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들의 책이 가끔씩 출간되고 있다. 번역서가 아니라 번역가 자신의 책이다. 지난주에 나온 건 일본문학 전문번역가 권남희 씨의 <번역에 살고 죽고>(마음산책, 2011)이다. 번역가 지망생이라면 베테랑 번역가의 '생존 노하우'를 참고해볼 수 있겠다.    

  

문화일보(11. 04. 23) “번역가는 바람둥이, 금세 새 책과 열애”

“백댄서만 하다가 가수로 데뷔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무척 기뻤어요. 그만큼 두려움도 크더군요. 학문적인 내용이 아니라 제 개인사와 번역에 대한 제 생각을 쓴 것이니 세상에 알몸으로 선 기분도 들고요.”

번역가인 권남희씨는 ‘번역에 살고 죽고’(마음산책 발행)를 펴낸 소감을 이렇게 전했다. 이 책은 일본문학 번역가로서 최고 반열에 올라있는 권씨가 번역 입문 시절부터 지금까지 겪어온 일들을 진솔하게 담은 책이다. 에세이 형식의 글들을 모았는데, 흥미진진한 소설처럼 한달음에 읽힌다. 경쾌한 보법을 사용하는 문장 속에 유머와 휴머니티가 담겨 있어서 자주 미소를 짓게 된다.

권씨는 번역을 할 때와 자기 글을 쓸 때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번역은 어떤 상황에서도 책상 앞에 앉으면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글은 그렇지가 않더군요. 이른바 글발 받는 날이 아니면 아무리 쓰려고 해도 한 줄도 안 쓰이더라고요. 1주일 동안 한 줄도 안 쓰여서 애가 탔던 적도 있어요.”

20년차 번역가인 권씨는 자신이 업계에서 최정상급의 대우를 받게 된 것을 ‘운’이 좋아서라고 했다. 1990년대 이후로 한국의 젊은이들이 일본 소설을 많이 읽게 된 바람을 탔다는 것이다. 그러나 책을 보면 스스로 스펙(학력, 경력)이 약한 ‘마이너리그 출신’이라고 하는 그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다. 1990년대 초반에 보통의 번역가들이 200자 원고지 1장당 2300원을 받을 때 600원을 받고 일했다. 그럼에도 일거리가 들어오지 않자 권씨는 일본에 가서 직접 책을 구입해서 기획하며 일거리를 만들었다. 

 

권씨는 당시 에피소드들을 책에 소개하며 익살스럽게 중얼거렸다. “너무 앞서갔던 나는 번역계의 이상(李箱)이었던가.” 그 시절에 그가 일본 현지에서 발굴한 책의 작가 중에는 ‘요시모토 바나나’ ‘에쿠니 가오리’가 있었다. 그에 대한 우리 출판사들의 반응은 이랬다. “이름이 바나나야? 토마토가 아니고? 에쿠니 가오리? 앗싸 가오리? 내용이 뭐 이래. 이런 걸 누가 읽어요.” 그런 천대를 받았던 ‘바나나’와 ‘가오리’의 작품들이 지금은 출판사들이 앞다퉈 번역하고 싶어하는 대상이 됐으니….

유미리, 무라카미 류, 무라카미 하루키, 아사다 지로, 온다 리쿠 등의 책을 우리말로 옮긴 그는 번역가를 ‘바람둥이’라고 생각한다. 한 작가의 작품과 열애에 빠졌다가도 금세 다른 소설에 온 마음을 뺏겨버린다는 점에서다.

권씨는 번역 작업이 너무 즐겁다면서도 젊은이들에게 직업으로 권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열 명이 시작하면 한두 명 성공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큰 수입을 얻는 건 아니에요. 물론 일하는 만큼 돈이 되니 더 열심히 일하면 더 많이 벌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건강을 포기해야겠죠. 저는 여가 생활을 전혀 못하면서, 또 주말도 즐기지 못하면서 일한 끝에 겨우 여기까지 왔거든요. 그래서 이제 사회에 나오는 친구들, 혹은 가족의 생계를 떠맡아야 할 젊은이들한테는 번역 쪽은 택하지 말라고 하죠.”

그럼에도 권씨는 책에 문답형식으로 번역가 지망생들을 위한 조언들을 자세히 정리해 놨다. 그는 여기서 좋은 번역가가 되려면 외국어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우리말 공부를 부지런히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번역의 실제를 설명하면서 외국어를 그대로 직역했을 때와 그것을 우리말로 제대로 다듬었을 때의 차이를 구체적 사례로 소개한다.

그는 번역을 직업으로 택했을 때의 장점을 “집 밖으로 나가서 사람을 만나지 않고 모든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책에는 그가 번역 원고의 첫 독자로서, 비평자로서 역할을 해온 딸 ‘정하’와 함께 살아온 모습이 진솔하게 담겨 있다. 물론 번역가도 저자, 출판사 편집자와 소통을 잘 할 수 있도록 원만한 성품이 요구된다는 것을 그의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번역 고료 지급이 안 되거나 그것이 늦어졌을 때 해결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권씨는 실력이 뛰어난 후배 번역가들이 등장하면서 일본 문학의 우리말 번역 수준이 크게 높아졌다고 했다. “후배들 때문에 제 밥줄이 위태롭다”고 하면서도 권씨는 흐뭇한 눈치였다. 그는 영미문학 번역가였던 고 이윤기씨처럼 소설을 쓰겠다는 꿈을 간직해왔다. “경로우대증이 나오는 65세까지는 열심히 번역을 할 거예요. 그 후에는 여유롭게 먹고 사는 걱정 안 하면서 제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어요.” (장재선기자) 

11. 04. 24. 

 

P.S. 번역가 얘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조재룡 교수의 <번역의 유령들>(문학과지성사, 2011)에는 한국 문학 속에 번역과 번역가가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나 살펴본 글들이 포함돼 있다. 저자가 정리해준 통념상의 번역, 번역가의 스테레오타입은 이런 모습이다. 

예컨대 잠시 머무는 직업, 임시방편의 직업, 일정한 틀 안에 갇히지 않는 작업, 언젠가는 그만두어야 하는 일, 빈둥거리면서도 할 수 있는 일, 거쳐가는 일, 이동 중인 일, 통과하는 일, 그래서 또 자유롭다면 자유롭다고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번역이며, 그리하여 룸펜일 수 있는 자가 바로 번역가인 것이다.(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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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5 11: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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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5 16: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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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5 15: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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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5 16: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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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4-25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0년대에 번역료가 200자 원고지 1장당 2300원인데 지금은 200자 원고지 1장당 4000원이라고 하더군요.그래선지 실력있는 번역자들이 없어서 FTA번역 오류들이 생긴다고 하네요.

로쟈 2011-04-26 07:37   좋아요 0 | URL
4000원 이하도 많습니다. 이 또한 열정을 착취하는 시스템이에요. 하기 싫으면 관둬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