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과 아벨 강스
벤야민에 관한 첫번째 수다

서점 두 곳에 들러 이주의 관심도서 두 권을 사들고 왔다. 둘다 이론서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윤영 교수가 엮은 <사유 속의 영화>(문학과지성사, 2011)는 영화이론 선집이고, 호미 바바가 엮은 <국민과 서사>(후마니타스, 2011)는 '네이션'에 관한 탈식민주의적 성찰들을 묶은 것이다. 두 책을 모두 갖다놓은 서점이 없어서 한권씩 구하면서 발품을 팔아야 했다(알라딘에는 <국민과 서사>가 아직도 입고돼 있지 않다).   

그중 <사유 속의 영화>에는 벤야민의 유명한 텍스트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이 한번 더 번역돼 있어서 눈길을 끄는데, 이번엔 불어판의 번역이다. 제목은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6). 편역자가 서문에서 일러주는 바에 따르면, 벤야민이 1936년에 피에르 클로소프스키의 도움을 받아서 직접 불어로 쓴 텍스트이다. 이미 알려진 세 편의 독어본을 고려하면 '제4의 텍스트'인 셈이다. "이 불어판은 한국어로는 처음 소개되는 것이고 독일어로 된 다른 세 판본들과 대조 및 비교를 거쳐 영화 연구뿐만 아니라 벤야민 연구에도 기여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편역자는 적었다.  

책을 들춰보다가 벤야민이 인용한 아벨 강스의 말에 눈길이 멈추었는데, 그건 예전에 이 한 대목의 번역에 관한 포스팅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벤야민과 아벨 강스' 참조). 내가 참조할 수 있었던 몇 개의 번역본이 모두 '오역'이 아닌가 싶어서 올렸던 글이었다(최초로 의견을 적은 건 2005년 '벤야민을 좋아하세요?'란 글을 통해서이다). 3판을 기준으로 할 때 벤야민 텍스트의 2절 말미에 나오는 문제의 문장과 예전글의 요지를 다시 가져오면 이렇다(강유원본과 김남시본은 출간본이 아니라 온라인 버전이었다).  

-1927년 아벨 강스는 다음과 같이 열광적으로 말한 바 있다.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영화화될 것이다..."(반성완)

-아벨 강스는 1927년 이미 이렇게 외쳤다.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은 영화화될 것이다..."(차봉희)

-1927년 아벨 강스는 다음과 같이 열광적으로 외쳤다.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영화화될 것이다..."(이태동)

-1927년 아벨강스가 열광적으로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은 영화화될 것이다..."고 외쳤을 때...(강유원)

-1927년 아벨 강스가 다음과 같이 열광적으로 외쳤을 때 -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영화화될 것이다.."(김남시)

이 대목에 대한 영역본은 (2종 모두) 대략 "When Abel Gance fervently proclaimed in 1927, 'Shakespeare, Rembrandt, Beethoven will make films..."라고 옮기고 있다. 내용은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영화를 만들/찍을 것이다..."이다. 그리고 벤야민의 독어본에서 인용문은 "Shkespeare, Rembrandt, Beethoven werden filmen..."이다. 이 역시 아벨 강스의 불어 텍스트를 벤야민이 옮겨온 것이므로 '원문'으로서의 지위를 갖는 건 아니다. 구문은 단순한데,  추측하자면 werden이 미래시제 조동사이고(사전에는 werden이 '-가 되다'란 뜻도 갖는 걸로 돼 있다), filmen이 동사원형(부정법)이어야 영역본에 대응한다. 러시아어본도 같은 식이다. 그렇다면,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영화화될 것이다"와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영화를 만들/찍을 것이다..."가 의미론적으로 동치가 아닌 이상(물론 아니다) 어떤 해석이 맞는 것일까? 안타깝지만, 나는 5종의 국역본 대신에 영어와 러시아어본이 맞다고 본다. 그건 의미의 논리상 그렇다.  

   

이런 의견을 제시한 후에 동의와 함께 반박 의견도 많이 받았는데, 벤야민의 독어 텍스트뿐 아니라 아벨 강스의 불어 텍스트에 대해서까지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김성태의 <'영화' - 존재의 이해를 위하여>(은행나무, 2003)에 아벨 강스의 말이 이렇게 옮겨진 것을 발견했다. 이 대목이 내 생각과 맞아떨어지기에 '벤야민과 아벨 강스'란 글을 적었더랬다.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벤토벤은 영화를 만들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왕국은 이전과 같으면서도, 동시에 훨씬 더 넓어졌기 때문이다. 예술적 가치들은 온통 소란스런 전복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며, 게다가 지금까지 있어온 어떤 것보다 위대한 꿈들이 환상적이고도 급작스럽게 꽃을 피울 것이다. 단순한 인쇄기계를 넘어서, 모든 심리적인 상황을 변조할 수 있는 꿈의 공장이요 왕수(금이나 백금 따위를 녹이는 화학용액)요 리트머스 용액이기도 한 영화. 이미지의 시대가 온 것이다!"(236쪽)

