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찬 사진집 <골목안 풍경 전집>(눈빛, 2011)에 관한 리뷰기사가 생각나 한겨레21을 찾아갔다가 읽은 건 '신형철의 문학사용법'이다. 몇번 옮겨놓은 적이 있는데, 박형준 시인의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문학과지성사, 2011)에 대한 감상도 '짠'한 데가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21(11. 09. 12) ‘천진하게’와 ‘물끄러미’의 어긋남

8월30일 오후 4시경 서울 상수동의 어느 카페에 자리를 잡은 나는 그 뒤로 거의 2시간 동안을 한 편의 시만 읽고 또 읽게 된다. 하필 맨 처음 펼친 시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문제의 그 시는 박형준의 새 시집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문학과지성사)의 표제작이다. 그렇게 2시간을 보내고 나는 다음과 같은 문자메시지를 시인에게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표제작만 몇 번을 다시 읽는 중입니다. 가슴이 아파요. 이런 아픔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날 때마다, 읽겠습니다.” 그 시를 옮긴다.

“그 젊은이는 맨방바닥에서 잠을 잤다/ 창문으로 사과나무의 꼭대기만 보였다// 가을에 간신히 작은 열매가 맺혔다/ 그 젊은이에게 그렇게 사랑이 찾아왔다// 그녀가 지나가는 말로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그는 그때까지 맨방바닥에서 사랑을 나눴다// 지하 방의 창문으로 때 이른 낙과가 지나갔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여자를 기다렸다// 그녀의 옷에 묻은 찬 냄새를 기억하며/ 그 젊은이는 가을밤에 맨방바닥에서 잤다” 총 10연으로 돼 있는 시의 전반부다. 뒷이야기는 이렇다.

“서리가 입속에서 부서지는 날들이 지나갔다/ 창틀에 낙과가 쌓인 어느 날// 물론 그 여자가 왔다 그 젊은이는 그때까지/ 사두고 한 번도 깔지 않은 요를 깔았다// 지하 방을 가득 채우는 요의 끝을 만지며/ 그 젊은이는 천진하게 여자에게 웃었다// 맨방바닥에 꽃무늬 요가 펴졌다 생생한 요의 그림자가/ 여자는 그 젊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과나무의 꼭대기,/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여기까지다. 나는 이 시의 묘미가 부사(副詞)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 시가 품고 있는 이야기를 이렇게 복기했다.

반지하방에 사는 사내가 있다. 사과나무에 “간신히” 열매가 맺힐 때 그에게도 “간신히” 사랑이 왔다. 방바닥에서 사랑을 나눴다. 그래서 여자는 허리가 아팠다. 여자가 한동안 오지 않는다. “때 이른” 낙과처럼 “때 이른” 이별이 오려는가. “하지만” 사내는 여자를 기다린다. 요를 사두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오면 요를 깔고 사랑을 나누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자는 왔다. 이 “물론”은 절묘하다. 두 개의 뉘앙스가 함께 있어서다. (1)그래, 간절한 마음만 있으면 사랑은 뜻대로 되는 거지! (2)이 답답한 사내야, “물론” 오기야 하겠지, 그러나 그런들?

언뜻 (1)인데 결국은 (2)였다. 사내는 요를 깔고 “천진하게” 웃지만 그녀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한다. 그녀가 기뻐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선 어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영영 떠났다. 사내는 지금 사과나무를 보며 울고 있지만, 뭘 알기는 하고 우는가? 요 하나가 방을 다 채울 만큼 작은 그의 방이 문제였다는 것을, 사랑하는 여자를 침대에 눕히지도 못하는 그 가난이 문제였다는 것을, 그런 줄을 모르는 이의 간절함은 상대방에게 오히려 잔인함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니 이 시는 결국 “그 젊은이는 천진하게 여자에게 웃었다”와 “여자는 그 젊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라는 두 문장으로 요약된다. 아니, 더 짧게는, “천진하게”와 “물끄러미”의 어긋남에 모든 게 들어 있다. 사내가 창피해했거나 화를 냈거나 혹은 허세라도 부렸다면, 그녀는 희망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내는 “천진하게” 웃었다. 그녀는 깨달았을 것이다. 이 사내는 바뀌지 않겠구나, 나는 이 천진함을 견디지 못하겠구나, 결국 이 사내를 미워하게 되겠구나. 그러니 그녀의 “물끄러미” 안에는 또 얼마나 많은 슬픔이 있었을까.

