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뉴스에서 발터 벤야민 선집에 관한 리뷰기사를 옮겨온다(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006&title_down_code=002&article_num=8836). 주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길, 2007)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아벨 강스의 인용문 번역과 관련하여 '로쟈'도 언급돼 있기에 눈길을 끈다.

컬처뉴스(07. 12. 28) 기다리고 기다리던 '오빠'가 왔다!

독일의 비평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20세기 최고의 사상가 중 하나이다. 벤야민의 비평 대상은 그야말로 전방위적이었다. 그래서 벤야민은 그에게 “주요 비평 분야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것 자체가 실례가 될 만한 몇 안 되는 사상가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내 생각으로는 좀 거슬러 올라가면 롤랑 바르트, 보다 최근에는 움베르토 에코, 근래에는 슬라보예 지젝 정도가 이 정도 ‘급수’에 근접해 있다고 할 만하다).

그렇지만 적어도 국내에서 벤야민은 “저주 받은 작가” 군(群)에 속해 있었다. 그 화려한 명성과는 달리 지난 2005년까지 국내 독자들이 접할 수 있는 벤야민의 책으로는 차봉희 교수가 편역한 『현대사회의 예술』(문학과지성사/1980), 이태동 교수가 옮긴 『문예비평과 이론』(문예출판사/1987), 반성완 교수의 편역서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민음사/1992), 그리고 박설호 교수가 옮긴 『베를린의 유년 시절』(솔/1992)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 2002년부터 벤야민을 괴롭히던 저주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2002년 이래로 적어도 5권의 벤야민 관련서가 국역되더니 2005년부터는 벤야민 자신이 직접 쓴 『모스크바 일기』(1926), 『일방통행로』(1928), 『파사젠베르크』(1927~40)가 국역됐고, 급기야는 『해시시에 관하여』(1927~34) 일부까지 소개됐다.

총 10권으로 출간이 예고된 ‘발터 벤야민 선집’은 이렇게 서서히 명성에 걸맞은 대접을 받게 된 벤야민의 사유 전체를 일괄할 수 있도록 해줄 ‘사건’에 해당하는 기획물이다. 도서출판 길에서 나올 이 선집의 완간과 더불어 다른 출판사에서 나올 것으로 알려져 있는 벤야민의 초기 주저 『독일 비애극의 원천』(1928)까지 우리에게 도착한다면, 우리는 본격적으로 벤야민에 대해 ‘한국어’로 얘기를 시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벤야민 사후 약 70년.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오빠’가 온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오빠’를 어떻게 대접해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벤야민이 비평가로서의 자기 역할을 다했듯이, 우리는 독자로서의 우리 역할을 다하면 될 것이다. 독자로서의 역할? 그건 어느 사상가를 범접하지 못할 스타로 대접하는 게 아니라 스스럼없이 수다를 떨 수 있는 친구로 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에 대한 호칭은 ‘형’이나 ‘누나’가 아니라 ‘오빠’나 ‘언니’가 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이 글은 벤야민에게 말을 걸기 위한 첫 번째 수다이다. 두 번째, 세 번째 … 그 이상의 수다는 다른 독자들에게 맡기고 그럼 이제부터 내 역할을 수행해 보도록 하겠다. 벤야민 선집 1차분에 수록된 수십 편의 논문과 아포리즘 중에서 내가 가장 먼저 들춰본 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논문은 벤야민의 논문 중 가장 많이 언급되는 논문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었는데, 이번 선집에는 이 논문의 제2판(1936년)이 국내 처음으로 소개됐기 때문이다(이 논문은 총 세 가지 판본이 있는데 그동안 국내에는 제3판만이 소개됐다. 이 세 판본의 구구절절한 역사에 대해서는 옮긴이 해제를 참조하라).

