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3회

'로쟈와 함께 지젝 읽기' 3회분을 발췌해놓는다. 역시나 전문은 창작블로그의 연재공간에서 읽어보시면 된다. 연재에는 매회 따로 제목이 붙지 않는데, 이 발췌는 제목을 붙이면서 관련서의 이미지를 링크해놓으려는 목적도 갖는다.  

이제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에서 첫 번째로 읽을 책은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인간사랑, 2003)이다. 원제는 워쇼스키 형제의 영화 <매트릭스>(1999)에서 따온 <실재의 사막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2002)이다.(...)  



지젝의 분석과 성찰을 따라가보기 전에 제목의 핵심인 ‘desert of the real’이란 말부터 따져본다. 이 영어 표현에서 ‘of’는 동격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실재라는 사막’ 혹은 ‘실재계라는 사막’이란 뜻이다. 또 다른 궁금증. ‘더 리얼(the real)’이란 말의 번역은 ‘실재’도 되고 ‘실재계’도 되는가? 그렇다. 가급적 난해한 철학 용어나 정신분석 용어는 피하려고 하지만 불가피한 경우는 어쩔 수 없이 확인하고 넘어가야겠는데, ‘the real’이 그런 경우다. 일단은 ‘실재’나 ‘실재계’란 말이 나오면 ‘the real’의 번역어라고 생각하시는 게 좋겠다(전공자들은 ‘실재’란 번역을 선호하지만 실상 일반 독자가 읽는 번역서에서는 ‘실재계’란 말이 더 자주 나온다. 그런 사정을 고려하여 이 연재에서는 맥락에 따라 이 두 번역어를 혼용할 예정이다).

철학에서건 정신분석에서건 대부분의 개념어는 짝을 갖는다. ‘남자’ 하면 ‘여자’, ‘감성’ 하면 ‘이성’을 떠올리게 되는 식이다. 먼저 ‘실재계’는 라캉 정신분석학에서 인간존재의 현실을 구성하는 세 가지 차원, 곧 상징계(the Symbolic), 상상계(the Imaginary), 실재계(the Real)의 하나이다. 기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숙지해두는 게 좋겠다. ‘실재계(R)-상징계(S)-상상계(I)’의 머리글자를 차례로 따서 ‘RSI 상항조’라고도 부른다. 다르게는 ‘실재-상징적인 것-상상적인 것’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또 상상계를 라캉의 ‘거울 단계’와 연관지어 ‘영상계’라고 옮기는 경우도 있으나 여기서는 상용되는 용례에 따른다. 일간지 같은 데서야 이런 전문 용어들과 마주칠 기회가 거의 없지만, 영화잡지나 문예지의 경우엔 사정이 달라서 어느 정도 ‘독자’ 흉내를 내려면 ‘RSI’ 정도는 알아두는 게 좋다. 가령, 영화평론가들의 좌담에서라면 기탄없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지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정성일 평론가의 대답이다.

“지젝이 영화에 대한 깨우침을 준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영화가 지젝에게 지혜를 베풀어준 셈이지요. 지젝 자신도 점점 영화에서 멀어지고 있고요. 어쩌면 영화는 지젝에게 자기 철학을 알리기 위한 전술의 도구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 영화는 자기의 RSI 매트릭스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상자였던 셈이지요. 그는 라캉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영화를 동원했지 그 역은 아니었습니다.”(<씨네21> 763호)

이 인용문에 대해 조금 부언하자면, 영화는 지젝에게 “자기 철학을 알리기 위한 전술의 도구”라기보다는 “라캉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였고, 이 점은 영화평론가의 ‘발견’이 아니라 지젝의 직접적인 ‘고백’이다. 그는 “나는 라캉의 개념들을 본질적으로 저급한 대중문화의 개념들로 제대로 번역해낸 다음에야 비로소 그 개념들을 제대로 파악했다고 확신했다”라고 스스로 털어놓았다. 그가 말한 ‘저급한 대중문화’의 표본은 물론 할리우드 영화들이다. 게다가 지젝은 오페라광이긴 하지만 결코 ‘시네필’은 아니다. 그 점이 시네필 평론가로선 불만스러울 수 있겠지만, 지젝 자신이 “점점 영화에서 멀어지고” 있을 만큼 애초에 가까웠던 것도 아니다. 참고로, 2003년 방한했을 때 한 대담(『당대비평』 24호)에서 그 많은 영화를 다 보면서 언제 글을 쓰느냐는 질문에 지젝은 이렇게 답했다.

