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트앤스터디의 '인문숲'에서 플라토노프의 <코틀로반>에 대해 강의하면서, 단편 <암소>(1938)도 같이 읽어봤었다. 러시아 단편선 <무도회가 끝난 뒤>(창비, 2010)에 들어 있는 작품인데, 알렉산드르 페트로프의 애니메이션 작품으로도 감상할 수 있기에 같이 옮겨놓는다. 10분 분량의 애니메이션은 주로 암소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었다(작품에선 기관차와 관련한 이야기도 비중을 차지한다). 단편과 애니메이션 모두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 소년은 암소의 모든 것이 맘에 들었다. 항상 피곤한 듯 혹은 생각에 잠긴 듯 거무스레한 테두리가 둘린 온순한 눈도 마음에 들고, 뿔과 이마도, 커다랗고 여읜 몸집도 맘에 들었다. 암소가 여윈 것은 자신의 살과 지방을 위해 비축하지 않고 우유와 노동에 바치느라 그리된 것이다. 소년은 부드럽고 편안해 보이는 젖통을 바라보았다. 거기 달린 작고 쪼글쪼글한 젖꼭지에서 나온 우유를 먹고 소년이 자란 것이다. 소년은 단단한 뼈가 앞으로 튀어나와 있는 짧고 듬직한 앞가슴도 만져보았다. 

-바샤는 헛간으로 들어가서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길 기다리며 암소를 살펴보았다. 암소는 이제 아무것도 먹고 있지 않았으며, 이따금 조용히 숨을 쉴 뿐이었다. 암소를 괴롭히는 무겁고 질긴 고통은 끝도 모르고 커져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암소는 인간과 달리 자신의 고통을 언어나 의식, 친구나 오락 그 어느 것으로도 위로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바샤는 오랫동안 암소를 쓰다듬으며 달래주었지만 암소는 무관심한 채 미동도 없었다. 지금 암소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자기 아들, 송아지뿐이다. 인간도, 여물도, 태양도 이 세상 그 무엇도 자식을 대신할 수 없었다. 잊어버리고 다른 일을 찾는 것이, 그래서 더이상 괴로워하지 않고 다시 살아가는 것이 유일한 행복의 길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암소의 흐릿한 지성은 스스로를 기만할 능력이 없다. 한번 암소의 가슴속에 혹은 감정 속에 들어온 것은 억눌리거나 잊힐 수 없는 것이다.  



-얼마 전에 바샤가 열차 움직이는 걸 도와준 적이 있는 바로 그 기관사가 바샤의 아버지와 함께 차량 밑에서 죽은 암소를 끌어내고 있었다. 생전처음 자기와 가까운 존재의 죽음을 본 바샤는 괴로움으로 넋이 나가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내가 십분 정도 계속 기적을 울렸다니까요.” 기관사가 바샤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댁의 소는 귀가 먹은 겁니까, 아니면 멍청한 겁니까? 모든 차량들이 비상 브레이크를 걸었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귀가 먹은 것이 아니라 미친 거요.” 아버지가 말했다. “아마, 철로 위에서 졸고 있었겠지.” “그게 아니에요, 느리긴 했지만 어쨌든 소는 기관차에서 도망가긴 했어요. 그런데 옆으로 비켜날 생각은 안하더란 말이죠.” 기관사가 대답했다. “소가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학교에서는 1학기 중간고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학생들에게는 생활 속에서 겪은 일을 주제로 글을 쓰라는 과제가 주어졌다. 바샤는 공책에 이렇게 썼다.  

“우리집에는 암소가 있었다. 암소가 살아 있었을 때, 어머니와 아버지와 나는 암소에서 나오는 우유를 먹었다. 나중에 암소가 새끼 송아지를 낳았다. 송아지도 암소의 우유를 먹었다. 우리 세 사람과 송아지까지 넷, 모두에게 충분한 양이었다. 암소는 게다가 땅도 갈고 짐도 옮겼다. 그러다가 집에서 암소의 아들을 고기로 팔았다. 괴로워하던 암소는 얼마 안 있어 기차에 치여 죽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암소도 먹어버렸다. 왜냐하면 암소도 소고기니까. 암소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우유, 아들, 고기, 가죽, 내장, 뼈를 우리에게 내주었다. 착한 암소였다. 나는 우리 암소를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잊지 않을 것이다.” 

  

10.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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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10-27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길을 걸어가는 암소를 보고 '엄마'를 외치는 소년, 그 소리를 듣고 뒤돌아보는 암소의 눈빛. 암소는 소년의 마음을 알았을까요?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전해주는 에니메이션이네요.

로쟈 2010-10-27 16:47   좋아요 0 | URL
노르슈테인(Norstein)과 함께 러시아 애니메이션을 대표한다고 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10-27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와 같은 암소 이야기군요.그림도 인상적입니다.배경을 우리나라로 바꾸어도 될 듯한 이야기.가난한 농가의 소 이야기는 어느 나라나 짠한 느낌을 주나 봅니다.

로쟈 2010-10-27 16:46   좋아요 0 | URL
이 암소는 '사회주의 암소'이기도 해요.^^

노이에자이트 2010-10-27 17:49   좋아요 0 | URL
사회주의 암소라...아무래도 직접 읽고 싶군요.

로쟈 2010-10-27 18:18   좋아요 0 | URL
"암소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우유, 아들, 고기, 가죽, 내장, 뼈를 우리에게 내주었다."의 암소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긍정적 주인공' 형상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