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어찌 이리 폭력적인가”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돌베개, 2011)에 대한 지난번 리뷰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한 대목을 마저 적었다.
경향신문(11. 07. 05) [문화와 세상]분노의 기쁨
‘분노하라’는 메시지로 프랑스 전역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레지스탕스 투사 스테판 에셀의 올해 나이는 94세다. 1917년생인 그가 지난해 가을에 펴낸 <분노하라>는 30여쪽밖에 되지 않는 소책자이지만 젊은 세대에게 던지는 노투사의 단호하면서 열정적인 호소를 담고 있다.
무엇이 분노하게 하는가. 에셀은 점점 더 커져가는 빈부격차와 인권의 문제를 든다. 물론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도 사정은 다르지 않으니까. 가령 올해 30대 재벌그룹 총수와 직계가족 118명이 보유한 상장사 주식 평가액은 지난해보다 13조원이 더 늘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교착상태에 있는 최저임금 협상에서 재계가 제시한 건 30원 인상이었다. 한국은행이 제시한 물가상승률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삭감안’을 협상카드로 내놓은 셈이다.
이 13조원과 30원은 현 단계 한국 자본주의의 현실을 말해주는 지표처럼 보인다. 애당초 이명박 정부가 부자감세의 명분으로 내세운 ‘낙수효과’가 혹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최상위 부유층이 주식소득으로만 13조원의 이익을 얻게 되면 그래도 30원쯤은 노동자에게 돌아갈 수 있다! 이명박 정부 들어 날로 퇴행을 거듭하고 있는 인권의 현주소도 가끔씩 놀라움을 자아낸다. 비근한 예로 등록금 시위로 연행된 여대생에게 브래지어를 벗으라고 요구해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한 사건도 얼마 전 여론의 도마에 오른 적이 있다. 모두가 납득할 만한 일인가. 물론 그렇다면 우리가 따로 분노할 일은 세상에 많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세상에 이해 못할 일도 별로 없을 것이다. 반대로 그런 사례들이 진정한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의 원칙에 맞지 않으며 보편적 인권의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면, 그래서 결코 자랑스럽게 내보일 수 없다면 우리는 분노해야 한다.
사실 <분노하라>를 통해 되새기게 되는 교훈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알면서도 방치하거나 용인해온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보다 참여와 행동이 필요하다는 걸 한 번 더 상기하게 된다. 더불어 불의에 맞서 분노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분노할 수 있는 힘’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국어판 <분노하라>에 실린 저자 인터뷰에서 에셀은 그 비결을 ‘기쁨’이라고 말한다. 분노할 일에 분노하는 것조차도 결국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일 때 가능하다. 어떤 참여가 어째서 기쁨이 되는가. 자신의 존엄성과 행복을 지켜주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남에게 베풀고 싶은 마음과 베푸는 기쁨”을 삶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는 것이 에셀의 체험담이다.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그에게 마치 의무라도 지우듯 들려준 교훈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한다. “네가 행복해야 남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법이야. 그러니 항상 행복해야 한다.” 에셀은 그 가르침을 평생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수용소에 끌려갔던 경험조차도 지나고 보니 긍정적이더란 낙관주의는 그러한 노력의 소산이다.
자신의 낙관주의를 에셀은 ‘나이 많은 노인이 지니는 특권’이라고 말하지만 모든 노인이 그와 같은 낙관주의자는 아닐 것이다. 이 때문에 그의 ‘기쁨’ 혹은 ‘행복’이란 비결은 의미가 있다. 다양하고 풍요로운 경험과 함께 굉장한 연애도 해보았다고 자부하는 에셀은 한편으로 시를 읽고 암송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나치 독일의 강제수용소에서도 셰익스피어와 괴테, 횔덜린의 시구를 음미했다는 그다. 분노와 기쁨과 시, 이 세 가지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11. 07.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