그러나 다시금 반전이 벌어진다. 최성만 교수의 '발터 벤야민 선집'판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외>(길, 2007)에서는 이 대목을 예전판들과 마찬가지로 옮겨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벨 강스가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영화화될 것이다. … 모든 전설, 모든 신화, 모든 종교의 창시자, 모든 종교까지도 필름을 통해 부활될 날을 기다리고 있으며, 또 모든 영웅들이 영화의 문전에 몰려들고 있다"고 열광적으로 외쳤을 때 그는 - 물론 그가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을 아니지만 - 광범위한 전통의 청산에 우리를 초대했던 것이다.(47-48쪽, 106쪽)

이에 대해서는 출판기획자(현재는 도서출판 난장 대표) 이재원 씨가 다시금 이견을 정리해준 바 있다('벤야민에 관한 첫번째 수다' 참조). 여하튼 '소수 의견'에도 불구하고 아벨 강스는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영화화될 것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통용되던 차였는데, 작년 가을에 나온 <크리티카 4호>(올, 2010)에 루카치를 전공한 '자유 연구자' 김경식 씨가 벤야민의 텍스트를 '기술적 복제가 가능한 시대의 예술작품'이라고 재번역하면서 이 대목을 이렇게 옮겼다.  

1927년에 아벨 강스가 다음과 같이, 즉 "셰익스피어와 렘브란트와 베토벤은 영화를 찍을 것이다... 모든 전설, 모든 신화와 모든 설화, 모든 종교 창시자, 아니 모든 종교까지도... [카메라의] 빛이 비친 부활을 기다리고 있으며, 영웅들은  [영화의] 문전에 몰려들고 있다."라고 열광적으로 외쳤을 때, 그는 아마도 그럴 생각은 아니었겠지만 [전통가치의] 포괄적인 청산으로 초대했던 것이다.(291쪽) 

역자는 해제의 각주에서 난장출판사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 이재원 씨의 글을 참고했고 애초에 아벨 강스의 말을 "영화화 될 것이다"라고 옮겼다가 "영화를 찍을 것이다"로 수정했다고 밝혔다. 내 생각엔 그렇게 해서 번역 텍스트상으론 최초로 셰익스피어와 렘브란트와 베토벤이 '영화화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찍게 될 것'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이번에 나온 이윤영 교수의 번역에서 이 대목은 다시금 이렇게 옮겨졌다. 

그리고 1927년에 아벨 강스는 다음과 같이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미래에 태어날]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은 영화를 하게 될 것이다... 모든 전설, 모든 신화학, 모든 신화, 모든 종교의 창립자, 모든 종교 그 자체까지도 ... 스크린 위에서 부활하게 될 것이며 영웅들이 서로 떼밀면서 영화의 문전으로 몰려들고 있다." 이때 그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우리를 광범위한 청산으로 초대했던 것이다.(107쪽)

이로써 논란이 된 벤야민의 한 문장, 아벨 강스의 말 한 마디에 대해선 정리가 되는 듯싶다. 오래전에 제시한 '사소한 이견'이 결말을 본 듯해서 일의 자초지종을 한번 더 적었다...  

11. 04. 24. 

P.S. 참고로 또다른 온라인 번역판인 신우승본(http://tobebuff.egloos.com/1420194)에서는 아래와 같이 옮겼다.  

그리고 1927년, 아벨 강스가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과 같은 감독]이 [나타나] 영화를 제작할 것이다.(...) 모든 전설, 모든 신화, 모든 신화적 인물, 모든 종교 창시자, 모든 종교가 [영화의] 빛을 통해 부활을 기다리며, 또 모든 영웅도 [영화의] 문전에 몰려든다."라고 열광적으로 외쳤을 때, 그는 - 물론 그럴 생각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 [전통의] 광범위한 청산에 [우리를] 초대했던 것이다.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과 같은 감독]"을 나는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과 같은 창조적 천재들"이란 뜻으로 이해하지만, 여하튼 그들이 문학이나 미술, 음악 대신에 영화를 선택할 것이라고 옮긴 점에서는 신우승본도 뜻을 같이한다. 한가지 보태자면, 역자의 블로그에는 영국 킹스 대학의 피터 애덤슨 교수가 진행하는 철학사 프로젝트(http://www.historyofphilosophy.net/)가 번역돼 있다(http://tobebuff.egloos.com/category/PeterAdamson_HoP). 저자의 동의를 얻은 번역이라고 하는데, 철학사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겐 유익한 자료가 됨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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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5 02: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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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5 08: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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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5 08: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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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5 16: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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