그날 저녁에 사람들을 만났고 이 시를 보여주었다. 놀랍게도 의견이 갈렸다. 요를 산 뒤부터의 이야기는 남자의 슬픈 환상인 것처럼 보인다는 의견이 있었다. 여자가 오기는 했으되 다른 여자가 아니었겠느냐고 짐작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만든 이야기를 버릴 수 없었다. 누군가 물었다. ‘생각날 때마다 우는’ 남자의 마음을 알겠느냐고. 나는 되물었다. 허리가 아프다 했더니 침대가 아니라 요를 사는 남자가 슬퍼서 떠나는 여자의 마음을 알겠느냐고. 여하튼 너무 슬픈 시라고 투덜거리며, 우리는 경쾌하게 술잔을 부딪쳤다.(신형철_문학평론가) 

11. 09. 11.   

P.S. 시를 읽으며 떠올린 건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노래'이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란 구절로 시작해서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이라고 마무리되는 시이다. 예전에 학원에서 중학생들한테 국어를 가르칠 때, 지문에서 나올 때마다 왜 이런 시가 교과서에 들어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렸었다. 청소년들에게 '감동'을 주기는커녕 너무 '노골적'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가난하면 사랑도 버려야 한다'는 게 이 시의 '교훈' 아닌가?).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도 비슷한 싱숭생숭함을 느끼게 한다.  

한편, '천진하게'와 '물끄러미'의 대조를 읽어낸 이 칼럼에서 평론가가 준비한 비장의 부사는 물론 '경쾌하게'다. 그리고, '여하튼'. 여하튼 경쾌하게! 칼럼에는 이 '너무 슬픈 시'에 대한 두 가지 반응이 나온다. (1)가슴이 아파요. 이런 아픔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2)우리는 경쾌하게 술잔을 부딪쳤다. 가슴 아픈 일들이 많은 세상이지만, 여하튼 남은 연휴를, 골목안에서 활짝 웃고 있는 아이들처럼 경쾌하게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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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9-11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진하게'와 '물끄러미' 그리고 '경쾌하게'가 서로 어긋났던 기억이, 추억할 수 있는 것의 전부인 그 무수한 '심심하게'들이 생각납니다ㅎㅎ 명절이라고 마땅히 갈 데도 없는 저 같은 '심심이'를 위해 좋은 글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석 잘 쇠세요~^^

로쟈 2011-09-12 14:59   좋아요 0 | URL
마땅히 갈 데가 있다고 덜 심심한 것도 아닌데요.^^ 연휴 잘 보내시길...

서투른_독서 2011-09-12 0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을 누일 방이 절실했던 대학시절, 눅눅하고 어두워 심장까지 축축해져버릴 것 같던 자취방이 생각나네요. 한자리에 오래 머물 수 없다는 불안을 껴안고 잠들어야 했던 그 시절... 다리를 뻗으면 허술한 문에 엄지발가락이 닿았던 고시원과 자취방... 그래도 그때는 가난이 수치의 대상이 되지 않아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지금 이 시대는... (굳이 시인의 말이 아니어도) 눈물이 나네요. 이 시대의 대학생, 청년들을 위해 기도하고 싶은 밤입니다.

로쟈 2011-09-12 15:00   좋아요 0 | URL
세월이 더 좋아져야 정상인데요..^^;

singing 2011-09-15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며 감동한 저는...;;;ㅠㅠ 저라면 감동했을 듯해서.. 제가, 이래서 안된다니까요;;
'맨방바닥에 꽃무늬 요가 펴졌다 생생한 요의 그림자가..'
그림자마저 생생한 요라니..젊은이가 해줄 수 있는 것의 최대치가 요라서 그 사랑의 생생함인지, 요에 함축된 어쩔 수 없는 가난의 생생함인지..(그림자라니 후자쪽?)
암튼 아픈시네요..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