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거나 날씨는 정말로 완벽했다”
문학동네 블로그에 연재하는 '로쟈의 스페큘럼' 네 번째 이야기를 옮겨놓는다. '네 번째'라고는 하지만, 지난번에 다룬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파티>에 대한 내용의 연장이다. 이야기는 이 글에서 완결되지 않기 때문에 '중간다리' 정도라고 해야겠다. 작품에 흥미를 느끼다 보면 다시 읽게 되고, 다시 읽다 보면 또 다른 흥미가 생기기 때문에 오래 붙들고 있게 된다. 계획엔 '타자로서의 이웃'이란 테마까지 다루고 나서야 '파티장'을 빠져나갈 수 있을 듯싶다. 역시나 글의 전문은 http://cafe.naver.com/mhdn/16606 를 참조하시길.
다시 날씨 얘기부터 시작해보자. 지난번에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파티> 첫 문장을 “어쨌거나 날씨는 정말로 완벽했다.”고 옮겼는데, 세계단편문학 영국편 <가든파티>(창비, 2010)에서는 보다 원문에 충실하게 “그리고 어쨌든 날씨는 이상적이었다.”(And after all the weather was ideal.)라고 옮겼다. ‘충실하다’고 한 건 ‘And’를 ‘그리고’로, ‘ideal’을 ‘이상적’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누구나 문맥과 관계없이 단어만 접한다면 일감으로 떠올릴 만한 번역이다. 그리고 그게 때로는 작품 분석에 더 유용하다. 이 경우에는 특히 좀 예외적인 서두인 ‘그리고’란 말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준다.
상식적인 사실을 확인해두자면, ‘그리고’란 접속사는 앞에 무엇인가의 존재를 전제한다. 한데, ‘그리고’가 텍스트의 시작이므로 그 ‘앞’은 텍스트의 ‘바깥’이다. 텍스트의 바깥을 텍스트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이 작품에서 ‘텍스트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사진에 비유하자면 이것은 사진에 직접 드러나지 않는, 화면 바깥의 화면, 곧 외화면(外畵面)을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실상 “사진은 회화와는 달리 반드시 실제로 지각되는 풍경에서 일정 부분을 따온 것”인데, 그것을 사진의 ‘인용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진의 인용성은 사진의 외화면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 보이는 화면이 보이지 않는 화면을 끌고 들어와 한데 결합됨으로써 사진의 전체 화면이 형성된다. 이때 화면이 의식의 영역이라면, 외화면은 무의식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은 무의식적인 외화면이 없이는 사진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오히려 회화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조광제, '철학으로 본 매체', <미술관에서 인문학을 만나다>, 199쪽)
‘외화면=무의식의 영역’이라는 주장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사진의 인용성이 어떤 것인지 이 인용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가든파티>에서 ‘그리고’는 이 인용성의 지표라 할 만하다. 그리고 첫 문장에 이어서 바로 “설령 그들이 미리 주문을 했더라도 이보다 더 완벽하게 가든파티에 어울리는 날을 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라고 화자는 서술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그들’이라는 3인칭 대명사는 일반인칭(‘사람들’)이 아니라 곧 등장하는 셰리던 씨 가족을 가리킨다(둘 다 가능할 것 같지만 나는 그렇게 보고 싶다). 곧 가든파티 주최측이다. 1인칭 소설이 아닌 이야기의 서두에서, 고유명사보다 3인칭대명사가 먼저 등장하는 것 역시 일종의 파격이다. ‘그’ ‘그녀’ ‘그들’이란 3인칭 대명사는 1인칭과 2인칭(청자 혹은 독자)을 미리 전제해야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같은 대목을 다르게 옮긴 번역본들과 비교해보면 식별할 수 있다.
“날씨는 기가 막히게 좋았다. 가든파티에 적당한 날씨를 미리 주문한다고 하더라도 이보다 더 완벽한 날씨를 구하진 못했을 거다.”(<가든파티>, 강)
“어쨌거나 날씨는 더할 나위 없었다. 가든파티를 위해 특별히 날씨를 주문했다 해도 그보다 완벽한 날은 없었을 것이다.”(<가든파티>, 펭귄클래식)
이 번역들에서 원작의 ‘인용성’은 지워지거나 최소화됐다. 그래서 깔끔하다. 외화면을 거느린 원작의 ‘사진성’을 ‘회화적’으로 처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콘텍스트를 배제한 만큼 텍스트의 자기완결성이 더 높아지긴 했지만, 맨스필드의 원작은 좀 불안정하며 시작부터 ‘완벽’하지 못하다. 물론 이 ‘완벽하지 못함’은 작가적 의도의 소산이다. (...)
그렇다면, 작가가 단편소설의 미적 자질로서 ‘자기완결성’까지 훼손해가면서 ‘그리고’란 접속사로 작품을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째서 “날씨는 이상적이었다.”(The weather was ideal.)란 평범하지만 순탄한 서두 대신에 파격을 선택한 것일까? 나는 그러한 ‘인용성’이 갖는 효과에 주목하고 싶다. 사진의 인용성은 외화면을 화면 안으로 끌고 들어옴과 동시에 화면을 외화면으로 끌고 나간다. 마찬가지로 텍스트의 인용성은 콘텍스트를 텍스트 안으로 끌어들임과 동시에 텍스트를 콘텍스트로 데리고 나간다. 그럼으로써 텍스트의 지시성이 강화된다. 텍스트의 경계, 곧 텍스트와 콘텍스트 간의 경계가 흐려지는 만큼 텍스트에서 제기된 문제는 텍스트 바깥으로 쉽게 번져나간다. 그에 따라 주인공의 물음은 독자의 물음으로 전이된다.
<가든파티>의 번역자 김영희 교수는 짤막한 해설에서 이 작품이 “어른들이 대변하는 중산층적인 계급적 가치와 어린아이다운 순진한 심성 사이에서 동요하는 어린 소녀 로라의 시선을 통해 삶과 죽음, 계급과 윤리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했다. 나는 로라의 시선을 통해 죽음과 노동자계급이라는 ‘타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정리하겠다. 크게 두 가지가 해명되어야 한다. 어째서 로라의 시선이 필요한가? 그리고 ‘죽음’과 ‘계급’이라는 타자와의 조우는 이 작품에서 어떻게 처리되고 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로라의 시선’이 필요한 이유는 간단히 답해질 수 있다. 로라가 제일 처음 호명되는 대목에서 암시되기 때문이다. 가든파티를 위한 천막을 치기 위해 인부들이 도착했을 때 인솔자로 한 명이 나서야 했는데, 이 셰리던 씨 집안의 네 남매 가운데 로라가 낙점된다(로라와 메그, 조스, 로리라는 이름은 루이자 메이 울컷의 <작은 아씨들>에서 차용한 것이다).
“네가 가봐야겠네, 로라. 예술가 타입은 너잖아.”(창비)
“네가 가야겠다, 로라. 네가 감각이 있잖아.”(강)
“로라, 네가 가봐야겠다. 네가 예술적이잖니.”(펭귄클래식)
“You'll have to go, Laura; you're the artistic one."
이것이 이야기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예술적 감각을 갖춘, ‘심미적 주체’로서의 로라는 곧 ‘윤리적 주체’로서의 책임도 떠안게 될 것이다(그러니까 ‘심미적 주체=윤리적 주체’라는 것이 <가든파티>의 한 가지 메시지다). 이 윤리의 문제는 좀 더 길게 이야기해야 할 듯싶다...
10. 07. 23.