“천만에요. 제가 분석하거나 해석하는 영화들의 3분의 1도 보지 않았을 겁니다. 예컨대 저는 로셀리니의 작품을 한 편도 보지 않았으며, 영화관에 가는 것도 그리 즐겨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극장에 갈 시간이 부족하다고 이야기하는 편이 정확하겠네요. 영화를 직접 보지 않더라도 중요한 영화 텍스트에 대한 대부분의 분석이 책의 형태로 이미 나와 있기 때문에 연구에 큰 지장을 주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지젝의 ‘작업 비밀’이다. 그럼에도 영화가 지젝에게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은 영화 텍스트가 “이데올로기와 일상적 삶이라는 텍스트의 비밀을 응축해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와 일상적 삶’의 분석이지 ‘영화’가 아니다. 국내에는 ‘철학책’들보다 먼저 소개된 지젝의 ‘영화책’들, 예컨대 <삐딱하게 보기>(시각과언어, 1995),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한나래, 1997),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 등을 읽을 때는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시 인용으로 돌아가면, ‘RSI 매트릭스’라는 것이 바로 ‘실재계-상징계-상상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요즘은 허다한 영화비평에서, 심지어는 영화 저널리즘에서도 라캉과 지젝의 용어들이 활용되기에 이 정도는 아는 체를 해주셔야겠다. 그렇게 셋이 짝지어 다닌다면, ‘실재계’만 분리해서 알 수 없으므로 통째로 챙겨두도록 한다. 라캉 입문서인 <HOW TO READ 라캉>(웅진지식하우스, 2007)에서 체스 게임을 예로 들고 있는 지젝을 따라가보자.  

체스를 하기 위해 따라야 하는 규칙은 체스의 상징적 차원이다. 순전히 형식적인 상징적 관점에서 ‘기사’는 이것을 둠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변동 안에서만 정의된다. 이 상징적 차원은 상상적 차원과 명확히 대비된다. 상징적 차원에서 각각의 말들은 특유의 형태를 가지며 서로 다른 이름(왕, 왕비, 기사)으로 개별화된다. 그래서 규칙은 같지만 서로 다른 상상계, 즉 ‘메신저’ ‘러너’ 따위의 이름으로 불릴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실재계는 게임의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연속적인 환경의 전체집합이다. 경기자의 지능이나 경기자를 당황하게 하고 갑자기 게임을 중단시키는 예기치 못한 침범 같은 것이다.(18~19쪽)

나부터도 체스에 익숙하지 않으니 ‘효과적인’ 예는 아니지만, 어쨌든 상징계란 체스 혹은 장기의 규칙 같은 것이다. 어떤 말이 어떻게 이동할 수 있는가는 이 규칙에 의해서 정의된다. 상징계는 ‘현실’을 관장한다. 상상계는 ‘기사’가 ‘메신저’로 불릴 수도 있는 또 다른 가상적 게임의 세계다. 규칙을 떠나서, 혹은 규칙을 무시하고 말이 이렇게 가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것 따위는 상상계에 속한다. 물론 이 상상적인 것이 공유되고 새로운 규칙으로 수용된다면 그것은 새로운 상징계로 등록될 수 있다. 한편 실재계는 인용문에서 “게임의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연속적인 환경의 전체집합”이라고 정의됐는데, ‘연속적인 환경’은 ‘우발적인 상황(contingent circumstances)’의 오역이다. 장기를 두고 있는 상황에서 걸음마를 하는 아이가 다가와 판을 뒤엎는다든가 하는 ‘예기치 못한 침범’이 바로 실재다. 그것은 게임을 한순간에 무효화하면서 진지하게 게임에 임하던 경기자들을 허탈하게 만든다(하지만 동시에 해방시킨다!). 실재는 상징계에 구멍을 내는 송곳이며 그 구멍 자체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9·11이라는 스펙터클은 자본주의적 상징계의 구멍을 낸 실재의 침입이기도 하다. 뒤엎어진 판을 다시 정돈하여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현재의 게임을 계속해야 하는지, 현재의 사회적 좌표계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지 자문하게 하는 사건이다. 물론 그러한 질문과 대면하는 일은 두렵다. 그것은 마치 폐허가 된 ‘실재의 사막’과 대면하는 일과 같다. 그래서 부정하거나 회피한다. 그럴 때 우리가 주로 동원하는 것이 ‘환상’이다. 공격받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대테러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믿음이 그러한 환상의 대표적 사례다. ‘빨간 약’(현실) 대신에 ‘파란 약’(환상)을 선택하는 것이다.(...) 

10. 0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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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8-20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질문 하나 드려도 되요? 저는 실재계가 진실의 핵심부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사회적 좌표를 흔드는 것은 허상과 허위로 가득한 현실에서 실재를 목격하고 난 결과론적인 것으로 이해했었는데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요?

로쟈 2010-08-20 23:28   좋아요 0 | URL
흠, 실재와의 조우 자체가 사회적 좌표에 대한 충격인데요. 그래서 가장 흔한 조어가 '외상적 실재'란 말이고요. 어떤점에서 잘못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신 건지요? 실재는 상징계에서 좌표값을 갖고 있지 않기에 표시되지 않고, 의미를 부여받지도 못합니다. 말 그대로 간극이고 구멍이죠. 그게 우리말 '실재'와 충돌하는 의미 같기도 합니다. '진짜로 있는 것'이 구멍이라고 하면 잘 이해가 안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