그러나 특히 내가 이 논문을 먼저 들춰본 이유는 몇몇 지인들과 인터넷 카페/블로그에서 이 논문의 국내 번역본에 대해 한참 떠들어댔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요 골자는 기존 번역본들의 군데군데에 ‘이상한’ 부분이 있다는 것. 그래서 이 논문이 재번역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그때 당시 문제가 됐던 부분이 어떻게 번역됐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이 또한 여기에서 반복하기에는 구구절절 기나긴 얘기이니 혹시 관심 있는 분들은 유명한 알라디너 로쟈님의 블로그를 참조하거나 다음카페 ‘비평고원’ 혹은 ‘발터 벤야민과 현대’의 관련 포스트들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지인들과의 수다 중에 가장 많이 논란이 된 것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제3판/1939) 두 번째 단락에서 벤야민이 인용한 프랑스 영화감독 아벨 강스(Abel Gance, 1889~1981)의 말이었다. 그 구절은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영화화될 것이다. … 모든 전설, 모든 신화, 모든 종교의 창시자, 모든 종교까지도 … 필름을 통해 부활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였는데,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맨 앞의 문장을 한국어본과 일본어본 옮긴이들과는 달리 영어본, 이탈리아어본, 러시아어본 옮긴이들이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영화를 찍을 것이다”로 옮겼다는 것. “영화화될 것”과 “영화를 찍을 것”이라는 두 표현은 전혀 상이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논란이 될 수밖에.

벤야민의 원문은 “Shakespeare, Rembrandt, Beethoven werden filmen”인데, 이 구절은 인용이어서 그런지 세 가지 판본이 모두 똑같다. 당시에는 독일어 동사 “werden filmen”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원문의 표현인 “feront du cinéma”에도 “영화를 찍을 것이다”와 “영화배우로 활동할 것이다”(즉, “영화화될 것이다”)라는 두 가지 의미가 모두 들어 있었던 관계로, 한국어본-일본어본 옮긴이들 대 영어본-이탈리아어본-러시아본 옮긴이들의 기이한 대결 구도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구절을 기존의 한국어본-일본어본과 똑같이 옮긴 새로운 판본을 읽다가, 문득 우리는 강스의 텍스트 자체를 보지 못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요컨대 우리는 벤야민이 인용한 ‘부분’만을 프랑스어 원문으로 확인했을 뿐, 벤야민이 말줄임표로 생략한 강스 텍스트의 ‘전후 맥락’은 전혀 읽지 않았던 셈이었다. 그래서 마침 프랑스에 유학 중인 지인에게 부탁해 벤야민이 인용한 강스의 텍스트, 「이미지의 시대가 왔다」(1927) 원문 전체를 받아봤고, 흥미로운 결론을 얻게 됐다. 먼저 벤야민의 강스 인용문 전후 맥락을 모두 옮기면 이렇다(굵게 칠한 부분은 벤야민이 인용한 부분으로서, 지면관계상 원문은 생략한다. 역시 관심 있는 분들은 내 개인 블로그를 참조해 주시길 바란다. http://blog.naver.com/virilio73).

영화는 인간에게 새로운 감각을 선사할 것이다. … 인간은 운율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었던 것처럼, 빛을 가지고 시를 지어낼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오페라] 가수를 보지 않고도 그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다. 오! 기쁘도다. 「발퀴레의 기행(騎行)」도 [그렇게 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은 영화를 찍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왕국은 같으면서도 더 광대해질 것이니까. 예술적 가치들의 엄청나고 격렬한 전복, 그 어떤 것보다 더 커다란 꿈들의 급작스럽고, 화려한 개화. … 진실로 이미지의 시대가 왔노라! 모든 전설들, 모든 신화와 모든 이야기들,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 및 종교 자체들, 역사의 모든 위대한 형상들, 수 천 년 이래 대중들의 상상의 객관적 반영들, 이 모든 것들은 빛나는[빛을 통해 영화화되는] 부활을 기다리고 있으며, 영웅들은 우리의 문으로 들어오려고 쇄도할 것이다. 모든 꿈 같은 삶과 모든 삶의 꿈이 [필름의] 감지띠 위로 달려올 준비가 되어 있다. 호메로스가 『일리아스』, 아니 어쩌면 더 『오뒷세이아』를 그 감지띠에 인쇄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위고식의 농담만은 아니다.
 
이렇게 텍스트 전체를 보면 확실히 강스는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영화를 찍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상식적으로 볼 때에도 이미 각자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으로서는 영화에 출연한다거나 영화화되기보다는 직접 영화를 만드는 것이 더 어울릴 뿐만 아니라 각자의 “왕국”을 키울 가능성도 더 높을 테니. 게다가 서구 예술의 시조격인 호메로스마저 자신의 작품을 영화로 찍을 태세인데 말이다!

