다. 내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비싸다는 게 중요합니다. 미술품의 최대 메리트이기도 하죠. 보통 사람들은 가질 수 없다는 것. 과거에는 교양이 그런 기능을 했습니다. 예술이나 문학에 대한 조예가 있으면 ‘저 사람 잘 살아’라고 생각했지요.”

 

 

 

‘교양전쟁’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하지만 교양은 변화한다. 일본에서는 70년대에 지식과 교양이 대중화하는 일명 ‘대중사회’로 진입한 뒤 더 이상 교양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학진학률이 높아지면서 교양이라는 게 의미가 없어졌다. 이러한 패러다임 변화는 교양이 대학에서 어떻게 교육되어 왔는가를 보면 이해하기 쉽다. ‘교양주의’ 등장 이후 거의 6,70년 간 지속된 형태다.

 

“<서양음악의 이해> 라는 과목을 들었다면 시험을 어떻게 봤죠? 음악 짧게 들려주고 누구의 무슨 곡인지 알아맞히는 식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교양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딱 제시간에, 1분 안에 제목과 작곡가를 알아 맞히는 게 교양이라면 자기 자신을 위한 교양이 아니라 상대방의 질문에 응답하기 위한 교양이지요.”

 

대학 내에서도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이 90년대에 일어났다. ‘문학연구’에서 ‘문화연구’로 전환한 것이다. 이를 서구에서는 ‘교양전쟁(culture war)’이라 불렀다. 이는 대학에서 무엇을 교양으로 가르칠 것인가, 그리고 서양문명사, 서양문학사를 강의할 때 어떤 작품을 가르칠 것인가의 문제였다. 정전(canon), 곧 문학의 필수 작품 리스트에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와 같은 사조들이 비판적으로 ‘도전’하면서, 기존 정전 리스트에 지속적으로 개편이 일어난다. ‘교양’에 대한 패권 다툼이 일어난 것이다.

 

 

 

‘곁다리 인문학’의 균형감각

“교양은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역동적인 장입니다. 권력 엘리트와 부르주아의 부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지요. 고전 텍스트를 읽더라도 이런 것을 인식하고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교수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인문교양 강의, 서평쓰기 활동 등을 '곁다리 인문학’이라 표현했다. 인문학 옆에 있으되 어깃장을 놓고 브레이크를 거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인문학 전도사지만 인문학을 욕하기도 하는 그는 교양에 대해서도 비슷한 균형감을 강조했다.

 

“교양을 알고 습득하는 것은 좋지만 역사적인 맥락에서 가져온 부정적 기능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게 중요합니다.”

 

11.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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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1 2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11 2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꾸때리다 2011-12-13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대체 왜 저렇게 잘생기신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