아마도 한국어본-일본어본 옮긴이들은 두 번째 인용 부분에서 “모든 전설, 모든 신화, 모든 종교의 창시자, 모든 종교” 등이 영화화될 것이니 인용문 내의 대구(對句)를 살려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 역시 “영화화될 것”이라고 읽는 게 옳다고 생각했던 듯싶다. 그도 아니면(혹은 바로 이것이 문제였을 수도 있는데) 전문가로서의 지식이 자충수가 된 격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논문의 최초 판본이라고 할 만한 제1판(1935년)에서 벤야민은 문제가 되고 있는 인용 부분 앞에 “이러한 현상은 『클레오파트라』와 『벤허』에서 『프리드리히 대왕』과 『나폴레옹』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역사영화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고 적었기 때문이다. 제2판과 제3판에서 삭제된 “『클레오파트라』와 『벤허』에서 『프리드리히 대왕』과 『나폴레옹』에 이르기까지”라는 구절은 (비록 인용문 상에서이긴 하나) 확실히 뒤이어 언급되는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 등도 클레오파트라, 벤허, 프리드리히 대왕, 나폴레옹처럼 영화화될 것이라고 읽도록 유도한다.

그렇지만 벤야민은 모든 판본에서 강스의 말을 인용한 뒤에 이렇게도 말한다. “물론 그[강스]가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궁금증. 왜 벤야민은 자신이 염두에 둔 “그런 뜻”이 아닌 강스의 말을 (스스로 밝히면서까지) 굳이 인용했을까? 그건 단순한 수사였을까, 아니면 잊어버리기에는 너무 매혹적인 표현이어서였을까? 그도 아니면 벤야민의 고의적인 해석? 

여기에서 나의 결론, 혹은/그리고 가설 하나. 혹시 벤야민은 이 시기에 제정신이 아닌 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자신의 인용을 마지막으로 확인할 만한 여유조차 없었을 만큼? 아마도 벤야민은 자살 시도(1932년) 뒤의 침울함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자신이 얻은 말라리아(1934년)에서 완치되지 않았던 것을 수도 있으리라. 그도 아니면 메모를 잘못해놨을 수도 있다(벤야민은 자타가 공인하는 메모광이었으며, 그의 미완의 대작 『파사젠베르크』 역시 일종의 메모모음집이다). 요컨대 벤야민 역시 불완전한 인간이었던 건 아닐까? 그 때문으로라도 ‘오빠’라고 불려야 할 만한?

(마지막으로) 아마도 언젠가는 벤야민 선집 2권의 부록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관련 노트들」에서 누락된 또 다른 노트들이 발견될 지도 모를 일이다. 『파사젠베르크』의 원고뭉치가 벤야민 사후 40여 년이 흐른 1981년 7월 이탈리아의 철학자 지오르지오 아감벤에 의해 극적으로 발견되어 햇빛을 보게 됐듯이 말이다. 일단은 베를린예술아카데미가 2007년부터 매년 두 권씩 총 20권으로 발간할 계획을 밝힌 새로운 벤야민 전집을 기다려볼 일이다.(이재원_출판기획자)

07. 12. 29.

P.S. 참고로, 본문과 관련있는 페이퍼는 '벤야민을 좋아하세요?'(http://blog.aladin.co.kr/mramor/706506)와 '벤야민과 아벨 강스'(http://blog.aladin.co.kr/mramor/1257584)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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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벨 강스는 이렇게 말했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4-24 18:08 
    서점 두 곳에 들러 이주의 관심도서 두 권을 사들고 왔다. 둘다 이론서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윤영 교수가 엮은 <사유 속의영화>(문학과지성사, 2011)은 영화이론 선집이고, 호미 바바가 엮은 <국민과 서사>는 '네이션'에 관한 탈식민주의적 성찰들을 묶은 것이다.두 책을 모두 갖다놓은 서점이 없어서 한권씩 구하면서 발품을 팔아야 했다(알라딘에는 <국민과 서사>가 아직도 입고돼 있지 않다).그중 <사유 속의 영화&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